나의 삶을 더듬으면서
3학년 2반 55번 이만호
내 나이가 벌써 80 고개를 넘어 허리가 아프고 걷기가 힘이 들어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어가야 하는 형편이 되었으며, 그동안의 교직 생활이 그립고 함께 생활했던 친구들이 그리워지며 함께 교실에서 딩굴던 아이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첫 발령을 받고서
1961년 졸업을 앞둔 우리들에게 큰 할일들이 주어졌다. 그것은 각 반에서 뽑혀 온 8명의 친구들이 이오신 선생님 밑에서 산수과 표준화검사 문제 추출과 평가 후 분석까지 하는 작업을 3개월 동안 하게 되어 날마다 즐거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고비를 받고 그 돈으로 발령받을 때 입을 양복과 기타 생활용품들을 준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발령은 5월 11일 자 5.16 직전에 발령을 받았는데 부임하게 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례교육청에 부임 인사를 가니까 우리 선배이신 한태종 선생님이 교육청에 계셨고 후배인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때는 어수선한 때라서 그런지 학무과장도 새로 발령을 받아서 한태종 선배님의 주선으로 택시를 불러 타고 동승하시던 교육장님과 학무과장님과 함께 광의국민학교에 첫 부임을 하게 된다.
각 교실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선생님의 모습을 먼발치로 볼 수가 있었고 교무실에 웬 손님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본 선생님들은 높은 분이 오셨구나 하는 짐작으로 직원 모임 종이 울리자 웅성웅성 대며 교무실로 모여들게 되었다. 학무과장님이 새로 부임하셔서 인사차 오셨다는 말을 들은 선생님들은 교무실에 들어오자 출입구 쪽 바로 얌전히 앉아 있는 젊은 사람 나를 학무과장으로 착각하고 나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극진한 인사를 하기에 무식한 나는 나에게 인사한 모든 선생님에게 목례로 가볍게 답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교육청 손님들이 떠나가신 후 교무실은 웃음꽃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어이 이 선생, 자네가 학무과장이 되어버렸네.”
절값을 받아야 된다고 하며 나에게 졸라댔다.
그 후 8년 동안을 광의학교에 근무하면서 구례군내 많은 선생님들한테 놀림감이 되었다. 광의학교는 학무과장이 부임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들 소문이 선생님들이 모이는 곳마다 퍼져 학무과장으로 시작한 교직 생활이 다시 그립고, 그때 함께 근무한 선생님들에게 절값으로 막걸리를 내야 했던 그때가 다시 그립고, 구례에서 나를 알았던 선생님들은 지금도 만나면 학무과장 이야기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곤 한다. 선배님들 앞에서 늘 사랑만 받아왔던 지난날이 그립다.
큰일 날 뻔한 일
광주교대부설초등학교 근무 만기가 되어 희망하여 신안군으로 발령받고 신안 임자중앙초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모두가 벽지 점수를 받아 벽지 만점을 합산하면 교감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학교이어서 모두가 열심히 일들을 하였다.
나는 섬 어린이에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합창연습을 열심히 하여 다른 선생님들 보다 교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합창연습을 끝내고 운동장에 나와 보니 임자가 고향이신 선생님이 오토바이를 이끌고 집으로 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에게 “어이, 김 선생. 나 오토바이 타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겠나?” 하니 “예. 그렇게 하지요.” 나는 김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시동 걸고 출발하는 법을 배워, 한번 해 보는데, “쉽네. 이렇게 쉬운 것 할 수 있을 거야.” 하며 시동 걸고 출발을 시작했다.
기분 좋게 출발했으나 무엇을 잘못 손댔는지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소리도 더 요란한 기계 소리에 김 선생을 불러도 서로 말을 통할 수 없게 되었다. 점점 더 빨라져서 운동장 커브도 잘 굽어 갈 수 없게 될 지경이었다. 나는 무서웠다. 김 선생이 무어라 소리쳐도 들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커브를 돌다가 돌지 못하고 커브 옆 벽돌담에 부딪히고. 나는 몸을 다쳐 누워 있고, 오토바이는 쓰러져서 웽웽 바퀴 소리만 요란하게 돌고만 있었다. 그래도 나는 죽지는 않았나 보다. 김 선생님의 부축을 받아 양호실에 가서 응급조치로 약 바르고 붕대를 두르고 누웠으나 상처 분야가 매우 아파 끙끙 앓았다.
광주에 가서 전신 붕대로 감고 치료하는데 모양이 가관이다. 신안 관내 선생님들은 이만호가 오토바이 잘못 타다가 죽을뻔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칠푼이가 되어 말하련다.
아들 자랑, 마누라 자랑을 하면 칠푼이가 된다고 한다. 나는 오늘 칠푼이가 되어 마누라 자랑 아들 자랑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아들만 세 명 두었다. 아들만 있는 가정에는 엄마가 고생이라고들 하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는 아들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고 신앙심이 많은 아내는 가정을 위해 아들을 위해 너무 간절히 기도 생활을 하며 생활했다. 피아노 교습소에서 유치원장으로 일감을 바꿔 가며 살아왔다.
나는 집안 생활에는 너무 소홀히 하여 이사를 한 날이면 이사를 다 한 후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집안 살림에 너무너무 고생하며 살림을 일궈 간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저녁에는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꼬구라져 잠을 자다 하는 생활이 계속되어 왔다. 유치원을 지어서 빚에 쪼들리고, 낮에는 유치원 교실, 밤에는 그 교실이 우리들의 잠자리가 되었으며 이부자리는 창고에서 꺼내어 잠자고 아침이면 창고로 이부자리를 숨기는 생활을 하였으며 아들들은 바닥에서 잠을 자도 불평 하나 없이 엄마의 고생만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며 살았다.
첫째와 셋째는 그 어려운 생활 중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의대에 합격하는 축복이 있었고, 둘째는 학급에서 중간 정도의 실력이라서 조대를 희망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서울에 살고 있는 아내 친구가 서울 연세대 원서를 사서 보내왔기에 담임 선생님께 사정사정하여 원서를 작성해 서울로 보내고, 20일 동안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운 공부였다. 신앙이 깊은 아내는 저녁마다 골방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 생활을 했고 온 가족은 아내의 기도 생활에 동참하게 되었다. 시험 당일 서울 연세대에 가서 실기 시험을 보는데 놀랍게도 공부했던 음악이 시험에 작용하게 되어 결국 합격을 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아들 2명은 의사가 되고, 둘째는 미국유학을 가서 성악공부를 마치고 한인교회 목사가 되었다. 아들 2명과 며느리가 의사가 되어 부모에게 너무 효도를 잘하고 있으며 미국에 아들까지 화상 통화로 소식을 늘 전해 들으며 살고 있다.
아들이 사준 승용차가 이제 15년이 지나도록 잘 타고 있으며 새 차를 사준다고 했으나 나는 지금 헌 차로 마감을 하겠노라고 반대했다.
이제 노인이 된 우리 부부는 자식의 따뜻한 효심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기도할 때마다 죽음을 준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칠푼이가 이렇게 친구들 앞에 쓸 데 없는 자랑으로 친구들의 얼굴에 짜증이 날까 봐 걱정을 하며 이 글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