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백일장 안내
중앙 시조 백일장은 시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신인이면 응모 가능하며 응모 편수는 1편 이상입니다. 한 해 동안 매 월말 장원과 차상.차하에 뽑힌 분을 대상으로 12월에 연말 장원을 가립니다.
▶보내실 곳:서울 중구 순화동 7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 시조 백일장 담당자 앞(우:100-759). 팩스(02-751-5598)로 보내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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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1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길 위의 집
화살처럼 날아간 길 저녁에 닿아 있다
꽃은 피고지고 새들 노래하다 갈 뿐
아무도 머무르지 않아, 비어 쓸쓸한 둥지
믿음은 길 위의 집과도 같은 것
세상 모든 길이 한데 모여 기도할 때
사람은 하늘로 길을 낸다, 창문을 열어둔 채.
누구나 가슴엔 한두 개쯤 길이 있다
뜨거운 언어를 한올 한올 풀어내어
창 많은 사림일수록 밝은 달을 띄운다.
<정선주.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차상]
갈대빛 기다림
눈발처럼 속깃 풀풀 날리는 새이고 싶어
접은 듯 날개 모아 날렵하게 솟아오른다
지난 일, 남루를 벗고 따라 오려 애써도.
감나무 가지끝엔 까치밥 등을 밝혀
때묻은 텃새 허기를 달래는 저녁
까마득 잊어버렸을까 갈대빛 굽은 등뼈.
젖은 안부 품에 안고 거리를 떠돌지만
펴지 못한 기다림 앉지 못해, 눕지도 못해
한줌 씨 뿌리고 나면 못 이긴 척 봄은 올까.
<조은세. 서울 용산구 이촌동>
[차하]
보리밭
빗살무늬 볕살 아래
한나절을 졸다가
볼 붉은 동지 바람
목까지 여며 덮고
턱없이
웃자란 보리
시린 발을 묻고 있다
풀 먹인 서리도
길을 들여 내려덮고
함께 누운 마늘밭과
도란도란 새는 밤
들뜬 꿈
다지는 별빛
속살도 푸르다
<강순태. 마산시 자산동>
[이달의 심사평]
군더더기 없이 삶이 희구 형상화
술렁이던 신춘문예도 끝나고 관망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응모편수가 줄어 무난한 입상작 뽑기가 어려웠다.
응모작은 연시조가 주를 이루는데, 산만하고 시상이 응축되지 않아 시조다운 맛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3장 6구 12음보라는 정형을 따르지 못한 작품도 많았다.
'길 위의 집'을 장원(정선주)으로 결정했다.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4수를 3수로 압축했다.
'화살처럼 날아간 길'은, 곧은길이라는 의미보다 시간의 흐름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길이 '저녁'이라는 때와 맞물려 있음에서도 그렇다.
'믿음은 길 위의 집과도 같은 것'이란 표현도 구체성.적확성을 요한다.
마음을 하나로 잇는 '믿음'의 자세가 '집'이라는 따뜻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거기 둘러앉아 '밝은 달'을 볼 수 있는 '쓸쓸'하지 않은 삶의 희구를 형상화했다.
차상, '갈대빛 기다림'(조은세)도 4수를 3수로 압축했다.
여백과 함축의 미를 살리는 데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루를 벗고' '날렵하게 솟아오'르고 싶은 화자는 '갈대빛 굽은 등뼈'로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대상에게 '젖은 안부'를 묻는데, 그 또한 '남루를 벗고''못 이긴 척''허기를 달래'주는 '봄'으로 와 주길 소망한다.
묘사와 진술의 유기적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
차하, '보리밭'(강순태)은 혹한을 뚫고, '서리'마저도 '길을 들여' 이불처럼 '덮고' 자라는 '보리'의 강인함을 '들뜬 꿈/다지는 별빛'에 연결하여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응모자들께서는 시조의 정형성에 대해 더 공부해 주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박시교. 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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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2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강
입춘이 흔들고 간 버짐 핀 나뭇가지
부산하게 몸 비비며 마른 각질 떨궈낸다
강물은 결빙 풀고서 길 떠날 채비한다
아직은 어지럼증, 허방다리 짚어대다
웅크린 깊은 물 속 하얀 맥박 박동치는 날
짜고도 매웠던 눈물 범벅, 내안의 배를 푼다
얼마만큼 흘러가야 만날지 모르지만
푸른 가슴 열어 줄 그리운 포구에는
배 한척 대는 소리에 또 봄은 오겠지
<이태순/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
[차상]
그리운 방
문지방 밟지 마라. 얘야, 복 달아난다.
하도 밟고 서서 복 달아날 대로 달아났을
그 방은 아이들 뿔뿔이 집으로 간 놀이터.
녹내 나는 시소처럼 문고리 삐거덕거려도
병풍처럼 눈발 두르고 오남매 보듬어온
흑백의 할머니 방에선 메주 뜨는 내가 났다.
숯덩이며 붉은 고추 액막이하듯 띄워
깊은 장맛 지켜오듯 본가를 지키시고
네모난 얼굴들 걸어두신 햇살 환한 사랑채.
<김혜진/ 경기도 용인시 상현동>
[차하]
겨울 산행
홀로 서고 싶어도
홀로 설 수 없는 날은
털실같이 뒤엉킨
일상을 벗어나
온 몸을 훤히 드러낸
겨울산에
오른다
겨우내 부는 바람
산들도 힘이 겨워
서로의 등을 어루며
한 몸으로 서는데
안개 낀 산록도로에
경적소리
요란하다
<김경택/ 제주시 이도2동>
[이달의 심사평]
도입부터 신선한 시어 버무려
이 달엔 어렵지 않게 입상작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입상권에 들지 못한 많은 응모작들이 정형성은 잘 따르고 있으되, 주제의 전달이나 이미지 형상에는 힘이 달렸다.
즐거워하면서도 넘치는 일이 없고(樂而不淫) 슬퍼해도 상심하는 빛이 없으며(哀而不傷) 원망으로 풀더라도 노여워하는 빛을 띠지 않아야(怨而不怒) 한다는 말이 있다.
대상을 어떻게 시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태순씨의 '강'(장원)은 2월의 에스프리로 가장 아름답게 떠올랐다.
'입춘이 흔들고 간 버짐 핀 나뭇가지/부산하게 몸 비비며 마른 각질 떨궈낸다'는 도입부터 신선하게 다가온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으나, 부적절한 시어와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 등은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김혜진씨의 '그리운 방'(차상)에서는 뿔뿔이 본가를 떠난 자식들을 위해 아직도 메주를 띄워, 깊은 장맛을 지켜오듯 자손을 지키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하게 배어나온다.
햇살 환하게 비치는 사랑채 벽에 걸린 메주들도 보인다.
함께 보내온 작품에서 제목 붙이는 힘과 시적 짜임새가 돋보인다.
김경택씨의 '겨울 산행'(차하)은 무리 없이 잘 읽히지만 종장처리가 미숙하고, 함께 보내온 작품에서도 완성도가 떨어지는 결점을 보인다.
대상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미지 형상과 주제의 부각에 더 힘써주시길 바란다.
<심사위원: 박시교. 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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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3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추억에서
툇마루 내려서며
밀짚모자 눌러쓰시는
들뜬 헛기침소리
그 날은 장날이었다
주막엔
상만이네 병애네
아부지들 목청 높겠다.
막걸리 잔 한참 돌아
자반 한 손 꿰어 오는
불콰한 걸음새
일찍 뜬 달이 재촉하고
누렁개 우쭐대는 비린내에
나보다 먼저 뛰었다.
<강현남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차상]
달빛 소나타
<서곡>
잎새 지운 마른 가지 하늬바람 현을 타고
귀담을 이 하나 없는, 고즈넉한 텅 빈 객석
달거리 어슬한 뒤란 조명 하나 밝혀 든다
<1악장-초승>
여위고 창백한 낯 노을 속에 거둔 세월
못다 한 이야기들 속으로만 묻어둔 채
해 붉은 산허리 돌아 절룩대며 가는 사랑
<2악장-보름>
이럴 수가… 오, 남몰래 무르익은 수밀도라니
암팡지게 살진 가슴 얼비치는 뽀얀 속살
터질 듯 하얀 그리움
피워 물고 있었다니
<3악장-그믐>
눈감아야 볼 수 있는 마음 하나 띄웁니다
그대 향한 밤의 길섶 차라리 소경이고자
올곧은 시대의 서정 별밭 다시 일굽니다
<임채성 : 서울 노원구 공릉2동>
[차하]
3월은
바람길 막는다고 겨울이 금 안 가나
햇살은 벌써 풀어져 샐샐샐 웃고 있고
개나리 댐 문 열고서 터질 준비 한창이다.
아기 냄새 향긋한 젖니 돋는 새싹들
들판에 앉고 기는 건 하늘도 어쩌지 못해
없던 길 만들어가며 꽃샘바람 지나간다
<김희창 : 제주시 용담2동>
[이달의 심사평]
투신으로, 탄핵으로, 폭등하는 유가로 세상은 어수선해도 밀려오는 봄기운은 막을 수 없는가 보다.
생강나무.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더니 볕드는 데 도도록해진 진달래 꽃눈도 눈에 든다.
이 달엔 겨우내 웅크렸던 시심이 봇물 터지듯 몰려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입상작을 올릴 수 있었다.
강현남씨의 '추억에서'(장원)는 유년의 추억을 간결하고 세련되게 형상한, 묘사와 진술이 조화로운 수작(秀作)이다.
함께 보내온 작품도 가족사를 아련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난한 아버지들도 주막에 모여 술기운에 호기를 부리며 주머니를 털어 생선이라도 한 마리 사들고 오시던 장날. 그 아버지를 향해 누렁개 뒤를 따라 반갑게 달려가는 아이가 보인다.
임채성씨의 '달빛 소나타'(차상)는 초승.보름.그믐이라는 달의 영휴(盈虧) 현상을 단단한 시적 짜임새로 포착해낸 기교가 돋보인다.
다른 시편에서도 오랜 수련의 시간이 엿보이는 미더운 솜씨이나, 전체적으로 좀더 신선한 비유와 적절한 시어의 선택이 필요하다.
김희창씨의 '3월은'(차하)은 '하늘도 어쩌지 못'해 '꽃샘바람' 끝에 오고야마는 앙증스런 봄을 재미있고 신선하게 그려내고 있다.
함께 보내온 작품에서는 치기와 진지성 결여를 지적할 수 있다.
여러 편을 보내주신 강영민, 한덕, 김명희씨의 분발을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박시교. 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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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4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봄산
햇살에 막 가려워 속살 긁고 있는 봄산
손톱 둥근 바람이 스쳐 가는 기슭 따라
예제서 붉어지겠다 덧날 가슴 있겠다.
하늘을 스멀대던 물기가 땅 적시더니
그게 어느 틈에 또 뻗친 가지에 닿아
화안히, 실은 아린 입김을 내뱉기도 하는데…
어쩌면 겨울잠이 주검 같기도 하고
거기서 깨기 싫은 그런 기미도 보여
실핏줄 돋은 봄산이 골짝마다 저리다.
<김동호 : 강원도 화천실업고등학교 교사>
[차상]
흔적, 깨금발 딛고
날적이 갈피마다 깨알처럼 박혀있는
묵혀둔 마음 밭에
쇠뜨기로 숨은 뿌리
캐내지
못한 흔적으로
깨금발 딛고 섰다
비탈진 삶의 이랑
아등바등 뒤척여온
뽑히다 만 잡초처럼 눈 못 뜨고 엎딘 사연
아직도 타는 갈증으로
푸른 날을 열고 있다
*날적이 : 일기장
<이복순 : 부산시 사상구 주례3동>
차하
가풀막길에 서다
이제는 돌아갈까 뒤를 힐끗 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이 얼룩으로 찍혀 있다
언제나 힘겨울 적에 빠지고 싶은 갓길 있다
비릿한 바람내가 가풀막길 점령한다
바삭하게 마른 덤불 그곳에도 싹은 날까
두렁을 가로질러서 달리고픈 충동 인다
철 지난 수첩 속에 빛바랜 이름들을
하나씩 지울 때마다 밀려오는 갈등 있다
겨울을 등 뒤에 업고 비켜 앉은 산모롱이
<송순만 :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이달의 심사평]
이 무렵이면 습관처럼 인용하던 '4월은 잔인한 달'. 과연 잔인할 정도로 치열하게 새것을 길어냈는지 돌아보는 끝자락이다.
보다 깊고 다양한 발견의 싹을 기대하면서, 이 달의 응모작을 조심스럽게 펼쳐 본다.
장원에 '봄산'을 올린다.
봄산의 겉과 속을 같이 살피는 시선과 참신한 감각이 빛나는 작품이다.
연시조의 구조나 이미지 면에서 긴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듬직하다.
그렇지만 '손톱 둥근' 같은 작위적인 표현은 경계를 요한다.
차상에 오른 '흔적, 깨금발 딛고'는 압축이 돋보인다.
압축 속에서도 두 수의 이미지가 무리 없이 조응하는 점과 나름의 긴장 유지에 믿음이 간다.
제목을 구체화시키고 구태의연한 비유를 벗으면, 탄탄한 후속작을 낼 듯싶다.
차하의 '가풀막길에 서다'는 주제가 잘 전달되는 장점을 지닌다.
그만큼 생에 대한 성찰의 진지함은 보이는데, 상투적인 표현과 이완을 넘어서는 힘이 달린다.
형상화를 통해 이를 극복할 때, 사유도 깊이를 얻을 것이다.
형상화 이전의 단계에서 의욕만 앞서는 응모작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형식과 내용을 새롭게 아우르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맛에 시조의 오묘한 세계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압축과 절제를 늘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더욱이 습작기에는 단수를 통해 시조의 형식미를 익히는 게 중요하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신선한 작품이 많이 나오리라는 즐거운 예감으로 새 달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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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5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개구리밥 1
어디쯤 자리를 펼까 물갈퀴 드리워도
편안히 발을 뻗기엔 아득히 먼 불빛
한 자리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떠도는 삶
2
새벽안개 자욱히 선잠 깬 신도림역
집 떠난 자갈들 레일 밑에 신음하고
환승장 좁은 미로엔 출렁이는 얼굴들
3
등 밀려 쓸려왔다 어디로 또 떠나는
무리 속 까만 얼굴 자꾸만 눈길이 간다
언제쯤 돌아가려나, 헤매 도는 개구리밥
*개구리밥 : 논. 늪지 등에 뜨는 작은 풀로 '부평초'라고도 함
<박선양·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차상]
등나무
저 뒤틀린 굴레들을
이젠 벗지 못한다
벗으려 하다 외려
더욱 옥죄어 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에
몸부림도 다 거두었다.
그래도 벗고 싶다
이따금 소리치다가
자신의 몸에 매달린
보랏빛 꽃등을 본다
천지를
뒤덮는 향기
늦게서야 맡는다.
<윤경희·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
[차하]
신용카드
시간이 떠다니는 큰 길 한 모퉁이
마그네틱 카드 속에 부호를 삽입한다
이윽고 나는 규정된다 이제부터 암호다
무인 현금지급기 앞, 한 기호가 서성댄다
저에게 부여된 번호를 투입하자
긴급한 에러 메시지, 폐기 그리고 암전…
<백윤석·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이달의 심사평]
떠도는 우리들 삶 돌아보게 해
박선양作 '개구리밥'
숱한 격랑 속에서도 변함없이 세상을 지키는 초록이 더 눈부신 때다. 주위의 초록빛을 둘러보며 우리가 쓰는 시조도 저렇듯 겸손하고도 오래 가는 힘을 지녔으면 하는 마음이 새삼 간절해진다.
이달의 장원에 '개구리밥'을 뽑는다. '개구리밥'은 율격의 안정감과 삶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가작이다. 현대인의 유목민적 삶의 단면과 개구리밥의 이미지 교차가 조화를 잘 이루는 가운데 자신 혹은 이웃의 떠도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차상의 '등나무'는 감각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 역시 대상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해 습작의 시간을 짐작케 한다. 이제 일정한 수준에 오른 만큼, 작품이 대체로 소품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에 유의하면 좋을 듯 싶다.
차하의 '신용카드'는 당대를 읽으려는 노력을 평가한다. 시대의 명암을 잡아내는 자세와 형상화 노력에는 신뢰가 가지만, 표현에는 문제가 좀 있다. 2수로 줄인 것을 보면서 대상을 어떻게 녹여내는 게 압축미를 살리는지 고민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나름의 습작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소재나 내용이 구태의연하다면 엇비슷한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기 어렵다. 많은 작품을 보내온 박철이, 신종범 두 분은 형식 안에서 표현과 내용을 좀더 녹여내길 기대한다.
그리고 응모자 모두에게 이 시대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주문하고 싶다. '고시조'에서 비롯된 선입견을 넘어가야 시대와 함께하는 진정한 '현대시조'로 나아갈 것이다.
<심사위원:김영재.정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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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6월 중앙시조 백일장
[중앙 시조 백일장 6월] 장원
등이 보일 때
풋풋한 산그늘에 발길 닿아 가벼운데
서너 걸음 앞서 가는 땀 배인 등을 본다
나누어 질 수도 없는
속울음 깊은 등을
물살 세찬 여울 건너 가풀막 올라선다
산꿩 울음 잠겨드는 샘물에 손 담그면
노을빛 실루엣으로
시린 등의 그가 있다
길섶의 나무들도 저리 몸을 낮추어서
서로를 돌아보는 애잔한 저물녘에
우리도 그리운 것들
조금씩 닮아간다
[중앙 시조 백일장 6월] 차상
외줄 - 유리창 닦기
신종범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무한의 허공을 거미처럼 내려와서
한 가닥 밧줄에 생명을 저당 잡히고
몸으로 세상을 닦는다
마음까지 환하라고
대명천지 밝은 날에 까막까막 등불 켜고
외줄에 감겨드는 이승의 삶 풀어내며
무리진 흔적을 모아
깨끗하게 훔쳐낸다
따가운 햇살마저 두 손으로 당겨서
흐린 생 트이라고 이제는 맑아지라고
나부시 지운 길들이
반짝이며 부풀고 있다
[중앙 시조 백일장 6월] 차하
상처들
정상혁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
살구나무 가지마다 흐드러진 꽃잎들은
겨울이 할퀴고 간 자리마다 고름 맺힌
피끓는 그리움이다 간지러운 상처다
내 몸에 절망의 못 박아대던 지난겨울
찢겨진 살점들이 망국의 깃발처럼
시커먼 그림자 남기던 시간들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 또한 일어설 차례
깊숙한 상처 위로 돋아나는 꽃잎처럼
내 몸에 싸한 향기의 새살이 돋고 있다
.
[6월의 장원작]"교직 떠나 텅 빈 마음 달래줘" -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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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조 '등이 보일 때'로 6월 시조백일장 장원에 오른 권성미(52·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사진)씨는 소감을 묻자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려야겠다"고 말했다.
권씨는 지난해 이맘때까지는 중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며 집이 서울로 이사오자 학교가 있는 인천까지 출근이 힘들어 눈물을 머금고 20여년 정들었던 직장을 접었다.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고 아쉬운 심사를 시조 공부로 달랬다.
지난해 말 중앙문화센터 시조교실 목요일 반에 등록해 문학 친구들도 만나고 공들여 쓴 습작을 내보이기도 했다.
권씨가 장원 수상 소식을 알리겠다고 한 제자들은 1984년 담임을 맡았던 친구들이다. 20년이 지나 중학교 3학년이던 제자들은 30대 중반이 됐지만 학창 시절 추억을 잊지 못하고 인터넷에 '권선생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스승의 날이나 명절에, 가끔가다 부부 동반으로도 만나는 사이들이다 보니 권씨의 수상은 스승·제자들의 즐거운 '회동 건수'임이 분명하다.
권씨는 "그런 인기를 누리시는 비결이 뭐냐"고 재차 묻자 "'틈만 나면'일 정도로 유별나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준 게 아마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고 수줍게 답했다.
일주일에 몇 권, 한달에 몇 권 하는 식으로 어림잡을 수는 없지만, 책에서 손을 떼지 않는 권씨의 습관은 비교적 빨리 시조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권씨는 "속마음을 완전히 내보이지 않고 어떤 규율같은 데 가둬둔듯하면서도 보여줄 것은 보여주는 게 시조의 매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권씨는 요즘 최명희의 장편소설 『혼불』을 읽고 있다.
심사평 '등이 보일 때' 인간의 내면 따뜻하게 그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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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盛夏)의 숲처럼 나름의 그늘을 키워가는 작품이 많았다. 그늘 너른 나무는 그 안팎에 들이는 것도 많아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든다. 나무만한 시가 있겠냐 하지만, 나무보다 오래도록 푸른 시는 분명 존재한다.
이달의 장원에 '등이 보일 때'를 올린다. 일상의 안팎을 읽어내는 속 깊은 관찰에 따스한 시선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등'의 내면을 세 수에 고르게 담아내는 역량은 함께 보낸 작품에서도 확인된 장점이다. 이제 더 깊고 너른 시조로의 도약을 도모했으면 싶다.
차상에 오른 '외줄-유리창 닦기'도 대상의 투시와 내면화가 진중하다. 고층건물의 '유리창 닦기'라는 위험한 일을 '외줄'에 집약함으로써 공감을 효과적으로 넓히고 있다. 삶이 점점 외줄타기 같은 이즈음, '흐린 생 트이라고' 부푸는 길이 눈부시다.
차하 '상처들' 역시 체험의 육화가 곡진하다. 상처가 곧 꽃이라는 발상은 낯익은 듯해도 그것의 감각적이고도 절실한 내면화가 호소력을 높인다.
둘째 수의 '망국의 깃발' 같은 과잉이 다른 표현을 입으면 두 수의 밀도가 더 빛날 것 같다.
이 달에는 시적 체험을 밀도 있게 우려낸 작품이 많아 선자를 즐거운 고민에 들게 했다. 진정 크고 깊은 '현대시조'의 앞날이 새롭게 열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양과 질 양면에서 고른 수준을 보여준 응모자들께 거듭 응원을 보내 드린다.
어느새 한 해의 반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 반이 남아 있다. 새로운 작품을 낳기에 짧은 시간은 아닐 터이니,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모두 필생의 작품을 향해 나아가시길 빈다.
<심사위원:김영재·정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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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7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능내리 푸른 산빛
-다산 생가에서
첫새벽 풀잎에서 젖 같은 이슬 받아
백리향 녹아드는 찻물을 끓이는 날
능내리 푸른 산빛이 샛강을 끌고 가네
이에 저에 등 떠밀려 마현골 깃 사리고
두물머리 바윗돌에 깨어나라, 깨어나라
휘두른 저 붓자국은 맥이 돌아 숨을 쉰다
이가 시린 맑은 물 바위 틈새 길어와서
벼룻돌 어르는 아침, 딸깍대는 분청사기
뒤뜰에 살구꽃 향기 마재마을 다 적신다.
한석산(55.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차상]
화첩 기행
김종훈(울산시 신정초등학교)
새로 펼친 화선지에 헐벗은 나무 대여섯
오두막집 찾아가는 가파른 오솔길과
갈기를 세워 달리는 능선도 그려 넣다.
눈 위에 또 눈이 내려 잠시 붓을 멈춘다.
여백마다 채워 넣던 풍경들이 지워지고
지나 온 길과 길들이 하얗게 드러눕다.
길가에 내려서서 눈발 속을 헤집는다
눈사람 하나 없는 까마득한 망망대해
속마저 젖은 사내가 소실점으로 서 있다.
눈 멎고 햇살 들자 길들이 다시 걷는다
수묵으로 남은 화판 연둣빛 대담한 터치
붓 자국 스칠 때마다 풀잎들이 일어선다.
[차하]
아침 강
김태형(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거미줄에 걸린 햇살
현악기로 튕겨내며
연초록 물이든 바람
털갈이가 한창이다
아련한 물밑사이로
새떼 발자국 지우는 강
[7월 심사평]
폭염의 날씨에 버금갈 정도로 이 달의 작품은 경합이 치열했다.
그만큼 이 지면이 튼실하게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석산씨의 '능내리 푸른 산빛'을 이 달의 장원으로 뽑는다.
단아하게 시작되는 아침을 생기있게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자연을 외경의 것으로만 다루지 않고 서로 어울리고, 나아가 인간과의 교감을 자연스레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능란함이 엿보인다.
김종훈씨는 시의 짜임이 어떠해야하는 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화첩 기행'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순서에 맞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확장 은유를 잘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확장 은유는 하나의 은유로 되어있는 단편적인 단순 은유보다는 시상을 유기적으로 잘 연결해주고 밀도있는 묘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시를 만드는 데 치중한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잘 짜여진 시는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감동의 울림을 수반하는 데는 인색하다.
김태형 씨의 '아침 강'은 묘사가 잘된 단시조다.
세 수 중 한 수를 택했다.
이 한 수만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창작한 작품을 퇴고할 때 건너 뛰어 율독해 보기를 권한다.
무리 없이 읽혀지는 경우 중간을 과감히 생략해보라.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박재실.정행년.윤병욱.서옥섭.김경하.박종필.한서정씨의 작품이 주목을 받았다.
예전 같았으면 충분히 뽑힐만한 작품들이었다.
분발을 바란다. 심사위원:유재영.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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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8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광개토대왕비 - 한분옥.울산 남구
광활한 만주벌에 떡 버티고 선 대왕이여
거침없는 말발굽 소리 내달린 천년 세월
불호령, 산하 깨우는 용오름 하고 있다.
내 역사(歷史) 기웃대는 변방의 북풍들은
억지로 고개 들어 고구려 하늘 넘나들고
분노가 끓어 오른다 장군총 앞에서면.
눈보라 모래바람 묻힌 뼈 삭고 삭아
현실(玄室)엔 아직도 꺼질 줄 모르는 등잔불
적석총 바윗돌 무게 근심 또한 만근이다.
용장(勇壯) 이끈 천군만마 지축 울려 다시 이 땅
불보다 뜨건 가슴 장엄한 웅지(雄志) 태워
천지연 (天地淵) 물안개 걷혀 옛 영토가 일어선다.
[차상]
알파벳 대문자 Q를 본다 - 박시랑.서울 은평구 응암동 -
장마에 집을 잃고
가족 소식 모르지만
살아야 하는 생명이라
철모르고 싹을 틔워
홀로이 뿌리내리려
안간힘으로 버틴다.
미인은 박명이라
계란 같은 그 얼굴에
난세를 살았어도
곱고도 하얀 모습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콩낱 한 알 그 운명을.
[차하]
가을산 - 금순희. 서울 중구 -
산자락 들쭉날쭉 고리 물고 흐르는데
모두들 초록으로 밑그림 그려놓고
자 이제 시작해보자, 화려한 그 변신을
색색이 알록달록 수놓는 듯 펼쳐지고
넉넉한 몸체에는 흥에 겨운 단풍 무리
한 몫 한 쑥부쟁이꽃 우쭐대며 서있네
[중앙 시조 백일장 8월] 이달의 심사평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기개만큼 호쾌한 필치
현대시조는 오늘의 정서를 대변하는 목소리여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응모된 작품의 상당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고답적인 소재와 고루한 생각들에 얽매여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는 도덕교과서가 아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새로운 서정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울 숲을 "퓨즈가 나간 집"으로 볼 수도 있으며, 꽃은 버려진 타이어 안에서도 피어난다. 생명의 가열한 몸짓을 어찌 낭만적으로만 형상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분옥 씨의 '광개토대왕비'를 장원작으로 뽑는다. 다소 거친 표현들이 있지만 작품이 갖는 의미를 높이 사기로 했다. 거침없는 기개와 원대한 개척의 의지로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열어간 서사적 인물을 호쾌한 필치로 그려내었다. 눈앞의 명리를 좇아 정신이고 역사고 경제고 그 모든 것이 답답한 오늘, 이 지리멸렬함 위에 불보다 뜨거운 웅지의 함성이 내리꽂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박시랑 씨의 작품은 새롭다. "철모르고 싹을 틔워"라든지 "콩낱 한알"에서 보듯 알파벳 대문자 "Q"가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형상과 이에 관련된 이미지를 잘 그려내었다. 다만 첫 수의 내용이 둘째 수에서 좀 더 구체화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금순희 씨의 '가을산'은 가을산의 흥취를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정적인 배경을 동적으로 바꾸는 서정의 힘이 돋보인다. 같이 보낸 다른 작품들은 그렇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응모한 분들 중에는 이미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는 분들도 있었지만 논외로 하였다. 시조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작품도 더러 보이는데 우리말의 갖는 네 박자 형식을 생각한다면 쉽게 극복되리라 믿는다. 한덕.변정용.홍준경.이계동.석성혜.황경태 씨 등 여러분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주목되었다.
<심사위원 :유재영.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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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9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한탄강, 가을
눈 뜬 소문들이 수런대는 하늘 저 켠
국경에 길게 걸린 사연 여럿 펄럭인다
자욱이 바람만 바람만 안개비 내리고
귀 밝은 풀벌레 벙어리로 우는 밤
몰아가는 물살 위로 성 하나 무너진다
메숲지 흩는 바람결 투신하는 한잎 두잎…
골골 사유 깨치고 고여 도는 종소리
겹겹 쌓인 붉은 함성 노을 속에 남겨두고
반창고, 붙인 희망이 흔들리며 가고 있다.
<이태호(50.경남 진주시 주약동>
[차상]
옆길로 접어들다
넓고 반듯한 길만이 언제나 앞길이던
어느 날엔가 문득 옆길이 눈에 들어
한동안 가슴 한복판이 못 견디게 뜨거웠다.
<황이 : 충남 예산군 예산읍>
[차하]
숲 속 한낮
오수(午睡)에 든 돌개바람 등성이 사이로
도토리 한 놈이 떼구르르 길 나선다
심심한 청설모 새끼 곧추세운 꼬랑지
걸러지는 햇살을 이마 짬에 뉘어두고
손 차양 멀리로 호오이 불러본다
안 뜨락 소리길 따라 화답하듯 기인 여운
느슨하고 헐거웠던 서투른 자맥질
앞 뒤 삶 어느 것도 간단치는 않은 것을
그마저 사랑스러운 깨어있는 이 적막
누런 황톳길 가장이 보석 띠로 둘려 있던
민들레 봄맞이꽃 꽃마리 제비꽃들이
알사탕 첫 입맛처럼 혀뿌리로 아파왔다.
그 후론 빨리빨리 달릴 수만은 없었다.
알록달록 다치기 쉬운 어린 숨결 두고는
큰 길이 멀어져버려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박수영 : 대구시 동구 신천4동>
[이달의 심사평]
'한탄강, 가을' 절제된 표현…여운은 아득히
폭염과 태풍의 여름, 그만큼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 가을이 오고 있다. 이마에 와닿는 소슬한 바람, 푸르도록 깊은 하늘, 아마 그 설렘과 기대 때문일까.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투고됐다.
'한탄강, 가을'을 장원 작품으로 뽑는다. 둘째와 셋째 수 종장처리에서 보듯 절제와 여운이 잘 살아나고 있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이 고르게 일정 수준을 넘어서고 있어 기대가 된다. 그러나 아직도 군데군데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사연 여럿'이라든지 셋째 수 초장 첫 구의 연결 등은 부자연스럽다. 율독을 통해 가락을 무리 없이 타는 법을 체득해주기 바란다.
'옆길로 접어들다'를 다음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밋밋하기 그지없어 맺고 끊는 시조의 장점을 잘 살려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오늘의 시조단에서 찾기 힘든 존재론적 성찰이 미약하게나마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하나의 지적 사유를 올곧게 밀고 나가는 성찰적 시편들은 자칫하면 관념화로 흐르기 쉬운데 둘째 수의 구체적 발견을 통해 이를 보완하고 있어 믿음이 간다. '숲 속 한 낮'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오수(午睡)의 한낮을 깨우는 청설모의 "곧추세운 꼬랑지" 하나의 생생함을 잘 포착하고 있다. 각 수를 명사형으로 똑똑 끊어버린 어조의 처리가 걸린다. 시에서의 연(聯) 연결이 자연스러워야 하듯 시조에서도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하)다"의 종결형 어미보다는 다양하게 변화를 주는 것이 시적 긴장을 높이는 데 훨씬 효율적이다. 말줄임이나 감탄(…하는가, 아! 등), 놀라움(…하다니) 등으로 변화를 유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광.김경하.박함규.손용석(경복고 3년).최상남 여러분의 작품이 끝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심사위원:유재영.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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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홍시 하나
허울 다
떨궈내고
홍시 하나 덩그러니
바알간
늦가을이
허공에 걸려 있다
人慾(인욕)이
채 닿지 못한
하늘 가지 꼬옥 잡고.
풋감에
햇살 담아
구워낸 등불인 양
저녁 노을
펼쳐놓고
무위의 춤을 춘다
채워도
허기진 마음
허울 쫒는 나를 본다.
<황경태. 서울 압구정동>
[차상]
빈집
뻐꾹새 울음소리에 감꽃은 몰래 지고
닫다 만 양철대문 기웃대는 訃告(부고) 한 통
마루 끝 야윈 햇살이 부서질 듯 쌓였네.
시렁 밑 먹다 남은 시래기 몇 가지만
청춘의 푸른 일기 아삭아삭 읽어 가는데
뭉개진 발자국 깨워 어디로들 떠났는가.
바람은, 소금 절인 거짓말만 부려놓고
오동꽃 지기 전에 동네를 빠져나가고
고요가 손님처럼 와 가부좌로 앉았네.
<김명희. 경북 안동시 송현동>
[차하]
숯불 바비큐 치킨
다음 세상엔 우리
저 쟁반 위에 누워
앞서간 영혼들의 허기, 달래줄 수 있을까
유골을
수습하다 문득
밟히는 연옥이여.
<권영오. 대구시 수성구 지산1동>
[이달의 심사평]
'홍시 하나' 절제된 표현… 읽기에 무리 없어
무잡하고 번다한 세상일수록 한 편의 시가 절실해진다. 그 한 편의 시가 상처받은 영혼을 위무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시가 지닌 정서의 힘이 아니겠는가.
이 달에는 그런 세상에 밝혀든 황경태씨의 '홍시 하나'를 장원에 올린다. 이 작품은 늦가을 적요의 공간에 등불처럼 매달린 홍시 하나에서 무위의 상념을 풀어낸다.
읽기에 무리가 없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허심으로 대상에 다가가 절제된 감정을 옮겨 놓기 때문이다. '허울 다/떨궈내고' 익어가는 감은 이미 인간의 욕망이 닿지 못할 거리에 있다.
그렇게 다 떨궈낸 줄 알았던 허울을 '채워도/허기진 마음'이 또 쫓고 있으니, 아무래도 홍시는 인간이 사는 세상 쪽으로 떨어지기 마련인가 보다.
차상은 김명희씨의 '빈집'이다. 이농현상의 여파로 갈수록 늘어가는 빈집. '닫다 만 양철대문'이나 '시렁 밑 먹다 남은 시래기 몇 가지'가 우리네 농촌 현실의 우울한 풍경을 읽게 한다.
활력의 기운이 빠져나간 빈집은 이미 삶의 터전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정지된 시간 속의 허상일 뿐. 이런 작품은 자칫 넋두리로 빠질 우려가 있는데, 빈집의 한 수를 덜어낸 연유도 여기에 있다.
'숯불 바비큐 치킨'을 차하로 뽑으면서 잠시 망설인다. 까닭인즉 고만고만한 역량을 보여준 투고작들이 적지 않은 가운데 단수를 고르는 부담 때문이다.
앞의 두 편과 달리 도시적 감수성이 물씬한 이 작품은 의표를 찌르는 종장의 반전이 예사롭지 않다. 행간에 담긴 사유의 깊이가 잔류 감각을 낳는다.
홍경희.서정택.도애란.가재순.조성제.홍준경 제씨의 작품들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나, 시상의 집중이나 함축 면에서 기대에 못미쳤다. 정신의 고삐를 바투 잡고 이왕에 잡은 붓끝을 더욱 곧추 세워 볼 일이다.
<심사위원 : 이우걸. 박기섭>
[♣위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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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물너울 치다
1.
파도야
너는 본디 너울의 사내자식
무에 그리 보고자파 뭍으로
뭍으로 내달아
모래톱
갯바위 치며
밤잠을 설치는가.
2
주르륵
볼 적시는 그 물기 뜨거워라
구메구메 흙물을 퍼 잉걸불 사위어놓고
저 암벽
오르는 길을 쉽다
쉽다 하는가.
3
자욱한
해미 속을 떠돌아 이는 물너울
연어떼 솟구침에 바람일고 구름일어
작달비
작신거린다
저문 바다 위무하는….
<조성제 67 서울 송파구 신천동>
[차상]
개발지대
택지 개발 구역에
가건물이 들어서더니
뒤숭숭 초여름부터
초목들이 술렁이고
세상엔 뜬소문 같은
개망초가 피었다.
건너 건너에서
따다다다 포성처럼
개발의 송곳니가
살점을 물어뜯고
깡마른 허수아비가
붕대 감고 서 있다.
숨죽인 틈바귀에서도
자랄 것은 자라고
심지를 태우는
옥수수 시름에도
세상사 아랑곳없는 듯
호박꽃이 웃고 있다.
<홍경희, 제주시 노형동>
[차하]
산딸기
꾀꼬리 노래하는 윤오월 산자락에
가난한 살림살이 올망졸망 데리고
노을빛
몸을 섞어서
옷고름에 영그는 떨기
여리디 여린 순정 볼우물 오목하고
추억으로 찾아드는 한나절 해거름
빈 잔에
이는 그리움
향내로 깊어오네
<이남순,서울시 종로구 관수동>
[이달의 심사평]
언제나 강조되는 사항이지만 시조는 정형시이고 우리시대의 노래다. 따라서 철저히 음보를 지켜야 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제재를 다루어야 하고, 말부림이 오늘의 어법에 맞아야 한다. 특히 초심자의 경우 훈련과정에서 언어를 깎고 다듬는 인고의 노력이 없으면 정형시를 짓는 고통과 매력을 터득할 수 없다.
이 달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시조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되어있지 않은 작품, 무턱대고 옛스럽게 쓰려다 현대성을 잃은 작품, 이미지의 중요성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조성제씨의 '물너울 치다'는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다. 우선 시조라는 정형시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가락을 살리면서 보여주는 언어의 그림들이 놀랍다. 개성적인 소재나 주제가 아닌 것을 이렇게 읽히게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홍경희씨의 '개발지대' 또한 오랜 수련 경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함께 보내온 '손톱'을 뽑으려 했으나 종장의 관념성 때문에 이 작품으로 바꾸었다. 현대성이 돋보이는 이런 작품의 경우 그 의도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을 펼쳐가기가 어렵다. 이 작품은 그런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다.
이남순씨의 '산딸기'는 즉물적인 대상을 노래하는 많은 투고자의 작품을 대표해서 뽑은 시조다. 한 뜸, 한 뜸 수틀에 수를 놓듯 언어를 다루고 있다. 시조를 정격으로 이해하고 펼쳐놓는 정성이 돋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서정시조의 영역을 개발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심사위원:이우걸.박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