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유파
판소리는 18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말까지 300년 동안 민족의 예술로 향유되어 왔다. 그 동안 판소리는 자체적으로 자생력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성장해왔다. 애초의 판소리는 민중을 기반으로 성장해왔으나 19세기에 이르면 양반층도 판소리의 애호가가 되었으며, 따라서 민족적 예술 장르가 되었다. 대체로 판소리의 유파 형성은 19세기 초반인 전기 8명창 시대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가 명예와 부의 축적을 보증하는 예술이 되면서 광대들은 자신들의 법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먼저 동편제와 서편제가 대립적으로 존재하였고 중고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의 개념으로 나뉘는 것은 판소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의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면 판소리는 양반과 서민층이 함께 즐긴 민족의 예술형태로 발달하게 되었다. 양반들이 판소리를 감상하는 수준도 대단히 높아서 판소리의 사설과 음악의 내용에 비평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양반층의 개입에 의하여 조야한 판소리 사설이 양반들의 가치 규준을 따르는 전아한 내용으로 변모되었고, 감정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창법에 일정한 제한이 가해져 우아한 곡조나 화평한 곡조가 채용되었다. 판소리의 성격이 이처럼 양반층과 서민층을 아우르게 되면서 판소리에는 상당히 엄밀하게 구분되는 유파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다.
판소리를 비롯한 예술행위는 관객의 취향과 선택이라는 미의식의 작용에 의하여 변화 발전한다. 청중은 힘차고 남성적인 것이 좋다는 음악관을 애호하기도 하고, 섬세하고 슬픈 취향의 여성적 음악관을 선택하기도 한다. 마당에서 질박한 내용의 사설을 거칠게 불러대는 것에 점수를 더 줄 수 있고, 방안에서 우아한 태를 갖춰 점잖은 소리를 하는 것이 예술적 완성도가 있다는 미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서민층에서 즐기던 판소리가 너무 처참하다거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폐단이 있다고 양반들이 지적하면서, 판소리 음악은 일정하게 감정의 지나친 표출을 자제하는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미의식을 반영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유파의 스타일로 정형화되어 갔다. 굿판에서 불리는 소리를 ‘어정소리’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감정이 지나치게 토로되는 폐단이 있어 판소리 음악으로 담아내면 안된다는 미의식이 생겨나서 판소리 음악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처절한 정서를 진계면으로 표출해 내는 노래들은 양반의 미의식인 중용의 가치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양반층이 요청하는 미의식을 판소리 광대들이 수용하여, 판소리 음악은 감정을 과잉되게 노출하지 않고 절제하여 표현하는 쪽으로 변화되었다. 판소리 가운데 시창(詩唱)의 빈번한 등장과, 가곡성 우조의 등장, 평조를 포함한 경기도 소리제의 편입 등은 이 같은 미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를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유파별로 나누어 서술한 자료로는 정노식이 지은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가 처음이다. 정노식은 20세기 전반까지의 판소리 현장을 조사하여 보고한 이 책의 ‘대가닥조’에서, 당시에 명백히 존재하던 판소리의 유파와 그들 유파의 기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판소리는 시대를 거쳐 전승되면서 자연스럽게 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노식은 동편제가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지 이쪽‘을 기반으로,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 등지 저쪽‘을 터전으로, 중고제와 호걸제는 그 맥락으로 보아 ‘충청,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여, 판소리 유파가 지역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성립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판소리의 유파를 나누는 우선적인 기준은 전승지역이다. 특출난 명창이 사는 지역이 자연스레 판소리 전승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명성과 교육적 능력을 가진 명창이 사는 집에 학생들이 와 함께 기식하면서 오랜 시간 학습하였다. 같은 스승에게 배우다보니 배우는 이들의 소리 스타일도 거의 같게 되었다. 씩씩하고 웅장한 맛이 나게 소리를 끌어가거나, 애원처절하며 기교를 많이 부리는 일을 위주로 소리하는 것은 소리를 독자적으로 수련하여 이뤄낸 특정한 명창의 능력이지만, 이것이 일가를 이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동일한 지역에서 불리는 동일한 스타일의 판소리가 된다.
동편제는 지역적으로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에서 발원하였으며 송흥록이 중시조라 하였다. 동편제에는 송흥록제와 김세종제, 정춘풍제 등이 있다. 송흥록제는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남원·구례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해간 유파이다. 송흥록은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여 판소리를 완성했으므로 가왕(歌王)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김세종제는 동편제의 다른 가닥으로 분류되는데, 주로 고창의 신재효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승집단에서 기왕의 판소리 사설과 음악의 내용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수정한 것이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기왕의 「춘향가」보다 양반적 취향이 많이 가미되어 우아하고 섬세해진 변화된 모습이 특징이다. 이 소리는 보성의 정응민 집안을 토대로 널리 퍼져 있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광주·나주·보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유파의 소리를 지칭하며,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박유전은 헌종 무렵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한양에서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등 크게 활약하다가 만년에 보성군 강산리로 옮겨 살았다. 판소리에 장식과 기교를 덧붙여 서편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박유전의 소리는 정창업, 이날치, 정재근 등으로 전승되었다.
중고제는 헌종 때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경기·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의 판소리 유파로서 지금은 그 계승이 끊어진 판소리 유파이다. 모흥갑이 경기도 진위 출신이고, 방만춘이 충남 해미 출신이라는 점에서 중고제 명창으로 추정된다. 모흥갑은 평양 연광정에서 판소리를 할 때 덜미소리를 질러 내어 십리 밖까지 들리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할만큼 성량이 탁월했던 명창이다. 중고제는 염계달과 김성옥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아 전승되었다. 중고제의 음악적 특성은 ‘비동비서(非東非西)이지만 동편에 가까운’ 중간이라고 하며, 비교적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중고제는 김성옥과 염계달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김성옥은 진양조의 창시자로 유명한데, 서른 살 무렵에 죽었으며, 그의 소리는 아들인 김정근에게 전해졌다.
판소리 전승의 실태
동편제나 서편제, 그리고 서편제의 전승양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판소리는 전승지역에 굳건하게 뿌리를 두고 발전해 나왔다. 그러나 명창이 사정에 따라 이사를 하여 사는 지역이 바뀌기도 하고, 이사한 명창을 따라서 필요에 의하여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유파의 구분은 자연스레 이전의 지역적 기준보다는 명창 자신의 기준에 의하여 유파를 나누게 되었다. 동편제나 서편제가 전승지역보다 ‘소리의 법제’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문을 중심으로 유파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송판 적벽가」라든지 「박유전제 심청가」, 「김세종제 춘향가」 등은 가문으로 계승된 소리의 계보이다. 이로 보자면 사승관계(師承關係)야말로 유파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 명백하다.
판소리에서 ‘제’는 법제 또는 제작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소리 스타일’을 의미한다. ‘제’의 큰 범주로는 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유파로 나눌 수 있지만, 작은 범주의 ‘제’로는 ‘바디’를 포괄하여 지칭한다. 이 작은 범주의 제도 유파와 마찬가지로 자체적 전승력을 가지고 있다. 제는 바디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정정렬제 춘향가」, 「박유전제 심청가」라고 지칭할 때 이 경우 이 춘향가와 심청가는 짧은 소리대목이 아니고 완창하는 판소리 한 마당을 지칭한다. ‘바디’는 어느 명창이 짜서 부르는 판소리 한 마당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판소리는 일제 때의 시련기와 그 이후에 힘든 쇠퇴기를 지내다가 1960년에 들어와 새롭게 변모되었다. 1962년에 중앙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었으며, 국가 재정의 뒷받침을 받으며 창극을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1964년에는 판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로 보호받게 되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는 1968년에, 「수궁가」는 1970년에 지정되었으며, 「적벽가」와 「흥보가」는 1971년에 각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74년 이들 개별적으로 지정되던 것이 판소리로 묶이게 되었다. 판소리 명창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제도적으로 판소리를 보존·전승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전수되고 있는 판소리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궁가」는 유성준이 보유했던 동편제가 정광수와 박초월 두 계통으로 명맥이 전승되고 있다. 정광수제 「수궁가」는 김영자가 보유자 후보로, 정영미가 보조자로 지정되어 있다. 박초월제 「수궁가」는 남해성과 조통달 두 사람의 보유자 후보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춘향가」는 현재 「김세종제 춘향가」와 「정정렬제 춘향가」, 「김연수제 춘향가」가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새로운 계통으로 「김소희제 춘향가」가 포함되어 있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성우향이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김여란이 보유하였다가 박봉례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전수되고 있다. 「김연수제 춘향가」는 보유자 오정숙과 보유자 후보 은희진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김소희제 춘향가」는 신영희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
「심청가」는 현재 보성소리인 「정응민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소릿제는 보유자 성창순과 보조자 이순자에 의하여 한가닥이 전승되고, 보유자 조상현이 다른 가닥을 보존하여 전승시키고 있다. 「흥보가」는 김정문이 전승시켜온 동편제가 유일한 전승의 유파이다. 박녹주와 강도근이 이 유파의 보유자였으며, 박녹주에게는 보유자 후보로 한농선과 박송희가 있어 이 소리를 보존해 오고 있다.
「적벽가」는 「박봉술제 적벽가」와 「서편제 적벽가」, 「중고제 적벽가」가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박봉술제 적벽가」는 보유자 후보인 송순섭과 김일구에 의하여 전수되고 있다. 「서편제 적벽가」는 보유자 한승호가 전승시키고 있다. 「중고제 적벽가」는 보유자 박동진과 보유자 후보인 강정자, 조교인 김양숙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한편 판소리 고수의 전승 방식을 담당한 고법의 무형문화재로는 보유자였던 김명환과 조교인 정회천이 있고, 보유자였던 김영수와 조교인 장덕화가 한 짝을 이룬다. 현재 보유자는 김성권과 정철호가 있으며, 보유자 후보로 김청만이 있다.
이상이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는 판소리 및 고법의 전승 실태이다. 오늘날 전승의 가장 본질적인 단위는 춘향가로서 「정정렬제 춘향가」, 「김세종제 춘향가」, 「김연수제 춘향가」 등이 있으며, 심청가로는 「박동실제 심청가」, 「정응민제 심청가」가 있다. 흥보가는 「김정문제 흥보가」와 「김연수제 흥보가」가 있으며, 수궁가의 경우 「유성준제 수궁가」와 「정응민제 수궁가」, 「김연수제 수궁가」가 있다. 적벽가는 「정응민제 적벽가」와 「박봉술제 적벽가」, 「김연수제 적벽가」, 「박동진제 적벽가」 등이 공고한 전승력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다.
·김세종제 「춘향가」 - 정응민- 성우향 - 김수연, 김영자
성창순 - 이추월, 김명자
조상현
·정정렬제 「춘향가」 - 김여란 - 최승희, 박초선
·박동실제 「심청가」 - 김소희 - 신영희, 김동애, 안숙선, 이명희
한애순, 장월중선
·정응민제 「심청가」 - 박춘성, 안채봉, 성우향
성창순 - 안숙선, 박양덕, 김수연, 김영자
·김정문제 「흥보가」 - 박녹주 - 한농선 - 김영옥
박송희 - 정순임
·김정문제 「흥보가」 - 박초월 - 남해성, 최난수, 김경숙, 전정민
·유성준제 「수궁가」 - 정광수 - 박초월 - 김영자, 안숙선
·정응민제 「수궁가」 - 정권진, 조상현 - 정회석
·박봉술제 「적벽가」 - 송순섭, 김일구
·정응민제 「적벽가」 - 정권진
·박동진제 「적벽가」 - 강정자
·김연수제 다섯바탕 - 오정숙 - 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이상에서 살펴본 것이 20세기 후반의 판소리 전승 현장의 모습이다. 현재 전승되는 유파의 가닥이 충실하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전승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는 빠른 시일안에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이 유파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지는 않으나 전승될 가치가 있는 지방연고의 판소리 유파가 있다. 이들을 보호·육성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새로운 천년의 판소리
지금까지 300년 전통의 판소리의 전승 내력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하였다. 판소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전승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전승의 기반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을 때 무형문화재라는 제도에 의하여 일정하게 보호받은 측면이 있다. 물론 판소리 자체에 내재한 끈질긴 생명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이 정도라도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 이후에 대학에 한국음악학과가 생기고, 이곳에서 판소리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상황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판소리에 관한 일반의 인식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다. 90년도 초반의 영화 「서편제」 열기는 판소리가 가진 강인한 특성이 비로소 우리의 고유한 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 즈음의 판소리는 19세기의 왕성한 민족예술적 정수를 담은 것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자생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 판소리를 어떻게 새로운 천년에 적응시켜서 향유하느냐의 문제이다. 앞으로의 판소리가 우리의 예술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판소리
이번 사례조사 대상이 된 판소리 재인 18명에 대한 계보조사를 통해 동편제·서편제(강산제)·보성제·섞어제 등의 전승과정을 살펴보자.
소리의 법제에서는 흔히 '동편제'라 하면 송흥록의 계보를 말하는데, 이는 송흥록이 '동편(우조)'의 두드러진 명창이었기 때문이다. 송홍록 이전에도 우조(창법)의 소리는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편제'라 하면 박유전의 계보를 말하는데, 이는 박유전이 '서편(계면조)'의 명창이었기 때문이다. 박유전 이전에도 계면조의 소리는 있었을 것이다. 서편제 중에서도 박유전 이후의 소리를 '강산제'라 하는데, 강산제 계열에서 다시 정응민의 소리가 뛰어나 정응민 이후를 '보성제'라 한다. '보성제'는 서편제이면서도 동편소리를 가미해 다시 확립된 소리의 제이다.
이와 달리 '섞어제'는 동·서편의 소리를 섞으면서도 하나의 새로운 소리제를 형성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데, 주로 40∼50대 이전의 판소리꾼들이 동·서편 양쪽의 소리를 다 배워 양쪽 모두에 능한 경우를 말한다. '섞어제'가 미래에 또 하나의 소리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며, 혹시 이것은 동·서편제가 통합된 소리제일 수도 있다고 본다.
무릇 당파나 계보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정도와 강약이 달라지므로 새로운 인물과 명칭이 나타나는 게 당연하다.
서편제가 '강산제', '보성제' 등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발전과 변화를 거듭했기 때문인데 판소리의 발전이 서편제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판소리의 법제를 동·서편제만으로 쉽게 분류하거나 고집하는 것은 발전과 변화에 역행하는 개념이다. 물론 '송(만갑)판', '이(날치)판', '정(재근)판' 등의 '판(token)'이 있고 '메가타입(megatype)'으로 '박유전 강산제' 등의 개념이 있긴 하지만, '판'이나 '메가타입'이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하며 아랫대로 가면 언젠가 이들이 새로운 '제'로 격상될 가능성이 있다. 인류의 모든 출계(kinship)는 언제나 신화적인 단계(clan)보다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계(lineage), 나아가서 친·인척(kindred) 단계를 더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판소리 법제를 '열린 체계'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판소리계에서도 중시조(中始祖), 입향시조(入鄕始祖) 또는 문중(門中), 파종(派宗) 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강도근: 동편제의 명창. 제자가 적은 게 안타깝다. 안숙선·이숙자 등이 그들이다.
강씨는 송만갑(국창)의 직계인 김정문에게 배웠다.
송만갑은 '가왕(歌王)'이라 불리는 송흥록(1800년경) 종손자로 부친 송우룡도 명창이었다. 송만갑의 할아버지 송광록은 동편제의 창시자 송흥록의 동생으로 처음엔 고수였으며, 흥록의 부친 송 첨지도 초대명창 권삼득의 고수였다. 흥록은 또 철종에게 통정대부(정3품)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송흥록의 동편제는 명창 박만순, '가선(歌仙)'이라 불리는 박기홍에게 전해졌는데 제자가 빈약했다. 김정문의 제자는 기라성 같은 소리꾼으로 현대 판소리계를 이끄는 중추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박초월, 김추원, 배설향, 박봉래, 박녹주, 이초선, 이화중선, 김광순, 김소희, 신금홍, 김초향, 박봉술, 장판개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 장월중선: 동편제의 여창. 송만갑의 제자이며 고종앞에서, 〈장판교대전〉 대목으로 혜릉참봉(종9품)직을 제수 받은 명창 장판개(張判介)의 동생, 장도순이 장씨의 부친이다. 장씨의 고모 장수향씨(장판개 막내여동생)도 명창이었다. 장판개의 수제자이며 당대 명창이었던 배설향(1895∼1938)은 장씨의 큰어머니이다. 장판개의 외아들 장영찬씨도 국극 명창이었다. 장씨의 딸 정순임씨가 대를 잇고 있고, 이명숙 주영희 등이 제자.
△ 한농선: 동편제계의 섞어제 여창, 김정문-박녹주 계열이며 박송희·조순애가 학습동기다. 한편 한씨는 김창조-한성기의 줄풍류맥도 함께 이어받고 있다. 가야금 명인 한성기씨가 부친이다. 한씨의 제자는, 이동운, 정충식, 도건영, 김영옥, 김미정, 임명이, 박선미, 김영서, 강선희 등이 있다.
△ 한승호: 동편계열의 강산제 명창. 김채만의 맥을 잇는 명창 한성태가 부친으로 성원목·송만갑·이동백에게도 소리를 배웠다.
한씨는 대금명인 한덕만의 손자이며 거문고 명인 한갑득의 형이다.
한씨의 제자는, 김순종, 조성윤, 김태원, 김판조 등이 있다.
△ 남해성: 동편제 여창의 확실한 계승자. 박초월에게 배웠으며 송만갑·유성준의 소리맥을 잇고 있다. 그의 아들 한세현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김수연, 전정민, 박양덕, 임명자, 김경숙, 주소영, 탁정란, 정은영, 강정임씨 등이 제자들이다.
△ 박동신: 강령탈춤 보유자로 부인 우옥주와 함께 잽이피리의 독보적 존재다. 정먹통에게서 피리를 익혔고, 장량선에게서 소리를, 최용락에게서 춤을, 오순석에게서 탈춤을 전문 학습했다. 김호석과 서정진이 대를 잇고 있으며, 이경원, 길덕석, 정한수, 박인범이 피리를 배우고 있다.
△ 김숙자: 죽은 넋과 산귀신들의 척과 한을 푸는 도살풀이의 명수. 할아버지 김석창은 경제(京制) 명창이었다. 아버지 김덕순은 판소리와 춤에 뛰어났고 어머니 정귀성은 이름난 세습무였다.
정일동은 김씨의 외사촌 오빠로 현재 경기무악 장단의 제일인자다. 정씨의 딸 김운선과 이질녀 류홍난이 도살풀이 맥을 잇고 있으며 제자는, 김란, 양순길, 장두이, 최영순, 이정희, 강남기, 이량기, 염은아, 임수정, 노성연 등이 있다.
△ 천대룡: 전남 해남출신으로 서당 선생 곽훈장과 판소리 강산제 명창 정응민으로부터 배웠다. 한때 당대명창 임방울과 김경애 밑에서 약관고수로 명성을 떨쳤다. 박상길, 홍광표, 김삼룡, 주정표, 김상룡, 김춘식, 김철룡, 김재근, 박흥수가 제자들. 천씨는 국립국악고에 재학중인 딸 천희양에게 거문고와 북 장단을 가르치고 있다.
△ 정철호: 아쟁산조의 창시자. 명고수·판소리명창·창극 작곡가로도 한 시절을 풍미했다. 증조부인 정달현과 조부 정희연은 기악명인이었으며 부친 정치조는 판소리 명창이었다. 어머니 안능례도 무가에 뛰어났다.
정씨는 장구명인 지성자씨의 부친 지영희씨로부터 아쟁을 전문 학습했고, 명창 임방울에게서 소리학습을 했다. 그는 또 김재선의 북 장단을 익혀 한성준-김재선제를 이어받는 한편, 강산제 명창 정응민으로부터 창제와 더늠을 배웠다.
아들 정병국이 아쟁의 맥을 잇고 있으며, 서용석, 윤윤석, 박대성, 김경환, 김경수, 최애순, 주경희, 천대룡, 이룡배 등이 제자.
△ 우옥주: 황해도 옹진의 대가집에서 태어났으나 강신무가 되기 위해 성을 이씨에서 우씨로 바꾸었다. 우씨는 전설적 강신무인 김기백의 신딸이 되어 31거리굿을 배웠고 체일리 만신의 굿을 전수 받았다.
피리 잽이의 명수 박동신은 그녀의 남편. 제자는, 이막내, 정순옥, 김학균, 정순녀, 하원실, 손순열, 윤일숙, 이봉애, 김학민, 박선자, 오석주, 오영신 등이 있다.
△ 이동안: 조선조 재인청의 마지막 도대방. 조부 이하실·부친 이재학도 경기도 화성 재인청의 도대방을 지냈다. 숙부 이용우는 화성 재인청의 부도대방.
△ 전경환: 천부적인 눈썰미로 재기를 익힌 농악상쇠의 일인자. 최화접·강성옥·박성근·김성락(이상 상쇠)에게서 배웠다. 김홍식은 전씨와 사돈간이며 고에게 장구를 가르쳤다. 이상순, 박이식, 정득채, 황기현, 임재식, 정윤수, 문한준, 최상진 등 15명이 전씨 예능을 전수 받고 있다.
△ 여재성: 북청사자놀음 인간문화재. 8촌형인 여권숙한테서 퉁소·북·징 등 놀이음악과 앞뒤채 사자 역을 익혔다. 여씨의 부인 유송승씨는 북청사자놀이 중 넋두리 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이수자로 결정됐다. 조카 여병룡(양반 역)과 종손 여병필(뒷사자)도 북청사자놀음을 함께 배웠다. 동선백, 동선봉, 동영범, 고장욱, 전경욱, 노용준, 정명한, 최홍길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 서용석: 김광식·한주환(대금), 정철호(아쟁), 방태진(태평소), 서공철(가야금)의 전통맥을 이은 대금의 명인. 장남 서영호(아쟁)·셋째 서영훈(피리)·막내 서영민(해금)·부인 최선옥(창)까지 재기를 재인 가족이기도 하다.
명창 박초월은 서씨의 친이모이며 외할아버지 박덕삼은 전라도 지역에서 이름이 났고 외할머니는 어정판을 주름잡았다. 어머니 박점례도 외할아버지의 재기를 이어 받았다. 아들 삼형제가 서씨의 맥을 잇고 있고, 심상남, 김광복, 최상화, 최삼범, 황규일, 김재영, 채조병, 이재익, 금잔디가 제자들이다.
△ 양소운: 북한 최고예술인 김진명에게서 서도소리를 익혔고, 장량선으로부터는 춤을, 유정철에게서 남도창과 가야금을 전문 학습했다. 큰딸 차재숙·아들 차부회·막내딸 차선숙이 양씨의 맥을 잇고 있으며, 손자 차원철 손녀 차은선도 예능을 익히고 있다. 조카딸 양재옥·노승희·조영애·김혜영·김영실은 양씨의 검무를, 김실자·김정순·김정숙·강대성·송용태는 강령탈춤을, 김종엽·장준석은 봉산탈춤을 양씨에게 익히고 있다.
△ 정경파: 이동안제 살풀이춤의 명인. 승무 굿거리 장구 창에도 능하다. 재인청 마지막 도대방을 지낸 이동안으로부터 춤을 전수 받았고 그 인연으로 이씨를 양아버지로 모시고 있다. 달성권번 이선생(남도창)과 한성권번 박선준(창·무용기본)에게도 배웠다. 제자로는 박경현, 김희영, 최근자, 고희자, 황연주, 이정희, 김명순, 이영미, 이선영 등이 있다.
△ 박귀희: 강태홍-오태석제 가야금 산조를 이은 가야금병창, 본명은 오계화이며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박지홍·조학진·박동실·유성준에게서 창을 익히는 한편, 김남수에게서 무용을 학습했다.
박씨의 제자는 우리 국악계에서 손꼽히는 사람이 많다. 안숙선, 강정숙, 김성녀, 윤소인 등이 그들이며, 정예진, 정한희, 오갑순, 강동열, 이영신, 정진숙, 이명희, 박옥화, 정명희가 후계자들이다.
△ 김오채: 설장구 가락 기능보유자. 김씨의 할아버지 김창환은 고종 앞에서 어전공연으로 중추원의관 벼슬을 제수 받은 창악계의 거봉이다. 서편제 판소리의 뿌리인 이날치와 박기홍씨와는 이종사촌간이다. 부친 김만길도 상쇠명인이었으며, 사돈 김만석(설장구)과 장인 김흥식(설장구)·임준용(가야금·피리·북)에게 재기를 익혔다.
김씨의 딸 김옥란이 맥을 잇고 있고 제자로는, 이대희 이동운 안태수 등이 있다.
△ 조송자: 어름광대 명인. 부친 조길환은 남도창과 장구에 능한 재인이었다. 줄타기는 손만대에게 익혔다. 조씨의 외손녀 박상미가 어름광대의 대를 잇고 있으며, 정은영이 유일한 제자다.
△ 이은관: 서도소리 명창으로 배뱅이굿의 명인. 소리꾼 김관준의 배뱅이굿을 이은 이인수로부터 배웠고, 최경식에게서 시조창을 익혔다. 제2의 이은관이 되기 위해 그의 소리를 배운 이는 많지만 현역에서 활동하는 제자가 드물다. 박준영, 인정임, 박경옥, 최병문, 김경열, 김경선, 박기옥이 그의 제자들.
△ 박후성: 우리 창극사와 함께 한 창극의 산증인. 박씨의 본명은 김동. 부인 박홍도도 평생 동안 창극을 함께 해왔으며, 그의 셋째 작은아버지 박화섭은 강산제 소리의 정통맥을 이은 명창이었다. 성원목·박동실(이상 창), 한갑득(거문고), 오태석(창극), 이설행·전창근·박진 ·이진순(이상 연출)으로부터 전문 학습했다.
임준옥, 한일섭, 장영찬, 양상식, 은희진, 조통달, 윤석기, 윤충일, 김영자, 안숙선, 임향임 등이 그가 사랑하는 제자들이다.
△ 송동숙: 동해안 오구굿의 일인자. 부인 김향임도 영해 별신굿놀이의 기능보유자다. 증조부 송화랑은 대구에서 진사 벼슬을 지냈는데 누명을 쓰고 울진으로 귀양왔다가 무당이 됐다. 그 이후 종조부 송대근·송대봉과, 조부 송학봉, 조모 이씨도 각각 무업을 계승했다.
또 큰아버지 송일선·부친 송도선·작은아버지 송기성도 무업을 승계했으며, 딸 송명희와 사위 김장길이 무업을 계속 잇고 있다.
△ 김상용: 김승원(조부)-김성태(부친)의 양주별산대 놀이맥을 이었다. 김씨는 박준섭과 고명달에게서 완보역을 배웠고, 아들 김정선이 농사를 지으며 양주별산대 놀이맥을 잇고 있다. 류한수, 류묘순, 김순홍, 신해춘, 노금모 등이 제자들이다.
△ 김재원: 남사당 재인. 홍덕화의 재기를 전수 받은 남원룡의 맥을 잇고 있다. 김씨는 남씨의 부인 박계순과 함께 1대이며, 남씨의 아들 3형제 남기환·남기문·남기선과, 박용태·지운하 ·진명환은 김재원 남사당패의 2대이다. 또 김봉철·이봉교가 3대, 남동현(남기환씨 아들)·박준섭(박용태씨 아들)·이동훈(박계순씨 이질조카)·박찬종·한상돈·남현경(남기문의 딸)등이 4대에 속한다.
△ 박송암: 이만월(범패 17세)-이월하(범패 18세)의 맥을 이은 범패 19세. 본명은 박희덕. 철종의 사위로 금릉위에 봉해진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가 친할아버지다. 역사의 격변기에 아버지 박흥원이 스님(법명은 운허(雲虛))이 됐고 동생 박혜륜도 스님의 길을 걷고 있다. 사형사제간인 남벽해에게서 목을 틔웠고, 박씨의 제자는 무려 1천명에 달한다. 범패 20세인 제자들로는, 김구해, 이원명, 오송강, 한동희, 마일운, 이기봉, 정대은, 김능화, 조동선 등이 있다.
△ 이매방: 신방초-박귀수-이정선-김금옥-박영구의 정통 승무맥을 이은 재인. 할아버지 이대조는 명무 명고수로 호남일대를 주름잡았던 명인이었다. 박영구(승무·북)·이창조(검무)에게 전문 학습해 춤꾼이 됐다. 딸 이현주가 그의 맥을 잇고 있으며, 김진홍, 송수남, 임이조, 채향순, 김진선, 최영순, 정명숙, 진유림, 류숙희, 이상온, 이애경이 손꼽는 제자들이다.
△ 김계화: 교방굿거리춤의 재인. 본명은 김순례. 부친 김봉기는 호적을 잘 분 명인이었다. 오수암·최막동·강장원에게서 창을 익혔고, 이대조(검무·승무)·신용주(교방굿거리춤)·김종기(가야금)에게서 재기를 익혔다. 김씨의 동생 김명심은 국악인이며, 딸 김영미와 조카 김애란이 춤맥을 잇고 있다. 제자로는, 장인영, 박진희, 박금복, 염경화 등이 있다.
△ 박범훈: 지영희의 정통맥을 이은 피리 재인. 할아버지 박창두는 가야금에 능했고, 명창 함동정월은 박씨의 내종숙. 이봉교에게 작곡을 배웠다. 김광복, 송선원, 한세현, 김재영, 정한수, 정윤희, 최인석, 한상일, 김원선은 피리, 유문식, 이화동, 최종실은 작곡을 배운 제자들이다.
△ 박종선: 아쟁·대금·태평소·장구·가야금·북 등에 뛰어난 민속악의 명인. 할머니 배씨도 어정판에서 놀았던 명무당이다. 특히 박씨의 큰아버지 박동실은 동·서편소리 다섯 마당을 자유자재로 부른 가객. 외조부 공창식과 아버지 박영실은 판소리 명창이었으며, 육촌 박수길과 박희숙도 여류명창이다.
박씨는 한일섭에게서 민속악을 배웠다. 아들 박기영과 딸 박회정이 민속악의 대를 잇고 있으며 제자들로는, 이태백, 김영길, 심상남, 신상철, 김일륜, 오경희 등이 있다.
△ 강선영: 승무·살풀이·태평무·학춤·한량무를 익혔고, 장군춤의 최고 명고수 한성준의 태평무를 계승했다. 할아버지 강경수는 관가 벼슬을 하며 한성준·이동백·정정열 명인들과 함께 어울렸다. 작은아버지 강병화는 토월회를 조직한 연극인. 이현자, 이명자, 김근희, 채상묵, 심가영, 심가희, 양성옥, 김나영, 고선자, 최윤정, 김경희, 이춘자 등이 강씨의 제자들.
△ 장보배: 황해도 강신무. 평산 강신무 김씨 할머니로부터 배웠다. 이선비, 윤종하, 박영자, 윤용녀, 박인숙, 안금자, 최종숙, 이장호 등이 장씨의 무업을 잇고 있다.
△ 한동희: 회심곡의 전수자. 속명은 한희자. 박송암 스님을 만나 음성불사 기능을 모두 전수 받았다. 비구니 승인 현준, 현수, 자인, 혜일, 인화, 정율, 희성을 비롯해, 민연옥, 김미숙이 박씨의 손꼽는 제자들이다.
△ 정달영: 가야금 병창. 본명은 정재국. 정씨의 당숙 정남옥은 산조가야금의 큰 맥 한숙구제를 이었다. 아버지 정학기는 피리·가야금 등 민속악의 명인이었으며, 형님 정백옥은 명금장(名琴匠). 고모부 조때갈과 고종사촌 박점옥도 명고수였다. 김복술에게 굿거리 뒤풍류를 전문 학습했다. 강정열 양경숙 문혜란 곽은아 박정수가 그의 제자들.
△ 이애주: 한성준-한영숙의 정통춤맥을 이은 승무명인. 이보남·이용우(경기도당굿), 조한춘(경기도당굿), 박송암(범패), 김월하(시조), 박상화(81 영가무요)에게 재기를 익혔다. 한성준제를 잇고 있는 제자들로는, 김옥희, 나재선, 이진실, 유정애, 이명실, 윤영옥, 이철진 등이 있다.
△ 이강덕: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 이씨는 효녕대군의 18대손. 성경린(이론·거문고·궁중정재), 이석재(피리), 김보남(승무·살풀이), 이주환(가곡·시조), 봉해룡·성금연(가야금) 등에게 배웠다. 그를 통해 국악의 길에 접어든 이로는, 이희명, 김용만, 홍도후, 윤미홍, 황병주, 정재국, 최충웅, 이미숙, 한석 등이 있다.
△ 김금화: 황해 강신무. 외할머니 김천일은 큰무당이었다. 권만신·방수덕(무가·사설)·유만신에게 배웠다. 신딸이 50명이나 되는데, 김경화, 정옥련, 김매물, 이옥자, 신숙자, 김춘선, 송미자, 정기성, 이연화, 이정아 등이 손꼽는 제자들이다.
△ 이일응: 바라춤·나비춤·법고춤 등 범패작법의 일인자. 속명은 이재호. 전주 보문사 주지로 있다. 이법준(바라 나비춤)·강보담·성옥두·오덕봉·이월하(나비춤)에게서 배웠다. 아들 이인묵(속명 이삼길)은 조계종 스님으로 작법맥을 잇고 있다. 제자로는, 박혜안, 이운봉, 이강선, 김혜정, 이인오, 일각 이석준, 전유정 스님 등이 있다.
△ 신석남: 동해 세습무. 아버지 신용수와 어머니 이금화도 큰무당이었으며, 시아버지 김범수·시어머니 김운화와 남편 김용출, 친정어머니 이금화, 시숙모 이영파 모두 전통 세습무가 출신이다. 신씨는 동해안 최고무당 김석출의 사촌형수가 된다. 동해안 무속은 둘째아들 김명철과 며느리 빈순애, 넷째 아들 김명대와 며느리 이순덕이 잇고 있으며, 사화선 김영숙, 박금천, 신동해가 제자들이다.
△ 조을선: 오돌또기 등 제주민요 무형문화재. 친정 어머니 송신화도 목청 좋은 명창이었으며, 변여옥·이경춘에게서 전문 학습했다. 조씨의 소리맥은 외손녀 강경화와 강문희가 잇고 있으며, 이선옥, 송인선, 김경화, 김향란, 강인옥, 홍태옥, 현순옥, 이미생, 정일수, 이창순 등이 조씨 밑에서 소리를 익히고 있다.
△ 김윤수: 제주칠머리당굿 무형문화재. 증조부가 무당으로 4대째 무업을 잇고 있다. 조부 김기원, 종조부 김신천, 큰아버지 김천년, 둘째 아버지 김만년, 셋째 아버지 김백년, 넷째 아버지 김사년, 아버지 김성년 또한 큰 신방이었다. 김씨는 외할아버지 홍씨와 외할머니 안씨, 외삼촌 홍명관에게서 무악장단을 익혔으며, 의붓아버지 양금석(춤)과 안사인(사설)으로부터 학습했다. 무당 김윤보는 김씨의 사촌형이다. 고순안, 홍보원, 이용순, 오방건, 문순실, 이태수, 고산옥, 마치순, 김연희, 문태봉 등이 제주칠머리당굿을 배우고 있는 제자들.
△ 하보경: 밀양북춤 무형문화재, 아버지 하성옥은 농악패에서 큰북을 치던 명인이었다. 하씨의 밀양북춤맥은 손자 하용부가 잇고 있으며, 김상용, 권재엽, 임순희, 조병완, 박동영 등이 제자들.
△ 안채봉: 소고춤 제일인자. 박동실·조몽실·정응민·임방울의 소리를 배웠고, 박영구의 소고춤과 한진옥의 살풀이춤 김종기의 가야금을 각각 익혔다. 제자들로는, 이미 고인이 된 명창 고농선을 비롯해 김설행, 김영숙, 김지숙, 김현미, 성은희, 성훈 등이 있다.
△ 김덕명: 양산사찰학춤의 명인. 김씨의 아호는 학산이며 동자승 출신이다. 김씨의 할아버지 김두식은 통도사의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배웠다. 그는 김두식의 학춤을 이은 황종열·안화주로부터 익혔다. 또 사찰춤맥으로 내려오는 이월호(통도사 주지)-김설암-신경수-양대응의 맥과 함께, 권번춤맥으로 이어진 안주서-고수길-김농주의 맥을 동시에 이었다.
김씨의 둘째아들 김성수(백성 스님)는 윤월하 스님이 아끼던 법 제자로 사찰학춤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씨의 제자는, 박계현, 성계옥, 김정애, 서정남, 정행금, 최금순, 김연이, 정필순 등이 있다.
△ 김애정: 국악명인. 김씨의 외할아버지는 세(細)피리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김씨는 오바돌(단가), 장행진(가야금병창), 김덕진·조동선(심청가)과 국창 송만갑의 조카인 명창 송엽봉(적벽가), 신고주(승무), 도금선(굿거리춤), 박동실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김씨는 송엽봉-박동실 명창의 소리제를 잇고 있으나, 강갑성, 김동순씨가 유일하게 그의 소리제를 학습하고 있어 보전이 시급한 실정이다.
△ 강준섭: 진도다시래기 기능보유자. 강씨의 할아버지 강용성은 어정판 무악뒷바라지로 이름을 날렸다. 또 아버지 강보문과 어머니 박석화도 상청놀음판에서 날린 명인이었으며 박병두와 채기선에게서 창을 익혔다. 무대에서 만난 부인 김애선은 창과 무용, 연극에 능한 예술인이다.
강씨의 아들 강민수가 진도다시래기맥을 잇고 있으며 김광수와 김천두가 그가 아끼는 제자들이다.
△ 김수악: 김수악 구음(口音)을 창제하고 진주검무로 인간문화재에 지정됐다. 김씨의 아버지 김종옥은 거창군내에서 한량율객으로 통할 정도로 거문고·피리에 능했다. 숙부 김종기는 진주권번 선생으로 창에 능하고, 관악기를 자유자재로 주무른 천하명인이었다.
△ 강동일: 백낙준-김종기-박석기-신쾌동으로 이어지는 거문고산조 전통맥을 이었다. 강씨는 거문고 산조의 3제파(制派)인 신쾌동·한갑득·김윤덕 제를 계승하는 한편 방금선에게서도 재기를 익혔다. 강씨의 아버지 강남풍은 어정판에서 장구와 가야금으로 밥을 먹던 악사였으며 막내아들 강기웅도 국악의 길에 들어섰다. 최영순, 장복희, 서경이 그의 제자들이다.
△ 장금도: 동살풀이춤의 명인. 일제 때 민속춤의 대가로 날리던 도금선에게서 살풀이춤을 배웠고, 최창윤(승무), 김백룡(정재), 이기권·김준섭·민옥행으로부터 판소리를 익혔다. 도금선-장금도 살풀이춤 맥은 기정희가 유일하게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박정수: 문묘-종묘 제례악 때 추는 일무의 확실한 계승자. 박씨는 김기수(종묘제례악의 총괄), 김천흥(팔일무), 성경린(거문고 팔일무), 김성진(대금), 김준연(피리), 김태섭(편종·편경), 김종희(해금), 김영윤(정악·가야금)에게서 배웠다. 팔일무는 중국에서 배워 갈 정도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으나, 곽영효 이영우씨 등 제자들이 몇 안 된다.
△ 오수복: 경기도당굿 열 여섯 거리 원형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는 경기강신무. 오씨는 줄광대로 유명했던 이봉원의 친누나인 갑오만신의 신딸이다. 갑오만신과 단짝을 이루며 젓대·해금·경기무악에 통달한 민속음악의 이용우에게서 도당굿을 배웠다.
오씨의 도당굿은, 김순덕, 김은심, 장유분, 조과연, 김춘례, 송정자 등이 계승하고 있다.
△ 황병기: 국악의 세계화를 기치로 활동중인 가야금명인. 황씨의 부인은 소설가 한말숙씨. 김윤덕(정악가야금)을 통해 정남희제 산조를 계승하는 한편, 김영윤·심상건·나원화에게도 사사했다.
황씨의 제자는 쟁쟁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재숙, 김정자, 조청자, 서원숙, 이승열, 양연섭, 양승희, 문재숙, 박현숙, 윤소희, 곽은아와 외국인 앤드루 킬릭·바버라스미스·로버트 가피어스 등이 있다.
△ 윤윤석: 한일섭 아쟁산조의 대를 이은 아쟁의 도인. 윤씨의 아버지 윤영택은 호적·설장구·꽹과리·장단북에 능했으며 가야금 명인이었다. 이창선에게 창을 익혔으며 막내아들 윤성경이 대를 잇고 있다. 윤씨의 아쟁산조는 조영제가 확실히 계승하고 있다.
△ 김백봉: 최승희 무용을 확실하게 계승한 부채춤의 창무자(본명은 김충실). 김씨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와 동서간이다. 김씨의 남편 안제승은 경희대 무용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시아주버니 안필승은 최승희의 남편이다.
△ 김영재: 전남대 국악과 교수로 해금주자. 김씨는 김천흥(무용), 지영희(해금), 신쾌동(거문고)에게 전문 학습했다. 김씨의 제자로는, 남현우, 임숙자, 배종근, 백정순, 고영란, 최지인, 김은정, 조미애, 장호순, 최숙인, 이형환, 한민택, 김근수, 이진이, 임현숙 등이 있다.
△ 이은주: 묵계월·안비취와 함께 '국악 트리오'로 불리는 경기잡가 명창. 본명은 이윤란. 이씨의 아버지 이삼덕은 경기도 부농으로 호적을 잘 불었다. 원경태(잡가 시조 가사)와 명창 이창배(12잡가 경기민요)에게 배웠다. 이씨의 스승인 원경태와 이창배는 경기잡가의 중시조인 박춘경의 소리맥을 이은 수제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