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laza1.snut.ac.kr/~ctman/TA203.htm
(주 : 추종자란 단어에 너무 초점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프롬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학자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계기로 그와 어떤식으로라도 관계가 있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올리는 것입니다. )
J. Lacan의 정신분석학과 욕망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있어서 기본입장
라캉(Jacques Lacan;1901~1981) : 파리의 유복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1919년 의과대학에 다녔으나 철학, 문학, 초현실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조르쥬 바타이유, 클로스포스키 등과 교류하였다. 1932년 의학박사 학위논문인
"인성과 관련된 편집증적 정신이상"을 출판하였으며 이때부터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36년에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를 발표하였으며, 1968년
학생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정신분석학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라캉의 이론은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조차 할
만큼 난해하지만 그는 여전히 프로이트를 발판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과학에 입각해 분명한 입장을 유도한 프로이트에 비해 라캉의 이론은 모순에 차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와 대립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에서 중요한 사항을 들자면
1)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을 믿는다는 사실,
2) 언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3) 라캉의 말은 단순하고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사실 등이다.
라캉 : 언어학을 모형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재정립
즉, 프로이트가 개인의 역사에 중점을 두고 탈정치화의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한다면
정치적 문제와 함께 개인적 문제의 해결을 통한 인간 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프랑스
68 학생혁명과 함께 독일에서는 마르쿠제, 프롬 등이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이런 사회환경 속에서 라캉의 이론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고틀로서 프로이트가 결여하고 있던 철학적, 인간학적 측면을 보완하는 것으로써 20세기 후반 지식인 세계에 폭넓은 주목을 끌었고 또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라캉은 정신분석 이론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이론이 유비적(analogical)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언어학적 개념을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설명하는 데 적용
프로이트가 어둠에 잠겨있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
라캉은 무의식이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어 이해 가능하고 설명 가능하다고
파악
즉,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어린 아이의 사회화과정과 연관시켜 설명
여기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공통점과 차이를 보자면
정신분석은 꿈 혹은 정신병 등에서 왜곡되어 나타난 무의식의 의미를 언어로 드러내거나, 인간의 일상적 행동과 언어 속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적 잔재를 추적하는 것이란
점에서 자연(본능, 리비도)과 문화(사회, 규범)의 접점 속에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역할 수행. 라캉은 프로이트에게 중요한 심적 에너지 혹은 리비도라는 자연주의적 가설을 거부하고 있으나, 정신분석학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 즉, 문화는 '본능의 억압'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프로이트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문화 자체보다 문화를 구성하는 언어에 집중. 따라서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로 번역가능하다'고 본다.
실재계(le reel) :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것이자 경험의 대상을 구성하는 세계 전체로 생물학적 욕구와 외적 사물로 구성되며 상징화되기 이전의 세계의미. 실재계는출생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아기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 누리던 일체감과 안락감을 맛볼 수 없으므로 결핍 또한 시작한다. 즉 출산은 어머니의 몸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체를 이루고 있던
자신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며, 탯줄을 자르는 것은 이러한 분리를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처럼 인간은 날 때부터 욕망의 죄절을 겪게 되며 이러한 결핍이 성적
욕망을 앞선 것이므로 성적 만족이 이것을 결코 완전하게 채워주지는 못한다. 결국 실재계란 인간이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이 욕망의 존재로 돌아간다는 것은 분열과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계(거울단계) : 6~18개월의 어린 아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다른 사람으로 알다가 점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거울 앞에 선 어린 아이, 이것은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산만한 유아가 갑자기 전체적이고 일관되며 멋진 것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아가 하나의 정체성으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에 이르게 되는 길이며, 유아는 자신을 거울에 보이는 것과 일관된 존재로서 상상한다.
즉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통해 아이는 '조각난 몸'(le corps moecele)의 환상을 갖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과 자아를 동일시(상상적 자기동일성)하는 순간 조각난 몸의 환상이 가져온 고뇌에서 벗어나 '신체의 통일적 형태'(gestalt)를 파악 : 만족감과 자아도취의 감정 획득하지만 자기도취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자기소외 수반
이 단계가 인간의 자아의식의 허구성, 기만성을 노출하는 시기이다.
거울단계가 있다는 것은 유아가 외부로부터 자아에 대한 느낌을 얻게 된다는 뜻인데,
이 자아는 그 자체의 반영물에 불과하다. 자아에 대한 거짓된 감각 즉 잘못 인식된 정체성을 라캉은 그 개인에게 계속 남아있게 되는 분열의 원인으로 보았다. 이 가공의
세계에서 거울 이미지는 시니피에(기의)이고, 아이 자체는 시니피앙(기표)이 된다.
상징계(아버지의 이름) : 어린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가면서 언어를 획득하게 되고 상상계로부터 분리 즉,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요,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거울단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이 상징계로의
진입을 통해 진정한 자기동일성으로 변형가능(언어의 주체가 되는 것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되는 것)
실재계와 상상계를 억압함으로써 욕망의 끊임없는 순환 야기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는 인성발달의 단계에 상응하면서도 개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세 종류의 질서
라캉의 욕망론
라캉은 출생으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태아는 어머니를 상실했다는 불유쾌한 경험 즉 어머니와 한 몸이었으나 출산으로 어머니 몸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최초의 좌절 경험하고 근원적 결핍감을 갖게 된다-욕망의 근원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의 욕구는 만족되었으므로 우리는 어머니와 분리되기 이전에 느낀 평화롭고 목가적인 상태를 기억하며 욕구
그러나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본질적 특성을 갖기 위해 상상계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로고스(언어, 이성)을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은 상상계로부터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해야 비로소 인간답게 된다. 즉, 어쩔 수 없이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인 남성의 기관으로서 페니스(음경)를 상징적
의미의 팔루스(Phallus; 남근)란 상징적 언어로 대체시켜 프로이트의 전통을 발전하는
한편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
프로이트가 외디프스 콤플렉스에서 말하는 '음경선호'(penis envy)에 대해 라캉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남근은 허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다. 또한 남근은
그 자체로 현실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대상도 아니다. 남근이 남성 성기나 음핵같은
신체기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진실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는 바 팔루스는 신체기관인 페니스가 아니라 곧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팔루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 즉, 남성 중심 사회의 법, 곧 근친상간을 금지하고 아버지에 의한 거세를 두렵게 생각하는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므로 생물학적 결정론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팔루스는 권위, 권력, 질서를 상징하는 한편 상실, 결여,
욕망을 상징하는데 어린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이러한 '결여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언어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린 아이가 무엇인가 결여되었거나 상실된
사물의 개념을 가져야 비로소 파악될 수 있다.
인간의 욕망(desir)은 매우 불안정하고 모순적이어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충족될 수
있는 욕구(besoin)와는 다르다. 욕구는 생물학적 필요를 말하며 식욕, 성욕의 충족처럼 특정 대상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의 달성을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욕구의 충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잔여물이 있고 그것이 욕망의 형태로 남는다.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욕구는 대부분의 경우 요구(demande)의 형태로 나타난다.
라캉에 의하면 요구는 특정한 대상으로 만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그러하다. 사랑에 대한 요구는 타자가 만족시켜
줄 것을 기대하지만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은 이것을 만족시켜 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결핍감이 욕망을 구성한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은 순수한 결핍이 갖는 힘"이라고 한다. "욕망은 만족을 위한 욕구도 사랑에 대한 요구도 아닌, 요구에서 욕구를 뺀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동시에 양자 분열의 현상 그 자체이다."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랑의 요구는 서로의 요구를 완전히 채워주기는커녕
오히려 주체를 욕망의 회로 속으로 몰아넣는다."
라캉의 시각예술분석
시선과 응시의 분열
'반복'(repetation)의 어원은 '지치게 하고 소모시킨다'는 의미의 'holen'(to haul) 즉, 끌어당긴다란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라캉이 이 반복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제5권의 한 에피소드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즉, 아들의 병상에서 밤낮으로 간호했던 한 아버지가 아들이 죽은 후 잠시 옆 방으로 가면서 그 아들의 시체를 보기 위해 병실에 큰 촛불을 켜놓고 문을 조금 열어둔 채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면서 비난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 제가 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아들의 병실로 다가가니 촛대가 넘어져 불이 났고 그 불로 아들의 팔이 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 꿈을 일종의 '소망충족'으로 해석한다. 죽은 아들은 꿈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는 상태로 있도록 잠에서 바로 깨어나지 않고 이 꿈을 연장한다. 아버지가 꿈에서 깨어나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면
그만큼 아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실재계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발생하는 주체의 분열이 반복의 토대인 것이다.
븐석이란 경험에서 발견되는 주된 특징은 분열이며, 이 분열의 변증법적 효과 속에서
실재계가 파악된다.
그러나 실재계와의 만남이 처음에는 달갑지 않은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로 이
때문에 실재계와 충동이 주체에게서 비슷하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 역시 우리를 보여지는 존재로 만드는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현상학의 한계를 헤쳐나갔다. 시선이란 보는 사람의 시선에 선행하는 발아라는 것의 은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가 가르쳐 준 대로
우리가 규정해야 할 것은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으로 보여진다. 여기에서 분열이란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접하게 되는 한계성을 의미한다. 응시는 시야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상징하며,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접하게 되는 경험, 즉 거세공포를
형성하는 결여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시선과 응시. 시각의 영역에 충동(drive)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시선과 응시의 분열이다.
응시(gaze) :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것-모방을 통해 응시를 이해할 수 있다.
세계는 모든 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에게 응시를 촉발시키지 않는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strangeness) 역시 시작된다. 이 말은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응시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응시가 볼 뿐만 아니라 '보여준다'는 사실도 사라져 버린다. 반면 꿈의 영역에서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응시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경험하는 응시는 거세공포에 의해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듯 바라보기만 하던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그래서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 게 하는 동인 즉 실재계에 난 구멍이 바로 응시인 것이다.
예를 들면, 사르트르가 말한 바대로 열쇠구멍을 통해 보는 남자가 어느 순간 (복도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의해 또는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깨닫고 놀라고 당황하여 수치심을 느끼는 그런 지점이다. 메를로
퐁티 역시 장갑을 예로 들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갑의 표면은 매끈하지만 그 속은 털이 있다. 인간의 손 또한 피부는 매끈하지만 그 위에 털이 나 있으므로 장갑과 손은 서로 반대이지만 장갑을 끼었을 때 장갑과 피부는
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본다. 이것을 시선과 응시의 관계를 비유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시각의 영역이 욕망의 영역에 연관될 때 비로소 욕망의 기능 속에서 응시가 갖게 되는
특권이 이해될 수 있다. 주체의 기능이 데카르트적 사유에 의해 가장 순수한 형태를
띠게 된 바로 그때 원근법에 반대되는 '평면광학(geometral or flat optics)'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시각이란 일반적으로 이미지의 기능에 따라 배열된다는 사실 즉, 이미지의 기능이란
공간 속에 있는 두 물체의 점대점 대응(point-to-point correspondence)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라캉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작품에서 주체의 소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외교관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책상 위에는 당대과학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놓여 있다. 그 당시 아그리파(Cornelius Agrippa)는 과학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목적으로 <지식의
공허함>을 썼다. 평면시각으로 볼 수 없는 물체, 공간과 욕망이 개입되어야 드러나는 이 물체는 그 위에 놓여진 과학의 상징물들을 허영이라고 비웃는 듯 하다.
이 책에 의하면 그림 속의
물체들은 그 당시 세 학문(trivium; 세 학문의 집합)과
네 학문(quadrivium;대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으로 분류되어 과학과 예술을 상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밑에 길쭉하게 누워있는 것은 정면에서 볼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으나 몸을 왼쪽으로 옮기며 돌아나가려다 힐끗 보면 그것이 해골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 물체가 처음부터 해골의 모습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발트루쇄티스는 그것을 오징어 뼈에 비유한다. 그러나 라캉은 그것을 노파의 비참하고 더러운 모습을 잘 나타내기 위해 달리(S. Dali)가 고의적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빵덩어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노파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그녀는 더욱 비참하고 더러워 보인다. 또 이 그림을 보면 전경에서 날고 있는 상태로 묘사된 물체의 의미보다 덜 성적이긴 하지만 달리가 그린 녹아내리는 시계(라캉에게 있어서 이 녹아내리는 시계는 '거세'를 상징하는 이미지이다)들을 연상시킨다.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기억의 고집> 역시 홀바인의 <대사들>처럼 이 공간개념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인다. 주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평면광학이 관심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당시에
홀바인은 주체의 소멸을 보여준다. 주체는 이미지로
구체화된 거세의 형태로 소멸되고 이것은 우리가 근본적인 충동들을 통해 욕망을
전체적으로 조직할 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시각의
기능을 따라가 보면 기이하게 왜곡된 길쭉한 형상(해골)은 남근의 상징인 변형된 유령이 아니라 이 그림에서처럼 살아 맥이 뛰는 듯한, 아찔한, 확장된 응시의 기능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그림들처럼 응시를 유혹하는 덫이다. 어느 그림에서나 응시의 각 점에서 응시를 찾는 바로 그 순간 응시가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평면적인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느끼는 이유는 단순한 시선(eye)을 넘어서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주체는 '사유하는 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바로 '욕망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왜 타자의 응시가 인식의 영역을 해체시키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욕망의 변증법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시각은 보기만 하는 시선(eye)이 아니라 보여짐(gaze)이 함께 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보여짐을 강조하는 것이 라캉의 욕망의 주체이다. 상상계 못지 않게
상징계를 강조하듯 그의 보여짐, 즉 '응시'가 대상을 허구화시키는 욕망의 동인(오브제 a)임을 보여준다.
과제
이상으로 정신분석학과 미술이란 주제 아래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훑어보았습니다만 여전히 개설에 불과합니다.
보다 심도있는 학습을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입문』,『꿈의 해석』,『토템과
터부』는 물론 자크 라캉의『에크리』를 비롯하여 허버트 마르쿠제의『문명과 에로스』, 에리히 프롬의『소유냐, 존재냐?』,『사랑의 기술』등을 독서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이 강의에서 다루지 못한 정신분석학자들 예컨대 칼 융의『사람과 상징』, 쥴리아 크리스테바의『사랑의 역사』를 비롯하여 빌헬름 라이히, 안나 프로이트, 멜라니 클라인 등의 기본관점에 대해서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강의노트는 황수영,「라캉:욕망과 성」(장영란 외 지음,『성과 사랑 그리고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자크 라캉『욕망이론』(권택영 엮음)을 기본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관심있는 학생은 위 도서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장영란 외 지음,『성과 사랑 그리고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 서광사, 1999.
자크 라캉,『욕망이론』, 권택영 엮음, 문예출판사, 1995권택영 엮음, 문예출판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