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1-18
찬송가 291장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
오늘부터 살필 책 룻기는 성경에서 둘뿐인 여자 이름을 제목으로 한 책 중 하나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경의 제목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예수님 족보에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룻과 그녀의 집 이야기를 담은 단 4장짜리 이 짧은 책이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룻기의 시대 배경은 우리가 어제까지 살핀 사사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사 시대가 얼마나 죄로 물든 암흑기였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 때 별이 가장 빛나고 태풍이 일어도 그 한 가운데의 눈은 아주 고요히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사 시대를 끝낼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룻기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중심의 두 시대,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 사이에 껴서 그 빛을 더욱 드러내는 책입니다.
성경학자들이 연구한 룻기의 기록 목적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룻기 묵상을 시작하며 우리나라 신학자 우병훈 교수의 해설을 소개합니다. 우병훈 교수는 자신의 책 ‘룻기, 상실에서 채움으로’에서 룻기의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의 기록 목적은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진 룻과 그 언약에 따른 ’사랑‘을 보여 준 보아스가 위기와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룻기입니다.’
앞으로 룻기를 살피며 칠흑같이 어두운 때에도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맡기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사람이 되어 세상의 룻기로 읽히기를 소망합니다. 룻기 시작은 이렇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고난(1-5절)
(1-2)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룻기의 막이 오릅니다. 사사란 문자적으로 재판관을 뜻하지만, 실제 사사는 전장의 지도자나 통치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첫 사사 옷니엘과 초기 사사들은 아니라도 마지막 사사 삼손에 이르렀을 때에 사사들은 결코 바른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죄로 물든 이스라엘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한편 이 말은 ‘사사들이 사사 노릇하던 때에’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즉, 룻기 기자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흰 도화지가 아닌 까만 도화지 위에 그려질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한 가정의 모습도 시대 풍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벗어나 이방 땅으로 이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 분배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기업을 잘 가꾸어 나갈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 사람들에게 기업은 자기 생계유지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땅이 살기 어려우면 이주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흉년을 이유로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1절 끝에 나온 ‘거류하다’는 ‘잠시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잠시 흉년을 피하려고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2절 끝은 이들이 거기서 살았다고 표현합니다. 아예 눌러 앉아버린 것입니다. 잠시가 장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일을 이 집의 집 가장 ‘엘리멜렉’이 주어로서 한 일임을 밝힙니다. 엘리멜렉의 이름에는 ‘나의 왕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답게 가정생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왕이 되어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이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명했던 모압 민족 속으로 가족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잠시 뒤 그에게 장기도 아닌 영원으로 남는 일이 됩니다.
게다가 엘리멜렉의 이런 행동은 가풍까지 바꾼 걸로 보입니다. 그의 아내 이름 ‘나오미’에는 ‘희락, 기쁨’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둘은 믿음의 가정에서 나고 자라 부부가 되어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 낳은 두 아들 이름이 특이합니다. 말론과 기룐. 이 이름에는 각각 ‘허약한 자, 병든 자’와 ‘파괴와 죽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분명 부모는 자녀 이름에 자기 신앙고백을 담습니다. 그런데 신앙인 부모가 자녀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두 이름은 가나안식 이름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자녀 이름을 이렇게 지어서 이른바 ‘액땜’을 하려 한 걸로 보입니다. 이름을 일부러 안 좋게 지어 장차 생길지 모르는 안 좋은 일을 막겠다는 시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그리 본받을 만한 신앙인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 엘리멜렉은 룻기에만 나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지 못한 인생의 한 표본으로 박제되었습니다. 엘리멜렉 입장에서 이는 시대 풍조 때문이라고 핑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택은 그가 했습니다. 버젓이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이 왕이 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나 자신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일의 파급력은 우리 상상 이상이고. 동시에 우리가 책임질 수 없을 만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분의 높고 지혜로우시며 전능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와 우리 가정을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모압에서 산 엘리멜렉의 가정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합니다.
(3-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엘리멜렉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압에 산 지 10년쯤 지났을 때 그 사이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이제 이 집에 남은 건 나오미와 두 며느리, 세 여자뿐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설교자는 이 부분을 해설하며 ‘불순종의 저주가 이만큼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걸 버리거나 떠나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것은 분명 성경에 나오는 원리입니다. 이를 신명기 사관이라고 합니다. 성경 역사서 중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이러한 사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엘리멜렉과 그의 집은 불순종의 저주를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놓쳐선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룻기가 1장 5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룻기는 4장 22절까지 이어집니다. 나아가 성경이 룻기 이후로 마흔여덟 권이 더 있음도 놓쳐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 이해와 고정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원인 있고 결과 있다는 인과율에 묶인 사고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결과가 있고 이에 따라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혹 내가 오늘 불순종했더라도, 최근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 같아도 좌절하지 마십시다.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과 환경, 그간의 결정들을 하나님의 크심을 더욱 신뢰하고 의뢰하는 계기로 삼으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 일 이후 가장이 된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의 행보가 이렇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6-14)
(6-7)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 귀에 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고향에 양식이 생겼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사사 시대가 배경이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듣고 사사를 일으켜 회복을 주신 때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두 며느리도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가던 중 나오미가 걸음을 멈춥니다.
(8-9a)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나오미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두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는 그간 자신이 받은 두 며느리의 정성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정의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선대한 것’이라고 번역한 이 말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곧 분에 넘치는 사랑이고 선을 넘어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를 표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들을 앞으로 이렇게 대해주시기를 구하며 축복까지 합니다. 이렇게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아끼고 사랑해 집으로 돌아가라 권한 건 그녀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미 앞서 10여 년을 타국인으로 지내봤기에 두 며느리가 이스라엘로 갔을 때 처할 상황을 잘 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결정은 그녀의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나오미는 빈털터리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한 가정의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사람의 노동력’이었고 특히 남자들이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오미의 집에 남자는 없습니다. 게다가 뒤에 나오지만, 나오미는 더는 재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증이 여기는 모압인 두 며느리는 그녀에게 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호기롭게 고향을 나섰다가 빈손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간 멋쩍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혹을 붙여 돌아가니 짐짓 사람들 시선이 두렵습니다. 더욱이 두 며느리가 모압에 남으면 이들은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모스는 인신 공양을 받는 우상입니다. 나오미는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그 둘을 떼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처음 두 며느리는 나오미의 제안에 눈물을 흘리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재차 제안하자 먼저 결정한 사람은 첫째 며느리 오르바였습니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나오미에게 작별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도리어 그녀를 붙좇았습니다. 여기서 ‘붙좇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브카’는 ‘매달리다’ ‘바짝 붙다’ ‘감정으로 묶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그녀를 더 세게 움켜 안았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 나오미는 진심 어린 사랑과 감추어둔 이기심으로 한 번 더 이별을 통보했지만 룻은 자신의 결심을 이렇게 밝힙니다.
나오미와 함께 가는 룻(15-18)
(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나오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표현하며 자기 결정이 신앙적 결단임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뜻하는 말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이 신앙적 결단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룻은 자신이 나오미를 따르지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겠다며 목숨을 걸었습니다. 분명 룻도 알았을 것입니다. 나오미를 따라가면 앞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그녀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셔야 하며, 새 남편은 꿈도 꾸지 못하고, 이방인이라 차별과 냉대받을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룻은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선택합니다. 이때 룻이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 시어머니에게 보고 배운 게 있었기 때문이겠습니까. 물론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은 그모스와 다르다는 건 알았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결심 크기가 남다릅니다. 그렇다면 룻이 보통 범인과는 다른 신앙 영재, 될성부른 떡잎이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앞서 하나님의 지혜와 일하심은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룻의 이해할 수 없는 결단도 하나님 관점으로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 하나님이 룻의 마음에 자기 헤세드 사랑을 나눠 주신 건 아닐까요. 10여 전 룻이 그녀에게는 이방인인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 할 때부터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선택한 작은 결단과 믿음을 보고, 하나님 헤세드의 사랑 통로로 계속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가 빌어주기 전 이미 하나님께 헤세드 사랑을 넘치게 받았고, 지금 그 사랑을 시모에게 흘리는 건 아닐까요.
이 역시 성경이 룻의 심정과 그녀 삶의 이력을 말하지 않기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외에 룻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할 근거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 그렇다면 이러한 룻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우리도 분명 작은 믿음의 반응을 주님께 보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새벽 묵상 자리에 나온 것도 그 한 예입니다. 이때 우리의 이런 작은 모습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가 보이고 드린 것 이상을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록 못난 신앙인, 넘어지는 신앙인, 자주 고갤 돌리는 신앙인 일지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자로, 그렇게 헤세드 사랑으로 우리 안을 가득 채운 자로 이미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룻처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걷겠습니다. 그렇게 우릴 향한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께 가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룻의 반응에 나오미는 말하기를 그칩니다. 룻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 닥칠 수치에 대한 걱정으로 다문 입술 끝이 아래로 향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나오미에게 혹이 아닌 복을 단 일임을 압니다. 결코 나오미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녀를 붙들고 놓지 않아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오미를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로 놓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처럼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시고야 마는 이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나아가 우릴 통해 헤세드 사랑을 세상에 나누고 먹이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주님의 사람, 주님의 제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크고 높은 하나님을 헤아려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대에 하나님은 자기 빛을 세상에 띄울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집을 주목하셨고, 그 집에 룻을 보내셨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이 죄로 물든 이스라엘을, 고난에 빠진 나오미를, 외로운 이방인 룻을 그리고 오늘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기 사랑을 전부 부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우리도 받은 사랑을 세상에 기꺼이 흘리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의 유사점은 무엇인가요?
2.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때 엘리멜렉처럼 내가 왕이 되어 선택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 방법은 무엇일까요?
3. 우리는 죄 중에 거할 수밖에 없음에도 우리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 룻이 자신도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울러 오늘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할지 묵상해보세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