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지의 안부
이 경 숙
골목길 어느 집 담장을 넘어 온 감나무에 잘 익은 주황색 감들이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도 예뻐서 길 가다 말고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곁을 지나가는 트럭 운전사가 문을 내리더니 그래서 떨어지겠느냐고 입을 벌리고 드러누워 있어야지요 하고 농담을 하며 지나간다. 감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감은 저리 탐스럽고 큰 대봉시가 아니고 작고 동그란 산골 마을의 토종감으로 떫어서 뜨거운 물에 우려야하는 월하감을 좋아한다.
딱딱하게 잘 익은 떫은 월하감을 따서 항아리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은 뒤 이불을 덮어 보온하여 하룻밤을 두면 아침에 타닌이 빠져 달달한 감이 된다. 크고 탐스러운 대봉감의 홍시도 달지만, 그와는 다른 단맛과 아삭한 식감이 더없이 좋다. 요즘은 주로 개량된 감나무들을 많이 심지만,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모두 월하 감나무뿐이었다. 6.25 사변을 겪으면서 할아버지는 얼마나 놀라셨는지 전방 근처인 고향 양구를 떠나 피난지였던 속리산 화전마을에 터를 잡으셨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모두 도시에 살았지만,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면서 조부모님께 맡겨진 나는 갓 돌이 지나면서 오지의 시골아이가 되었다.
다른 과일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고도가 높은 지역이어서 그랬을까? 할아버지는 감나무를 여러 그루 심으셨다. 고욤나무의 밑동을 사선으로 자르고 거기에다 감나무 어린 가지를 접붙이던 모습이 신기해서, 그러면 고욤이 아니고 감이 달리냐고 묻고 또 묻고 하던 유년의 오랜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렇게 감나무는 마당 끝에도, 뒷밭 둑에도, 개울가에도 여기저기 심어져 우리 집은 감나무 집이 되었다. 일하시다가 밭둑가에서 참을 드시는 할아버지의 그늘이 되어주기도 하고, 나의 놀이터이자 친구가 되었다. 노랗게 감꽃이 떨어지는 초여름이면 꽃들을 주워서 목걸이도 만들고 소꿉놀이의 밥도 되어 우리 친구들의 간식도 되곤 했다. 큰 감잎들 속에는 그 아래서 노는 우리 친구들 웃음소리만큼이나 조잘조잘 새 떼들이 몰려와서 살았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감들이 저 아랫동네에서 올라오다 보면, 우리 집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곤 했다. 늦가을이 되면 감들을 모두 따서 항아리 속에 볏짚을 한 켜 한 켜 놓으며 저장해놓고 눈 내리는 저녁이면 아랫목에 모여 우리 가족들은 꽁꽁 언 홍시를 녹여 먹곤 했다. 나의 유년은 마당 입구의 감나무 아래에서 울고 웃으며 나무와 함께 소녀가 되고 숙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감나무를 떠났다. 이따금 다니러 가는 그 오지에는 더 높이 높이 키가 큰 감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앉았다가 떠나 올 뿐이어도 감나무는 말없이 나를 기다리고 반겨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둘이 가서 앉아도, 엄마가 되고 셋이 되어 찾아가도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주던 감나무, 할아버지가 떠나시던 그 봄에도 감나무는 여전히 움을 틔우고 말없이 슬픔에 젖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혼자 훌쩍 찾아가 앉아도 왜 혼자 왔는지, 얼굴이 어두워도 묻지 않는 나무 아래서 난 늘 위로받고 할아버지를 맘껏 그리워하다가 또다시 그 빈 집에 홀로 감나무를 세워두고 떠나오곤 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그곳을 떠났다. 빈집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키 큰 감나무뿐이었다. 찾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기다리며 감나무는 봄이면 움트고 나의 목걸이가 되었던 꽃을 노랗게 뿌려도 아무도 돌보지 않았지만, 새색시 볼 같은 작은 열매를 맺고 저 홀로 익어가기를 반복했다. 녹슬어 허물어지는 헌 집은 주인의 체온을 잃은 지 오래지만, 주인을 기다리며 제 소임을 다하듯….
언제부터인가 가을이면 어디서든 남의 집 감나무를 만날 때마다 난 그 오지에 두고 온 나의 감나무를 떠올리게 되고, 나무가 나에게 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은 마음이 먼저 달려가 앉았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지 40여 년, 언젠가는 나 역시 영영 찾아가지 못하는 날이 와도 나의 감나무는 그때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천천히 늙어가며 안부를 물어주는 또 하나의 가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쓸쓸한 날도 많았지만 인내하고 살았던 날들이 버팀목이 되었듯이, 나무도 비바람에 패인 옹이로 가슴속에 아름다운 나이테를 만들며 늘 기다려주었다. 내가 살아낸 그 날들의 이야기를 다 품고 있는 나의 또 다른 가족, 감나무는 어쩌면 나와 함께 긴 세월을 같이 살았던 것일까. 나에게 누가 그처럼 묵묵히 기다려주고 안부를 물어줄까? 그 오지 언덕의 삭풍을 견디며 말이다.
이제는 손에 닿은 가지가 하나도 없는 키다리 감나무는 올해도 노구를 이끌고 한껏 제 소임을 다하고, 작은 웅덩이 개울가에 힘든 제 그림자를 씻는다. 수북이 쌓인 마른 감잎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뒤척이다 마른 풀숲에 편지처럼 꽂히며 서걱서걱 가을이 깊어간다.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미래를 어루만지는 사람
부탄이라는 나라는 내게 늘 궁금한 나라 중에 1위에 꼽힌 나라였다. 전세계에서 국민의 행복 지수가 1위라는 뉴스에 자주 올라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개발되지 않은 천혜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볼 때마다 언젠가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늘 부탄이 배경이 되는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챙겨보는 편이었는데, 우연히 접한 오늘의 영화를 보고 오랜만에 내 마음도 정화되는 가슴 뭉클한 시간을 만났다.
<교실 안의 야크>라는 영화는 해발고도가 높은 부탄에서도 해발 4,800m의 오지 루나나 마을에 부임한 한 신입 초등학교 교사의 이야기다 주인공 유겐은 할머니와 살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교사가 되었지만 자기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의 시간을 보낸다.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유겐의 꿈은 호주의 도시로 가서 가수가 되는 것을 꿈꾸지만 교사로서 계약기간이 남아있어 할 수 없이 오지 중에 오지 마을로 부임하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 며칠을 야영하며 걸어서 가야 하는 산골 마을에 촌장님은 선생님을 모셔오라고 마을 청년을 보내고, 유겐은 툴툴거리며 힘든 산길을 며칠을 걸어 오지 학교로 간다. 마을 사람 전부가 56명밖에 되지 많은 마을, 마을 사람들은 두 시간이나 걸리는 마을 어귀로 먼 길을 마중 나와서 양쪽으로 늘어서며 어린 선생님을 맞이한다. 칠판도 없고 종이도 없는 열악한 학교 사정에도 열 명도 되지 않은 아이들은 새로 부임한 선생님에 무한 애정을 보내고, 유겐은 흙벽을 칠판 삼아 가르치고 종이가 부족한 아이들에게 사택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발라준 창호지를 뜯어서 공책으로 쓴다. 마을 주민들은 주로 야크를 키우고 야크의 배설물로 불쏘시개를 한다. 어렵게 적응하려는 유겐에게 교실에 야크를 매어주어 배설물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유겐도 자신이 원치 않은 환경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 속에서 마을과 동화되어 학교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간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유겐은 설산 아래 마을에서 야크를 키우며 아름다운 야크의 노래를 부르는 한 아가씨의 모습과 노래에 매혹되어 그 노래를 배우며 적응하는 듯하였으나 자신의 꿈을 버리지 못한 유겐은 호주 이민 허가서를 받게 되고 한 학기가 끝나고 루나나를 떠난다. 자신들의 미래를 버리고 떠나는 선생님을 원망할 만도 하지만 맑고 아름다운 설산 언덕 위의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은 유겐이 그 마을에 부임해 오던 날처럼 두 시간을 걸어서 배웅한다. 그렇게 유겐은 부탄을 떠나 호주의 어느 술집에서 가수가 되어 흘러간 팝송을 부르는 가수가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이야기와 흥에 빠져 유겐의 노래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회의를 느낀 유겐은 부르던 노래를 중단하고 루나나 마을에서 배운 야크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 자신이 진정 그리워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깨닫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실제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부탄의 오지 마을에서 촬영했다는 풍경은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꼬질꼬질한 옷소매의 반들반들 코 묻은 아이들의 순박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들을 보면서 어릴 적 나의 모습과 닮아서 더 오래 여운이 남았을 것이다.
내 어린 날의 모교에도 첫 부임지로 오신 젊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버스에서 내려 먼지 나는 신작로를 한 시간 이상 걸어와야 하는 오지의 학교에 처음 오신 선생님들은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는 미래이고 도시와 오지를 이어주는 매개이기도 한 유일한 통로 역할을 했다. 그런 나의 선생님에게도 임용 후 첫 부임지의 아이들은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면서 최근까지도 수십 년 동안 간직하고 계시던 사진을 복사해서 나눠 주시기도 하셨다.
영화에서 선생 유겐은 아이들에게 장래 꿈이 무엇인지 한 명씩 물어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중에 어떤 어린이가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를 묻자, 그 어린아이는 “교사는 아이들의 미래를 어루만지는 직업이니까요!”라고 대답한다. 방황하는 교사도 그 대답에 숙연해지고 먼 나라 오지에서 수십 년 전 같은 환경에서 자랐던 내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 대답이었다. 부모님 다음으로 세상에서 제일 처음 만났던 어른, 선생님의 가르침은 나의 미래에 얼마나 많은 삶의 초석이 되었고 진리의 상징이었던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교사의 권익에 대한 작금의 세태들을 보면서 세대 차이를 떠나 나의 어린 시절은 해발 4,800m 부탄의 오지에서나 추억할 정도로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제는 그런 오지가 없듯이 그 순수한 눈동자들이 없는 것일까? 그런 아이들의 미래를 어루만지는 선생님이 없는 것일까?
풀 속의 제비꽃 같고 민들레 홀씨 같았던 그 여린 영혼들이 남아있는 학교가 더는 아니듯, 학생도 선생님도 학부모도 다 쓰러져버린 갈대처럼 서걱이는 뉴스가 서글픔을 준다.
오늘날 그들에게 진정 미래를 어루만져 주는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 영화를 보면서 새삼 생각해 본다.
안단테
진 재 훈
스웨덴 4인조 혼성 그룹 아바(ABBA)가 부른 ‘안단테(Andante)’라는 노래를 들으며 출근길에 나선다. 여행 마지막 날 들려준 노래인데 가사와 멜로디가 너무 좋아 지금도 즐겨 듣는다.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린 10박 11일의 유럽 여행은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내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앞만 보고 빠르게 달려온 삶을 조금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과연 해외에 나갈 수 있을까 했는데, 막상 공항에 나가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여행객들로 북새통이다. 처음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망설였으나 더 늦기 전에 다녀오기로 용기를 내 출발한 유럽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지는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독일 등 6개국을 다녀오는 코스였다. 긴 비행시간과 빡빡한 일정이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니 걱정보다는 설렘으로 들떴다. 오랜만의 해외 나들이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기대를 안고 여행길에 나섰다.
유럽 여행 일정은 대부분이 성과 교회 그리고 광장 및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처음에는 호기심을 갖고 집중하지만, 나중에는 서로 비슷비슷한 모습에 식상할 수도 있다.
여행 첫째 날, 체코를 방문해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성당 그리고 카를교를 다녀왔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관광객들로 무척 붐볐다. 성당 앞에서 정신없이 사진 촬영을 하던 중 옆에 있던 예쁜 금발머리 아가씨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순간 머릿속에 항상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말이 생각나 못 들은 척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의의 부탁을 할 수도 있는 것인데, 소인배 행동을 한 것 같아 조금은 낯이 부끄러웠다.
광장을 나와 사전 예약한 엔틱 카를 타고 시내 구경을 하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시민 중 우리가 타고 있던 고급 차를 부러운 듯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 통에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쭐했다. 80m 쌍둥이 첨탑이 인상적인 틴 교회에서 사진도 찍고 천문시계탑 근처 길거리 음식으로 그 유명하다는 굴뚝 빵도 먹어봤다. 야간에 카렐교에서 강물에 드리운 불빛과 프라하 시내 야경을 보며 이국적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지만, 왠지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체코가 보헤미안이라는 집시를 연상시키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식사 때 반주로 마신 흑맥주는 맥주의 나라답게 술 못하는 아내도 인정할 만큼 깔끔한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날, 음악과 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비엔나 관광을 했다. 프랑스 베르사이유에 비견되는 궁전을 갖고 싶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건설한 쇤부른 궁전과 미술관으로 유명한 벨베데레 궁전을 관람했는데, 그중에 특히 벨베데레에 전시된 구스타프 크림트 작가의 ‘키스’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품에 안겨 넋 나간 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여인의 모습이 강렬한 금빛 채색과 다르게 몽환적으로 보였다. 이 그림은 절대 외부 반출이 되지 않아 작품을 보려면 꼭 이곳을 방문해야 한다고 하니, 오스트리아 국민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셋째 날,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헝가리로 가는 길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의 옥수수밭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이곳이 농업국가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부다 왕궁, 어부의 요새, 세체니 다리, 영웅광장을 차례로 구경했다. 저녁 즈음 헝가리에서 유명하다는 장미 아이스크림도 맛봤다. 명성만큼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고객이 원하는 색으로 순식간에 장미꽃처럼 만들어 줘 마치 요술을 부리는 듯 신기했다.
저녁 식사 후, 헝가리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도나우강에 있는 유람선을 타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감상했다. 2019년 대형 크루즈 여객선과 충돌하는 참사가 발생해 우리나라에서 온 많은 관광객이 희생됐던 곳이나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강물만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다음날은 크로아티아로 넘어가 플로트비체 국립공원을 보러 가는 날이다. 북쪽 끝 독일에서 계속 남쪽으로 이동해 아드리아해를 낀 크로아티아로 넘어오니 이곳은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한다. 플로트비체 호수는 TV에 수없이 소개된 곳이라 낯설지 않았다. 물 색깔이 어쩌면 그렇게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띠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다음날 로마 시대 건축물을 잘 간직한 자다르, 스플리트를 관광했다. 이 도시들은 로마 유적지 내에 사람들이 직접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꽃보다 누나’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배우 김희애가 사 먹었다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찾았다. 때마침 인근 바닷가에 대형 크루즈 여객선이 도착해 수많은 관광객을 쏟아내자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배에서 내린 관광객 대부분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연로한 관광객들이 많았다.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닌, 가슴이 뛸 때 다녀야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크로아티아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드브르브니크였다. 성에 둘러 쌓인 주택의 주황색 지붕과 코발트색에 가까운 아드리아 해의 바다 색깔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멋진 풍광을 만들어 내어, 왜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유람선으로 성벽을 한 바퀴 도는데 특이하게 나체주의자들이 성 아래 바닷가에서 알몸으로 수영을 하고 한켠에서는 절벽 위 카페에서 술과 음료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함께 있어 기분이 묘했다. 구시가지 중심 거리를 걷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았는지 돌길 바닥 면이 마치 유리알처럼 매끄럽다.
8일째 되는 날은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 수도인 류블레냐 성과 블레드 섬을 관광하는 날이다.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이 내전으로 서로 원수가 되어 살상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전쟁으로 가족과 친지를 모두 잃고 홀로 된 어느 노인의 깊게 팬 주름과 그늘진 눈망울에서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비교적 따뜻했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며 알프스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로 향하는 날에는 비가 내려 더 을씨년스러웠다. 차창 밖으로 오두막 같은 농장과 자유로이 풀을 뜯는 소 떼들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이국적 느낌을 더해줬다. 이곳에서 자연 방목한 소가 제공하는 신선한 우유를 매일 아침마다 자판기에서 커피처럼 마실 수 있다니 무척 부러웠다.
다음 날 다시 오스트리아로 이동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찰츠캄머굿을 구경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흰 눈이 쌓인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모차르트 어머니의 고향인 길겐 시내와 볼프강 호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하산 후 호수 유람선 투어를 마치고 근처 커피숍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하니, 온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하면 비엔나 커피를 떠올리지만 정작 이곳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고 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유명한 찰츠부르크 시내에 있는 미라벨 정원과 거리 관광을 했다. 미라벨 정원은 실제 와서 보니 영화보다 더 아름다웠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생가와 레지던츠 광장 및 케트라이데 거리를 둘러보는데 상점을 안내하는 표지판만 보면 어떤 물건을 파는 가게인지 식별이 가도록 그림으로 표기한 것이 참 독특해 보였다. 또한 건물들은 옆 건물과 서로 연이어 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는데, 전쟁 시 성벽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러하다 하니 그들의 실용적 지혜가 돋보였다.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를 봤다. 70년대 말 학창 시절 때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촬영지를 둘러본 후 영화의 감동은 전혀 달랐다.
호텔에 도착해 일행들과 각자 가져온 음식을 모두 꺼내 조촐한 파티를 하며 여행 마지막 밤 아쉬움을 달랬다.
마지막 날은 독일 로텐부르크를 관광하는 날이다. 독일어로 ‘부르크’는 성(城)이라는 뜻이라 하는데 그래서인지 찰츠부르크, 아우스부르크, 퀸즈부르크 등 그런 도시 지명이 많았다. 성 안에 들어서니, 마치 중세의 어느 도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듯 착각을 일으켰다. ‘브르조아’가 성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얘기와 성 안과 밖이 신분을 가르는 경계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고딕양식으로 190년에 걸쳐 건축된 성 야콥 교회 및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크리스마스 용품을 파는 가게 그리고 시 청사 등을 둘러보았다. 이 성이 잘 보전된 것은 과거 유럽의 30년 전쟁 당시 이곳 시장이 상대편 장군의 무리한 포도주 시음 제안을 목숨 바쳐 지켜 냄으로써 도시 파괴를 막았다고 한다.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행태를 생각하며 로덴부르크 시장의 용기가 더 존경스러워진다.
귀국하는 날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출국 수속이 워낙 까다롭기로 소문나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그동안의 11박 10일의 동유럽 여행에 대하여 가이드가 소회를 얘기하며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사건 없이 여행을 잘 마무리한 유일한 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출국장 검색대를 나서는 시간, 가이드 말 대로 몸수색이 철저했다. 거의 신체 부위 전체를 마사지하듯 검색하는데 조금은 불쾌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해프닝은 나에게서 비롯됐다.
검색대에서 모든 짐 검사 및 검문 검색을 통과해 내 소지품을 찾으려 하는데 먼저 나간 아내가 내 소지품을 모두 챙겼으니 얼른 나오라고 해서 무심코 비행기 탑승수속을 하려는 순간, 호주머니에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출국장 앞 커피숍에서 분실한 것이 아닌지 생각되어 밖으로 다시 나가려 했으나 쉽게 허락되지 않았고, 나가서 다시 들어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간신히 지갑을 되찾고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지만 지금 생각해도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것처럼 아찔했다.
우여곡절 끝에 10박 11일간의 동유럽 6개국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퇴직 기념으로 동유럽 여행이나 다녀오자는 아내의 제안이 솔직히 처음엔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14시간 이상 장시간 비행도 걱정되었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종일 걸어야 하는 일정도 그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릎관절이 좋지 않은 아내가 걱정돼 나로서는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몇 날을 고민 끝에 결국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난 어떤 해외여행과 다르게 더 많은 추억과 여운을 남겨 주었다.
이번 여행은 경주마처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내게 이제는 주변을 더 돌아보며 살라는 가르침을 준다.
‘안단테(Andante)’ 노래 가사처럼 천천히, slow, slow 하며…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22), jhj43211@naver.com
앨범 속에서
김 정 자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변하는 것들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보면 세파에 시달려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에 가보면 무상함을 실감한다.
장에 간 엄마를 마중했던 느티나무 이파리와 아버지의 손과 흙으로 지어진 흙담도 흔적이 없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인 것은 집 정리를 하면서, 두터운 겨울옷을 정리하다가 창고 귀퉁이에서 발견한 앨범 속에 고향집도 있고 아버지 엄마도 계셨다. 앨범을 정리하다 보니 오랜 가뭄에 갈라지는 가슴과 무언가 간절하게 바라는 얼굴, 그리고 거친 손등을 천천히 들여다보니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가을 운동회 날 달리기를 마친 자식들을 먹이고 싶어 아껴 놓았던 찹쌀로 밥을 지어 삶은 계란, 환타 등을 가지고 와서 동네 어른들과 같이 먹던 흔적들도 있다. 팔에 일등 도장을 찍고 온 딸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아저씨에게 꼬깃한 돈을 꺼내 주면서 찍은 사진을 보니 가슴이 아련해 온다.
사진은 색이 바래고 흠집이 있지만, 엄마의 모습은 내가 어릴 적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앨범 속에서 지나간 세월을 하나씩 풀어 놓았다. 내가 이십 대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사십 년 넘게 살면서 남편과의 불화나 어려웠던 흔적도 없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아들의 첫돌 때,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앞에 놓고 찍은 사진 속에는 돌잡이에 아들의 장래 희망에 기대도 했다. 여름휴가에 물속에서 아들과 포도를 먹고 물장구를 치며 놀던 젊은 엄마는 한껏 멋을 내기 위해 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폼을 잡고 서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그리운 형상들이 앨범 속에 남아 있어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애틋하고 소중한 순간들이다.
낡은 앨범이지만 기억을 회복시켜주고 그 기억을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는 망각의 위해서도 너무 소중한 것이다.
이제는 앨범 속의 주인들이 내 곁을 떠나고 없지만, 그동안 나누었고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기록하고 나만의 의미가 담긴 소중한 물건이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사진들을 분리해서 ‘아들 사진은 아들에게 전해주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은 소중하게 간직하자’ 하고 남겨진 조각 사진을 한 장씩 눈에 담았다. 세월 따라 날씨 따라 사진은 군데군데 흠집이 났고 앨범 겉은 헐고 낡았다. 하지만 사진에 묻힌 기억만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때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변치 않을 것이다.
두 아들을 포도가 한창일 때 낳아서 그런지 포도를 유난히 좋아한다. 까만 포도알이 달린 포도밭을 보면 행복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처럼 젊은 내 눈에 참으로 흐뭇했다, 가끔 내 마음속에 달콤하고 상큼한 포도알처럼 알찬 결실의 인생을 그려본다.
요즘 세상 바라보는 인식은 평소 사고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지만 이럴 때 앨범 속의 추억들을 꺼내 보면 그 추억의 힘이 생긴다. 자연은 늘 한결같고 나무는 한 뼘 더 자라 든든해지며 꽃들은 제 몫을 다하다 보니, 그럭저럭 여름이 올 것이다.
저녁 준비를 하려다 보니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 왠지 혼자라는 생각에 쓸쓸하다. 앨범 속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어디에선가 들리는 듯해서 밖을 보니 오월의 장미 향기에 추억도 함께 실려 온다. 젊을 때 꾸었던 꿈도, 우아한 노후를 기대했던 것들도 세월에 내려놓고 빛바랜 사진 속에서 행복을 찾아본 오후였다.
※ 충남 금산 출생, 동서문학상(2010), 대전문협 올해의 작가상(2022), 수필집 『그랬구나』, 『새참』등, kim-qhfma@hanmail.net
잊고 지냈던 그 아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충남 금산에서 대전으로 전학을 왔다.
시골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단발머리에 고무신을 신은 어린아이는 도시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가서도 같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움츠리고 있었다.
그때 집주인 딸이 마침 나이가 같았고 같은 학교에 같은 반이 되었다. 참 다행이란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 아이는 한 번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등 하교 때에도 같이 다닌 적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집주인 딸로서 촌티 나고 셋방살이하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리라는 것은 나의 바람뿐이었다. 그 아이 엄마도 나를 딸 친구라고 부르지 않고 셋방 사는 애, 아니면 그 아이라고 불렀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고 같이 대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늘 따로 다니는 광경을 바라보는 나의 엄마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더 화가 나서, 그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아이와 가까워지자는 각오가 생겼다. 그 후로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으로 그 아이를 이겼고 담임 선생님께 칭찬을 받게 되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도 다른 아이보다 더 높이 뛰고 삔 따먹기를 할 때도 악착같이 삔을 많이 따서 그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그 아이와 가까워지면서 시골 촌티도 벗어내고 졸업 때가 되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아침에 단발머리를 곱게 빗고 교복을 예쁘게 입고 대문을 나서는 그 아이를 볼 때면 부럽기도 하고 교복이라도 입어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친구들이 중학교 다닐 때 나는 직물 공장에서 주야 2교대로 일을 하면서 늘 교복 입고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 월급을 받아 양장점에서 교복 치마만 내 몸에 맞게 맞추어 입고 중학생처럼 다녔다.
나에게 외출복이란 교복 치마와 낡은 티셔츠뿐이었고. 성인 버스요금을 내기가 아까워 학생 승차권을 내다가 학생증을 보여 달라는 안내양에게 창피를 당한 적도 있었다.
가끔은 주인집 아이와 같이 다닐 때면 그 아이 학생증만 보여주고 같이 학생인 양 묻어갔다.
그러다가 일 년이 지난 후 그렇게 가고 싶었던 중학교에 진학하고, 학교가 정해준 교복을 입고 다니며 폼을 잡았다. 그 아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나는 그 아이보다 일 년 늦게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가끔 아이의 고등학교 교복을 빌려 달라고 해서 또다시 고등학생 행세를 하면서 입고 다녔다. 그 친구는 가끔은 교복을 벗고 외출복을 입고, 외출할 때도 너무 예뻐 나의 질투 대상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 친구의 외출복을 빌려 입고 외출을 했다가 그 아이 엄마한테 많이 혼났고 같이 놀지도 못 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후로 그 아이를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 때문에 어른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우리 엄마는 자존심을 견디다 못하고 그 집에서 이사를 갔다. 그 뒤로 그 아이와는 소식이 끊기고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몸에 딱 맞는 고등학교 교복을 예쁘게 입은 것을 그 친구 엄마에게 보여주며 나도 고등학생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쉽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나의 가장 어려웠던 유년 시절, 나를 중학생처럼 변장을 시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이 다니며 꿈을 키웠던 그 아이를 어느 날 문득 빛바랜 사진을 정리하다 생각이 났고 많이 궁금했다. 그 아이도 지금 어디선가 나처럼 늙어 가겠지? 사진 속에 추억을 엮어 틈틈이 글을 써 놓고 작년 12월에 “새참”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집을 냈다. 많은 분의 축하와 격려가 있었고 가장 놀라운 것은 얼마 전 집주인 딸아이였던 그 아이가 내 책을 보고 연락이 왔다.
촌티가 나고 중학교도 제때 다니지 못했던 아이였는데 어떻게 수필집까지 냈을까? 혹시 그 아이가 아니고 동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연락한 것이라고 했다.
너무 놀랐고 반가워서 당장 만나자고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 아이는 같은 대전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 아이와 약속을 하고 보니 우선 무슨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그것부터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보내야 되나, 맘이 설레고 급했다. 옷장을 뒤져봐도 마땅히 입을 옷이 없어서 새 옷을 사서 걸어 놓고 신발도 옷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깨끗이 닦아 놓았다. 거리엔 봄꽃들이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듯이 부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한껏 멋을 내고 나갔지만, 그 아이도 나도 별수 없는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서 금방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잊지 않고 간직해온 추억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몸을 한참을 놓지 못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 아이도 좋은 남편을 만나 건강하게 살면서 아들, 딸 결혼 시키고 지금은 별 어려움 없이 잘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중학교에 갈 때 나는 공장 작업복을 입고 같이 대문을 나설 때면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평등하게 늙어 감을 알았다. 지금껏 나는 그 아이에게 고맙고 미안함도 많았고 한 번도 친구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평생 함께할 보약 같은 친구가 되겠다. 서로 어찌 살았는지 묻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다 보니 나의 인생도 비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쓰러지기도 하고, 수없이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검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고 파도를 넘고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있었다.
너구리 굴
오 월 석
마나스 공항에 내리니 희뿌연 연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숨을 쉬니 케케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떻게 이렇게 공해가 심한 도시에서 살 수가 있지?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는 높이가 30미터쯤 되어 보이는 백양나무가 도로의 양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두툼한 눈이 온 도시를 덮어버렸다. 7일 동안 이런 도시에서 지내야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나는 1월 2023년 1월 12일 밤 10시에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의 한 호텔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오늘 아침 3시 30분에 일어나서 장장 17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한국과 키르기스스탄 간 직항이 없어지는 바람에 인천공항에서 6시간 30분 날아서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항에 도착한 뒤, 공항 로비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갈아타고 1시간을 날아가서야 키르기스스탄 마나스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의 긴 여정을 곱씹어 보며 호텔 9층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도시의 붉은 네온사인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공해가 심해서 가시거리가 100미터도 안 되는 듯했다. 술탄이란 친구에게 듣자 하니 비슈케크는 세계에서 제일 공해가 심한 도시라고 한다.
1990년대 초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카페의 구석진 방에서 음료수를 마셨는데 좀 껄렁대는 친구들이 담배를 피웠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당시 좁은 공간에서 친구들 여러 명이 담배를 피웠고 환기 시설이 없으니 완전히 너구리굴 같았다. ‘너구리굴’이라는 말은 옛날에 사냥꾼이 너구리나 오소리를 잡을 때 굴에 연기를 피워 숨을 못 쉬고 나올 때 잡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인 듯하다. 그 시절 나는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처럼 너구리굴을 나가지 않고 버티며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그때는 남자들도 여자들만큼이나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 가끔 친구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에 1박 2일로 놀러 갔었다. 커다란 사랑방에서 카세트로 디스코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추는 친구들, 나와 친구 한 명은 방구석쟁이에서 후레쉬를 흔들고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면서 지금의 나이트클럽의 화려한 조명을 만들었었다. 당연히 그 사랑방도 너구리굴이 되었었다. 담배와 술을 마시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간접흡연을 하면서도 즐거웠었다. 지금은 그 당시 함께했던 친구들과 대소사가 있을 때만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가는 곳마다 너구리굴을 만났다. 철이 없던 그 시절을 이곳 키르기스스탄에서 회상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곳은 정말 너무도 큰 너구리굴이었다.
나는 1년 만에 다시 키르기스스탄을 찾았다. 올 7월에 인천공항과 비슈케크 마나스 공항 간 직항이 생겼다고 한다. 왕복 비행기 삯이 80만 원 정도 되고 비행시간은 7시간 걸린다. 작년에 비해 좋은 조건이 항공편이 있었지만, 일정이 안 맞아서 다시 17시간을 이동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한국과의 시차가 3시간이라서 적응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이 아침 7시면 이곳은 새벽 4시가 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출발 하루 전에 잠을 잘못 자는 바람에 목이 아파서 비행기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자면 머리가 쳐져 목이 아팠기 때문이다. 나는 목이 아픈 상황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아 그 동안 집에서 읽기를 미뤄왔던 500페이지 정도 되는 책 ≪위대한 유대인 100명≫을 다 읽었다. 간혹 졸기는 했지만, 목이 아파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마나스 공항에 도착하니 저녁 10시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1시였다. 다행인 것은 예전에 비해 공기가 최악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눈도 내려있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가니 이번에 잡은 호텔은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3층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야 했다. 17시간 긴 여정이 끝나니 몸의 온갖 근육들이 만유인력에 의해 아래로 쳐지고, 몸도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비상약으로 가져온 종합감기약 1알과 항생제 1알을 스스로 처방하여 먹고 침대에 누웠다. 평소에도 잘 자는 편인데 오늘은 떡실신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첫인상은 공해 때문에 좋지 않았지만 두 번째 와보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사람의 만남도 첫인상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좋아지게 되는 사람이 있다. 내게 키르기스스탄은 그런 나라에 속한다. 비행기에서 읽은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대인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지적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나도 나이가 지천명(知天命)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처럼 다방면에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행사를 주최한 유니코스 대표인 누르술탄과 그의 친구 엘란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내 질문에 귀찮기도 했겠지만 성실하게 알려주었다.
키르기스스탄은 1867년 제정러시아의 지배로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1926년 키르기스자치공화국, 1936년 키르기스스탄공화국을 거쳐 1991년 8월 31일 독립선언을 했고 그해 12월에 승인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해체로 키르기스스탄공화국이 되었다. 인구는 674만 명이고, 수도 비슈케크에 200만 명이 살고 있다. 국가 면적은 1,999만 5천㎢이고(한국의 2배), 종교는 이슬람교가 80%, 러시아정교가 15% 정도 되고, 교회 세 곳, 불교사원도 한 곳 있다고 한다. 언어는 러시아어와 키르기스어를 사용한다. 민족은 40여 개 된다는데 거리를 걷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금발의 부드러운 머리를 한 사람, 갈색, 회색 머리, 그런데 대부분은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어 한국인과 이질감이 덜한 편이다. 아랍인처럼 구레나룻 턱수염을 기른 사람도 있고, 몽골사람처럼 몸집이 크고 얼굴이 둥글둥글한 사람도 있다. 서양의 톱스타처럼 멋진 사람들도 많았다.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는 여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키르기스스탄의 화폐단위는 ‘솜(com)’이다. 100솜에 1,500원 정도 한다. 2022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1,410$라고 한다. 한국이 35,000$정도 되니 우리나라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반 회사원 소득이 1개월에 40만 원 정도 한다고 하는데 빈부의 격차가 매우 심한 듯하다. 내가 들렀던 식당은 보통 음식값이 450솜 정도 하는데 국민의 1인당 국민소득을 생각하면 매우 비싼 가격이다. 이곳 비슈케크가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이고 사람들의 경제 형편이 좋아서 가능한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천성이 순한 것 같다. 길거리를 산책하다 사람들을 많이 마주쳤는데 크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100명을 넘게 수용하는 큰 식당에서도 크게 떠들며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거의 못 보았다. 모두 조용조용 속삭이듯이 이야기한다. 공산주의 국가의 잔재가 남아서일까? 타인들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 같다. 도시를 이곳저곳 살펴보니 재밌는 풍경이 많이 있었다. 아직도 버스 지붕에 전선을 연결하여 운행하는 전차가 다니고 있고, 15인승 승합차에 사람들이 꽉 차서 콩나물시루 같았다.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의 풍경과 같았다. 비슈케크는 도시의 도로가 바둑판처럼 설계되었고 모두 평지였다. 문제는 좁은 도로와 교통신호 체계가 문제였다. 사실 대부분 도로가 편도 3차선이라서 도로가 좁다고 볼 수 없는데 맨 가장자리 1차선은 주차장이다. 대부분의 도로 3차선은 사선으로 주차된 차량 때문에 다닐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수도의 차량들이 대부분 2차선 도로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교통체증의 원인 중에 색다른 것도 있었다. 어느 날은 차가 30분 이상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통령이 퇴근 중이라고 한다. 이 나라에도 대통령궁이 있는데 굳이 출퇴근하면서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경찰들이 아침저녁으로 교통을 통제한다고 한다. 대통령은 모세의 기적을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경험하며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다. 구소련의 독립국가연합(CIS)의 국가 중에 유일하게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민주주의 선거방식을 도입한 나라는 아직까지 키르기스스탄이 유일하다고 한다. 하지만 6년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운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각종 비리로 엮여서 쫓겨나 타국에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5개국 나라의 차량번호판이 도로를 주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량번호판에는 아제르바이젠, 벨라루시아,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의 국기를 보면 어느 나라 차량인지 구분이 가능하다. 5개국은 서로 육로 국경을 통해서 이동할 수 있도록 협약을 맺고 있다고 한다. 난 궁금해서 술탄에게 물었다. 혹시 러시아 자동차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신호위반을 하고 러시아로 넘어가면 벌금은 어떻게 내야 하는지를 물었더니 자기는 생각을 안 해봐서 모른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국경을 넘어갈 때 벌금을 정산하고 갈 것 같다. 비슈케크에는 높은 건물이 많지 않다. 5층 이하의 건물이 많다. 건축기술 노하우가 많은 한국에서 들어와 협력해서 지으면 좋을 듯싶다. 건물의 기본 틀을 올려놓고 층마다 벽돌을 쌓아서 벽을 만드는 방식인데 건축을 모르는 내가 봐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기술력으로는 높은 건물을 짓기 어려울 것 같았다. 도로는 괜찮은 편인데 보도블록이 많이 깨져있고 파였어도 보수를 하지 않은 곳이 많아서 걸을 때에 튀어나온 바닥이 있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하수구는 도로 가장자리가 노출된 구간이 많았는데 이상한 것은 악취가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거주한 호텔이 주택가여서 오수가 많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그곳에서도 도시의 인프라 투자에 인색해 보도블록이 다 부서져 있어도 보수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내가 올해 11월 중순에 키르기스스탄에 온 목적은 키르기스스탄 학생들에게 우리 학교를 소개하고 한국문화를 체험하게 해 줌으로써 나중에 우리 학교에 올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이곳 학생들을 모집하고 한국문화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누르술탄의 몫이었다. 우리는 학교 홍보를 하고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말하기 능력과 내용을 평가하여 장학금을 주는 일을 담당했다. 행사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물이 흐르듯이 잘 진행되었다. 행사를 하며 뿌듯했던 것은 학생들이 한국의 문화를 너무 좋아했고 내가 한국인이라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잠시지만 내가 연예인이 된 느낌이었다. 한국어로 말하기에 참석한 학생들의 발표 태도에서는 한국 유학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행사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중간중간에 K-POP 댄스를 하는 춤 동아리 학생들의 현란한 춤솜씨에 놀랐다. 화려한 한복을 입고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 한국 김밥과 초코파이에 웃음 짓는 아이들, 한국문화 퀴즈를 맞추면 주는 선물이 라면 한 개인데도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마음이 흰 눈처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았다. 키르기스스탄에서 1년에 한 번 하는 한국문화행사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 모두 미소 지으며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여기에서 음식을 잘 못 먹고 왕자병에 걸렸나?
비슈케크에는 우리의 손발이 되어주는 가이드 친구가 두 명 있다. 3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우고 있다. 행사를 공동으로 주관한 누르술탄과 그의 친구 엘란이 그들이다. 누르술탄은 한국 서울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하면서 비슈케크에서 한국어학원과 유학업을 하고 있으며 가끔 한국주재 키르기스스탄 대사의 통역을 하는 수재다. 2022년도에는 한국에서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서 상금도 100만 원을 탈 정도로 실력이 상당하다. 몇 년 전에 결혼하여 아내와 세 살 딸이 서울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개인 사업을 하고 공부하는 것도 바쁜데 쓰리잡으로 중고차 매매를 하고 있다. 듣기로는 수익이 꽤 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차를 사서 키르기스스탄으로 보내고 키르기스스탄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에게 다시 파는 식으로 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서는 외국차를 사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다. 그 틈새시장을 활용하여 키르기스스탄에서 러시아로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갖다주는 방식으로 차량을 판매하는데 수입이 좋은 듯 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일본 차와 한국 차를 선호한다고 한다. 친구 엘란도 사업을 세 가지 하고 있다. 한국에서 5년간 아파트 배관공으로 일해서 벌어온 돈을 종잣돈으로 하여 사업을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 자기 고향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있고, 송어양식장도 사람을 두고 운영하고 있다. 송어 치어를 사다가 사료를 주고 키워서 다 성장한 송어를 러시아로 수출하고 있단다. 이번 출장에 엘란이 운영하는 양식장에 꼭 가서 보고 싶었다. 그리고 23년 전에 중국 북경에서 친구들과 송어를 사다가 회를 떠서 먹은 기억이 있는데 다시 한번 회를 직접 회를 떠서 먹어보고 싶었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중국사람과 마찬가지로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출장 기간 중 짬 시간이 생겨서 엘란이 운영하는 송어장에 갔다. 그곳에는 동네 친구가 한 명 와 있었는데 송어를 직접 뜰채로 잡는 일을 도와주었다. 송어 두 마리 잡아서 한 마리는 내가 회를 떠보았다. 회칼과 도마도 없이 마른행주를 깔고 송어를 올려놓은 후 과도로 회를 떠보았는데 큰 송어에서 겨우 열 첨 정도의 회가 나왔다. 주위 환경이 열악했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해보는 것에 만족했다. 키르기스스탄 세 친구에게도 억지로 송어회를 한 첨씩 초고추장 듬뿍 발라서 입에 넣어 주었다. 난생 처음 먹는 송어회를 어설프게 먹게 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오랫동안 송어회 맛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첫 경험이기 때문이다. 엘란의 시골 친구가 불을 피워서 갓 잡은 송어를 소금 뿌려 구워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밤하늘에는 어느새 새하얀 초승달이 우리를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엘란은 한국어도 잘 알아듣고 의사 표현도 정확히 할 줄 안다. 그들과 같이 다니다 보면 두 친구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는데 사업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30대 초반에 이 친구들처럼 정열적으로 살지 못했던 것 같다. 누르술탄은 심지어 올해부터 ‘누르장학재단’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마치면 키르기스스탄에 돌아와 정치를 하고 싶다고 한다. 먼 훗날 두 친구는 정치인과 기업인으로 큰 재목이 되어 우뚝 서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약속을 잘 지키고 부지런하다’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키르기스스탄 사람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이 온순하고 착하다’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학교의 복도에서 키르기스스탄 학생들을 만나면 그들은 정말 예의 바르게 인사를 잘한다. 다른 나라 학생들처럼 폭행에 연루된 적도 없고, 불법 체류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번 행사에 참가했던 250여 명의 학생들을 보면 참으로 친밀감이 든다. 한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 70년대에 해외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한국 정부가 과학기술에 투자하여 40년 만에 60배 성장하여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듯이 키르기스스탄 학생들이 한국에서 선진기술과 지식을 익혀 고국의 선구자가 되고 견인차가 되길 바란다. 비슈케크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은 1,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아직 한국과의 교류가 몽골이나 중국만큼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민간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란다. 서로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들끼리 좋은 관계를 더욱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이 나라는 산이 전 국토의 90%를 차지하고 3천 미터가 넘는 산이 많다고 한다. 비록 현재는 비슈케크시에서 화석연료를 때서 도시가 희뿌연하지만, 정부와 젊은 학생들이 힘을 합쳐 너구리굴을 맑은 공기의 굴로 바꾸어 가기를 기대한다. 머잖은 미래에 이 나라는 중앙아시아의 스위스가 될 것이다.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2017),
moon5865@hanbat.ac.kr
새벽 단상
김 현 주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무더위가 슬그머니 달아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낙엽이 뒹굴고 서늘바람이 불며 국화꽃 향기가 가을가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가을이다.
오는가 싶으면 가버리는 게 요즘 봄, 가을이니 예전의 간절기란 말이 사라진 듯하다.
무더위를 핑계로 그간 멈추었던 아침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마음먹으면 못 할 일도 아니건만,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서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지.
세월의 더께만큼 불어나는 체중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불편하고, 점점 부실해져 가는 하체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한다.
잠에서 깨면 생각이 들어오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나갈 준비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오면 오늘도 걸을 수 없는 이유와 핑계가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서는 것까지가 결단이고 용기다.
막상 나와 신선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걷기 시작하면 이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얼리버드가 된 듯 하루를 알차고 의미 있게 시작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
어둠이 물러나고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의 신비함을 오롯이 느끼며 걷노라면, 내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묘한 충만감이 밀려온다.
어제 세상을 떠난 이가 그토록 살고 싶었을 내일이 나에게는 오늘이라는 선물로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신성한 이 아침을 맞이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느껴진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두 팔을 한껏 흔들며 보폭을 넓혀 씩씩하게 걷노라면 동쪽 하늘이 붉어지면서 오늘의 태양이 떠오른다.
잠시 멈춰서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나마스테라며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우주의 기운을 내 몸 깊숙이 받아들인다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다.
걷기 시작하면서 생긴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흐린 날이어서 해가 뜨지 않을 땐 흐르는 냇물, 풀, 나무, 오리와도 눈길을 주며 아침 인사를 한다.
나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교감하며 걸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점점 즐거워진다.
바쁜 도시 생활 속에 이렇게나마 자연의 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고맙다.
걷노라면 어둠이 사라지며 도시의 윤곽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기지개를 켠다.
도로의 차량이 늘어나고 바쁘게 움직이는 도심의 일상이 시작된다.
그런 풍경들을 지켜보며 아무 잡념 없이 오로지 발걸음과 호흡에만 집중하며 한 시간 정도를 걷는다.
모자를 눌러쓰고 걷다 보니 고갤 들어 쳐다보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무심히 걷는데 스쳐 가는 사람의 발과 꼭 잡은 두 손이 보인다.
몇 발자국 가다가 뒤돌아서 스쳐 간 사람을 바라보았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아침 일찍 산책을 나온 듯했다. 부부일까? 아님 연인일까?
그저 손을 맞잡았을 뿐인데 보기 좋았고, 오랜만에 가슴 뜨거워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가슴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청춘남녀의 꼭 잡은 두 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을 맞잡는다는 의미는 무얼까?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의 만남으로 인한 반가움의 표시일 수도 있고, 고마움이나 간절함일 수도 있고, 의전이나 행사에서의 의례적인 행위로서도 손을 잡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간절함이 담긴 애틋한 손길, 그 마음이 담긴 마주 잡은 손이다.
손을 마주 잡고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윽하게 바라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있는 진실이 담긴 손 잡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무슨 말도 할 수 없을 때 그저 손을 꼭 잡아본 적이 있는가?
열 마디의 말보다 한번 잡아주는 따뜻한 손이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준다는 걸 나는 안다.
너무나 당혹스러울 때, 놀랐을 때, 슬플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고 든든할까. 무슨 말로도 그 마음을 달래 줄 수 없을 때 그저 손을 꼬옥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아이와 함께 길을 갈 때 손을 잡아주면 의지가 되고 보호받는 기분이 들 것이다
부부싸움으로 서로 서먹해졌을 때도 슬그머니 다가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화해가 된다.
손을 잡는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의 손을 따뜻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잡아 줄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아침 걷기를 하면서 생각이 정화되고 정리되는 것 같다.
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면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기가 쉬운데, 아침 시간에는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제 인생의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는다 생각하니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고 나다울까 고민해 본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기보다는 주변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는 삶이 훨씬 풍성하고 의미 있는 삶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 중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찾아보는 중이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함께 할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그 안에서 나의 역할과 목표를 설정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국, 내외적으로 유난히 사건 사고도 많고, 전쟁으로 어수선한 한 해였다.
누구나 태어나 자유로이 인간적인 삶을 살 권리가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다
안타깝고 애처롭지만, 아직도 인간은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을 그 누구도 그 어떤 국제기구도 막지 못한다.
이 평화로운 아침을 맞고 자유를 만끽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만 이렇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아도 되는 건지 전쟁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왠지 미안해진다.
이 해가 가면서 모든 분쟁이나 전쟁도 원만히 잘 마무리되고, 이 세상 모든 곳에 신의 가호와 평화가 깃들길 소망해 본다.
※ 대전 출생, 수필가, 한밭문학회 사무국장, hl3evs@hanmir.com
응급실에서
이 대 영
시골의 가을 풍경은 아침, 저녁으로 새롭다. 일조량과 풍속에 따라 자연의 풍광이 다채롭게 전개된다. 추수를 끝낸 논에는 하얀 알약 모양의 볏짚 꾸러미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소 사육을 위한 원형 곤포 사일리지이다. 마치 공룡이 알을 낳아 놓은 듯 그 풍경이 사뭇 이국적이다. 서리태가 듬성듬성 남아 있는 밭에는 벌써 마늘이나 양파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왕성하게 솟아나는 이들이 올겨울 추위를 어떻게 버텨낼지 궁금하다.
마을 사람들은 김장을 위해 밭에 나가 채소를 거두는 일로 분주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이틀 전에 텃밭에 있는 배추와 무를 뽑아 비닐하우스로 가져왔다. 그리고 어제는 다듬은 배추를 세로로 네 등분하여 큰 고무 대야에 담아 소금에 절이는 작업을 했다. 그러는 사이 막내를 제외한 오 남매가 시골집에 도착했다. 숨이 죽은 배추를 다른 대야에 옮겨 담으며 수육도 삶고 삼겹살도 구워 먹으며 요란한 하루를 보냈다. 대부분의 대화는 사흘 전에 교체한 지붕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낡은 슬레이트를 걷어내고 붉은색 강판 기와로 교체하는데 오십여 년이 흘렀다. 오래전,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꿨을 때의 기쁨이 다른 가족에게도 되살아난 것 같아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갈라진 틈새를 페인트 작업으로 메꾸는 등 자주 수리를 했음에도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 시간의 틈새로 빗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거실에까지 빗물이 떨어지고, 지붕 곳곳에 설치된 함석 물받이가 삭아 집을 수리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지자체의 지붕개량 사업 지원금 일부를 받아 작업을 서두른 것이었다. 또한 연로하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집을 수리해야 때늦은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속내도 작용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가족들이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밖에 쌓아 놓은 천여 포기의 배추로 김장을 끝내야 집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천이백 포기로 김장을 했다가 지쳐버린 가족들이 올해는 이백 포기를 줄이자는 의견에 모두 동의하여 준비한 양이었다. 마치, 작업은 김치공장처럼 돌아갔다. 여동생들은 번갈아 가며 찬과 술을 내왔고, 각자가 가져온 김치통들은 오전에 모두 채워졌다. 그리고 고무 다라 안에 비닐을 씌우고 김치를 가득 채워 창고에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점심때가 되자 공주에 사는 조카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들고 시골 마당에 나타났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가족이 함께한다는 기쁨으로 집안이 왁자지껄했다. 낮술로 얼큰해진 매제들이 노래를 부르자 흥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께서는 몸이 안 좋으신지 짜장면 그릇을 들고 여기저기 다니시며 나누어주려 하셨다. 그렇지만 모두 배가 부른지 선뜻 받는 사람이 없어 제자리로 돌아가시는 듯했다.
오후가 되자 김치공장은 더 바쁘게 돌아갔고, 마침내 ‘끝났다!’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리고는 서울, 인천, 대전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아버지는 공주에서 간간이 우리 집에 들러 일손을 거드는 아저씨를 대접하려는 듯 들마루에 앉아 술을 들고 계셨다. 나도 대전으로 돌아가려 옷을 갈아입고자 거실로 들어가는 순간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차를 부르라는 외침이었다. 내가 들마루로 달려갔을 때는 아버지가 뒤로 몸을 누운 채 의식을 잃고 계셨다. 나는 급히 119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다. 주소와 환자의 상태를 전달한 후, 아버지에게 달려갔을 때 심폐소생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급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암울한 터널의 끝에서 마침내 아버지의 입에서 ‘푸-헉!’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는 입에서 이물질이 튀어나왔다. 위기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눈에 초점을 잃고 있던 아버지는 다시 동공을 바로잡고 부스스 몸을 일으키셨다.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응급차가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로 들어섰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구급 차량을 따라 달려왔다. 경광등을 번쩍이며 우리 집 마당에 도착한 구급대원은 아버지를 모시고 차량으로 이동하여 베드에 몸을 눕혔다. 상황설명을 듣던 구급대원은 아버지의 호흡과 맥박이 정상이라고 했다. 병원 가기를 사양하시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차량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가용으로 구급차의 뒤를 쫓았다. 시골길에 익숙한 나는 신호와 관계없이 구급차를 쫓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시내로 접어들자 구급차를 놓치고 말았다. 구급차가 신호에 걸리자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공주의료원으로 가고자 했으나 의료원에서 대학병원으로 갈 것을 권장하여 세종시로 향한 것이었다. 밤길을 급히 더듬어 간 곳은 대학병원이 아닌, 이전에 임시로 사용했던 응급 의료센터였다. 주민에게 다시 묻고,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찾아간 대학병원 응급실은 이미 만원이었다. 실은, 환자가 많기보다는 응급실과 인력이 부족했다. 위급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우리 일행은 응급실에 입실할 수 있었다.
마스크로 굳게 입을 걸어 잠근 간호사는 아버지에게 환자복으로 갈아입게 한 후 포도당 주사를 놓았다. 의사의 진료가 늦어지자 응급실 여기저기에 누워있는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 창 옆에는 건장한 사내가 노모를 간호하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
“응!”
“엄마 정말 괜찮냐고?”
“응, 괜찮아, 빨리 집에 가자!”
큰 체격의 사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내는 집에 가기를 보채는 노모를 윽박지르고 달래기도 하며 ‘엄마’를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간호사가 환자 곁으로 다가갔다.
엄마! 소변검사를 하셔야 해요!
난 암시랑토 않아! 나는 집에 갈꺼여!
엄니! 소변검사를 하셔야 집에 갈 수 있어요!
안 아프다니께! 난 집에 갈꺼여!
아잉! 엄마 왜그래! 잉!
설득이 안 되자 간호사는 이제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나는 속으로 또 피식 웃으며 ‘간호사 너는 정말 체질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소변검사만 하는 거여?
그렇지! 엄마 조금만 참으면 돼 잉?
그럼 어디 해봐!
엄마 다리를 벌려야 돼! 애기 날 때처럼 하는 거 알지?
뭐여? 미쳤나벼! 나 집에 갈껴!
이잉~ 엄마! 잠깐이면 된다니까? 쪼금만 더 벌려봐!
아옹다옹하는 사이 간호사는 소변을 채취한 듯 그 자리를 떴다. 뉘 집 딸인지 붙임성 있게 잘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주섬주섬 짐을 챙긴 노모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응급실을 나갔다. 뒤이어 여고생인 듯한 환자가 아버지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커튼을 치고 누워있는 환자 곁에는 어머니인 듯한 분이 서 있었다. 간호사는 그들에게 다가가 아버지에게 했던 대로 포도당 주사를 놓으려 했다. 그러자 환자는 ‘엄마!’를 외치며 ‘아퍼!’라는 고함을 여러 번 질러댔다. 나는 또 속으로 ‘엄살 좀 작작해라!’며 혀를 찼다. 참을성이 많이 없어 보였다.
앞쪽에 새로운 환자가 도착하는 사이 기다리던 의사가 나타났다. 내 나이 또래의 의사는 일단 연륜이 있어 보여 안심이 되었다. 내원하기까지 상황을 들은 의사는 일단 피검사와 뇌 CT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간호사가 우측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입 마스크를 고치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1차 검사에서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2차 검사를 다시 해보자며 1일 병실료가 28만 원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환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간호사는 그곳을 떠났다. 그때부터 나는 코로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다가왔다. 감염예방이 취약한 응급실에 저 환자가 그대로 있어도 되나 싶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께서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셨다. 나는 아버지의 마스크부터 다시 고쳐 드렸다. 늦게 입실한 여자 환자 또한 젊은 의사에게 머리 어지럼증에서부터 구토와 몸살 증상 등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다. 참으로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정지한 듯싶었다. 그럴 즈음, 의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대부분이 정상이고 이상 증세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기도가 막혀 호흡곤란으로 일시 혼절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솔직히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모르겠다’는 의사의 말에 진솔함을 느껴, 퇴실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의사는 지금 가셔도 된다는 경쾌한 답변을 주었다. 실로 마음에 드는 의사였다.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낯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얼핏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온한 표정이셨다. 아마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팔십 대 후반에 들어선 아버지의 혼절한 모습을 나는 앞으로 또 몇 번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 번이나 비상등을 켜고 응급실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마치, 어릴 적 내가 울 때마다 달려와 수십 번 팔로 안고 어르던 그 아버지처럼.
의심
땡볕을 모조리 삼킨 고추가 밭고랑에 매달려 있다. 간간이 불어오는 미풍에 어린 고추들이 얼굴을 내밀어보지만, 정작 사람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휴일을 이용하여 고추밭을 찾은 내 손길이 분주하다. 조부님 생전에 매입한 밭 언덕에는 오래된 두 그루의 밤나무가 서 있다. 척박한 땅에서 치고 올라오는 생명체를 제압하고 의젓하게 서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우리 가족은 그를 표지목 삼아 이곳을 밤나무밭이라 명명하고 있다.
부모님이 텃밭으로 일구시는 이곳 사백여 평의 밭에는 여름에는 고추, 가을에는 무와 배추가 자라 가족에게 부식으로 공급된다. 노동의 시간과 거리는 항상 멀게 느껴진다. 이슬도 마르기 전에 시작한 일은 한 고랑을 나가기도 전에 내 몸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가족에게 공주님의 별칭을 얻은 아내가 밭고랑에 나타난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도시에서 자라 일에 서툴다 보니 논밭에 나와도 크게 일손을 덜지는 않는다. 오히려 음식솜씨를 살려 새참이나 점심을 준비하는 것이 한결 낫다.
아내가 시골에 온 이유는 뒷산에서 밤을 줍기 위함이었다. 이원 묘목 축제 기간에 사 온 과수들이 텃밭 여기저기에서 자라, 이제는 가을이면 다양한 과일들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검정 장화를 신고 비료 포대에 집게를 들고 야심 차게 대문을 나선 아내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뱀에 놀라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래도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는 알밤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는지, 이번에는 긴 막대를 휘저으며 집을 나섰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머니와 함께 고추밭으로 향했다.
수확한 고추의 이동 거리를 줄이기 위해, 나는 반대 방향으로 빈 포대를 가지고 걸어갔다. 여기저기서 개구리가 뛰는가 싶더니, 숨어 있던 뱀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내달린다. 가슴이 섬뜩했다. 조금 전에, 뱀을 무서워한다고 아내를 놀렸던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나는 허리를 굽혀 밭고랑에 다른 뱀이 없는지 구석구석을 확인한 뒤에야 발을 뗄 수 있었다. 시골 인구가 줄어들고 농약 살포량이 줄면서 사라졌던 메뚜기도 눈에 띄고, 개구리나 뱀의 개체 수가 현저하게 늘었다. 그래서 요즘은 논밭에서 항상 긴장을 풀지 않는다.
새참 먹을 시간이 되자 아내는 과일과 맥주를 내왔다. 굵은 밤을 웬만큼 주웠는지 얼굴에서 흡족한 표정이 보였다. 파라솔을 폈지만, 땡볕의 기운이 옷을 파고들어 땀구멍을 자극했다. 얼마 남지 않은 고랑이 때론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일을 끝내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또한 농부의 마음이다. 그러기에 농부에게 노동의 끝은 길고 멀다.
고추 따는 속도가 붙을 즈음, 낯모르는 여인이 밭으로 찾아왔다. 삼십 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그녀는 아내를 향해 산에서 자신의 차 열쇠가 들어 있는 검은 봉지를 줍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본 적도 가져온 적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산 아래에서 밤을 줍다가 능선에서 밤을 줍는 아내를 보았노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말 검은 봉지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의심하며 재차 묻는 그녀의 태도에 아내는 내가 남의 차 열쇠를 갖다가 어디에 쓰려고 가져왔겠느냐며 목소리를 키웠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밭고랑을 좁혀갔다.
사단은 이십여 분 후에 생겼다. 밭에 왔던 여자가 다른 여자를 한 명 대동하고 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경찰관 한 명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경찰관을 밭으로 호출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열쇠 분실사건 신고로 왔다며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혔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쯤 아래로 보였다. 기분이 상해 경찰관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나의 눈에 유독 허리에 찬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단, 경찰관에게 가보자며 집으로 향했다. 대문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집 밖으로 나오려는 여자와 마주쳤다. 나는 화난 목소리로 “당신 누구냐!”고 물었다. 아니, 묻기보다는 고함을 질렀다. 아무 대답이 없는 그에게 나는 경찰이 들으라는 듯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대답 대신 내 어머니를 찾으며 고추밭으로 줄행랑을 쳤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지 또 다른 여자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나는 두 모녀가 열쇠를 찾기 위해 뜰에 놓여 있는 보따리를 뒤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나는 더욱 화가 나 또 그녀에게 “당신 도대체 누구냐!”고 고함을 질렀다. 그 또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경찰이 거들고 나섰다. 집주인이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다그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경찰관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내 아내가 뒷산에서 밤을 줍고 내려왔고, 이 여자가 밭에 와서 열쇠를 주웠느냐고 묻길래 그런 일이 없다고 했더니, 급기야 경찰관과 동행하여 나타났으니 내가 화가 나지 않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경찰관도 나를 따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신고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차 열쇠를 훔쳐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왜 사실과 다르게 신고를 했느냐고 추궁해도 두 모녀는 한숨만 내쉴 뿐 대답이 없었다. 오로지 차 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를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혹여 외국인 노동자가 밤을 주우러 왔다가 열쇠를 가져갔나를 묻기 위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 순간 두 여인이 “전화를 하지 말아달라”고 동시에 부탁했다. 나는 두 여자가 내 친구의 허락도 얻지 않고 입산하여 밤을 주웠을 것으로 추측했다. 법학 지식이 무뢰한인 나도 이들이 무고죄, 허위사실 신고죄, 가택 무단출입죄, 절도죄 등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뒤늦게 밭에서 돌아오신 어머니의 중재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같은 마을에 살다 인근으로 출가한 여자와 그의 딸이었다. 경찰은 서로 아는 사이인데 신고를 했느냐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는 모녀에게 한참을 훈계했다. 경찰은 “제가 출동한 것은 혹시, 산에서 열쇠를 본 분이 없나 물어보러 왔습니다”라며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나 또한 할 일이 많다며 그 자리를 떴다. 두 모녀는 어머니와 한참을 이야기하다 경찰관을 따라 떠났다. 이후에 어머니께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묻자, 연신 두 모녀가 사과하고 갔다고 했다.
나는 문득, 지난봄에 할머니의 산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기했다. 선산 입구에 들어서자 탐스러운 고사리가 이곳저곳에 솟아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고사리를 채집하려는 욕심으로 술병과 포가 든 비닐봉지를 땅에 내려놓고 산 아래까지 내려가 고사리를 뜯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나는 망연자실했다. 봉지 안에 들었던 북어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틀림없이 사람 소행은 아니고 들짐승이 한 짓일 텐데, 어느 놈인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날랜 고양이 짓일 거라고 추측을 했다. 그 후에 고향 친구는 아마도 범인은 고양이가 아니라 너구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밭둑에 비린내 나는 음식을 두고 일을 할라치면, 너구리가 귀신같이 나타나 번개같이 물고 간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두 모녀의 열쇠가 담긴 봉지를 물고 간 녀석은 산짐승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이런 일이 시골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지 않고 모녀에게 화부터 낸 것을 뒤늦게 반성했다. 그래도 동네 사람을 의심하여 경찰관을 대동하고 나타났던 그들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심할만한 많은 일을 접한다. 의심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더 큰 분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상호 소통을 통해서 해결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오해한 후부터 불신과 분노의 감정이 앞서 웬만해서는 대화로 이어지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실은 나도 모른다. 오해 살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