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단어를 그냥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의미와 용법으로 사용하신다. 부처님 재세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을 가리켜 ‘나’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불교수행에 있어서 ‘나’라고 하는 말 외에 추가로 필수적인 개념과 용어가 있어야 함을 잘 아시고, ‘산냐’라는 용어를 도입하셨다.
‘산냐[sanna]’는 ‘인식자(認識者)’의 어의(語義)를 가진 팔리어이다.
사실 인간은 ‘나’, ‘나 자신’, ‘자아’ 등의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이들 용어에 대한 개념 정의는 잘 하지 않는다. 그냥 누구나 자각(自覺) 인식(認識)하는 대로 사용할 뿐이다.
정신과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그 속성이나 구조, 내용 등을 전혀 모른 채 스스로 인식 자각되는 것을 두고 그냥 ‘나’라고 말한다.
법기 대아라한 스님께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漢譯) 금강경을 설하시면서, 금강경에 등장하는 ‘사상(四相, 네 가지 상)’,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생명상(生命相)’을 중생의 주체(主體)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주체들 중에 ‘아상(我相)’이 근본상(根本相)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파생상(派生相)이라고 하신다.
또 이들은 하나 같이 경계에 대응해서, 네 가지 상 중에서, 그 경계에 걸맞는 상이 생겨나서, 그 경계로 인한 마음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주도(主導)하고, 그 역할을 마치고 나면 사라진다고 하신다.
구마라집이 ‘아상’으로 한역(漢譯)한 단어는 Ātmasaṃjñā(아뜨마삼즈냐, 산스크리트어)인데, Ātman(아뜨만, 산스크리트어)이라는 단어와 Saṃjñā 라는 단어가 붙여져 만들어진 복합어이다. Ātman은 ‘나(我)’라는 어의(語義)이고, Saṃjñā는 ‘인식자’라는 어의로 팔리어로는 ‘산냐[sanna]’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중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라는 것이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인간은 이런 사실을 전혀 자각 인지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어떤 속성이나 내용으로든 ‘나’라는 것에 대해서 간헐적으로 자각 인식하지만, 죽기 전에는 어떤 순간에도 사라지고 없어진다고는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환언하자면 내가 자각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라는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각 인식하는 것을 ‘자의식(自意識)’이라고 한다. 물론 이 자의식은 지속적이지 못하다. 길어야 몇 분을 가려나?
그렇다면 이 ‘자의식(自意識)’의 유무(有無)를 두고 ‘나’라는 것이 생멸(生滅)한다고 설하신 것일까?
아니다.
부처님이나 법기 대아라한 스님의 법문을 잘 살펴보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각 인식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인간의 주체인 산냐는 생멸한다. 가령 자의식이 전혀 없는 신생아에게도 아기의 주체는 있을 것이다. 정신의학에 의하면 인간의 자의식은 출생 후 수 년 뒤에나 생겨난다. 그리고 잠을 자는 중에도 자의식은 없겠지만, 그 사람의 주체는 있다.
이와 같이 참으로 불교는 수행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주체에 대해서 실질적이고 실제적으로 다루면서 가르친다. 그래서 금강법기사에서는 이를 두고 ‘주체법문(主體法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