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본 문 : 요 21 : 15 - 23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들을 뽑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최종 시험을 치르는데 주어진 문제입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차를 혼자 몰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가다가 작은 마을을 지나가면서 보니깐 마침 버스정류장에 세 사람이 초조하게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차를 세우고 보니 한사람은 금방 죽을 것 같은 병든 할머니입니다. 빨리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을 자세히 보니, 그는 한때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아주 고마운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의사가 거기 서있습니다. 또 한사람을 보았더니 그는 묘령의 여자인데 자기가 평생 찾던 가장 이상형의 아름다운 여자가 서있습니다. 세 사람 중 한사람만 자기 차에 태워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면 당신은 어느 사람을 태워가지고 가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어느 사람을 태워야 되겠어요? 당시 면접에서 28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선발되어서 매우 중요한 요직에 발탁된 회사원은 답을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내 자동차의 키를 의사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아픈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정성껏 치료해주시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이상형의 여자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세 사람을 다 살렸죠? 그리고 또 자기 소원도 이루었습니다. 이게 소위 오늘날 흔히 말하는 win - win 전략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승리하는 것이죠. 누군가를 짓밟거나 끌어내지 않고 함께 살려는 생각은 모두를 위한 좋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선택하는 능력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어려운 곤란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선택할 기회는 있습니다. 선택할 기회가 있다는 말은 곧 내게 주어진 자유가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바르게 누리는 사람만이 참된 인격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유명 연예인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올바른 선택도 자유도 아닌 무책임과 죄악입니다. 고인의 고통과 아픔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생명을 포기하는 선택은 성경적인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중에도 결코 이러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명연예인들의 자살이 이어지면서 소위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뉴스에 등장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요 시인이요 작가인 요한 볼프강 괴테가 25세였던 1774년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베르테르는 남의 약혼녀인 로테를 사랑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마는데,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를 모방하여 자살했다고 해서 붙여진 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소설을 썼던 괴테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다섯 가지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어떤 경우에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버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되면 그 순간부터 나는 망가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회는 앞에 있습니다. 옛날일 생각하면서 그때 그러지 말아야하는데 하는 후회는 그만하세요. 이제 다 지나갔는데 자꾸 생각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 번째,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화낼 일이 있다면 오히려 자성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스스로를 깊이 살펴보면 화낼만한 이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생각하기 전에 화부터 내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걱정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네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괴테의 말입니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라는 어니 젤린스키의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걱정의 30%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걱정의 22%는 매우 사소한 것들입니다. 오직 4%만은 바꿀 수 없는 거라고 합니다. 이건 내가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만이 내가 고칠 수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100가지의 일 중에 4가지 오직 4%만이 걱정할 가치가 있는 거라는 거죠. 나머지는 걱정할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허무맹랑한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언제나 현재 일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중요하거든요. 과거도 먼 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지난 주에 이미 살펴본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지금 결정적인 순간에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수제자이지만, 부끄럽게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었고 큰 부끄러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는 다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감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고민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쉽게 짐작할만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도 힘들었겠지만 사실 그의 더 큰 고민은 그가 부인했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죽으신 줄만 알았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눈앞에 계시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스승을 부인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차라리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끝나버렸다면 그런대로 베드로는 뭔가 좀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자기 앞에 나타나시자, “아이코! 이런 멍청이, 이런 바보, 이런 나쁜 녀석!” 등등,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책망하게 됩니다.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난 더 이상 주님의 제자로써 살 수가 없다. 나는 옛날 하던 대로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하고 옛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어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다른 제자들도 줄줄이 따라갔어요. 모두 일곱 명의 제자가 고향으로 돌아가 옛 직업을 되찾아 물고기를 잡는데, 한 삼년동안 쉬었다가 하니까 그런지 물고기 잡히질 않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고 피곤해 지친 바로 그 새벽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주님이라면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스승을 배신한 제자,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배신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한 제자에게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저 같으면, 아마도 “야 너 왜 그랬어? 너 나에게 뭐가 그렇게 서운했니? 한 번쯤은 그렇다 쳐도 세상에 세 번씩이나 그럴 필요가 있었니? 야 너 그럴 줄 몰랐다.” 뭐 이런 종류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가금 아픈 과거에 대해서 전혀 말씀하지 않습니다. 책망하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과거에 집착합니다. 과거를 들먹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들추어냅니다.
어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애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말썽을 부리고 장난이 심한지 하루도 터지지 않은 날이 없어요. 또 남의 아이까지 다치게 해가지고 치료비 물어주기가 일쑤입니다. 부모는 견딜 수가 없어서 많이 걱정하다가 어떠하면 좋을까 해서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이 녀석이 저 사달라고 조르는 자전거 사줍시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너 일주일동안 사고를 치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자전거 사준다.” 그러자 아이는 너무나 좋아서 “알았습니다.” 약속을 했어요. 이 아이는 사고치고 싶은 일이 많지마는 자전거 얻어가질 생각에서 꾹 참았어요. 드디어 무사고 일주일후 약속대로 자전거를 사주면서 엄마가 뭐라고 했을까요? “이렇게 착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전에는 그렇게 허구한 날 사고를 쳤냐?”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내 그 말 나올 줄 알았어. 치사해서 자전거 안가진다”하고 자전거를 홱 던져버리고 나가버렸답니다.
왜 과거를 묻습니까? 사람들은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엄청난 실수를 한 베드로를 놓고서 한마디 말씀도 없어요. 딱 한마디 차원 높게 말씀하십니다. “아가파오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내 양을 먹이라.”하십니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지금 내 양을 먹이라. 나는 네 과거를 묻지 않는다. 네 잘못을 탓하지도 않는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끝에 가서 삶을 정리하고 돌아볼 때 가장 가치 있는 질문은 오직 하나 ‘나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그것뿐이야.”
여러분,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 우리 스스로 내 마음에 물어야할 가장 소중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오늘 예수님은 실의와 좌절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 눈물의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너의 과거도 묻지 않고 탓하지 않는다. 다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여기서 물고기나 잡고 있을 게 아니다. 돌아가서 내 양을 먹이라.”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을 먹이는 삶을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러면 주의 양을 먹일 것입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뜨거운 사랑의 질문에 오직 사랑하나만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것이 변화된 베드로의 진정한 삶입니다.
D. L 무디가 어느 날 큰 부흥회를 인도하고 내려왔을 때 어떤 사람이 가까이 오면서 “선생님, 하나님의 수많은 사람들을 당신을 통해서 구원하셨는데 이러한 위대한 주님의 사역자를 내가 직접 얼굴을 뵙게 되고 악수를 하게 되니 지상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말했더랍니다. 그러니까 D. L 무디가 허리를 굽혀서 땅에 있는 흙을 한줌 손에 움켜쥐더니 다시 손가락 끝을 벌려서 흙이 손가락 사이로 쭉 빠지게 내려 보내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쓰신다는 것 빼놓고는 나는 한줌의 흙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한줌의 흙에 불과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주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명령 앞에 이제 베드로는 자기 판단도, 자기 자성, 자기비판도, 심지어 자기 평가마저도 다 포기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오직 그 한마디만 생각하고 그는 다시 출발했습니다.
물론 지난번에 보았듯이 이처럼 귀하고 중요한 출발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요한에 대한 질투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네게 무슨 상관이냐?”하는 핀잔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질책 후에도 그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고고 귀한 일입니다. 직분을 받기 위해 피택된 자나 이분들을 선출한 분 모두는 베드로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사랑하는 제자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의 수많은 허물과 죄악을 묻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의 뒤를 따라 교회에서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명예처럼 달콤하지도 않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희생하고, 섬기고, 손해 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독한 길입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이웃을 살리는 길이요, 내가 사는 길입니다. 사망의 흑암을 걷어내고 생명의 촛불을 밝히는 길이요, 분열과 증오의 아픔을 물리치고 평강과 위로를 주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참된 보람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을 우리 모두 감사함과 기쁨으로 끝까지 완주하여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주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을 내가 얼마나 사모했는지 아십니까? 주님 정말 사랑합니다.”고백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