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1 - 시련의 목적 (약1장 1절 - 15절)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얼마 전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에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대한 내용이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인터넷 웹사이트 중에,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이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반대하는지 궁금해서 그 사이트들을 들어가 봤습니다. 게시판에 여러 가지 기독교를 반대하는 내용의 글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내용들은 제가 보기에 별로 타당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렇게 반대해 가지고 진짜 사람들을 기독교로부터 구출(?)해 낼 수 있을까?” 오히려 걱정이 되더라구요. 만약 이런 글들만 있다면 안티 기독교 사이트를 크게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글들이 이렇게 “논리적으로 기독교를 반박하려는 어설픈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삶에 대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의 비리, 장로들의 비리, 집사들의 비리 -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부도덕한 삶에 대한 내용들이 게시판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리들은 사람들에게 크게 appeal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세습, 옷 로비 사건 등 최근 몇 년 안에 있었던 큼지막한 사건들은 비롯해서 크고 작은 기독교인들의 비리가 게시판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것에 호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글들의 대부분의 결론은 “너희 종교를 강요하지 말고, 너나 똑바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의 실제 삶 사이에 gap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손들고 찬송하고... 그러는데, 밖에 나가서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장사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세금 적당히 속이고, 세상 사람들처럼 어려운 일은 슬그머니 남에게 미루고, 세상 사람들처럼 시험 점수 좀 잘 받겠다고 컨닝하고, 대출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술 마시고 룸싸롱 가고,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남자 친구 여자친구 사귀다가 끝까지 가고... - 뭐 차이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안 하면 좋은데, 이렇게 똑같이 살면서 말로는 “나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가고, 너는 예수 안 믿으니까 지옥 간다” 이러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가소롭겠어요? 가소로운 것을 넘어 신경질 나고 역겹지요.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 새로운 피조물
그러면 왜 이런 문제들이 일어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예수 믿고,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이러면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한 구절 찾아볼까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르고, 행동하는 것도 옛날과는 다른 -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고서도, 세상과 똑같이 생각하고 세상과 똑같이 행동하고 -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아주 작은 구석구석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새로워지고 다스리심을 받는 -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찬양하는 것 - 좋습니다. 예배 -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열렬히 찬양하는 그 내용 - 예수는 우리 왕이시라는, 그 내용 만큼 우리 삶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찬양과 예배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것들을 받으시는지 말입니다.
■ 야고보서의 배경
그런데, 이런 문제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나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이 쓰여졌던 초대 교회 때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는 이런 배경아래 쓰여진 책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때에도 믿는 사람들의 신앙과 삶이 따로 노는 현상들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것에 대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고는 오늘날 저희들에게도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야고보서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또 구체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 이런 것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 야고보서의 기록목적 및 구조
야고보서는 AD 62년 경,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예. 1절에 나오지요?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 무슨 말입니까? 로마 제국 안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의 영향권... 이신칭의 신앙의 보완)
야고보서 총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은 글 전체의 서론입니다. 이 책의 기록목적, 큰 원칙들, 문제제기 그리고 2장부터 5장까지 나올 내용들에 대한 간략한 survey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을 잘 이해하지 않으면, 2장부터 5장까지 나오는 내용들을 그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1장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2장에 넘어오면, 이제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2장에서는 형제를 차별하는 죄, 특히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3장에서는 말의 문제 - 이 혀를 잘못 사용하면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지를 경고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혀를 제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4장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경계해야 할 것들 - 욕심이라든지, 서로 비방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마지막 5장에서는 돈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런 내용들을 몇 주에 걸쳐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2절 - 4절 : 목적
자 이제 1장부터 시작합시다. 1절은 말씀 드렸고, 이어지는 2절부터 4절까지를 봅시다. 2-4절은 야고보서의 전반적인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읽어볼까요?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절에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번역이 약간 잘못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trial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시험보다는 시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시련, 즉 어려운 환경을 만나게 되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시련의 연속입니다. 여러분, 문제가 없는 인생을 보신 적 있으세요? 만약 이런 인생을 보기 원하신다면 공동묘지에 가야합니다. 묘지에 누워있는 분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상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시련이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가지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직면하고 이것들에 대해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처리해야만 합니다. 작게는 “오늘 아침엔 우유가 떨어졌는데, 무엇을 먹을 것인가”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대학에서 전공을 정하는 문제, 사업상의 크고 작은 결정들, 그리고 크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는 문제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런 문제/환경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우리가 이런 시련 - 크고 작은 우리 주변의 환경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컨닝이라고 하는 것은, ‘공부는 안 했는데, 시험은 봐야 한다’ 라는 환경(시련)이 나에게 닥친 것입니다. 시련이라는 환경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 대한 반응이 바로 삶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컨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공부를 안 했으면, 점수를 못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다’라고 정직하게 대처할 것인가? - 이것이 바로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거든” 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만나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예.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시련에 닥쳐왔을 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원망하고 시험 들고... 이러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요? 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련이 닥치면 근심하고 원망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똑같은 상황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차이가 나야 합니다. 시련에 대한 우리의 첫 반응이 결국 이어지는 행동들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근심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이 시련을 어떻게 헤쳐 나갑니까? 근심과 원망을 없애는 방향으로 헤쳐 나갑니다. 근심과 원망을 제공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문제의 해결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서 근심과 원망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면, 기뻐하라고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면 무엇이 목적입니까? 예. 그 다음절에 나옵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3, 4절 읽어볼까요?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련을 만나면 인내를 키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쌓여서 우리의 인격을 성숙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시련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엇이 목적이라고요? 예.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격이 형성되어 가는 것 - 이것이 시련을 우리 삶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는 얼마나 다른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교회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사는 백성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시련이 닥칠 때 기뻐합니다. 근심하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게도 기회가 왔구나!” 믿음을 발휘할 기회가 온 거잖아요? 그리고 믿음을 발휘하는 것을 통해, 내 안에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만들어진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 인격이 우리의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세요? 문제의 해결이 목적인 사람은 시련 앞에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 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Problem free인 - 문제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 여러분의 목적이라면, 시련 앞에서 기뻐하십시오. 시련을 통해서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내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라는 것입니다. 시련과 인격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있는데, 그것은 인내라는 것입니다. 인내가 시련을 인격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아세요? 인내와 믿음은 동의어입니다. 믿음이란 인내하는 것이고, 인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내가 성숙한 인격을 만든다고 하니까, “그래, 그렇게 참다보면, 참을성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당연히 인격이 성숙해 지겠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지금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격과는 다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믿음이 인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란 그냥 인격수양을 위해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내를 통해 형성되는 인격이란, 성인군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인격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실험하여 보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 사실을 입증하듯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분이시라면, 믿음으로 실험해 보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지 못하시는지 실험해 보라는 거에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런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냥 내 힘으로 다 해결해 버리지요. 이래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실험함으로 경험해보기 원하신다면,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물론 이 말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멍청히 앉아서 무기력하게 기다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야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 행동에 커다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절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편법이나 부정직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행동이나 결정에 앞서 먼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지요.
하나님의 방법
편법이나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은 “이 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한다”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고, 이렇게 하다가 일이 꼬이면,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가봐. 내가 그렇게 노력했는데, 일이 이게 뭐야” 뭐 이렇게 반응합니다. 아니, 언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증명할 기회나 드렸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것이 누굽니까?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립니다. 나보다 더 잘하실 것을 신뢰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려고 해보세요. 그러면 엄청난 인내가 필요합니다. 몸이 막 근질거립니다. 조금만 내 마음대로 편법을 쓰면 풀릴 것 같은 길이 막 보이거든요. 그걸 안 하려고 하면, 엄청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이 행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참기 어려운 유혹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유혹들을 믿음으로 넘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유혹들에 넘어간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의 하나님은 언제나 추상적인 하나님입니다. 내 삶에서는 구체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faith Mission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파송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시죠? 재정에 대한 필요를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필요를 아시고 채우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선교 단체들이 이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선교 못했다는 선교사는 없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란 곧 인내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심리학적인 하나님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지를 Test 해보기 원하신다면, 여러분, 믿음으로 인내해 보십시오.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 5절 - 8절 : 기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말씀 드린대로, 행동에 앞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 8절까지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볼까요?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무슨 말입니까? 5절에 보면, 이 시련 중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으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실패가 어디서 오시는 지 아십니까? 기도해 보지 않고, 내 상식대로 행하는 것에서 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하긴 구하는데, 어떻게 구하라고 합니까? 6절입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 “주여 믿습니다” 그러고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여, 내 생각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고 아무리 믿어도 그렇게 안됩니다. 믿음으로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그 다음에 그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내 소원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고 백날 기다려 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 안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응답되어 보세요. 맨 날 그렇게 기도할 것 아니에요? 이런 기도는 절대로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문제 해결이 목적인 기도입니다. 모양만 기도지, 그 목적은 세상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목적 -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대비를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7절 - 8절 : 이렇게 안 하면...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7절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백날 신앙생활을 해도, 그냥 맨 날 그자리라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특징은 8절,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로서 온 확신이 없이 결정하고 행동하니까, 중간에 자꾸 마음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변합니다. 당연하지요. 확신이 없는데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웬만한 경우에는 결정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결정에 앞서 기도하십시오. 정말 심각하게 기도하십시오. 가볍게 결정하고, 나중에 문제 생기면 바꾸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방법이 아닙니다. 결정에 앞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중요한 문제면 문제일 수록 더욱 심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시는 확신이 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성교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 보지도 않고, 그냥 감정이 끌리니까 교제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귀다 보니, 별로다. 헤어지자.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것, 요즘 세상의 풍속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사귀다가 마음이 안 맞으면 헤어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헤어져야만 합니다. 결혼해서 더 불행지면 안되니까요.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정말 기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인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귀기 시작하면 가능하면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웬만해선 바꾸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 그리고 기도하고 결정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믿음이 있는 사람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결정이 아닌, 인내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주도권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내가 쌓이면 어떻게 됩니까? 인격수양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 하시는구나!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과거에는 내가 원수 갚으려고 아둥바둥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그 분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구나” 이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쌓이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의 성숙이란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 말하는 성숙이란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숙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백성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13절 - 15절 :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
마지막으로 13절부터 15절까지를 보겠습니다. 9절에서 12절을 다음주에 하고요.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앞에서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이런 환경들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인내로 하나님을 기다리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이 일을 통해 우리가 성숙하게 -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시험받는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너희 욕심에 끌려서, 너희가 자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먼저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앞에서 말한 시험- 시련과는 다른 단어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영어로 temptation 즉, 유혹입니다. 죄에 끌려서 유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그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야고보가 한참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시련, 환경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가 시험을 이야기합니까? 이야기가 흐름이 안 맞잖아요? 이것은 경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의 결과로 맞이하게 된 환경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불순종하고 잘못해서 이런 환경을 자초해 놓고, 마치 그것이 무슨 대단한 믿음의 시련을 겪는 듯이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믿음의 시련 이야기 끝에 그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temptation에 끌려서 죄를 짓고, 그 결과 맞이하게 된 어려운 환경은 죄의 결과이지, 믿음의 시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환경 속에서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겸손하게 기다리면, 이 시험이 시련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왜 이런 환경이 도래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많은 어려움들이 사실은 여기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환경 앞에 그냥 무턱대고 “믿음을 발휘할 기회다” 이러고 대처하기 앞서, 먼저 이 환경이 왜 오게 되었는지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물어보고,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 결론
이제 결론을 맺읍시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환경과 어떤 문제 가운데 있는 지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의 결과이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이던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이라면,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그 것을 통해 신앙이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편법과 수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정말 오늘날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래리 크랩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완전하고 문제 투성이로 보이는 이 세상은 사실은 하나님을 발견하기에 가장 완벽한 장소이다. (perfect place to finding God)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환경에 분노하시고 안달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세상에 속한 세상 백성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환경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시련 속에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그 분을 닮아 가는 축복이 숨어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분노 대신 기쁨이 있고, 안달대신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까지 닮아 가시는 여러분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