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기성은 젊은 여류시인이다. 불교신자도 어떤 종교의 신자도 아닌 이 시인은 어느날 조계종의 태두라는 임제선사의 어록과 그것을 해설한 강의록을 듣는다. 거기에서 번쩍 체득한 영적 체험을 오랫동안 속에 삭혀두었다가 어느날 한 편의 글로 풀어낸 것이 바로 이 詩이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깨달은 종교적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의 대상은 바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을 창시하여 일세를 풍미하였던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이 제시한 원리가 바로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한 마디였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바 그리스도 예수가 지상의 짧은 시기 동안 부둥켜안고 함께 뒹굴었던 진리의 대상 역시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위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지배계급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그룹을 일러 '거지와 병자와 창녀'의 종교라고 모멸했던가. 아픈자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로 버림받은 사람들 가까이에 다가섰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 아니셨는가. 종교적 계율을 내세워 사람을 계급화 하고 기존 종교적 틀 속에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종교는 진정한 하늘의 뜻을 배역하는 파렴치한 가짜들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이 가짜 얽매임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미혹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며 섬기고 있을 뿐, 진정한 주목대상인 달은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다. 종교란 그 <사람>의 실체와 그 <사람>의 고통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약한 자, 고통 당하고 있는 자와 가슴 열고 함께 하며 그 고통을 분담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임제>란 불교를 떠난 하나의 상징이다. 대자유의 상징어이다. 율법의 굴레를 초월한 진리란 자유한 것이다. 자유할 때 사랑이 샘솟는다는 것이다. 세속의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할 때 비로소 진리의 세계, 사랑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시인의 고백을 잠시 읽어보자. - 내가 보기에, 임제는 날아오는 화살을 둘로 쪼개는 칼바람이고, 살아서 펄펄 뛰고, 비수처럼 꽂히고, 천둥, 번개처럼 번쩍하고, 막 움직이는 역동적인 에너지 그 자체이고, 확확 열어가지고, 과격하게 때려부수고, 넘어뜨리고 멱살을 잡고, 한 방에 주먹이 날아가고, 1초도 가만있질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유령불처럼 휙휙 날아다니는 생령(生靈)이다. 활화산이고 천기누설이고 지뢰밭이고 산사태고 태풍이고 해일이고 홍수고 날벼락이고 대지진이고 전쟁이고 폭발이고 섹스고 분출하는 용암이고 불나비고 외로운 사자다. 히말라야산맥이고 대서양 바다고 영하 40도의 러시아 들판이고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하는 죽음의 계곡이고 실크로드 사막이다. 임제는 3천도 기름가마, 화약, 양귀비, 독버섯, 농약, 불구덩이, 마약, 독주, 비상, 50도 위스키, 새카만 커피콩, 몰핀, 100년 된 와인, 천년짜리 산삼이고, 송곳이자 칼날이자 대포알이자 벼랑끝이자 핵폭탄이자 독화살이자 곤봉이자 골프채이자 식칼이자 죽창이다. 임제는 손 한번 들어 온 세상을 와장창 깨트려버리고 휙 돌아서,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떠나가는 풍광한 아닌가. 한번 가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긴 회랑 속을 장삼자락 펄럭이며 뚜벅뚜벅 걸어가 버리는 우레같은 사내 아니던가... 그러면서 나는 소설같이 재밋는 상상을 했다. 만약 출가한 지 40년 된 어느 깡패 같은 비구니가 있다면, 어떻게 강의했을까?... 조교시범 보이듯 실전으로 5분만에 끝냈을 것이다. 진짜 불상을 집어던지고, 멀뚱멀뚱 보고 있는 학인에게 목탁을 날려 대갈통을 부숴 버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왜 그러냐고, 말리는 수좌에게 찰나적으로 뛰어가 따귀를 후려치고...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 아우성치면 신나를 확 뿌려 법당 하나를 홀라당 불질러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는 해야 진짜 임제가 웃지 않을까? 그 정도 장면은 연출해야 전광석화처럼 스님들이 임제의 선풍을 조금 짐작이나 하지 않을까?... 아울러 ‘인간 임제’를 가지고 영화 찍어서 할리우드에 팔면, 요새 서구에서 불교인기 높으니까 떼돈 벌지 않을까 싶고, 또 영화는 두 시간이면 땡이니까 이토록 길게 12시간씩 강의 테잎, 안 들어도 되고... 어느 비구니 하나 불꽃처럼 사라져 버린다면 그야말로 임제에게 한 방 먹이고, 그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생양아치 같은’ 보화선사 수준으로 선풍을 휘날리는 것 아니랴... 한순간이 영원이다! 순간이자 불멸이 ‘지금 이 생명’이다. 나는 너절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예수도 33세까지 살았고, 내가 존경하는 마틴 루터 킹목사도 39세에 죽었고, 불후의 명작을 남긴 빈센트 반고흐도 37세에 생을 마감했다. 또 전쟁과 기아로 스무살 이전에 비명횡사한 목숨들도 수천 명이다.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악착같이 팔십까지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단 말인가. 올해 39세인 나는 지금 여기서 떠나도 여한이 없다. 왜? 인간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다 맛보았으니까! 뭐든 한 순간에 다 버릴 수 있으니까!
특히 재작년, 우리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어릴 때 “미미(美美)야”, 나를 부르던 아버지가 68세의 나이로 쓰러져, 1300도씨 고열에서 1시간 반만에 굵은 뼈다귀 몇 개로 나와, 마침내 ‘고운 회색가루 한 대접’으로 변한 걸 보며, 나는 인생문제를 정리했다! 이젠 아무것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가난과 고독도 두렵지 않다. 생존 그 자체만이 눈부신 환희임을, 살아있는 생명, 그것만이 가장 설레이는 첫사랑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래서 이젠 어떤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고, 옆에 사랑이 있든 없든 내 자신의 ‘고적한 자아’를 언제든 유지할 수가 있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진정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는, 자유롭고 강인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아무나 내 가슴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누구도 내 가슴에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이 모든 것은 生이 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어떤 분은 나에게 ‘뛰어난 예지’가 있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인간을 보는 슬픈 눈동자’가 있을 뿐이다. 가방 하나 들고 취재한답시고 온갖 삶의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만난 것은 사람들의 고통이었다. 각양각색의 불행과 어두운 그늘과 상처, 배고픔과 한숨, 눈물과 한이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현실이 가슴 아프고 슬퍼서 하루 종일 울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밤거리를 쏘다니며 흐느꼈고, 밤새워 울었고, 2박 3일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으며, 특히 첫애 낳고는 온 세상 슬픔이 다 나한테 달려와 자리보전하고 한달을 울었다. 이 사람도 슬프고, 저 사람도 가엽고, 이 인물도 딱하고, 저 얼굴도 애처롭고... 그 불쌍한 인간을 바라보는 내 자신도 불쌍하고... 우리아파트에 아침마다 길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바닥에 시커멓게 말라붙은 껌자국을 싹싹 긁어내며 거리를 청소하는 작은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자기운명을 자각한 듯 매일 오전 꼭 그 시각에 지극정성으로 길바닥을 청소한다. 그 모습이 하도 눈부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발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지켜보곤 한다.
‘오페라의 유령’에 이런 대사가 있다. “가련한 존재여, 그대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가 이미 ‘걸어다니는 경전’이고, ‘움직이는 부처’ 아니고 무엇이랴...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 유정뿐 아니라 무정까지 품에 안을 수 있는 그 사람은 과연 누군가... 그 흘러내리는 눈물줄기 사이로 그동안 “사람, 사람”하던 임제조차도 아프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는 ‘무정까지’,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서럽고 아름다운 ‘生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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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의륙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수고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