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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강 : 영 혼 몸 (Spirit, Soul & Body) -앤드류 워멕 저-
“내가 거듭났을 때” 내가 변한 것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몸도 변하지 않고 같은 죄에 매번 넘어지는 행동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변한 것이 있기는 할까? 의심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삶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계속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실까?’ ‘자격 없는 내가 무엇을 받겠다고 기대한다는 말인가? 나는 부족해.’ 등의 반복되는 질문만 할 것입니다. 이 책 <영혼몸>은 당신의 의구심들을 말끔히 해소해 줄 것입니다. |
1장 하나님의 거울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우리는 영과 혼, 몸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영 :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
혼 : 생각, 감정, 의지(지,정,의), 양심 ; 인격(personality,성격)이라고 부름
몸 : 거울로 볼 수 있는 신체적 부분
우리가 영에 접근 할 때는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영과 육 이 둘 사이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다.
영적인 진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 믿으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영은 즉각적인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고,
혼은 나의 생각을 새롭게 하고 마음의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가치관을 다시 형성하는 만큼 변화될 수 있다. 그래서 혼의 변화는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계속된다.
2장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풀어놓으라.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 영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영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변화를 겪는다. 그때 몸과 혼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 변화는 완전한 변화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실거라 기대하지만 아무 것도 변화된 것이 없이 옛날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보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예수님을 믿은 순간, 예수님만큼 완벽하고 예수님만큼 성숙하며 예수님만큼 완전하다.
거듭난 이후의 신앙생활은 새롭게 하는 것과 풀어놓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영과 혼이 합의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고, 혼이 몸에 뜻을 맞추면 초자연적인 생명의 흐름은 막히게 되고 자연적인 영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내 영 안에 있는 것들이 물리적인 세계로 나오려면 반드시 내 혼을 통과해야만 한다.
영이 가장 중심이고 내 영이 진짜 나이다. 영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에서 몸으로 가려면 반드시 정신적, 감정적 부분인 혼을 통과해야만 한다.
우리 영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 동일하게 내재되어 있다.
(엡 1:18-20) 하지만 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밸브가 잠겨있다면 전혀 나타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을 새롭게 하여 그 밸브를 열어야 한다.
혼이 신앙생활의 중심축이다. 혼이 영에 동의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물리적인 몸에 나타나서 치유와 자유함, 기름부음과 승리, 능력과 기쁨, 형통과 번영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과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전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생각으로 인해 나는 낙심했고 답답해서 애가 타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내 거듭난 영에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이것을 풀어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생각(mind)를 새롭게 하여 이미 받은 것을 풀어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내게 없는 것을 얻어내는 것보다 이미 가진 것을 풀어놓는 일이 훨씬 쉬운 일이다. 우리는 이미 가졌다.
3장 새롭게 하고 인식하여 경험하라.
이제 우리에게는 구약의 원리인 ‘믿음을 더 받는다’, ‘새로운 기름부으심을 받는다’, ‘하나님으로 더 채워진다’, ‘갑절의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개념들이 역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분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과거시제). 그래서 믿음이 효력이 있고, 열매를 맺으며, 역사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인식하며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거듭날 당시,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과 기름부음, 승리와 기쁨, 평안을 내 안에 넘치게 주셨음에도 나의 혼과 몸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새롭게 되지 않은 내 생각 때문이다.
우리 구원의 1/3이(영,spirit) 이미 완성되었다.
이 세대를 본받을지 아니면 말씀으로 변화 받을지,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을 마음mind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4장 육신적인 실제를 따를 것인가, 영적인 실제를 따를 것인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육신의 생각은 (다 죄라는 뜻은 아니지만) 시각, 미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에 의해서 지배받는 것이다. 즉 생각의 중심이 물리적인 영역에 의해 돌아갈 때 그런 사람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자연적인 영역에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 가령 라디오 주파수, TV 신호, 와이파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영적 세계 역시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영적세계는 두뇌나 오감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낳는데(요6:63), 만약 나에게 평강이 없다면 내가 오감에 의해 내 생각이 지배받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저절로 오감이 인식하는 것에 끌려가게 되고 그러면 내 총명은 어두워진다.
생명과 평안을 누리기 위한 첫 단계는 영혼몸에 대한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영은 온전하게 되었음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보실 때 영을 보신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영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영만이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이 합쳐지고 하나가 되어 완전한 새사람을 창조한다.
5장 예수님과 하나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예수께서 지금 그러하심과 같이 나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나의 거듭난 영뿐이다. 몸도 아니고 혼도 아닌 바로 내 영이 예수님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다.
만일 내가 내 영으로 예수님과 내가 동일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의 영광, 능력, 모든 완전함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인생에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믿는 것은 첫단계일 뿐이기에 이 능력을 풀어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한번 생각했다고 인생이 즉시 바뀌지는 않으며 이 진리의 씨가 단단히 뿌리를 내려 내 생각 속에 자리잡을 때 이해와 성장, 성숙의 과정이 내 혼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주와 합한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이것은 완전한 연합을 말한다. 나의 영은 예수님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내 영 안에 있는 완벽함이 혼과 몸을 통해 흘러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이해한 후로 하나님은 거의 모든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셨는데 죽은자가 살아나고, 암이 치유되고,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신체적 질병뿐 아니라 우울증과 낙심같은 감정적인 문제도 치유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려면 내가 영으로 그분과 하나인 것과 내 안에 있는 그분의 능력을 풀어내는 것이 내 책임이라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나의 영안에 넣어두신 보물들을 깊이 팔수록 더 많이 찾아지고 치유가 일어났다. 누구라도 영 안에 숨겨둔 보물을 계속 파기만 한다면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6장 인치심을 받았으니
나는 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내 영은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되었음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에 겪은 낙심과 패배에 다시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내 영 안에 이루어 놓으신 일들은 항상 한결같으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가 되시므로 우리는 의가 되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예수님께서 나의 죄값을 치루셨다는 것은 알면서도, 자신이 의로워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마침내 천국에 도착하면 그때 의로워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거듭날 때 내 영은 온전하게 보존되기 위해 즉각 성령님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내가 어떤 영역에서 넘어진다 해도 내 몸에 들어오는 부패, 오염, 상함은 내 영을 관통하지 못한다.
진리는 내 영이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고 죄를 지을 때 나의 영은 그 죄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 난 부분은 오직 영뿐이다. 내 몸과 혼이 죄를 지어도 내 영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이말은 나의 행위가 내 영의 정결함과 거룩함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나를 대할 때 내 영을 보신다. 할렐루야!
7장 영원한 속죄
구약의 제사는 반복적으로 드려졌지만, 예수님은 성소에 단 한번 들어가셨고 단 한번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거듭난 영을 보며 기뻐하신다. 이렇듯 생각을 나의 영적 정체성에 집중하면 죄가 아닌 의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고후5:21) 때문에 담대함으로 그분께 나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 과거,현재, 미래의 죄값을 다 치루셨다. 다윗은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믿음으로 미리 내다보았다.
8장 복음에 관한 일반적인 의문사항
이즈음에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님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의 바른관계를 잃지 않는다면 계속 죄 가운데 살아도 되는가?”이다. 사도 바울도 이 질문을 동일하게 받았다.
또 하나의 질문은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나?”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고,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이 거룩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며
어떻게 사는지가 내 영의 의로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죄를 통해 사단이 내 몸과 혼으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사는 삶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9장 한번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죄를 지을 때마다 다시 거듭나야 하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고 유지된다.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옳다. 구원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히10:23) 있어야 한다.
죄를 지었다고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지만, 내가 구원을 파기할 수는 있다. 누군가 이 위대한 구원을 파기하기까지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완악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믿음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거절한다면 받은 구원을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구원을 버린다는 것은 의도적이며 공개적으로 구원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아니며 오랜 시간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그런데 이 구원을 파기할 수 있는 자격은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거절하면 이런 자들에게는 두 번 다시 회개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히6:4~6)
이들에게는 책임이 있다. 반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며 후회하고 있거나,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찾고 싶다면 버려진 것은 아니다.
10장 충만함을 받았으니
나의 영은 거듭날 때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되었고 성령님은 이 정결함을 거듭난 영 안에 인치셨다. 나의 영은 영원히 성결케 되었고 영원히 완전하게 되었다. 나는 영원한 속죄를 받았다. 내가 거룩하게 사는 이유는 내가 거룩하게 사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며, 내가 거룩하지 않으면 사단과 다른 사람에게 나를 대적할 기회를 내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영적 정체성을 알고 있으며 육으로 행하지 않고 영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 생명을 경험한다. 영원한 속죄에 대한 이해가 나를 거룩하게 살게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거절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결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다는 이 충만함이 나의 삶에 강한 영향을 주어 하나님께 감사한 나머지 더 거룩한 삶을 저절로 살게 한다.
11장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믿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풀어내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적인 믿음을 행하는 방법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 믿음도 선물이다. 구원이라는 헬라어 원어 “SOZO (쏘조)”는 구원의 모든 부분을 포함한다. 구원과 그 구원을 받을 때 사용하는 믿음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하나님은 믿음을 말씀안에 넣어두셨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믿음을 받게 된다.
인간의 믿음이란 시각,청각,미각,촉각,후각으로 알 수 있는 감각적인 지식에 근거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믿음이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이미 있는 것으로 보시는 것으로 영적인 영역에 있는 것들을 물리적 영역으로 가져온다. 믿음은 내 영에서 자라나는 열매로서 생각mind이 아니라 마음heart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더 필요하지 않고 이미 그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거듭난 영은 하나님의 믿음을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라.
12장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이미 이 믿음을 우리가 가졌으니 그 유익을 혼과 몸에 풀어놓는 것이 목표이다. 그 믿음은 항상 내 영 안에 존재한다. 우리에겐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식에 문제가 있다. 즉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믿음을 다스리는 법칙, 또는 믿음과 협력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믿음을 인식하지 못하여 그 믿음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지 못하면 결국 그 믿음은 표출되지 못한다.
우리는 거듭날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양과 동일한 질의 믿음을 받는다.
바울은 예수님의 믿음을 사용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셨던 그 믿음으로 살았다면 바울과 같이 거듭난 믿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셨던 그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파격적인 진리이다! 베드로도 동일한 믿음을 가졌는데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벧후1:1)
미국인들은 믿음에 여러단계가 있다거나 믿음이 찼다거나, 이제 믿어지기 시작했다는 개념을 말하는데, 믿음이란 믿거나 안믿거나 두 가지만 있을 뿐이다.
내 영안에는 예수님과 동일한 능력, 동일한 기름부음, 동일한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이제 필요한 것은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13장 내 영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거듭난 영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각mind이 있다.
우리는 자연적인 사고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자연적인 사고는 혼적 영역과 물리적 영역에서 두뇌처럼 작동한다. 자연적인 사고는 성장하면서 자라난다. 반면 거듭날 때 우리는 영 안에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데 이 영의 생각은 자연적인 사고와는 다르게 훈련을 받을 필요도 없고 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다.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영의 생각과 물리적인 사고는 서로 완전히 다른 실체이다. 그 두 생각이 서로 동의하지 않을 때 이것을 두 마음(mind)을 품었다고 한다.(약4:8)
그래서 신앙생활의 열쇠는 나의 물리적인 사고를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생각인 나의 영의 생각에 동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자연적인 사고가 내 영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을 한마음(mind)을 품었다 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온마음으로(heart)으로 믿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물리적인 사고를 영의 생각에 동의시키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런 이유로 신앙생활의 문제는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의 영은 모든 것을 알기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여기서 거룩한 자는 예수님이고 기름부음이란 “특별한 능력과 힘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내가 이미 가졌다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가졌다고 믿지 못하는 것을 풀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14장 그리스도의 생각을 풀어놓기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내 영 안에 있는 지혜를 길러내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눈으로 받는 것이다. 말씀이 ‘맞아’라며 깨달아질 때 내 영과 혼이 한 마음mind를 품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한마음mind를 품고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내 영의 생각인 그리스도의 생각은 말씀과 완벽하게 동의한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풀어놓는 또 하나의 방법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내 영이 기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한마음mind를 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혼에 심어서 내 영이 그 말씀을 내적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 혼이 내 영의 사고방식과 하나가 될 때 영 안의 지혜와 지식을 물리적인 영역으로 길러내어 내가 세워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영이 하나님의 감춰진 지혜로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도 방언으로 기도하라.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초자연적인 계시를 주신다. 계시 지식은 우리의 거듭난 영안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온다. 성령님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내 혼에 증거해 주신다.
방언을 할 때 통역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 자신의 방언을 통역해 보라.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고 통역을 했다고 해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것은 아니다.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그리고 통역을 받는 것은 한마음mind을 품어 영 안에 있는 것들이 내 삶에 표출되는 지름길이다.
15장 반드시 필요한 성령의 능력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열쇠는 지혜와 명철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이 없이 거듭난 영 안에는 존재하는 이 놀라운 현실을 완전하게 풀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령세례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 조차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어떤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님은 하나이기에 서로에게서 독립하여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분은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온다.
성령세례는 구원받는 것과는 구별된 하나의 경험이다. 성령세례를 통해 성령님의 능력으로 채워지고 그 능력을 풀어놓을 수 있게 도와주는 방언을 선물로 받는다. 방언기도는 내 안에 있는 지혜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명령하셨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
16장 영과 육신의 전쟁
거듭난 이후의 신앙생활은 영을 따라 행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순간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루신 일들이 나의 물리적 감정적 영역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며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간단하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육적인 내 자아가 다스리던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영적 정체성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이토록 어려울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내 영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에 그 말씀을 들여다 볼 때 영적인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삶에서 전쟁이란 내가 육에게 지배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영에게 지배받을 것인가의 그 선택이다. 마귀는 육에서 기인하며, 육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통해 역사하고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우리를 미혹한다. 반면 주님은 영적인 영역에서 일하시며 주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기에 지속적인 내적 분쟁이 있게 되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안되는 것이다.
육을 따라 살면 온갖 형태의 사망이 오게 되는데, 우울, 낙심, 분노, 쓴뿌리, 두려움, 염려, 질병, 가난, 외로움 등이다. 죄에 대해서 죽은 부분은 우리의 영인데, 혼과 몸은 아직도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거듭난 영은 그럴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타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을 얼마나 새롭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부활 생명 안에서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나에게 달려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본성이 있지만 사고방식은 두 개이다. 우리는 새 본성을 갖게 되었지만 우리안에는 여전히 새롭게 되지 않은 사고방식(육신)과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영)이 있다.
그래서 물리적인 사고방식을 다시 영의 사고방식에 맞게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내 영에게 지배받기를 선택할 때, 옛사람인 죄의 본성에 근거하여 세워진 생각, 욕구, 패턴, 습관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정욕, 술, 미움, 마약, 다툼, 험담, 우울, 아픔, 낙심, 질병, 가난에 더 이상 속박당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는 이 모은 것을 파할 수 있다. 우리의 영으로는 이미 완전히 자유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새롭게 하라.
17장 불가능한 삶
롬7장에서 바울은 육신(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모든 것, 신체적인 능력과 인간적인 생각, 감정,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육신을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으로 살 때에만 가능하다. 그 정체성이란 내 영이 완전하게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영으로 살 때에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육신으로는 주께서 하라는 것을 할 수가 없다. 누가 나에게 자기 짐을 지우고 1마일을 가자고 하는데 2마일을 가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마5:39~41) 그러나 내 안에 그리스도를 인지하고 풀어 놓을 때 엄청난 자유함이 오게 된다. 오히려 “저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저를 통해 사시고 저 사람들을 사랑 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 육신으로서는 베드로가 말했던 일곱 번의 용서도 어렵지만, 영으로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490번, 무제한의 용서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 안에는 용서하고 견디고 믿고 소망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들어 있다.
로마서 8:1절에는 참된 정체성을 풀어놓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므로(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으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의 저자 목사님은 영적 정체성에 집중한 이후로 TV프로와 라디오를 통해 수백만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발전되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육신이 더 경건해져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영으로는 더 강해지고 육으로는 더 약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영적 정체성에 더욱 집중한다면 내 육은 영의 다스림과 지배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18장 영에 집중하라
우리는 육신과 영이 서로 거스른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을 부인하기만 하면 저절로 영 안에서 행하게 된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나쁜 습관과 나쁜 생각을 끊기만 하면 영 안에서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 안에서 행하라. 그러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집중하여 영 안에서 행한다면 현재 내 육신의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육신의 지배를 끊게 된다. 만약 의사가 나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그 의사 말에 지배를 받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겠는가? 말이다. 생각이 육신에 머물러 있으면 육신 안에 거하고 있다는 뜻이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질병을 이기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없다.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법을 배워가면 내 영이 육신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될 것이며, 이러한 질적 시간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여 보내는 양적인 시간도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얻은 것처럼 동일한 이치로 몸의 치유도 얻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인도하지 않으시듯 우리를 질병으로도 인도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았다고 자동적으로 그 진리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단이 그 말씀을 빼앗으러 오기에 싸움이 생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깨달은 것과 내 몸이 느껴지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싸움이 있는데 이때 나의 육신과 영이 서로를 대항해서 싸우게 되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실제로 병치레를 하게 될 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치유를 받았다”라는 말씀을 외치며 몇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경험이 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수십년간 자기 멋대로 해왔기 때문에 그 싸움은 한번에 끝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면 엄청난 돌파를 가져다 주고 육신의 댐에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육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에 집중해야 하는데 라디오나 TV, 신문, 잡지를 통해 세상일에 너무 통달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많이 나타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은 많은 제대로 된 노력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은 것을 읽고, 같은 것을 보며, 같은 것을 듣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다른 결과를 얻기를 바랄까? 세상 사람들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육신 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한,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19장 이제는 출발할때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삼을 때 즉각적인 변화는 육신(몸과 혼)이 아닌 영에서 이루어진다. 영 안에 있는 이 변화가 물리적 영역에 표출되느냐 아니냐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생각이 물리적인 것에 머문다면(그것이 꼭 죄는 아닐지라도)내 삶도 육신에 제한받고 지배받게 될 것이다. 매우 도덕적인 사람일지라도 물리적인 것만 생각한다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지 못한다.
내가 계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를 다스리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과 그 안에서 내가 소유한 것들을 계속 생각한다면 물리적인 나의 삶에도 결국 그것들이 나타나고 표출될 것이다. 우리 구원의 1/3(영)은 이미 완성되었으나 아직 몸과 혼은 온전히 변하지 않았다.
나의 참된 영적 잠재력이 내 물리적인 삶 가운데 풀어질 것인가, 아닌가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롬12:2) 하나님 말씀의 진리로 자신을 지배하여 오감의 자연적 제한을 넘어서면 내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생명을 풀어놓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선을 누리려면 영혼몸에 관한 이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가 소유한 무한한 잠재력은 영 안에 있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 역시 거듭난 나의 영 안에 있다. 내가 영에게 순복할 때 육신이 점점 더 적게 지배하고 적게 나타나게 된다. 육신을 먹이는 시간을 줄이고 영에게 집중하라. 불평 불만하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믿음과 긍정을 말하며 그리스도 안에 가진 잠재력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라.
하지만 쉽지는 않다. 육신에 집중하던 것에서 영에 집중하는 것으로 옮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자연적인 생각이 영에게 동의하도록 하는 것은 점진적인 작업이면서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완전히 다시 까는 작업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새롭게 하면 결국 영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의 삶이 파격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고, 말씀과 영에 집중하겠다는 결단과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하여 그 가운데 행하기를 더 원하신다는 것이다.
소리 내어 기도해 보자.
“아버지, 성령님께 제 마음을 엽니다. 이 진리를 계속적으로 저에게 계시해 주세요. 이것은 한번에 되는 것이 아닌 과정임을 아오니 앞으로 남은 생애 가운데 영혼몸에 대한 더욱 큰 깨달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스럽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영을 따르는 습관을 형성하기 원합니다. 저를 자유케 하셔서 감사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는데 저를 사용하실 것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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