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조선의 여성 성리학자 윤지당 임씨 [允摯堂任氏, 1721~1793] 의 책.
1796년(정조 20) 동생 임정주(任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유고(遺稿)를 정리해 두 권으로 간행했다.
임윤지당
조선 후기인 1721년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호 윤지당(允摯堂)이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학통을 이어왔는데 고조부인 임의백(任義伯)이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계와 친밀했다. 이런 연유로 부친 임적(任適)은 과거에 낙방하였지만 음직으로 양성현감, 함흥판관을 지냈다. 그녀가 여덟살때 부친이 전염병으로 죽자 오빠 임성주(任聖周)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특히 윤지당은 성리학(性理學)에 깊이있는 통찰력을 보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자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글공부를 해도 쓸모가 없었고 여성으로서 지켜야할 규범만 요구되었다. 1739년 원주에 사는 신광유(申光裕)에게 시집을 갔으나 8년만에 남편이 죽고 어린 아이마저도 사망했다. 남편이 양자였기 때문에 두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윤지당은 조선의 여성에게 제한된 경전을 독학으로 탐독하여 성리학에 대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평소의 식견을 글로 남겼으며 1793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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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이름에 대한 애착이 무척 컸다. 윤지(允摯), 주 문왕을 낳아 최고의 성인으로 키워냈던 태임(太任)의 고향이 지(摯)였으니 윤지는 결국 태임처럼 살겠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여자의 막냇동생인 임정주와 시동생인 신광우가 내 몸에 기록한 글에 따르면 여자는 실제로 조선의 태임이라 불리기에 마땅한 삶을 살았다. 삶의 조각조각 하나가 너무도 완벽한 까닭에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 유일한 흠일 정도로. 임정주는 누이가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성실하고 장엄했다는 문장을 써가며 추모의 글을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빠른 말이나 황급한 거동이 없었고,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하셨다. 여러 오빠 형제들을 따라 경전과 역사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배웠고, 때때로 토론에 참여했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이 많았다. 둘째 형님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 등의 책을 가르치셨는데 누님이 매우 기뻐하셨다. 낮에는 종일토록 여자의 일을 하고, 밤중이 되면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으셨다.
이어지는 임정주의 글을 통해 여자는 점점 더 범접하기 힘든 기운을 타고난 거인이 되어간다. 여자는 예닐곱 어린 나이에도 제사 때면 육식을 멀리 했고, 어른들이 아직 어리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충고하면 어미가 먹지 않는 고기를 저 혼자 먹을 수는 없다고 답함으로써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저고리와 치마를 정돈해 시렁 위에 올렸고, 아침이 되면 어른들보다 먼저 깨어나 침구를 정돈하고 몸단장을 했다. 여자로 태어난 까닭에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느라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그것을 핑계 삼아 학문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깊은 밤 오빠들과 함께 앉아 경전과 역사책을 논할 때면 가만히 듣고 있다 조용히 한 마디씩 하고는 했는데 그 말이 그야말로 이치에 탁탁 들어맞았다. 임정주는 오빠들이 내뱉었다는 탄식의 말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읽는 이의 마음에 신화를 심어 놓으려 애를 쓴다.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
재미있는 사실은 임정주가 기록하는 여자의 삶은 기실 대장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은 마음가짐에 대한 여자의 견고한 믿음이다. 그를 증명하는 두 개의 일화 중 첫 번째는 부채론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이다. 여자는 더운 여름날 공부에 열중하는 자신의 조카들을 지켜보다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
협과 흡이라는 이름의 조카들은 아마도 무척이나 진솔한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여자의 질문에 대뜸 속내를 털어놓은 것을 보면.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여자의 질문을 듣고도 순진한 그들은 잠시 후 겪을 수난에 대해서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너희가 부채질을 하느냐?”
더워서 부채질을 했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답변 뒤에 가해진 여자의 청천벽력 같은 일갈. “정신을 집중하여 책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 그러니 어찌 부채질할 필요가 있겠느냐? 너희는 아직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
두 번째 일화는 추모 글의 당사자인 임정주가 직접 겪은 일로, 두레박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다. 나이 열한 살 때 한적한 시골을 떠나 번화한 도시 여주에서 살게 된 임정주는 새로 사귄 벗들을 따라 노니느라 공부를 잠시 멀리한다. 여자는 막냇동생을 조용히 불러 이렇게 이른다.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두레박처럼 남들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여자의 조용하나 핵심을 놓치지 않은 일갈이 임정주의 삶에 미친 영향은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이 좋겠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이께서 그 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
이렇듯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여자였으니 시집에서의 삶 또한 여느 여자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을 터. 여자의 시동생 신광우는 자신의 할머니가 여자에게 했다는 찬탄의 말을 직접 인용해 읽는 이를 설득하려 한다. “손자며느리는 자태와 성품이 참으로 탁월하다. 역시 가정교육에 법도가 있어서 그러한가 보다.”
신광우가 기록해나가는 여자의 삶은 임정주가 보여주었던 장면들의 데자뷰라 할 만하다. 시어머니가 숙환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을 때 측근에서 간병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동서가 난산을 겪었는데 약과 음식을 직접 조리하여 지성으로 간호했다, 일상 생활하는 데에도 법도가 있어서 어른이 앉거나 누운 곳에는 한 번도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이어 신광우는 여자가 한 말 중 기억할 만 한 것들을 차례로 인용한다. 물론 범상치 않은 것들이다. 선비가 독서하고 수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군자의 백가지 병폐는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 처지가 궁색하거나 현달하거나 만사가 형통하거나 좌절되는 것은 오직 천명에 달렸다......
임정주가 그랬듯 신광우 또한 여자 때문에 자신의 흐트러진 삶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남자치곤 제법 진솔한 표현이 의외로 깊은 울림을 준다. “처신할 때 혹시 잘못된 것이 있으면 형수가 알까 싶어 두려워했다.”
다소 낯 뜨거울 수도 있지만 여자에 대한 찬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광우는 여자가 죽을 때 했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여자의 삶을 태임의 삶과 유사한 영역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집안일을 바르게 단속하고, 남녀의 출입을 굳게 삼가도록 하라!”
여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살았던 집안의 법도가 혹여 흐트러질까 봐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다 할 만하다.
비통에서 벗어나는 길
그러나 임정주와 신광우의 기록대로라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내가 여자를 기억할 이유는 없다. 그들에게 있어 여자가 태임처럼 살았다는 것은 여자의 삶을 평가하는 데 무척 중요한 잣대였겠으나 내게는 동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공치사에 지나지 않는다. 주 문왕을 낳았다는 태임의 삶이 뭐 그리 훌륭했는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으므로. 게다가 현모양처의 상징처럼 추앙받는 사임당(師任堂) 또한 태임에게서 가져온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여자의 삶이 그 아무리 훌륭했다한들 제대로 빛을 발하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여자를 주목하는 것은 여자가 태임처럼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여자가 태임이나 사임당과는 전혀 다른, 굴곡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임정주와 신광우가 여자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 때문에 여자가 남긴 글을 거의 대부분 문집에 실었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물론 태임이 아닌 여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제 내 몸에 똑똑하게 기록된 여자의 육성을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너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기에 일 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느냐? 내가 나이 마흔이 넘어 비로소 너를 양자로 삼았으나, 처음 태어난 때부터 너를 안아 길렀다. 너는 일찍부터 나를 친어머니로 여겼고, 나도 너를 친자식으로 여겼다. 네가 젖을 뗄 때부터 내가 먹이고 재웠으며, 장난감들을 모아 놓아 놀고 자는 것을 모두 내 방에서 했다.
태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문장이다. 태임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너무도 솔직한 비통함이다. 그렇다. 여자의 삶은 기실 비통함으로 요약된다. 여자는 결혼한 지 8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여자가 낳았던 유일한 아이는 몇 해 살지도 못하고 죽었다. 남편이 죽은 뒤 십년 넘게 혼자 살던 여자는 시동생인 신광우의 아이 재준을 양자로 입적했다. 재준은 건장한 사내로 자랐고 그것으로 불행은 모두 끝난 듯싶었다. 그러나 재준의 삶은 스물여덟을 넘기지 못했다. ‘만사가 형통하거나 좌절되는 것은 오직 천명에 달렸다’고 선언했던 여자였지만 재준의 죽음을 맞은 후에도 담담하게 살아나갈 수는 없었다. 재준의 영전에 올린 제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으나, 나의 고통은 갈수록 심해진다. 내가 죽어야만 비로소 이 고통이 없어지리라......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빨리 죽는 것이다.”
죽음은 갑자기 닥치기도 하나 좀처럼 오지 않기도 하는 법이다. 여자는 재준을 보내고도 여섯 해를 더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 여섯 해, 비통으로 가득 차야 마땅했을 그 여섯 해가 실은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자는 비통을 숨기지 않았다. 그 숨기지 않음으로 인해 도리어 비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 여자의 비통은 사색으로, 문장으로 승화되어 세상에 배출되었던 것.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
나의 죄가 지나치게 무거워 천벌을 주심이 이토록 가혹한 것인가? 그렇다면 실로 하늘이 나를 이쯤에서 죽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니 다만 정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 원망도 하지 않고 허물도 하지 않으리라.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고자 한다.
소인은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군자는 정의를 귀하게 여기네.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오직 정의를 따르겠네.
비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문장에서 찾은 것은 사실 여자의 일생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신광우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을 하나 남기고 있다. “시부모도 돌아가시고 형수님도 늙었을 때였다. 간혹 집안 일 하다가 여가가 나면, 밤이 깊은 후에 보자기에 싸두었던 경전을 펴놓고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그때 창밖으로 등불이 형형하게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형수님의 학문에 남모르는 공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경전과 역사책을 읽었던 여자는 시집온 뒤로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태임을 본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자가 다시 책을 읽고 문장을 짓게 된 것은 연이은 불행 때문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시부모도 없는 여자가 의지할 것이라곤 결국 어릴 적 가까이했던 책과 문장뿐이었다. 비통을 불러온 것, 그리고 여자를 태임에게서 책과 문장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 것 모두 연이은 불행의 공로였으니 이 불행을 도무지 뭐라 부를 것인가?
아무튼 그런 식으로 어릴 적 벗들과 새로 노닐게 된 여자의 마지막 소망은 자신의 이름이 박힌 문집을 내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재준이 죽기 전부터 품었던 그 소망은 재준이 죽은 후에는 아예 간절한 열망이 되었다. 여자는 더 이상 글 읽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문장을 짓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진심으로 여자를 아끼고 존경했던 임정주와 신광우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가 죽은 후 임정주는 문집을 발간하고 발문에 이렇게 기록한다.
아, 부인들의 저술이 예로부터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의미와 이치를 분석한 변론, 성품과 천명을 논한 오묘함, 경의와 성리에 대한 담론은 마치 차 마시고 밥 먹듯이 자유로웠다. 이와 같이 집대성한 일은 아마도 문자가 생긴 이래로 처음일 것이다.
누이에 대한 애정이 절절이 배어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여자가 남긴 글, 그것도 평생을 품었던 포부가 대학 강독이라는 틀 속에서 느닷없이 드러나 버린 문장이다.
“군자에게는 대도가 있으니 반드시 충신(忠信)으로써 얻을 수 있으며 교태(驕泰)로써 잃게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수신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도이다. ‘충신’이란 성실을 말한다. 성실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자신도 수양하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다스리겠는가?
여자가 꿈꾼 삶이 정말 태임의 삶이었을까? 수신을 넘어서 천하를 평정하려 했던 군자의 삶, 그것이 여자가 진정 원했던 삶은 혹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해설
임윤지당이 처음 문집 간행의 뜻을 비친 것은 65세 때인 1785년의 일이다. 윤지당은 자신의 글 중 40편을 추려 임정주에게 보내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노년에 이르러 나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득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으면 초목과 같이 썩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여가가 날 때마다 글로 써 두었다. 그것이 모여 마침내 커다란 두루마리가 되니 모두 40편이다.
『윤지당유고』는 윤지당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1796년에 간행이 되었다. 문집에 실제로 수록된 윤지당의 글은 35편이다. 사라진 글들의 내용과 행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윤지당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의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이규상과 유한준의 평은 다음과 같다.
이학과 문장에 능하였으며 그 제문과 경의를 볼 것 같으면 견식과 문장 솜씨가 일가를 이루어 규방 사이에서의 시 한 수, 글 한 편의 재주와 같지 않다. -이규상,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풍천 임씨 가문에 여성 군자가 있었으니 그 호가 윤지당이다. -유한준, 저암집(著菴集)**
깐깐하기 그지없는 선비들로부터 여성 군자라는 인정을 받았으니 윤지당의 삶도 헛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여자의 삶을 평가함에 있어 선비들의 인정이 꼭 필요한지는 의문이지만.
* 임윤지당에 대한 지식은 이영춘이 지은『임윤지당』(혜안)을 통해 얻었다. 임윤지당, 임정주, 신광우 글의 번역문 또한 같은 책에서 가져오되, 조금 다듬었다.
** 윤지당에 대한 이규상과 유한준의 언급은 김재임의 논문 「임윤지당의 성리학 연구」에서 재인용했다.
- 설흔(『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공저)』,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저자)
- 출처 : 기획회의 295호(2011년 5월 5일)
첫댓글 임윤지당.
처음 접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