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투이호아 지역작전
1) 청룡1호작전시 제2대대 상황
* 제2대대장 오윤진 중령 *
1965년 10월 9일 캄란항에 상륙한 제2해병 여단은 12월초 까지 2개월간에 걸쳐 주둔지인 동바틴 일대의 지역에서 자체방어를위한 탐색및 경계임무 수행과 아울러 남쪽의 판랑지역 에서와싱턴작전. 백경작전. 을 실시하고, 북쪽의 나트랑지역에서 번개1~3호 전투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연합군의주요 항만과 비행장 및 군수시설을 방호하는 한편 주변일대의 수색및 공격작전으로 작전기반을 착실하게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과정중에 계획된 청룡1호 작전은 미제1야전군 사령관인 라슨(Stanly R. Larson)소장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공산군의 100년 아성으로 이름 높던 푸엔성의 투이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미.월남군이 협조된 공격작전으로 수행한 한국군 최초의 여단급 규모의 작전입니다
이작전은 최초 11월말쯤에 실시될 계획으로 추진되었으나 기상의 악조건으로 인해 연기되어 오다가 12월에 실시된것입니다
청룡1호 작전이 연기된 배경에는 최초 미 제1야전사령관 라슨 소장이우리에게 투이호아 지역 작전을 요청 하면서 " 미군이 수송기와 구축함1척을 지원하여 청룡부대의 이동을 지원하고 미 제101공수사단 1개대대를 예비로 확보한다 " 는 내용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같은 배경하에 청룡부대는 11월 22일을 기하여 캄란지역의 전술책임지역 경계임무를 담당할 1개대대를 제외한 2개대대를 투이호아 지역으로 이동 시킬 계획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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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발대로 출항하였던 미해군의 LST 가 투이호아 해안에서 좌초되고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계속되어 LST 의 구출과 작전수행이 어렵게되었습니다. 그러자 LST 에 탑승하고 있는 200여명의 병력을 구출하는것이 시급한 현안이 되었습니다 .
이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여단장은 투이호아 해안에 좌초된 LST 를 경계하기 위하여 제2대대를 긴급히 투이호아 비행장으로 공수시키고 나트랑부두 에서 승선대기중인 제3대대를 즉시 동바틴 기지로 복귀 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대대는 11월 24일 투이호아 남쪽 비행장에 공수되어 당시 투이호아 비행장 동측 해안에 좌초되어있는 미 해군 LST 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대병력은 400여명 정도 되었는데 LST가 좌초되어있는 지역에 대한 적의 81mm 박격포 공격을 고려하여 약 4Km방안 일대에서 수색과 매복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대대가 최초로 투이호아 비행장에 투입될 당시에는 투이호아 시내에 적의 박격포탄이 40발이 떨어지고 .시내 전체를 감제하는 고지가 적에게 점령되어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죠
그래서 우선적으로 " 비행장 부터 확보하라 "고 했는데 내려보니까 활주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겁니다. 팔랑개비 나 타워도 없고 사람도 없는 비행장 입니다 빈집만 하나 있었어요 그리고 가끔 그곳에 다니는 여객기 가 내릴뿐 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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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착륙하는 중대마다 " 사주방어를 하라 . 낮에는 호를 구축하라 " 고 하고 그다음 중대가 오면 또 호를파고 이렇게해서 비행장 활주로를 중심으로 방어했습니다 여기에는 대대본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사히 LST 가 예인된 12월 4일에 다시 Home Base 인 동바틴으로 복귀합니다
그리고는 제3대대가 담당하던 철도경계에 임하다가 12월 16일에 청룡1호 작전의 제1단계인 X-mas 작전을 위한 선두부대로 C-130기에의해 캄란 비행장에서 투이호아 로 이동하고 푸엔성장 실에서 한.미.월 지휘관 회의를 개최 하고다음 12월 22일 부터 작전을 시작 했어요
당시에는 12월 22일 부터 제2대대가 실시한 작전을 "제1단계작전" 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X-mas 작전이라고 했습니다 작전이 끝난후에 작전 개념을 정리 하면서 " 청룡1호 1단계작전" 으로 분류하였기 때문입니다
떠라서 X-mas 작전이라고 하는것이 알려졌고 1단계작전이라 하면 잘모릅니다 또한 통신계획이나 신문보도 등도 모두X-mas 작전으로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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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X-mas 작전. 즉 1단계 작전을 위해 우리대대는 16일 제3대대의 제9중대를 지원받아 증강된 편성으로 캄란비행장에서 미군수송기를 이용하여 투이호아 남쪽의 비행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22일 부터는 월남군과 합동으로 투이호아 북쪽의 산악과 해안에 출몰하는 적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투이호아 시내 북쪽의 Hoa Kien 지역과 북쪽으로 An Chan 및 An My 남쪽일대에 대한 폭넓은 수색작전을 실시하여 베트콩 훈련소 및 은거지를 색출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대대는 우일선 그리고 월남군은 좌일선을 맡아 투이호아 북쪽비행장을 LD 로하여 일제공격에 나섰는대 . 우리대대의 작전은 제5.6.9중대가 공격부대였고 7중대는 대대예비로 대대지휘소와 함께 투이호아 북쪽 비행장에 있었지요
월남군과 함께 24일 18:00 부터 25일 24:00까지 X-mas 휴전이 선포되어 잠시 작전을 중지 시켰기 때문에 그동안 적들은 대부분 도주해 버린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작전기간중 월남군과 협조가 잘되지않아 한국군 단독으로 실시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X-mas 휴전이 종료된 12월 26일부터 작전이 속개되었는데 이때의 작전은 "청룡1호 2단계작전" 으로 분류 하였습니다 이작전역시 원래는 X-mas작전이었지요
이작전에는 제3대대가 추가로 투입되었고 우리대대는 제7중대가 공격에 참가하였으며 제6중대는 투이호아 북쪽 10Km 의 My Quang 반도까지 점령한후 계획되로 작전을 마치고 여단본부 근처로 집결 하여 1966년 새해첫날부터 전개될작전 , 즉 "청룡1호 3단계작전" 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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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1호 3단계작전]
1966년 1월 1일 새벽부터 3단계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대대에 부여된임무는 비행장 남쪽10Km 지점에 위치한 X고지(1번도로 서측평야지대에 있는 48고지) 와 Y 고지(48고지남쪽의 Nui Cau Song Van. 256고지) 를 점령 확보하는것이었습니다
작전 첫날 X고지를 공격하던 제5.6.7중대가 적의 저항을 받고 공격이 저지되었는데 이는 월남군이 우리의 공격을 측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사전에 협조된 목표 1,2,3. (48고지 서측 Nui Sa Leo 하단 무명고지) 에 대한 동시공격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는수없이 대대는 피로서 탈취했던 Y목표를 포기하고 당초 월남 공수부대 담당하기로한 목표 1,2,3. 에대한 공격과 더블어 X 고지를 확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과정에서 적정이 불분명한데다 가 적은 천연적인 동굴과 바위틈에 숨어서 노출된 아군에게 자동화기 사격을 집중하여 고전을 면치못하는데 , 특히 작전첫날 제7중대가 48고지 하단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 또작전 3일차에는 여명공격에 이어 정면공격에 나선 제6중대 제2소대장(이종길소위) 이 전사하였는데 이소위의 전사는 파월한국군의 장교중에는 최초의 전사로 지금까지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와같이 어려운 작전을 거듭한끝에 1월 8일에는 목표했던 고지들을 완전히 점령한다음 이를 월남군에게 인계하고, 차기 작전을 위해 일단 각중대를 대대CP 부근으로집결시켰지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내가 진중에서 기록했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 오늘 Y목표를 완전히 점령하므로써, X ,Y ,목표가 8일만의 고전끝에 점령된것이다. 대대CP로 철수해온 제7중대원들 앞에서서 목이메여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 수고했다 " 는 말만 두어번 하고 말았다 밤과낮 8일간을 산짐승 처럼 쫒고쫒긴 그들, 세수는 물론 한번도 못했고 식사도 세끼나 굶었으며 팔.다리는 모두 가시에 찔리고 할퀴어 만신창이가 되었고. 바지는 헤어져 속곳과 반바지가 되었다 천근 만근 피곤한 그들 육신에는 사람 몰골이라고는 새까만 눈 뿐이었다 "
그후대대는 3일간의 부대정비를 마친후 헬리콥터에 의해 비행장 남쪽 20Km지점에 위치한 붕로만(Vung Ro 灣) 지역으로 공수되어. 제3대대와 함께 다비아( Da Bia)계곡작전에 투입되었으며. 1번 도로 개통을 위한 Link Up 작전결과 청룡1호 작전의 최종목표인 1번도로 개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청룡 1호작전이 끝나자마자 곧이어 추수보호작전인 청룡 2호 작전에 착수하게 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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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1호작전시 있었던 비화]
청룡1호작전은 월남군과 협조된 공격작전으로 X-mas 작전 즉. 제1~2단계 작전은 투이호아 북쪽해안지역 을 소탕하고 제3단계 작전은 투이호아 평야의 남쪽으로 부터 붕로만 지역까지 를 평정하는것이었습니다 .
이를위해 월남군 제22공수사단이 투입되어 우리와 협조된 작전을 하게 된것입니다 이과정에서 에피소드가 많이 있어요
작전을 위해 푸엔성의 회의실에서 작전회의를 했습니다 한국군 대표는 내가 나가고 월남군은 제22사단장 '샹' 장군이 참석했으며 미고문관등 모두가 다왔습니다 회의가 길어져 점심식사를 하면서 회의를 계속 했는데 공격개시일자와 세부 부대운영에서 이견이 있었습니다
내가먼저 " 우리가 이렇게 기동할테니 월남군은 우리의 측방을 보호할수 있도록 기동해주시오 " 라고 했더니 월남군 사단장은 자존심이 상했던지 반대 방향의 의견을 제시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단장의 사전지시도 있고해서 우리의 안을 우겨 관철시켰습니다 그다음 작전 개시일을 정하는데. 나는 " 작전의 D-day를 12월 22일 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드니 월남군 사단장은 "21일로 하자"는것입니다
결국 이문제는 부대운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나에게 꺽이게 되니까 엉뚱한 공격개시 일자를 가지고 문제를 삼는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 비도 계속오고 있는데, 어떻게 많은 병력을 북쪽에 옮겨 놓겠느냐? 비때문에 헬기도 안된다, 자동차도 없다, 도대체 안되니까 무리한 작전을 할수없지 않느냐? 했더니 그러면 자기가 먼저 하겠다는겁니다 그래서 월남군이 하루먼저 시작하게되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월남군이 먼저 공격해 나가면 월남군이 주둔했던 자리에 우리의CP를 두도록 되어 있는데 이친구들이 안나갑니다 그리고는 사단장이 나에게 " 이지역에는 월맹군 제95연대가 있다.
81mm박격포가 있고. 60mm박격포가 있고. 75mm 무반동총이 있고 또 무엇이. 무엇이 있고 .다있다 " 는 겁니다 그러면서 " 코넬 오 자신있소? 덤비지 말고 시간은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차근 차근해 나가시오 "
이렇게 한수 지도 하는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악수를 하고 헤여지며 걱정마시요 했어요 그다음 부터는 만나기만하면 인사가 '걱정마시오' 가 되었어요
결국 양국 군의 협조희의는 자존심의 문제가 걸렸던것으로. 희의의 진행이 월남군 사단장 보다는 한국군 대대장에 의해 주도 되니까 사단장의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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