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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문경을 걷다, 2013년 6월 8일~9일
6월8일(토) 아침 동서울터미널에서 8시20분 버스를 타고 경북 문경읍으로 향했다. 버스는 충주 건국대학을 거쳐서 10시30분 경 문경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침 햇살이 무척 좋은 날이라 눈이 부신 가운데, 선글라스와 모자, 선크림을 얼굴에 바르고는 도보여행을 시작했다.화장실에 다녀오고는 바로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식육점 뒤편에 있는 오래된 창고를 발견하고는 둘러보았다. 낡은 농협 창고인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철문과 외벽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워 사진을 한 장 찍어 둔다.
이런 창고를 개조하여 카페나 식당,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100명 이상은 동시에 수용이 가능해 보이는 크기다. 일본 북해도에는 수로 옆에 있는 해산물 창고를 수십 개 개조하여 다양하게 쓰고 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골에서도 새롭게 무엇을 짓고 만들기 보다는 사용하지 않는 비어있는 창고를 개조하여 재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비용도 절감되고. 창고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식육점 주인 아주머님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뭐 볼 것이 있다고 사진을 찍어여” 나는 그저 웃으며 “이뻐서여” 라고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 나왔다. 다시 길로 나와서 전진하다가 앞쪽 골목에 있는 낡은 정미소 간판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이곳도 없어진 정미소지만, 낡고 오래된 건물이며, 외벽이 멋지고 특이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목욕탕 건물도 재미있다. 목욕탕의 붉은 색 간판도 웃기지만, 낡은 건물을 방치하여 곳곳에 얼룩이 많아 마치 흐려진 벽화 같다.지금은 효용이 없어진 시골 정미소와 목욕탕을 살펴 본 나는 길을 우측으로 잡아서 조금 가다가 오미자찐빵을 판다고 하는 글씨를 발견했다. ‘다올오미자찐빵’이라고 하는 작은 가게인데, 도넛, 찐빵, 크로켓, 만두 등을 팔고 있었다.
난 오미자찐빵이라는 말에 무조건 빵 하나를 달라고 하여 먹어보았다. 향이 진하지는 않았지만, 식감이 좋았고 약간의 오미자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주인장인 강치구씨에게 몇 가지 물어보았더니 “우선 문경에 오미자가 유명하여 만들게 되었고, 오미자즙을 너무 많이 넣으면 식감이 떨어지고 향이 강하여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 몇 번의 실험 끝에 현재의 오미자찐빵을 만들게 되었다. 찐빵을 맛보신 분들이 체인점이나 분점 문의를 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여력도 없고 시설도 부족하여 고민만 하고 있다. 오미자찐빵은 씹히는 맛이 좋고 체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했다.
난 500원 이라는 너무 싼 가격에 정말 맛있는 오미자찐빵을 맛본 다음, 추가로 크로켓을 500원 더 주고 하나 더 먹었다. 재료 구입비가 저렴한 시골이라 싼 가격에 맛있는 찐빵과 크로켓을 500원 정도에 팔고 있어 감동하면서 먹었다. 정말 감사하다. 점심을 먹어야하는데, 이것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한 것 같아 나중에 이른 저녁을 먹는 것으로 하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을 우측으로 잡아서 ‘경북관광고등학교’로 갔다. 예전 문경고등학교가 학생 모집이 어렵고 지역 특성화를 위해서 지난 2002년 관광고로 개편을 한 것이다. 학생이 많지 않아 보였지만, 실내 골프연습장도 있고 컴퓨터실, 도예실 등도 있어 제법 알차게 운영되고 있는 듯했다.
예전에 선배 한분이 80년대에 이곳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탄광지역이라 별로였지만 아이들은 순박하고 좋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대학 후배인 서연이가 문경고 졸업생이라 가끔 고향에 가면 홀로 산책을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이런 추억은 안고서 잠시 산책을 했다.
학교를 둘러 본 나는 좀 더 길을 올라 ‘문경향교(聞慶鄕校)’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더운 날이라 수돗가에서 잠시 세수를 하고는 길을 가는데, 길 옆 빈집 마당에 있는 뽕나무를 발견했다. 오디가 좋은 철이라 한참을 서서 오디를 따 먹었다. 오랜 만에 정말 오디를 맛있게 먹었다. 4년 전인가 영주 시골집 인근의 뽕나무 밭에서 오디를 왕창 따서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겨울에 슬러시를 만들어 먹던 기억이 났다. 맛있게는 먹었는데 손과 입술 및 입 주변이 온통 검은 물이 들어서 다시 손과 얼굴을 씻어야 했다.길을 한참 올라가니 향교가 보인다. 향교 앞에 주차장이 있고, 바로 앞에 두 채의 농가 주택이 있다. 너무 향교와 가깝게 있어 신경을 쓰이기는 했지만, 나름 향교는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향교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들어가려고 하니 방법이 없어 월장을 하게 된다. 문경향교는 조선 태조 1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중건하였다.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전사청·내삼문·명륜당·동재·서재·외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뒤로 높아지는 지형에 대지를 3단으로 마련하고 앞쪽에는 교육 공간을, 뒤쪽에는 제사 공간을 배치하였다. 정문격인 외삼문을 통과하여 교육 장소인 명륜당을 지나면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소박한데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조선 숙종 어필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예전, 문경향교의 교장격인 전교를 지내신 장인어른 덕에 한번 방문을 한 적이 있는데, 오랜 만에 다시 오니 무척 좋다. 잠시 쉬면서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를 살펴보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이런 곳에서 며칠 쉬면서 나도 공부를 하고 싶어진다. 무척 더운 날씨라 난 천천히 걷는다. 그래도 걷는 좋을 좋아해 즐기면서 길을 걸으니 언제나처럼 행복하다. 또 기쁘다. 많이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서. 천천히 다시 읍내 방향으로 나오는데 우측에 작지만 아름다운 ‘문경성당(聞慶聖堂)’이 보인다.이곳은 지난 1958년 가은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도 신자들이 경상도로 이주할 때 관문역할을 하였던 문경은 신유박해(1801년)를 전후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때에는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던 문경의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3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103위의 성인 가운데 한 명인 여우목 출신의 이유일 요한도 이때 순교했다.박해 이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로베르 신부는 1883년 문경 지역 최초의 먹방이 공소를 설립하는 한편, 경상도 지역을 분담하여 맡게 된 파이야스 신부에 의해 가실 본당이 설립되면서 많은 문경의 공소들이 이 관할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가은 본당의 지베르츠 신부에 의해 문경에 새 본당 설립이 계획되고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수녀원이 완공됨과 동시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분원이 개설되어 사목을 돕게 되었으며, 1989년에는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를 개발하여 마원 성지를 조성하고 순교자 현양 대회를 개최했다.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리고 있는지 사람도 많고, 앞에 버스도 여러 대 서 있었다. 본당은 30~40년은 되어 보이는 건물임에도 무척 깨끗하게 깔끔했다. 난 본당과 사제관, 교육관을 둘러보고는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 장례미사를 지내시는 분의 천국행에 멋진 기도를 잠시지만 함께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다시 계속 전진하면서 읍내를 거닐다 보니 ‘문경읍사무소’가 보여 안으로 들어갔다.소읍의 사무소지만, 크기도 크고 멋스럽게 지어져 있었다. 안팎을 살펴본 다음, 지역의 관광안내도를 한 장 받아들고는 뒤편의 ‘문경서중학교’로 갔다. 예전 ‘문경객사’가 있던 곳이라 객사건물을 살펴보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객사는 요즘으로 보자면 지방에 있는 국립호텔 정도로 보면 되는 곳이다. ‘관산지관(冠山之館)’이라고도 불리는 문경객사는 1987년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9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건축한 관아의 객사 건물로 현재 문경서중 교정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고설각(高設閣)을 설치하고 양쪽 각 2칸은 빈객의 침소로 마련한 것이다. 1648년(인조 26)과 1735년(영조 11)에 각각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2013년 초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공사 중이라 내외부의 출입이 자유로워 안팎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지붕이며, 기둥, 창살 등이 고풍스럽고 아름다워 사진을 여러 장 찍어왔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다시 배우게 되는 건물이다.
객사를 살펴보고 학교도 둘러본 다음, 교문 앞에서 길을 가는 어르신들에게 예전 문경군청 터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군청 터가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빌라라고 해서 가 보았다. 군청청사가 있다가 다시 우체국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빌라가 지어졌다고 하는데 흔적도, 표지석도 없고 현재의 건물은 별로 볼품도 없었다.재미있는 것은 빌라 앞에 있는 아주 폼 나는 2층 양옥집이 보여서 그곳을 살펴보면서부터다. 내 느낌에는 군수가 머물던 군청관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층 건물에 외부가 대단히 잘 꾸며져 있고, 창문도 무척 큰 것이 관공서 건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마당도 무척 넓었다.다시 길 가는 어르신에게 물어보니 관사가 아니고 예전 장자광업소 정산탄광 사장의 집으로 주로 모친이 거주하던 곳이라고 했다. 어르신은 “장자광업소 사장이 정말 잘 나갔는데, 내 기억으로는 유신 정권 때 정치자금 문제로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는 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었지”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50~60년 정도 된 단독주택치고는 무척 깔끔하고 잘 지어져서 지금도 사람이 살기에 별로 불편함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도색만 다시 하면 새집이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 것 같은 멋진 집이다. 집을 둘러 본 나는 길 건너편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건물에 주목을 하고는 살펴보았다.‘정배네 한우’라고 하는 고깃집으로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1920년대에 지어진 ‘문경등기소’건물로, 이후 개인병원으로 쓰이던 것을 수리하여 식당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특히 우측의 창고건물은 화재나 외부 압력에 절대로 부서질 수 없도록 강철문과 두꺼운 벽이 특징이라고 했다.지금은 쓰지 않는 강철문은 안쪽 창고에 넣어 둔 것을 보여주는데 요즘도 페인트칠만 다시 하여 쓰면 좋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벽 또한 벽돌에 두께만 50cm는 되어 보이게 지은 것이 등기소 창고라 중요서류를 보관하기에 무척 튼튼하게 지어진 것 같았다.
창고는 현재 주방으로 등기소 건물 자체는 식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는 거의 수리를 하여 일본 주택의 특징을 자세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외부 벽돌은 쌓은 방식이나 안방의 붙박이 옷장이나, 지하 창고에서는 일본 건물의 특색을 느낄 수 있었다.아무튼 1920년대 일본 건물을 발견한 놀라움도 좋았고, 오래된 건물을 수리하여 쓰고 있는 주인장의 안목에도 감사를 드리고 나왔다. 한참 식사 시간이 끝나는 무렵이라 바쁜 주인장이 자세하게 건물 내 외부를 소개해 주어 기쁘게 잘 보았다. 감사했다.난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좀 더 읍내를 둘러보기 위해 앞 쪽 골목 안에 보이는 교회로 갔다. 오래된 교회의 맛이 나는 종탑이 보기에 좋아 찾아 간 것이다. 1920년에 세워진 ‘문경교회’다.
현재의 본당은 1959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하는데, 시멘트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고, 강에서 주워온 큰 돌과 시멘트를 혼합하여 지은 것이 보이게 무척 좋았다. 외부에 드러난 돌들이 어딘지 모를 강고함이 느껴지는 것이 인상적이라 마침 교회를 지키고 있던 전도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건축 당시의 흑백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면서 수천 명에 달하던 신도들이 돈과 인력으로 직접 지은 교회라 지금도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했다. 광산 도시였던 문경은 당시 초등학교의 학생 수만도 3,000명에 달했는데, 지금은 150명 내외로 줄었고, 교회의 신도수로 지금은 100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당시를 생각하면서 사진을 보고는 건물 안팎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미 교회 건축 전에 창고로 쓰고 있던 부분을 그대로 두고 앞쪽으로 교회를 증축한 흔적을 비롯하여, 앞 건물로 옮겨져 다시 세운 낡은 종루도 녹슨 철에서 풍기는 정취가 보기에 좋았다.
마당도 넓고 큰 나무도 있고 사택이며 예배당도 아름답고 큰 교회였지만, 현재는 지역에 인구가 많이 줄어 쇠락한 듯 보이는 것이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교회 주변에는 수많은 벽화들이 있어 보기엔 참 아름다웠다.문경교회를 둘러 본 나는 교회 주변을 산책했다. 처음엔 단순히 교회 주변에만 몇 개의 벽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산책을 하다 보니 온통 벽화투성이다. 대략 봐도 100개는 되어 보이는 벽화에는 문경을 알리는 사과, 예전의 광산도시의 분위를 표현한 광부 그림, 쥐와 오리, 농부 등등 골목골목 그림이 상당히 많았다.문경읍의 중심이 이제는 인적도 드물고 볼품이 없어 2~3년 전에 그림으로 새롭게 장식을 한 것 같았다. 그림을 둘러보기 위해 산책을 한참 하고는 문경새재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가서 시간표를 보니 정말 방금 전에 버스는 떠났고 다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냥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터미널 앞 모퉁이에 있는 ‘영생당 약국’에 눈에 들어와 안으로 들어갔다.내 눈에는 일본식 건물 같아서 약사에게 물어보니 지은 지 50~6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 있는 행정서사, 인테리어 사무실은 80년 정도 되었는데, 한번 살펴보라고 하여 앞뒤를 살펴보았다. 그곳은 오래된 것 같기는 한데, 별로 볼품이 없었다. 약국에서 빌려 쓰고 있는 사무실이라 그런지 관리는 잘 안 되고 있는 듯 했다. 난 주인장의 허락을 받아 마당과 집 안쪽을 더 살펴보았다.여든이 다 된 약사분이 30년 넘게 운영하는 곳이라 카드결제도 안 되고, 약국 내부의 자재도 전부 오래된 목재로 되어있었지만, 드라마 촬영장의 세트처럼 과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문경을 찾는 외국인이나 사진작가 들이 방문하면 주로 약국의 안팎을 전부 보고 가는 경우가 많고, 가끔이지만 신문 잡지나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 피로회복제를 한 병 사 마시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돌아서 나왔다.
입구의 창에 약이라고 쓰여진 큰 글씨가 빨간색이 아니라서 좋았다. 가끔 약국을 지날 때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위급한 상황에 약국을 잘 찾으라고 그런지는 몰라도 늘 빨간색으로 무시무시하게 쓰여진 약이라는 글씨가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빨간색으로 크게 쓰여진 약을 먹으면 치료는 커녕 먹고 죽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여기는 노란색이라 더 정겨운 것 같다.이제 문경새재 방향으로 진짜 길을 잡아 걷는다. 그런데 읍사무소 앞을 지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살던 ‘청운각(靑雲閣)’이라 집이 있다는 큰 안내판을 발견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가 1937~40년 경 교사로 잠시 문경에 머문 적이 있는데, 당시의 하숙집이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초등학교 동기인 규진이의 춘부장께서 문경초등학교 다닐 때 박정희가 담임선생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기구나. 규진이 아버님은 박정희에게 배워서 그런지,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대구사범을 졸업하시고는 문경, 영주, 예천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신 적이 있다. 아무튼 난 문경초등학교 앞에 있는 박정희의 교사시절 하숙집인 청운각으로 갔다. 이곳은 그가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재의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37년 4월부터 1940년 3월까지 거처했던 하숙집이다. 1976년 문경초등학교 동문회장이었던 김종호씨가 매입하여 보수한 후 문경초등학교에 기부했으며 현재는 문경시가 관리하고 있다. 대지 1,079㎡, 총면적 78.7㎡의 초가집으로, 박정희와 육영수의 영정과 교사재직 당시 찍은 사진·책상·가방 등의 유품이 있다.문경시는 지난 2012년 6월 청운각 주변에 박정희 사당과 기념관을 갖춘 공원을 추가로 조성해 시민과 관광객에게 개방했다. 17억 원의 사업비로 2년간의 사업기간을 거쳐 기존 청운각 부지 1천79㎡를 2천892㎡로 확장하고 청운각에 마련돼 있던 분향소를 새로 건립한 사당으로 옮겼다.
사당 옆에는 기념관, 기록영상실, 관리사, 화장실, 공원, 주차장 등을 조성했다. 마당에는 박 전 대통령이 교편을 잡았던 문경초등학교 100회 졸업 예정인 5학년 학생들의 장래 희망과 포부를 도자기 타일에 새긴 500개의 박석(薄石)이 깔려 있다. 이어 중앙에는 북 치고 장구 치는 아름다운 대동 세상을 표현한 북과 장구 형상의 상징물이 자리 잡았다. 이는 주역 상경의 마지막인 30번째 리괘에 해당되는 말로서 험난함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혁신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사당에는 홍익대 서양화가 조국현 전 교수가 그린 박 전 대통령과 한국미술협회 금천지부장인 정기창 화백이 그린 육영수 여사의 초상화 영정이 있다.기념관에는 생존하고 있는 박 전 대통령 제자들의 육성이 녹음된 '박 대통령 이야기'와 대통령 유물 및 자료, 영상자료 등을 볼 수 있으며, 관련 도서와 기념품도 팔고 있다. 사당과 기념관 사이에 조만간 박 전 대통령 흉상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청운각은 박정희 서거 전인 지난 1978년 경상도 보존 초가옥 1호로 지정됐다. 현재 문경에는 박정희의 생존 제자들이 20여명이나 거주하고 있다. 문경시는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거듭나 더 많은 추모객과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 생각에는 지금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역사자원이 큰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후에도 지자체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오히려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 조성한 기념물이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솔직히 궁금하다.난 사실 너무 인공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청운각을 둘러보면서 기분이 그랬다. 그리고 특이한 모양으로 우물 안에서 자라 오른 오동나무를 애써 ‘박근혜 오동나무’라고 이름을 정한 것도 그랬다. 아무튼 주마간산으로 청운각을 둘러보고는 화장실에 갔다가 길 건너 ‘청운주막집’으로 갔다.
사실 배가 고파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이곳에 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붙어 있는 박정희 사진과 신문자료, 글씨 등이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잠시 내부를 둘러보고는 나왔다. 박 대통령이 자주 애용하던 음식점인 것 같았다. 술도 팔고 해서 가끔 이곳에서 탁주를 한 사발하면서 이런저런 토론을 하면서 보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 본다. 술과 밥은 다음에 와서 하도록 하자.벌써 오후 3시 30분이다. 이제는 문경새재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새재 가는 길목에 있는 도자기를 굽는 ‘영남요(嶺南窯)’ ’문경도자기전시관(聞慶陶瓷器展示館)‘ ’문경유교문화관(聞慶儒敎文化館)‘을 순서대로 둘러보기 위해 3km정도를 걸어서 갔다. 무척 덥고 눈도 부시다. 목도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가장 먼저 당도한 곳은 영남요다. 도자기의 고장 문경에는 동로면 인곡리에서 조선 초기부터 도요의 역사가 시작되어 현재 10여 개의 도요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조금씩은 다르지는 때로는 같은 백자, 진사대작, 분청사기대작, 다완, 다기 세트 등이 생산되고 있다.
문경 자기는 특히 나무의 재를 이용하여 유약을 만들고, 전통 가마에 장작불을 지펴 구워내는 고전 방식 그대로의 제작 과정을 지키고 있어 자기의 깊은 멋이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안리에 7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기능보유자인 김정옥의 영남요를 비롯하여 천한봉의 문경요, 김억주의 황담요, 이정환의 주흘도요 등 10여 곳이 문경을 대표하고 있다.
여러 군데의 도예촌에서 나온 우수작들은 문경도자기전시관 등에 전시되어 있으며, 자기 홍보와 판매를 위해 찻사발축제와 도자기에 관한 강좌와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는 체험 행사도 자주 열리는 편이다.문경에서는 특히 오늘 방문하게 되는 영남요와 천한봉의 문경요가 제일 유명한 편이다. 문경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내는 방법에 따라 토기, 도기, 자기로 나누어지는데, 백토 등이 혼합되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을 자기라고 하며, 사기장은 사옹원(司饔院)에서 사기를 제작하던 장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영남요의 주인인 백산 김정옥 선생은 1942년 문경읍 관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 김취정 선생이 관음리에서 사기장 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200여 년간 사기장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양친에게서 자기 제작기술을 전수받았으며, 18세가 되는 1960년도부터는 홀로 물레를 돌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려운 살림형편으로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집안일을 도우며 사기장 일을 시작했다. 부친이 타계한 이후 일을 그만둘까도 고민하다가 현재의 터로 이전하여 영남요를 짓고 가업을 계승하기에 이르렀다. 18세부터 본격적인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 그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집스럽게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지금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발 물레를 고집하며 유약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배합까지 모두 전통을 지키며 문경자기의 은은한 미(美)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으로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조선백자의 전통성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자기를 구울 때도 장작 가마인 망뎅이 가마만을 사용하고 장작 또한 적송만을 사용한다. 선생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에서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7대째 이어져 내려온 가업은 아들인 경식까지 8대째로 이어지고 있으며 손자인 지훈군 역시 경기 이천의 도예고에 다니고 있어 9대의 맥을 이어지고 있다. 지훈군은 2013년 문경전통찻사발축제 행사의 하나인 발물레 경진대회 학생부에서 3등을 차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그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청화백자 기술은 소박하면서도 고고한 멋을 느낄 수 있고 정호다완에서는 정갈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난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배가 고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문경유교박물관 큰 길 건너편에 있는 작은 순두부 전문점에서 늦은 아니 이른 저녁으로 순두부로 먹었다. 너무 배가 고픈 가운데 먹은 음식이라 짜장 맛있게 먹었다. 더운 가운데 물도 한 모금 마시고 않고 4시간 넘게 다녀서 찬물도 5컵 이상은 마신 것 같다. 겨우 부른 배를 다시 부여잡고는 길을 좀 더 걸어 문경도자기전시관으로 이동했다.문경읍 진안리에 있는 도자기전시관은 조선 초기 분청사기도요지로 유명한 문경 도자기를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문경도자기는 주로 서민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꾸임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양을 갖추고 있어 우리 민족 고유의 순수한 멋과 투박한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전시관에는 문경 도자기의 역사와 제작과정 소개, 지역에서 출토된 자기류와 지역 도예인의 혼이 깃든 작품, 찻사발축제 공모 수상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은 총면적 1,055㎡의 지상2층, 지하1층 규모로, 토기, 청자, 백자, 근·현대 도자기와 수석을 전시하고 판매하며 실습 체험장과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단체 혹은 개인이 현장에서 체험을 하면서 만든 도자기를 나중에 가마에 구워 택배로 보내주기도 한다. 아울러 건물 뒤에는 문경의 전통가마인 망댕이가마, 16세기 백자공방이 설치되어 있어 좋은 볼거리다. 전통 망댕이가마는 우리 특유의 칸 가마로 길이 20~25cm 사람 장단지 모양의 진흙덩이로 만들었으며, 외형은 봉통, 5~6개의 요리칸으로 구성되고 가마의 윗부분은 반구형과 약15도 경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마외벽은 짚을 섞어 두껍게 바르고 내벽은 진흙물로 매흙질을 한 것이 특징이다.난 전시관을 재미있게 둘러보았고, 1층 다실에서는 차도 한잔 얻어 마셨다. 지역에서 나는 멋진 자기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실내 전시실은 전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사진 좀 찍게 해주지 말이야. 이어 바로 옆에 있는 문경유교문화관으로 이동하여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각종 설명판·모형·영상·구조물 등을 통해 유교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문경은 예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로서 영남과 기호지방 선비들의 만남의 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퇴계 이황, 백담 구봉령, 학봉 김성일, 서예 유성룡 선생 등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나들던 문경의 유교 세계를 문화관은 담고 있다. 문경에는 아직도 이들이 다녀간 흔적이 문경새재 주변과 진남, 선유동 지역이 남아있으며, 비록 특출한 인물은 아니지만, 문광공 홍귀달, 청대 권상일, 부훤당 김해 등 선비의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문경에 남아 있는 유교문화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이곳 문화관은 2004년 준공되었으며 건물총면적 873㎡의 지상 2층 건물이다. 1층은 제1전시실·제2전시실·전통 유교문화체험실, 2층은 제3전시실·제4전시실·자료실·관리사무실로 구성되어 있다.
선비문화를 주제로 한 제1전시실은 유교의 역사와 선비의 생활에 대한 설명판과 문방사우 전시물, 사랑방을 재현한 모형 구조물, 관련 영상물이 갖추어져 있다. 선비문화는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와 생활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보다 구체화되었고 정착되었다. 규방문화를 주제로 한 제2전시실은 안방문화라고도 하고 여성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자수를 놓은 의복과 규방자수 물품 전시물, 규방을 재현한 모형 구조물, 규방 문화생활·생활문화 설명판으로 꾸며져 있다. 문경의 유교문화를 주제로 한 제3전시실은 문경향교의 유물과 문경의 유교유적 및 유학자를 설명하고, 서당을 재현한 모형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문경에는 현재 조선 초에 세워진 문경향교가 있고, 서원으로는 효종6년에 세워진 근암서원과 숙종29년에 건립된 소양서원이 있다. 이외에 영빈서당, 반곡서당이 아직도 남아있다.
문경의 풍류문화를 주제로 한 제4전시실은 문경의 유교문화와 역사에 대한 전시, 주암정 모형과 향음주례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탈속의 담백한 서정과 운치, 대쪽 같은 절의와 기개를 만나봄은 물론 조화와 풍요, 여유로움과 해학이 있었던 선비문화의 다양한 면면과 그러한 생활의 바탕이 된 누각, 정자, 집들을 살펴볼 수 있다. 관람객들은 유교문화 체험실에서 목판인쇄와 탁본 체험을 할 수 있다. 나름 공부가 되는 것 같아 천천히 보았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유교문화를 전시장을 한번 둘러보는 것으로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좋은 학습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여름방학에는 아들 연우와 함께 와야겠다.이곳까지 둘러 본 나는 다시 문경읍 방향으로 길을 잡아 향했다. 좀 전에 방문했던 영남요를 조금 덜 미처 진안리에 있는 ‘흙사랑’이라고 하는 작은 도자기 전문점이 있어서 방문했다.
문경에서 매년 전통찻사발축제가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문경 도자기는 생활자기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문경 자기는 말 그대로 조선의 백자를 재현한 것이나 차를 마시기 위한 다기류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쓰는 접시나 찻잔, 화병, 옹기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가끔 문경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애써 문경에 왔으니 생필품 자기를 구입하고자 하지만, 이런 물품이 없어서 실망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그런데 지난 2011년에 개업한 생활자기 전문점인 흙사랑은 문경에서 나오는 자기류는 아니지만, 수요가 있는 곳에 필요로 하는 가게가 생겨난다고 타 지역에서 나오는 생활자기를 구매하여 문경에서 파는 매장을 연 것이다.큰 길옆에 자리를 하고 있는 관계로 주차도 비교적 쉽고 찾기도 편한 곳이라 생각보다 사람들이 발길이 많은지 내가 잠시 머무는 사이에도 여러 손님이 왔다가고,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사가는 것이 바쁜 것 같았다.주인장인 김외순씨는 “문경 자기는 어떻게 보면 이런 식의 생활자기로 일부는 전환되어 수요를 맞추는 분위기로 갈 것 같다”고 한다. 백자와 다기를 주로 제작해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수요에 맞추는 주문 제작이 서서히 생겨날 것이라는 전망인 듯했다.
아무튼 나는 이곳까지 둘러보고는 다시 걸어서 문경읍내로 갔다. 6시가 다된 시간이라 무엇을 더 볼까 하다가, 우선 가은읍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터미널로 갔다.오후 6시50분에 가는 차가 막차다. 내일은 하루 종일 가은읍을 둘러 볼 예정이라 문경읍에서 잠을 자는 것보다는 일찍 가서 쉬고, 새벽부터 가은읍을 살피기 위해 막차를 타기로 결심을 했다.막차를 타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 오전에 갔던 오미자찐빵집으로 가서 간식으로 찐빵과 도넛, 만두를 먹었다. 오전에 제대로 찍지 못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특히 찐빵은 너무 맛있어 몇 개 더 사고 싶었지만, 더운 여름이고 내일도 가은에서 머물러야 하기에 일단 요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맛있게 찐빵을 먹는 사이 여자 손님이 한 분 오시더니 주인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문경새재에서 일하시는 분인데, 문경아리랑 노래를 무척 잘한다고 주인 아주머님이 노래 한번 하라고 성화다.
새재에서 일하는 ‘장효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분은 정말 걸쭉하게 ‘문경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을 비교하면서 한곡씩 했다. 같은 노래지만, 여성미가 느껴지는 음감과 남성미가 느껴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한 번에 들어보니 알 수 있다.녹음을 할까하다가 사진만 찍고 나중에 문경아리랑 전수자인 송옥자 선생을 만나면 녹음을 하는 것으로 하고 기분 좋게 노래를 즐기며 들었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에 물 박달나무 큰 애기 손끝에 놀아난다. 아주까리 피마지는 일 년에 한번 지름 머리단장은 나날이 하네. 우리 딸 일흠은 금쌀애기 동래 부산 김할량의 맏며느리 산천초목은 변하더라도 우리 동무는 변치마라. 너캉 나캉 정들었지 이웃집 노인이 요사로다. 수심은 첩첩한데 잠이 와서야 꿈을 꾸지~♪"무척 기분이 좋았다. 구성진 노래를 너무 잘하는 장효자씨를 만난 것이 반가웠다. “아리랑을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부친이 노래를 좋아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수준급”이라고 찐빵집 주인 아주머님 칭찬이 대단했다.
난 노래 소리에 취해서 길 가는 것을 잠시 잊고 있다가 황급히 찐빵 값을 주고는 7시가 다 되어 버스를 타고는 가은읍으로 이동했다. 20분 정도 거리는 이동 시간에 버스는 마성면을 거쳐서 가은읍에 닿았다.작은 소읍은 가은읍도 예전에는 ‘은성광업소’가 있어서 대단히 번창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생산기반이 거의 없는 농촌의 소읍이라 그런지 너무 황량했다.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왕이 나고 자란 곳으로 그의 집터와 사당, 탄생과 연관된 갈전리의 ‘금하굴’ ‘방짜유기촌’ ‘문경석탄박물관’ ‘가은 사극촬영장’ ‘철로자전거’ ‘오미자 와인’ ‘소양서원’ ‘봉암사’ 등이 유명한 곳이다.난 일단 읍내를 대충 둘러보고는 숙소를 정하기 위해 마을 끝 양조장 앞에 있는 여관으로 갔다. 그런데 이런 가은읍에 1곳뿐이라는 여관은 문이 닫혀있었다. 숙박을 하고 가는 관광객이 거의 없는 관계로 얼마 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런 큰일이 있나’ 막차를 타고 왔고 마을 둘러보느라 시간을 보낸 관계로 다시 문경읍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택시를 타는 방법뿐이고, 노숙을 하기에도 그렇고, 아무튼 눈앞이 캄캄하고 다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여관 옆 작은 가게로 들어가 음료수를 한통 사고는 물을 마시며 “혹시 잘 곳이 있으냐"고 물어보았다.
“여관이 망해서 가은은 잘 곳이 마땅하지 않지만, 옆집에 민박을 하니 한번 가보세여”라고 한다. 급히 물을 마시고는 옆집으로 가보니 다행히 방이 있다고 한다. 남자 혼자 왔다고 하니 작은 방을 하나 내어준다.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씻고 몸을 누이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아 2만원을 주고 방을 잡았다. 하루 종일 걸었다. 서울 집에서 아침으로 먹은 토마토2개에 선식 한 사발, 문경에서 먹은 찐빵과 크로켓 각 1개, 오후 4시 경에 먹은 순두부 정식, 그리고 6시 경에 먹은 찐빵과 도넛 각1개, 만두2개가 오늘 먹은 것의 전부다. 원래 많이 먹지는 않지만, 하루 종일 더위 속에서 걷고 거의 먹지도 않아서 그런지 탈진 수준이다. 난 샤워를 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씻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더운물이 나왔다 안 나왔다를 계속 반복한다. 정말 겨우 씻었다. 아무튼 샤워를 마친 나는 잠시 TV를 통하여 뉴스를 잠깐 보고는 이내 잠들었다. 아무리 숙박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읍 소재지에 여관도 하나 없는 곳이 있다니 놀라운 가은읍이다.
하루 종일 강행군을 했던 탓에 너무 피곤하여 9일(일) 아침6시까지 너무 잘 잤다. 역시 피곤함이 수면제인 것 같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모자 쓰고 선글라스, 선크림을 바른 다음 밖으로 나왔다. 민박집 주인내외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고 있지만, 문이 잠겨 있어 그냥 나왔다.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벌써 이웃한 ‘가은떡기름방앗간’은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다. 혼자 일하고 계시는 주인 아주머님은 나를 만나기 무섭게 “총각, 이 떡 상자 좀 들어서 옆에 올려 주세여”라고 했다. 난 40대 중반에 총각이라는 기분 좋은 말을 듣고는 웃으면서 떡 상자 5개를 입구의 마루 위로 옮겼다.조만간 떡을 부탁한 사람이 찾으러 올 시간인가 보다. 부지런도 하시지. 벌써 한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작업을 준비 중이니 말이다. 주인 아주머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농사를 짓다가 18년 전부터 아들과 함께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들이 논으로 가서 혼자 일하고 있는데, 농사일보다는 편하고 매일 같이 돈이 들어와서 살만하다”고 한다. 조금 떠들고 있는 사이에 손님이 왔다. 콩, 쌀, 누룽지 등을 가지고 온 아주머님이다. 미숫가루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나왔다고 한다. 부지런도 하셔라. 난 조금 더 방앗간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왔다. 예전 고향 마을에서 방앗간을 하셨던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 전에 양복점도 하시고 다른 장사도, 정치도 하셨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방앗간을 돌리시던 조부의 얼굴만 간간히 떠오른다. 이제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우선 전체적으로 읍내를 살펴보기 위해 읍내를 관통하는 영강을 따라 조금 걷다가 견훤교를 건너서 아침 햇살을 맞는다. 참 기분이 좋다. 아침 공기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사진도 한 장 찍으니 전체적으로 분위기도 싱그럽다. 강을 건너 갈전리 방향으로 길을 잡아 걷는다. 벌써 사과는 엄지손톱보다 크게 자랐다. 문경은 사과가 무척 많이 나는데, 가을에 한 달 동안 사과축제를 한다. 물론 맛도 무척 좋다. 사과 밭을 지나 다시 길옆에 있는 호두나무를 발견했다. 호두 크기는 벌써 사과보다 두 배는 되는 듯하다.
어린 시절 덜 익은 호두를 따서 안쪽의 핵을 먹기 위해 벽에 문질러서 까먹는 기억이 났다. 온통 오디를 먹은 것과 비슷하게 손에 파란 물이 들어 어른들에게 혼나던 기억도 떠올랐다. 갈전리 마을까지 걸어서 마을회관을 둘러보고 산언덕까지 갔다가 돌아서 나왔다.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했더니 배가 고프긴 한데, 작은 읍이라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을 발견할 수가 없다. 밥심으로 사는데, 식사를 거르기엔 오늘도 강행군이라 읍내를 배회한다.잠시 원두막에 앉아 보기도 하고, 읍사무소 앞을 지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발견한 곳이 ‘가은성당(加恩聖堂)’이다. 어제 본 문경성당 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더 이쁘고 멋지다. 가은성당은 지난 1957년 점촌 충현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고 한다.현재의 성당 건물은 지난 1961년에 사제관과 함께 준공되었다고 한다. 입구의 유치원과 안쪽의 사제관 등이 너무 정갈하게 만들어진 예술품처럼 보이는 것이 좋다. 신도는 많지 않은지 너무 조용하고 규모도 작아서 멋스럽기까지 하다.
가은성당을 보고서 좀 더 가다 보니 오늘은 가은장날(4·9일)인지 장터 앞이 상당히 북적이고 있다. 가은읍은 지난 2011년 여름 기존의 전통시장을 2년 정도의 개보수 공사를 통하여 ‘가은아자개장터’라고 하는 체험형 문화관광시장으로 개조하여 문을 열었다.
우선 기존의 전통시장은 새로 리모델링을 하여 상가를 새로 수리하기도 하고 짓기도 했으며, 숭례문 복원에 참여하기도 했던 석노기씨가 직접 제작한 전통 대장간을 만들어 각종 농기구제작 및 생활용품 전시와 판매를 하고 있다.아울러 문경 전통의 도자기 만들기 체험이 가능하도록 도자기관을 만들어 체험과 전통 차 시음도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요즘은 보기 힘든 칼국수 체험 장도 만들어 스스로 반죽도 하고 칼국수도 빚고 썰어볼 수 있는 경험도 할 수 있도록 했다.또한 방앗간도 만들어 물레방아, 디딜방아, 절구, 맷돌 등 전통방앗간에 대한 체험은 물론 현대식 방앗간도 설치하여 비교가 가능하도록 했다. 여기에서는 떡메치기, 두부 만들기 체험도 해볼 수 있다.
특히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은 문경특산물판매장으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곳이다. 특히 오미자가 유명한 곳이라 오미자 와인과 오미자청, 오미자 비타민, 민들레 차, 민들레 진액, 각종 건 버섯, 블루베리 가공품, 사과 식초, 썰어서 말린 사과, 솔잎 분말, 오미자 당절임 등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좋다.물론 전통시장인 관계로 장터 먹을거리도 충분히 접할 수 있다. 전통주막에서는 막걸리와 빈대떡, 각종 전류, 찐빵과 만두 등을 먹을 수 있고, 산채비빔밥과 장터국밥 등도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가마솥에 직접 끓인 것을 맛볼 수 있다.난 안내소를 갔다가 쉼터에 앉아 쉬어보기도 하면서 시장을 전체적으로 둘러보았다. 특산물판매장에서 비타민 여러 통을 산 다음, 지역에서 나오는 유곡동에 있는 오미자청과 가은읍에 있는 오미자 와인 공장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나왔다. 조만간 기회가 되면 두 공장을 한번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장을 둘러보는 재미는 상당했다. 이제 9시가 다 되어 아침을 먹기 위해 시장 안에 있는 산채비빔밥집 ‘산채마을’로 갔다. 시골이라 아침을 파는 곳이 많지 않아 식사도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 시장에 오니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같다.비빔밥을 시켜두고 물을 한 사발 마시고는 잠시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 한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 앉아서 소주를 한 병 시킨다. 경황없이 앞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난 별 부담 없이 동석을 허락했고 같이 소주를 한잔했다. 이어 들어온 할머니도 동석을 하여 아침부터 소주로 속을 채웠다.이곳 장터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로 “본격적인 영업을 하기 전에 한 잔 술로 잠시 휴식도 취하고 힘을 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치 안주에 소주를 마시기가 부담스러웠던지 이내 한 할머니가 흑 두부를 한모 사와서 두부와 김치를 안주로 소주를 전부 마셨다.
처음 보는 사람과 동석을 하여 소주를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아침부터 소주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아무튼 나는 군소리 없이 그분들과 소주를 하고는 아침식사로 비빔밥을 한 그릇 했다. 내가 식사비를 계산하면서 소주 값도 같이 내고는, “두부 한 모를 같이 먹은 값으로 제가 소주 값은 내지요”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약간 취기가 올랐지만, 아침부터 나와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빈속에 나오셨는지, 두부와 김치로 아침을 하고 소주로 속을 달래는 마음이 서글프기는 했지만, 우리네 시골 아주머니들의 현실이기도 한 것을...... 조금은 알듯했다.밥을 많은 먹은 나는 힘을 내어 아침 일찍 갔던 갈전리 방향으로 다시 길을 잡아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鍮器匠) 이봉주 명장이 운영하는 ‘방짜유기촌’으로 갔다. 30분 이상 걸어서 산중턱에 있는 방짜유기촌에 올라갔더니 토·일은 오후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먼 길 왔는데 차라리 문을 열지 말지, 오후에나 문을 연다’고 하니 더 좌절하게 된다.
‘이런 다음에 다시 오기도 힘든데, 오후에 다시 와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그냥 안팎을 도둑고양이처럼 살펴보고 가는 것으로 하고는 크게 둘러보았다. 실내는 대부분 문이 잠겨있어 볼 수 없었지만, 뒤편 작업장은 청소를 하는 중이라 잠시 가공 준비 중인 금속 덩어리와 실패작들을 눈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앞에 있는 송덕비도 보고, 유기로 만든 종도 보았다. 종은 유기로 잘 만들어져 있어 느낌은 체감할 수 있었다. 이곳의 유기장 이봉주 선생은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20대 초반에 월남하여 서울에 있는 유기공장에 들어가 처음 일을 배웠다고 한다.이후 서울 용산구에서 유기 만드는 일을 계속하다가 지난 2002년 이곳 문경시 가은읍으로 내려와 약 4만 평 부지에 공방과 기숙사 등을 마련했다. 현재 대구에는 박물관을 준비 중에 있고, 이곳 문경에서는 제자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방짜유기는 현대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신비의 그릇이다. 인체에 나쁜 성분을 만나면 변색되며, 독성이 없고, 항균·살균 효과가 탁월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한 물건이라고 한다. 구리와 주석 비율을 78대 22로 섞어 만든다. 보통은 구리에다 주석을 17%까지 섞을 수 있는데 우리 방짜 기술은 특이하게도 22%까지 합금해낸다.금속을 혼합하는 과정에 비율이 정확하지 않거나 이물질이 들어가면 불에 달구어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가 늘어나지 않는다. 또한 쉽게 깨지거나 터져 버린다. 정확한 합금이 이루어져야만 방짜유기 특유의 색과 광채가 나온다고 한다.내·외부를 전부보지는 못했지만, 느낌만으로도 다시 한 번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길을 좀 더 서쪽으로 잡아 후백제 시조 견훤(甄萱)왕이 태어나고 자란 집터와 그의 탄생신화와 관련이 있는 갈전리 ‘금하굴(金霞窟)’로 갔다. 아침부터 날이 더워지고 있어 걷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20분을 넘게 걸어 길을 묻고 물어 겨우 금하굴을 찾았다. 이곳은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왕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석회암층에 발달한 석회동굴로 깊이는 23m이며 안타깝게도 동굴 내부와 바닥에는 두껍게 진흙이 덮여 있어 석순, 종유석 등의 동굴생성물은 확인할 수 없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동굴처럼 보이는 이굴이 후삼국의 영웅 중에 하나인 견훤왕의 출생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나는 잠시 경건해진다. 이곳 금하굴에는 전주 견씨(全州 甄氏)의 시조인 견훤왕의 탄생설화가 전한다. 갈전리 아차마을의 한 규수의 방에 밤이면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 정을 통한 후 새벽이면 사라지기를 여러 번, 처녀는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놀라 규수에게 초립동의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도록 시킨 후, 실을 따라가 보니 금하굴에 커다란 금빛 지렁이가 있었다. 그 후로는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10개월이 지나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견훤이다. 견훤은 서기900~935년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했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에 고려 왕건에게 투항했다. 왕건에게 자신의 아들인 신검왕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는 본래 이(李)씨이며, 상주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의 장남이다. 상주군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신라 백성으로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를 점령한 이후부터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900년 완산주에 입성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살해한 후, 효종의 아들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경순왕은 친 고려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신라의 민심은 고려의 왕건에게 기울어져갔다. 929년 고창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 이북의 30여 군현, 동해연안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이듬해 왕위계승문제로 맏아들 신검왕이 아버지인 견훤왕을 금산사에 유폐했으나 탈출했다. 그리고 스스로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 칭호와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아들인 신검왕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나는 금하굴을 둘러 본 다음, 마을 안쪽에 있는 견훤의 옛 집터를 살펴보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분명 금하굴, 금하정, 숭위전, 견휜의 집터를 알리는 문구와 표시가 있었지만, 도저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변변한 표지판도 안내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마을 주민들에게 길을 묻고 물어 겨우 찾아간 옛 집터에는 소를 키우는 우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내문도 없는 곳에 조금 큰 바위가 하나 있어 ‘이곳이 옛 집터에 있던 바위구나’라고 상상을 해 볼 수 있었다.‘천 년 전 영웅은 가고 없고 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으니 세상사 얼마나 허무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을 입구에 금하굴이 있고, 그 앞에 지난 2002년 문경시가 건립한 사당인 ‘숭위전(崇威殿)’이 있어 추가로 그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숭위전에서는 매년 4월 10일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견훤의 향사가 열린다. 사실 견훤왕릉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으나 그의 혼을 모신 사당은 그 동안 전국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그의 출생지인 문경시에서 그의 탄생설화가 있는 가은읍 금하굴 주변에 사당을 세운 것이다. 사당은 정면3칸, 측면1.5칸의 맞배지붕 형식이며 부지면적 6.6평에 건평 5평 정도의 작은 건물이다. 비록 볼품은 거의 없는 작은 건물이지만, 이곳에 있어 의미가 있는 곳이라 난 지금은 잊혀진 영웅 견훤왕을 향해 묵념을 하고 돌아 나왔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금하굴 주변은 너무 초라했고, 숭위전 역시도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입구의 안내판에는 옛 집터가 있다는 표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안쪽 어디에도 구체적인 안내판도 표식도 없어 집터를 찾아서 헤매야했다. 어렵게 찾은 집터는 우사로 변해있어 황당했다. 또 하나 금하굴 앞에 있는 ‘금하정’이라는 정자는 이곳에 살던 순천 김씨들의 정자다. 견훤과도 금하굴과도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위치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약간의 불협화음(不協和音)을 내는 악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재미난 곳이다.마을을 살펴본 나는 시냇물을 따라서 다시 가은읍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6월 초순의 더운 날씨에 아주머니 두 명이 다슬기를 잡고 있었다. 물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로 조금씩 잡고 있는데, 온 식구가 한 끼의 식사량은 될 정도로 잡히는 것을 보니 이곳 물이 맑기는 맑은가 보다.
나도 신발을 벗고 같이 잡아보고 싶었지만, 어린 남자아이도 하나 없는 곳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 같아 사진만 찍고는 돌아서 다시 길을 걸었다. 아침에 잠시 걸었던 영강을 따라서 30분 넘게 걸어서 읍내에 닿았다. 정말 덥고 힘들다.가은읍사무소를 잠시 둘러 본 다음, 점심을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시장으로 가서 약간의 과자와 음료수를 사서 먹고 마시고는 잠시 쉬었다. 더워서 힘들었지만, 저녁까지 행군을 하기 위해서는 쉬면서 에너지 보충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일단은 석탄박물관 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잠시 가다가 작은 찻집이 있어 들어갔다.더운 날에 최고의 주전부리 중에 하나인 팥빙수를 시켜 시장에서 사온 과자랑 같이 먹으면서 한참을 쉬었다. 팥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빵이나 빙과류는 언제나 팥이 든 것을 찾는다. 이곳의 팥빙수도 시원하고 맛있다. 많이 쉬었다. 이제 다시 길을 걷자.이어서 보이는 곳이 ‘가은역(加恩驛)’이다. 가은역은 가은선의 종착역이다. 개업 당시에는 가은면과 마성면에 걸쳐 있다고 하여 은성탄광(恩城炭鑛)으로 불리던 광업소 앞쪽에 있다고 하여 은성역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지난 1959년에 가은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에서 가은선 폐선으로 폐역이 되었고, 이후 문경시가 가은선을 매입했다. 현재는 문경시와 한국모노레일이 지난 2007년 업무협약을 맺고 기존 가은선 노반과 선로를 보수하여 가은-진남역 간 9.6㎞ 구간에 한꺼번에 200여명이 탈 수 있는 1대의 미니관광열차(도록코 열차, 광산이나 토목공사장에서 사용되던 광차(鑛車),mine tub)를 운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역사는 지난 2006년 등록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1955년 건립한 역사는 출입구에 박공지붕을 올리고 측면에 대합실을 배치한 당시의 전형적인 간이역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입구 양쪽으로는 기다란 수직 창을 배치했다. 그래서 작지만 아름다운 역사 중에 하나다.이후 주거지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립 당시의 원형이 다소 훼손되었다. 석탄 산업과 관련된 역사로 희소가치가 있으며 8·15광복 이후 건립한 철도 역사의 건축 기법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건축적·철도사적 가치가 있다.
난 이런 간이역이 무척 좋다. 간혹 쓰이지 않는 간이역이나 학교 교실을 보면 개조하여 갤러리나 공연장, 찻집, 혹은 집으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현실에 맞게 쓰임새를 조금만 바꾸어 고전미가 있는 새로운 시설로 용도를 변경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은역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가은역을 둘러 본 나는 ‘문경석탄박물관’ 방향으로 향한다. 희양산에서 발원하는 영산천이 봉암사를 지나 석탄박물관 부근에서 영강과 아우라지를 이룬다. 박물관 앞 영산천 끝자락에 작은 보를 만들어 ‘수상자전거 체험장’을 만들었다. 작년에 왔을 때 진남역 앞에서 연우랑 같이 수상자전거를 탄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도 똑 같은 수상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본 것이다. 어린 아이들만 타고 있는 경우도 있고 가족 단위로 여러 명이 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앞 쪽 다리 난간에 작은 인공분수를 만들어 약간의 물을 맞아가면서 즐겁게 타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이번 여름휴가 때 연우랑 같이 와서 한번 타야겠다. 그리고 입구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 있는 견우와 직녀 동상과 오미자 조형물이 보인다.
20~30평정도 되는 작은 규모의 ‘오미자 공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지역 특산품인 오미자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나무에 달려 있는 오미자의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도 멋있다. 이곳에 견우와 직녀 동상은 왜 있을까? 했더니 자세한 설명문이 쓰여 있다.칠월칠석에 오작교에서 한번 만난다는 견우와 직녀는 까마귀와 까치가 지상에 있는 오미자 넝쿨로 다리를 만들었다. 사실은 오미자넝쿨이 오작교의 자재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재미도 있고 기발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작교와 오미자를 적절하게 결합한 형태의 발상이 좋은 공원이다. 조형물을 통하여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공무원들의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나도 큰 공부가 되었다. 이제 입장권을 구매하고는 문경석탄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박물관을 보고서 위쪽에 있는 ‘가은촬영장’까지 이동시 모노레일을 타는 경우와 도보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도보로 이동하는 것으로 하고 입장권을 샀다.
가은읍 왕릉리에 위치한 석탄박물관은 1938~1994년 사이 탄광이었던 은성광업소 자리에 지난 1999년 석탄의 역할과 탄광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고 보존, 전시하기 위해 곳에 설립된 전문박물관으로 석탄 운반 기관차 등 광산 장비와 유물 6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1~2층 중앙전시장과 야외 전시장, 갱도 전시장, 광원사택 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선 길이 230m의 갱도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연탄 모습으로 꾸민 외관이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다. 부지 5만 136㎡, 연면적 1805.44㎡ 규모로 1층 전시실에는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형성, 석탄의 기원이 되는 고생대 그리고 석탄이 형성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 밖에도 1970년 지하 600m에서 캐낸 괴탄과 화석·황철석·자수정·규화목·규장암 등의 암석류가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석탄운반용 증기기관차와 연탄제조기·채탄도구·측량장비·통신장비·화약류·광산보안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탄광촌 점심시간 모습과 막장 굴진작업 광경, 갱도작업 모습, 석탄선별 작업을 다루는 실물 크기 밀랍인형을 전시해 실제 작업 장면을 묘사해 놓고 있다. 매직비전과 영상관도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폐석을 쌓아 놓던 경석장, 갱내에서 사용하는 각종 자재 및 갱내에서 캐낸 석탄을 실어 나르는 광차(Coal car), 갱내에서 사람을 태워 다니는 객차인 인차(Man car), 광산에서 쓰던 기관차, 광차에 적재된 석탄이나 경석을 내리기 위해 광차를 전도(뒤집어서 탄을 쏟아내게 함)시키는 장치인 티플러(Tippler)가 전시되어 있다.이외에도 경사로 이루어진 갱에서도 광차 또는 인차를 끌어 올리거나 수직갱에서 케이지나 스킵을 메달아 올리는데 사용된 150마력의 권양기(Hoist), 갱도 안으로 인공으로 공기를 만들어 넣어주고, 착암기와 오거드릴 등 채탄과 굴진 기계를 움직이던 공기압축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갱도 전시장에서는 갱내 사무실, 기계화 채탄 막장, 현대식 굴진 막장, 갱내 식사 장면, 사고시 구호활동 등을 보여준다. 탄광 갱도가 붕괴되는 사고를 소리로 재현하기도 한다. 탄광 광부들의 직업병인 진폐증 순직자 위령비도 있고 1970년 건축된 25평의 광원사택도 복원해 놓았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1960~70년 은성광업소 사택을 배경으로 광부들의 생활상을 그려 놓은 사택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마음도 짠했고 눈물도 났다. 우리네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났지만, 막장에서 일하던 광부들의 피와 눈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현재의 사택은 최근에 일부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 쓰던 사택을 전부 철거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과거 은성광업소의 사택을 그대로 보존하여 지금도 관광자원으로 쓰며 세계적인 광산촌 생활체험단지가 될 수 있는데, 전부 없앤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그리고 실제갱도를 활용하여 갱도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갱도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더운 여름이라 시원함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을까. 다들 존경스럽고 대단해보였다. 한 시간을 봐도 반도 보기 힘들 정도로 넓고 큰 박물관이지만, 여러 번 왔다간 나는 주마간산으로 보고는 언덕 위에 있는 ‘가은촬영장’으로 올랐다. 올 때 마다 모노레일로 올랐던 곳인데, 오늘은 그냥 걸어 올랐다.직선거리로 200m 정도인데, 더운 날씨에 기름 냄새나는 침목 길을 따라서 오르니 숨이 콱 막힌다. 원래 채탄장이 있던 아직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아까시나무가 대부분이고 큰 나무도 거의 없어 그늘 또한 없어서 걷는 것조차 힘들다. 배도 고픈 시간이다.
어렵게 올라가니 더운 날씨 때문이지 사람도 거의 없다. 물론 촬영도 없는 날이다. 이곳 가은촬영장은 주로 사극촬영을 많이 하는 곳으로 드라마 <연개소문> <대왕세종> <천추태후> 등 다수의 사극을 촬영한 곳이다. 위에 있는 1세트 촬영장의 고구려 궁궐과 신라 궁궐이 있고 초가들이 아주 많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2세트 촬영장의 안시성과 성내마을, 그 앞에 있는 3세트 촬영장의 요동성과 성내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난 위에 있는 촬영장은 아주 자세하고 보고, 덥다는 핑계로 아래는 지나가면서 사진 만 몇 장 찍었다. 수많은 드라마의 촬영지답게 고구려 및 신라 시대의 성내 모습이 사실적으로 꾸며져 있어 보기에는 좋았다. 그늘이 없고 덥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그래도 높은 곳에 올라 전망을 볼 수 있고, 약간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기분은 상쾌했다. 다음에 올 때는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이제 철로자전거 가은역 기점으로 가자.
철로자전거 가은역 기점으로 가는 길에 다시 수상자전거 체험장을 지난다. 아이들이 너무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에 나도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본다. 부럽다. 역시 여름에는 물놀이가 최고인 것 같다. 조만간 연우랑 문경에 오면 같이 이곳에 와야겠다.철로자전거 가은역 기점은 사실 현재의 가은역보다는 좀 더 앞에 있다. 대략 300m는 앞에 있는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단선인 철로를 이용한 것이라 회전을 하고 자전거를 돌리는 문제와 외부의 손님들이 많이 왔을 때 대기하고 쉬는 공간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아무튼 나는 길을 따라서 걷는다. 길옆 조금은 시끄러운 밭고랑에 파를 심고 계시는 아주머니 한분을 발견한다.
씨를 뿌려서 조금 자란 파를 잘 크도록 간격을 넉넉히 하여 다시 심는 것을 ‘정식’이라고 하는데, 이 작업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작은 파를 하나하나 심는 것을 처음 보아서 약간은 신기했지만, 도로 바로 옆이라 ‘먼지투성이 인데, 나중에 정말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그래도 작은 쪽파를 사다가 다시 밭에 심으면 큰 파가 된다는 사실은 좋은 공부가 되었다. 나중에 나도 집에서 한번 해 봐야겠다. 파 심는 아주머니에게 하나를 배운 나는 좀 더 길을 가다가 뽕나무 3그루를 발견했다.강가에 그냥 자라고 있는 주인 없는 뽕나무인데, 오디가 제철이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오디를 따서 먹었다. 어제도 문경향교 인근에서 오디를 왕창 먹었는데, 오늘도 오디를 엄청나게 먹는다. 강장제로 알려져 있는 오디는 간장과 신장의 기능을 좋게 한다. 갈증을 해소하고 관절을 부드럽게 하며 알코올을 분해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불면증과 건망증에도 효과가 있어 여름에 먹으면 특히 좋다. 내가 오디를 무척 좋아하는 이유는 특별히 달지 않는 은은함이 마음에 들어서다. 천천히 은은하게 다가오는 사랑이 좋듯 말이다.
오디를 먹고는 작은 철교를 건너 철로자전거 가은 기점에 도달한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사람도 거의 없고 조용하기만하다. 가은에서 진남역까지 왕복을 하는 철로자전거는 편도로 운행을 하는 관계로 1시간 정도씩 기다려야 한다.자전거가 갔다가 다시 오는 시간이 대략 한 시간 정도는 걸리는가 보다. 예전에 가족과 같이 탄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는 재미도 있고 여름에는 시원함도 좋았다. 조만간 한번 타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구경만하고 간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잠시 막걸리 한잔을 하고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다. 어제 숙박을 하려고 했던 여관 앞에 있는 양조장 쪽으로 길을 잡아 이제는 영업을 하지 않는 양조장 건물을 구경했다.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건축 당시에는 상당했을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층 창문이 운치 있고 멋스럽다. ‘요즘은 지방의 양조장도 인구가 줄어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았구나! 건물은 다른 용도로 활용이 되면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수가 있을 것 같다’
양조장까지 둘러 본 나는 이웃한 슈퍼로 가서 문경 특산품인 ‘만복 생 오미자 동동주’를 한 병사서 좀 마셨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여 막걸리 한 잔으로 속을 달래기 위해서다. 오미자까지 들어간 막걸리는 정말 시원하고 맛있다. 한잔을 하고는 가은터미널로 버스를 타기 위해 갔다. 시간은 5시 30분이고, 서울 가는 버스는 6시 30분이란다. 미리 표를 사고서 잠시 읍내를 더 돌아보려고 있더니, 이런 “현금으로만 표를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카드가 안 되는 곳이 아직도 있다니’ 당장 서울 가는 차표를 살 현금이 없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머니의 현금을 전부 털어서 점촌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읍내 구경 좀하고 저녁을 먹고 서울 가려고 했는데, 잔돈이 없어서 그냥 점촌으로 간 것이다. 버스는 30분을 달렸고 나는 점촌터미널에서 간단하게 분식으로 식사를 하고는 6시 20분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가은읍은 정말 재미난 곳이다. 읍 소재지인데도 여관이 없고, 버스터미널은 현금 거래만 한다. 놀랍기도 했지만, 이런 구식이 나는 좋다. 조만간 또 한 번 가은읍에 가야겠다.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를 발견한 듯하여 이번 문경 여행은 더욱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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