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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고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B.C.3세기경 헬리오폴리스의 대주교 이며 역사가인 마네토가 저술한 연대기에 기본틀을 두고 있다. 마네토는 상. 하 이집트를 통일한 최 초의 왕인 메네스 왕조로부터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정복한 B.C.332년까지를 총 31개의 왕조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179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원정대가 이집트 유적지를 탐사하면서 시작된 유물 발굴은 1854년 루브르 박물관의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가 사카라의 세라피움을 발견하면서 본격화되었고, 1882년 설립된 [이집트 발굴단]의 카터와 노먼 데이비스 등에 의해 보다 큰 업적을 남기며 진행되었다. 통일 이집트의 첫번째 수도인 멤피스와 중왕국 시대 아문신 숭배의 중심도시였던 테베, 오시리스신의 기념물이 남아있는 아비도스, B.C.1350년 아켄아텐왕이 아텐신 숭배를 주장하며 새로 건설한 '아케트 아텐(Akhetaten: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텔엘 아마르나 등에서 수많은 사원과 무덤 등이 발견되었 다. 이집트 역사상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라 할만한 시기는 18왕조가 포함된 신왕국 시대이다. 투탄카문의 황금마스크를 비롯하여 세련되고 정교한 부장품들이 묻힌 '왕들의 계곡'과 화강암과 현무암, 규암 등을 이용한 거대한 조각상들, 뛰어난 금세공 기술로 만든 장신구들이 당시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시대상을 말해 주고 있다. 이집트의 미술은 사실적이고 비례적이라기보다는 개념적이며 추상적인 성격이 강하다. 인물들은 양식 적이며 관습화된 틀에 의해 삼차원공간이 아닌 평면적 구도하에 그려졌다. 인물상의 대부분이 머리는 옆 면을 향하고 있는데 반해 눈은 앞면을 향하고 있으며, 어깨는 정면에서, 상체와 팔 다리는 다시 측면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신체 각 부분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들의 관 점은 언제나 본질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왕조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된 양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 신의 질서에 따라 운행되며 내세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을 표현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 [나르메르 팔레트(Palette of Narmar)] 검은색 점판암으로 만든 석판은 원래 화장품 가루를 빻기 위해 만든 도구였지만 점차 왕의 정복력을 기 념하는 조각품으로 사용되었다. 상 하 이집트를 통일하고 멤피스에 수도를 정한 첫번째 이집트 왕인 나 르메르의 석판은 남부 이집트의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존하는 파라오시대의 유물들 중 에서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최초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대형 방패모양의 이 석판에는 나르메르 왕의 치적과 관련된 여러 장면들이 정교하게 도안되어 있다. 한쪽 면에는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흰 왕관을 쓰고 시종을 거느린 나르메르 왕이 한 손으로 포로의 머리 채를 잡고 서있는 모습이 보이며, 그 앞에는 태양의 운반자 호루스를 상징하는 매가 있다. 석판의 또 다른 면에는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 왕관을 쓴 나르메르 왕이 각 지역의 전쟁터를 시찰하 고 있는 모습과 서로 머리를 꼬고 있는 두 마리의 암사자 등이 묘사되어 있다. - 유물명: 나르메르 팔레트(Palette of Narmer) - 연대: 제1왕조(Dynasty 1) - 출토지: 히에라콘폴리스(Herakonpolis) ................................................................................................................ [임호텝(Imhotep)] 고왕국 시대 제3왕조의 2대 왕인 조세르에게는 임호텝이라는 뛰어난 재상이 있었다. 이집트 문화에 있 어 가장 천재적인 선구자 역할을 한 임호텝은 재상인 동시에 태양신의 대제사장이며 의사, 천문학자, 사상가,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조세를 위해 사카라에 6개의 거대한 층이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 의 대규모 석조건축물로 유명하다. 임호텝은 평민 출신으로 나중에는 지혜의 신, 치료의 신과 동일시되 며 후대에까지 추앙받았다. 그의 무덤이 있는 사카라에는 병원이 건립되어 순례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 다. 또한 의자에 앉아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기록의 신으로도 숭배받았는데, 기록의 신 토트 를 형상화한 따오기 미이라가 그에게 봉헌되기도 하였다. ................................................................................................................. [ 케프렌(Chepheren)] 기원전 2723년에 시작된 고왕국 시대 제4왕조는 기자에 3개의 유명한 피라미드를 남겼다. 제4왕조의 2대왕 케옵스의 대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케프렌의 피라미드 그리고 후기의 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그것이다. 임호텝에 의해 창시된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3왕조 시대와 함께 끝나고 이들은 200만개 이상의 석회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진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건축기술은 물론 당시 파라오의 막강한 권력과 인적 물적 자원의 국가 동원체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케프렌 왕은 이 피라미드 외에 최초로 스핑크스(Sphinx)를 만든 것으로 더 유명하다. 가로누운 사자의 형상에 사람의 얼굴을 한 이 스핑크스는 케프렌 왕의 얼굴을 본뜬 것으로 알려지는데 높이 20m, 길이 73m로 스핑크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 [멘카우라 삼신상(Triad Statue of Menkaura)] 멘카우라는 현재 카이로시의 남서쪽에 있는 기자의 피라미드 3개중 가장 작은 크기의 피라미드를 만든 인물이다. 제4왕조 초기에 엄청난 노동력과 경제력을 동원하여 만든 대 피라미드 축조사업은 왕권이 점차 감소된 후기로 오면서 규모가 보다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멘카우라 왕은 주로 두명의 여신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암소의 뿔을 단 하토르 여신과 개의 형상으로 표현된 이집트 노모스주의 표장을 단 또 한명의 여신사이에 서있는 멘카우라 삼신상이 그중 하나이다. 이것은 근육이나 몸의 각 부분이 사실적이면서도 세부적으로 잘 묘사된 작품인데 왕의 장례 에봉헌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 곡식을 가는 여인상(Woman Grinding Grain) ] 기원전 2400년경 고왕국 시대 제 5왕조 시기의 것으로 출토된 '곡식을 가는 여인상'은 태양신전의 신관 이었던 '웨리르니'라는 사람의 무덤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조각상의 아래부분에는 고대 이집트의 문 자인 히에로그리프(Hieroglyphs)로 주인의 이름과 함께 '이티'라는 시녀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당시에는 농사를 짓고 곡물을 빻거나 빵을 굽고 맥주를 만드는 일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노동에 종사하는 하인과 시녀의 모습을 부장품으로 만들어 주인의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사후에도 하인들이 생전과 다름없이 주인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도 그러한 부장품의 하나이며, 넒은 판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밀대를 이용하여 가루를 빻는 시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 [ 서기관 좌상(Scribe) ]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성직자나 의사, 건축가, 예술가 등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서기관 교육을 받아야 했다. 서로 다른 상형문자들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에서부터 고전을 베끼고 번역하며 사회 각 분야에 대한 다양한 글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까지 서기관의 능력은 어린 시적부터 호된 교육에 의해 양성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직업이 세습되지만 능력에 따라 직업변동이 가능했던 이집트 사회에서 서기관은 부와 높은 지위가 보장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고위관리나 귀족들은 스스로 서기관으로서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법적인 문서나 수학, 의학적 논문 등을 집필하였으며 시나 명상록 등 문학작품을 저술하여 칭송을 받기도 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양무릎 사이에 옷자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그위에 파피루스를 펼치고 갈대줄기로 만든 펜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서기관의 좌상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하마(Hippopotamus)] 고대 이집트인에게 하마는 공포의 대상이면서 또한 사냥의 대상이었다. 엄컷 하마는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하마의 거대한 몸짓과 사나운 성질에 맞서 하마사냥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나타내고자 했다. 고왕국시대의 마스타바 벽화에서는 이러한 사냥장면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중왕국시대에는 하마를 부장품으로 만들어 매장하였는데 이는 죽은 자가 생전에 즐기던 사냥을 죽어서 도 계속 즐길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동시에 하마의 표면에 생명과 환생의 의미를 가진 연꽃을 그려넣 음으로써 젊음을 다시 찾아 환생하라는 기원의 표시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하마 부장품은 제 17왕조 때까지만 만들어지고 그 이후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마의 부장품은 주로 푸른색 자기로 조그맣게 만들었으며 물속의 수초을 표면에 그려넣은 것이 특징이다. [ 캐노픽 단지(Canopic Jars) ] 지중해에 접한 이집트의 도시 캐노픽(Canopic)의 이름을 딴 이들 단지는 고왕국 시대 제 4왕조 이후 죽은 자의 내장을 꺼내 담아두는데 사용되었다. 이집트인들은 미이라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은 자 의 내장을 따로 꺼내 방부처리 한 후 캐노픽 단지에 담아 미이라의 관옆에 매장하였다. 이때 간과 허파, 위, 창자를 각각 네개의 단지에 따로 담아 보존하는데 단지의 뚜껑에는 주로 호루스 신의 아들 4명의 모습을 새겼다. 사람 머리를 한임세티를 새긴 단지에는 간을, 원숭이 머리를 한 하피 단지에는 허파를, 재칼의 머리를 한 두아무테프 단지에는 위를, 매의 머리를 한 케베센누에프의 모습이 형상화된 단지에 는 창자를 담았다. 이밖에 죽은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단지도 간혹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캐노픽 단지는 주로 석회암이나 도기, 나무 등으로 만들어졌다. [우레우스(Uraeus Cobra)] 대부분 이집트 왕관의 머리 앞부분에는 독수리와 함께 코브라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이 코브라를 우레우스('일어서는 여자'라는 뜻의 그리스어)라고 부른다. 독수리 네크베트(Nekhbet)와 크브라 우레우 스는 상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두 동물로서 상 이집트의 흰 왕관과 하 이집트의 붉은 왕관이 결합되어 나타난 통일 이집트의 왕관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레우스는 왕의 이마 중앙에 지키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독침을 쏘아 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다. 이집트의 정통적인 코브라 여신은 왕조시대 이전부터 전해오는 '와제타(Wadjet)'에 그 기원 을 두고 있으며 나일 삼가주 지역에 있는 부토(Buto)의 수호신이었다. [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과 히에로글리프 문자(Hieroglyphs) 해독] 1799년 이집트의 로제타 마을에서 참호를 파던 나폴레옹 휘하의 한 프랑스 장교가 세로 114m, 가로 72m의 현무암 석비를 발견하였다. 이석비에는 기원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공적문이 히에로글리프(Hieroglyphs), 디모틱(Demotic: 민간에서 사용된 히에로글리프의 홀림체), 그리스어로 나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항복한 후 로제타 스톤은 영국으로 옮겨져 본격적으로 해독이 시도되었는데 결국 1822년 프랑스인 샹폴리옹이 로제타 스톤의 그리스어 '프톨레마이오스'에 기초하여 히에로글리프를 판독해냄으로써 잊혀졌던 고대 이집트 문자를 처음으로 되살려내는데 성공했다. 그리스어로 '거룩한 기록'이라는 뜻을 가진 히에로글리프는 B.C.3200년부터 A.D.394년까지 사용된 상형문자로 850여개의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히에로글리프의 문장은 사람이나 동물의 머리가 향하는 쪽에서 시작하여 좌우 어느 쪽에서부터든 먼저 쓰여질 수 있었으며 세로로도 쓰여졌다. 로제타 스톤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투트모스 III세(Tuthmose III)] 기원전 1575년에 시작된 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의 세력을 소탕하고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투트모스 3세는 제 18왕조의 6대왕으로서 겨우 10살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계모인 핫쳅수트 왕비가 섭정을 하다가 후에 그녀 스스로 왕이 되어 이집트를 다스렸다. 핫쳅수트가 죽은후 왕권을 찾은 투트모스 3세는 약 20여년동안 17변의 전투를 벌이며 이집트의 영토를 확장해 갔다. 당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거주하던 미타니족들은 북부 시리아에서 막강한 힘을 떨치고 있었는데 투트모스 3세가 지휘하는 원정군들은 이들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만큼 작은 체구에 뚜어난 정복력과 통치력을 가진 투트모스 3세 시대에 이집트는 예술약식의 발전을 거듭하며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유산을 남겼다. [ 파라오 아케나텐(Statue of Akhenaten) ] 신왕국 시대의 아멘호텝 4세는 파라오의 이단자로 불리는 인물로 혁신적인 종 교개혁을 단행한 왕이다. 그는 기존에 숭배되던 아문신 대신 아텐신을 섬기도록 했는데 즉위한지 5년(기원전 1350년)만에 자신의 이름도 아케나텐 ('아텐에게 봉사하는'이라는 뜻)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텐은 전통적인 태양신 숭배사상에서 벗어나 태양신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 눈에 보이는 형상 인 아텐을 섬겼다. 이는 태양신 안에 다양한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던 전통적인 신앙개념에서 최초로 유일신적인 개념으로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수도를 나일강 하류쪽의 엘 아마르나에 정한 아케나텐은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아케트아텐(Akheta ten)'이라는 도시를 세우고 아텐을 위한 수많은 사원을 건축하였으며 아문과 오시리스 등 다른 신들의 우상과 신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후계자인 투탄카문은 다시 아문신 숭배를 부활하여 대조를 이룬다. [ 왕들의 골짜기(The Valley of the Kings) ] 테베(Thebes)는 신왕국시대 이집트의 최대 번영기에 남부 수도였다. 제18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테베는 신들의 왕인 아문을 기념하는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 테베곁을 흐르는 나일강 건너 서쪽에 역대 왕들의 묘가 밀집한 '왕들의 골짜기'가 있다. 기존에 세어진 나일강 하류의 피라미드 왕묘들은 당시에도 도굴꾼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약탈되었기 때문에 투트모스 1세는 이곳에 새로운 묘지의 도시(네크로폴리스, Necropolis)를 건설하였 다. 이후 400여년 동안 파라오들은 이 한적한 골짜기에 그들의 무덤을 세웠다. 왕들의 골짜기에서는 투트모스 1세를 비롯하여 람세스 2세, 핫쳅수트 왕비, 아멘호텝 2세 등 62개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신왕국의 마지막 파라오였던 람세스 11세 시대의 혼란기에 거의 훼손되고, 투탄카문의 왕묘만이 비교적 손상되지 않은채 발굴되어 현재 카이로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 투탄카문(Tutankhamun) ] 기원전 1336년 신왕국시대에 투탄카텐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부친 아케나텐의 뒤를 이어 여덟살 에 왕위에 올랐다. 수도를 멤피스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아켄신이 생명을 주다'라는 뜻의 투탄카텐에 서 '아문신이 생명을 주다'라는 뜻의 투탄카문으로 고치고 아문신 숭배를 부활시켰다. 투탄카문은 열일 곱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9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투탄카문의 무덤은 1922년 '왕들의 골짜기'에서 영국인 고고학자 카터에 의해 뒤늦게 발굴되어 유명해 졌다. 전실, 별실, 보고, 현실 등 4개의 방으로 구성된 투탄카문의 무덤에는 당시의 화려한 궁중예술과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부장 품들과 함께 110kg의 순금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관이 발굴되었다. 그속에 무게 11kg이나 되는 황금가면을 쓴 투탄카문의 미이라가 놓여있었는데 미이라의 시신 부검결과 치명적 인 뇌손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투탄카문이 암살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람세스2세(Ramses II)] 기원전 1297년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열고 그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티1세는 그동안 균형을 잃었 던 이집트의 세력을 회복하는데 앞장섰다. 세티 1세는 제18왕조 투트모스 3세 이후에 서부아시아에서 세력이 더욱 커진 히타이트족(인도유럽계가 지배계층을 이룬 혼합민족)과 맞서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세티 1세의 아들로 24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람세스 2세는 오랜 적대관계에 있던 히타이트족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이집트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서로의 세력권에 대한 세밀한 규정을 명시한 우호조약을 맺은 것은 물론 히타이트 왕녀와 결혼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이후 66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테베와 카르낙, 아부 심벨등 이집트 전역에 수많은 건축물들을 세우는데 열중했는데 지금 이집트에 남아있는 많은 사원들이 그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와 대결했던 파라오로도 유명하다. [이집트의 신(神)] 오시리스(Osiris)와 이시스(Isis) 이집트 최초의 왕이었던 오시리스는 땅의 신인 게브와 하늘의 신인 여신 누트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여동생 이시스와 결혼한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의 질투로 살해되어 전 국토에 그 시신이 뿌려졌는데 마술과 주문의 힘을 가진 이시스가 남편의 몸을 다시 찾아내어 환생시켰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서 호루스가 태어난다. 오시리스는 기원전 2000년경 중왕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집트 전역에서 더욱 숭배되어 환생을 보장 하는 지하세계 최고의 왕으로 추앙되었다. 죽은 자들은 누구나 오시리스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하며 이후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 스스로 오시리스가 된다고 믿어졌다. 오시리스는 죽은 자의 수호신 이기 때문에 양손을 가슴에 교차시켜 얹은 미이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왕권을 상징하는 긴 수염을 달고 흰색의 높은 왕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의 아내 이시스는 인근 국가에서도 오랫동안 숭배된 보호의 여신이며 아들 호루스는 후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지상 최고의 신이 되어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태양신 라(Ra) 이집트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태양신이었다. 이집트인은 태양신을 일반적으로 라(Ra)라고 불렀고 정수리에 태양을 얹고 매의 신 호루스의 얼굴을 한 왕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태양신의 신전이 있는 하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는 라, 혹은 라-헤라크티(해가 떠서 질 때까지 낮의 하늘을 지배하는 능동적인 관점에서의 태양신)로 표현되는 태양 숭배사상의 중심도시였다. 수많은 건축물이 태양숭배 사상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계단형식으로 된 피라미드는 죽은 왕들이 태양신 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라의 아들이며 지상의 대리인인 왕들은 자신의 이름에 직접 라를 결합하여 부르기도 했다. 또 태양신은 그자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신들을 만든 존재 이기 때문에 아문-라, 아툼-라 등과 같이 다른 신들의 이름과 혼합되어 불려지기도 했다. 세크메트(Sekhmet)와 바스테트(Bastet) 여신 사자 머리를 한 여인으로 나타나는 세크메트 신은 고왕국시대부터 왕들의 신성한 어머니상으로 여겨졌 고 왕이 출전하는 전쟁터에 함께 동반하여 적에게 겁을 주는 무서운 힘을 가진 전쟁의 여신으로도 숭앙 받았다. 태양신 라(Ra)의 딸로서 머리에 둥근 태양판을 두르고 왕권의 상징인 우레우스 코브라로 장식한 세크 메트 여신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동시에 보호력을 가진 두 모습의 신으로 나타난다. 이집트인들은 세크메트 여신의 파괴력을 두려워하여 매일 두번씩 여신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따라서 신전에는 수많은 암사자 여신의 신상이 봉헌되기도 하였다. 고양이 모습으로 표현되는 바스테트 여신은 하 이집트의 부바스티스('바스테스 여신의 집'이라는 뜻에 서 유래)라는 도시에서 특히 숭배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죽은 뒤 미이라로 만들어질 만큼 숭배되는 동물 중의 하나였다. 바스테트는 처음에는 세크메트와 동일한 신으로 생각되었는데 점차 세크메트의 온순한 성격과 모성애를 상징하는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아누비스(Anubis) 아누비스는 재카의 머리에 남자의 몸을 한 무덤의 신이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는 사후의 심판과정에서 재판관 오시리스와 서기관인 토트신, 벌을 집행하는 아마메트신 등과 함께 의식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아누비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누비스는 죽은 자의 심장 무게를 저울에 다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진리의 여신인 마아트를 상징하는 깃털의 무게와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아누비스는 실제 미이라를 만들 때에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 신으로, 제사장들은 재칼의 모습을 한 아누 비스의 가면을 머리에 쓰고 미이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토르 여신과 프삼티크 I세(Hathor with Psammetik I)] 하토르는 '호루스의 저택'이라고 하는 '하트-호루스(Hot-Horus)'에서 유래되었고 여신 이시스와 동화되 어 호루스의 어머니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하토르의 화신으로 생각되어진 파라오의 왕비들은 그 상징으 로 사원의 의식 때마다 타악기의 일종인 시스트럼(Sistrum)을 연주했다. 하토르는 야생 암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양쪽 귀가 튀어나오고 뿔 혹은 가발을 쓰거나 암소뿔 모양의 왕관을 쓴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테베 서부지역의 사원이나 무덤, 덴두르 등지에서 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대한 황소 모습의 하토르 여신이 프삼티크(Psammetik) 1세를 보호하고 있는 이 조각상은 사실적인 표현미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후기시대 제 26왕조의 작품이다. 하토르는 고대 이집트의 서있는 남자상들이 대개 그렇듯이 왼쪽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다. 소의 오른 발과 왼발 모습이 돌의 양쪽면에서 각각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