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서부경남 문화정보 공유 (여행, 공연, 행사)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후기게시판 스크랩 진주 서경방송 답사 - 아름다운 추억 통장만들기
은영백백(백은영) 추천 1 조회 88 11.06.16 10:21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진주 서경방송 답사

오전 10시30 분 유달산 노적봉도착 .

오전 유달산트레킹 코스

대학루ㅡ이난영노래비ㅡ달선각 ㅡ 유선각 ㅡ관운각 ㅡ 일등바위 ㅡ소요정 ㅡ오솔길 걷기ㅡ난공원

오후 박물관 둘러보기ㅡ장보기

참가인원: 60여명

연령대 구성원 : 세살 어린이부터 70대 어르신까지

 

진주서경방송 답사팀에는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들이 많이 계셨다.

특히 인상적인 분들은 3년 동안 매월 안빠지고 답사에 참여한다는 노부부와 그들 가족 3대 였다.

가족기리 여행을 하면 가족 중 한 사람이 운전을 해야하므로 신경써야 했지만 서경방송 답사팀과 함께하면서 편안하다고 했다.

가족에게 많은 유산을 상속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는 일이 어디 흔한 일인가.

언젠가 원문으로 읽었던 해리포터 이야기가 생각났다.

주인공은 컴컴한 밤에 울창한 산길을 아름다운 추억만 생각하면서 터널같은 어두운 길을 헤치고 나갔다.

때때로 삶은 평화로울 때도 있겠지만 어렵고 힘이 들어 숨조차 내쉬기 힘들 때도 있다.

이들 가족은 힘들 때 꺼내서 쓸 아름다운 에너지를 통장에 저금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서너 가족은 어머니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었다.

은퇴한 어느 노부부가 그들을 보면서 "젊은 남편은 아직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를거야.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다양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두 대의 버스에 가득 담겨져서 유달산과 갓바위 박물관일대에 추억의 족적을 남겼다.

 

 

 진주하면 촉성루가 떠오르고 남강이 푸르게 느껴진다.

진주관기 논개이야기는 조선 광해군 때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 전한다.

'진주관기로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

논개의 행적은 확실치 않다. 아버지가 신안 주씨(新安:朱氏)고 전북 장수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정도다. 출생일도 알려지지 않았다.

 

충국열사로 추앙되는 논개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로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뿐이다. 그래서 논개에 관한 모든 자료는 구전에 의한 설화로 떠돌았다. 

아버지인 주달문은 서당훈장으로 한학에 밝은 선비였다고 한다. 논개의 사주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인 4갑술(甲戌)일이라 ‘개(戌)를 낳았다’하여 딸에게 논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낳은 개에서 놓은 개로, 다시 노은 개가 논개로 와음이 된 이름이 논개라는데, 아무튼 논개가 천한 신분이 아닌 양가 규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작명설화로 여겨진다.

논개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개망나니 같은 숙부가 노름빚으로 조카딸을 팔려고 했다. 억울한 송사를 접한 당시 현감이 바로 최경회였다. 두 모녀의 억울함을 풀어준 최경회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논개는 최경회의 소실이 된다.

둘의 관계가 터무니없이 미화된 점이 엿보인다. 집도 절도 없는 모녀가 지방 현감의 눈에 띄어 할아버지뻘인 환갑 노인네의 첩실이 들어앉은 상황이니 아름답거나 애절한 관계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자결 했다. 왜장들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마련한 촉석루 주연자리에 기생으로 위장 참석하여 남편의 원수와 함께 죽는다는 논개의 순절담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각도 많다.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는 논개의 최후를 유몽인의 허술한 한 줄 기록으로 무조건 충국순절화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은 꽤 강한 설득력이 있다. 전리품에 끼어 왜장의 노리개가 될 위기에 처한 논개가 강탈자와의 절망적인 사투에서 자신을 지키려다 희생됐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지 않을까.

논개의 전설화는 정치적으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18세기, 인조의 반정 이후에 중앙 권력으로부터 소외돼온 지방 지배세력들은 진주를 충향(忠鄕)으로 내세우기위해 논개를 순국의 의기(義妓)로 발굴했다. 진주 지방의 상징이 된 논개의 충군애국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재구성되었는데 논개의 가계와 생애 등이 이 과정에서 상당부분 부풀리거나 미화됐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순국열사 만들기 작업은 현대에 접어들며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6·25 전쟁 이후의 “논개 사적 정비, 성역화(聖域化)”와 같은 역사 기억 만들기 사업으로 맥이 연결됐다. 진주에서 전설로 내려오던 희미한 논개설화가 순국충절의 의사로 재생산된데 비해 애인과 공모하여 적장을 죽이고 자결한 평양의 계월향은 ‘의기’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남성적 시각의 편파적 평가가 원인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었던 계월향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副將)에게 전리품으로 주어지자 계책을 내어 김응서를 적장 곁에 불러들인다.  적장의 머리를 벤 김응서는 달아났으나 계월향은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논개의 투신을 체험하게 해서야

애인을 따라가지 않고 자결을 택한 기녀 계월향은 당찬 여인이다. 국가의 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담대한 계획을 실행한 후 죽음으로써 깨끗이 자존심을 지켰다. 그러나 그녀의 순국과 순정은 적장에게 이미 몸을 허락했다하여 하찮게 취급되었다.

진주시에서 열린 제10회 논개제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논개 순국체험’ 행사가 말썽이다. 촉석루 앞 광장에서 솜으로 된 왜장 인형을 안고 뛰어내리게 했는데 이틀 동안 적잖은 어린이들이 순국체험을 했다고 한다.

기생 논개가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것을 재현한 프로그램이라니 뭐하자는 짓거리인지 숨이 턱 막힌다. 투신체험이 아닌 순국체험이라는 집행위원장의 변명이 더 가관이다. 투신이 순국이었는지도 논개만이 알 일이다. <자료 : 충청매일신문에서 발췌 >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1.06.16 10:21

    첫댓글 '토요가족여행 목표편' 관광해설사분께서 블로그에 토요가족여행 목포편 글을 올려주셨네요~^^

  • 해설사님의 열정과 인품이 묻어나는 글이네요. 잘봤습니다.

  • 11.08.29 23:58

    답사는 우찌하믄 가는건가여?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