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불로초를 찾아서(네트워크 스페설 TBC)pts9228 2007.01.27 1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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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불로초를 찾아서
서귀포시 정방폭포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이다.
연중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함을 더한다.
▲ 서귀포 정방폭포
정방폭포에는 이곳 지명유래에 담긴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
중국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라는 신하가
영주산, 지금의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이곳 서귀포
해안으로 내려왔다.
서불은 이곳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라는 글귀를 남기고
떠났는데 서불,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서귀포다.
정방폭포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서복전시관.
서복전시관에는 불로초 탐사를 감행한 진시황과 그의 사자
서복의 관한 것이 전시 되어 있다
중국 현지에서 전하는 서복의 족보기록도 전시해
그가 실존인물임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아 제주도에 왔다는
서복의 전설이, 전설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을까?
1부
목숨을 건 불로초 탐사
중국 산시성 린튱현.
2천2백년전 진나라 수도였던 시안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
이곳에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무덤이 자리에 있다.
관광객들이 오르내리는 이 산봉우리가 바로 진시왕릉이다.
오랜 세월의 침식과 파괴로 지금은 많이 낮아졌지만
진시왕릉의 원래 높이는 115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무덤의 둘레만 해도 4킬로미터, 뉴욕둘레는 25킬로미터로
개인으로는 세계최대의 무덤이다.
관광객들을 위해 진시황릉의 호위병들의 근무교대식이
재현되고 있다.
진시왕릉은 지난 87년 세계문화유산지에 등재된 국가 유산이다.
중국정부는 진시왕릉의 발굴조사를 아직 미루고 있다.
지난 2002년 첨단장비를 동원해 대대적인 시굴 조사에 나섰지만
워낙 복잡한 구조 때문에 복원자체가 현재 과학 기술론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시왕릉의 주변을 발굴한 조사한 결과 병마용갱에서부터
무려 5만개나 달하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진시황의 부귀영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병마용객.
이곳 역시 진시왕릉의 일부 시설로 진나라 당시에 군사들의
모습이 흙으로 만든 토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굴 된 군사만 6천여 명, 말5백여필과 전차
130여대를 비롯해, 각종 무기들도 출토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서 출토된 토형들의 표정.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쳐난다.
이들의 표정 불론 옷차림 역시 계급과 신분에 모두 다르게
제작 되었다.
이 병마용객은 2천년 전 고대 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지난 74년부터 현재까지 발굴된 규묘는 2만평만미터.
병마용객은 지금도 발굴되고 있어 일부만 공개되고 있다.
2천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병마용객의 위세는 진시왕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짐작케 한다.
▲ 진시황
그렇다면 진시황은 어떤 인물인가?
기원전 246년 진시황은 13살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강인한 카리스마로 23살에 실권을 잡고
주변나라를 차례로 정복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세기 중국 대륙은 진나라를 비롯해 주변에
여섯 개의 경쟁 국가가 있었다.
진시왕의 이들 여섯 나라의 정복에 나선지
9년 만이 기원전 221년에 마침내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다.
병마용과 함께 세계 8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는 만리장성.
진시황은 황제에 오른 후 지방의 제후가 다스리던 봉건제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한다.
또한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심지어 학문과 사상까지
통일하려 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닌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소유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
어쩌면 그가 불로장생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보다시피 역대 어느 통치자가 다 그렇지만 자기 장수라든가
자기 통치 연장은 다 공유되는 그런 것들인데 진시황 그러면
그 시절에서 아마 더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죽은 다음에도
이런 신선, 불로초라든가 신선, 그것 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영원히 생존한다고 그래서 아마 병마용 같은 것도 그렇게
만들어서 환생을 하면 전생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부귀를 누릴
걸로 생각하고 아마 그 전체로 보면 역시 신선사상의 발로라고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갈구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신선사상
때문이었을까?
산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봉래시.
바닷가 기암 절벽 위에 중국 4대 명각 중에 하나인
봉래각이 자리에 있다.
뛰어난 풍광과 많은 역사를 지닌 이곳은
해마다 천만명이 이르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은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것으로 중국의 신선사상의 근원지이다.
기원전 3세기 산뚱반도로 중심으로 번진 중국의 신선사상은
삼신산과 선약으로 요약된다.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동쪽 바다 위에
산신산.
그리고 그곳에서만 자라는 불로장생의 선약. 이른바 불로초다.
“특히 이 삼신산 설화는 아까 말씀드렸던 최현이 주장했던
내용 중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천하의 8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와요. 다시 말하자면 그 밖에는 어떤 다른 세계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런 삼신산으로서의 어떤..
인간들이 가보지 못한 유토피아의 신선의 산 또는 신선의 섬,
이런 것들이 논의가 가능한 그러한 바탕, 배경이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이곳 산뚱반도가 신선사상의 근원지가 되었을까?
많은 이들은 그 이유로 신기루 현상을 들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에 신기루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지난 88년 1시간 넘게 지속된 신기루 현상이 한 여행객의
카메라에 우연히 포착되었다.
▲ 88년 1시간 넘게 지속된 신기루 현상 ▼
수평선 위에 마치 커다란 궁궐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이런 신기루의 장면은 수차례 방송으로까지 보도가 되었다.
신기루 현상은 해수면의 기온차이로 생기는 착시현상이다.
그러나 신선사상을 신봉하던 옛날 중국인들에게 바다 위로
떠오른 신기루는 단순한 기후현상이 아니었다. 바로 신선들의
세상으로 비쳤던 것이었다. 진시황은 황제로 등극한 이후
이곳 봉래각에 세차례나 올랐다. 그도 이 신기루를 보면서
신선사상에 더욱 매료되었고 산신산과 불로초를 갈망했을 것이다.
신선사상에 매료된 진시황의 일화는 산둥반도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산둥성 교남현 남쪽 바다에 자리한 낭야대.
해발 200미터가 채 안 되는 낮은 봉우리지만
넓은 황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 낭야대 정상에 서 있는 진시황 각석.
기원전 219년 이곳을 찾은 진시황은 자신의 공덕과
진나라 왕족을 칭송한 비문을 새겼다.
▲ 낭야대 진시황 각석
진시황이 제상 이사로 하여금 기록한 이 각석의 문자가
바로 중국 전역을 하나로 통일시킨 서전체 문자다.
현존하는 진시황 시대 각석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 이것은
박물관의 진품을 복원한 것이다.
중안리 낭야대 서복연구회장
“여기 낭야대 석각은 3개 부분으로 돼 있다. 동쪽과 남쪽
3개부분인데 내용은 하나는 시정강령을 적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시황의 업적을 서술해 놓은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국토의 면적을 적어 놓은 것이다.”
각석을 남길 정도로 진시황은 이곳 낭야대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의 각별한 애정은 이 뿐만 아니다.
중국 사기에는 진시황이 낭야대 정상에 행궁을 짓고
석달간 머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그는 이렇게 낭야대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을까?
▲ 낭야대 정상에 행궁
이곳 낭야대는 봉래각과 함께 신선사상의 대표적인
중심지이었다. 진시황 때 이름을 떨쳤던 안기생을 비롯한 수많은
방사들이 이곳에 모여 장생 불로약을 연구했다고 한다.
중안리 낭야대서북연구회장
“낭야대는 물도 좋고 나무도 좋은 곳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병사들이 여기를 찾았다. 그래서 조건상 신기루도 나타나고
고래무리도 많이 모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장생불로초를 구하러오기도 하였다.”
산둥반도 일대 방사들이 모여 있는 곳, 낭야대.
진시황이 이곳에서 석달이나 머문 것은 이곳에 모인 많은
방사들을 만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생불로약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진시왕은 우연히 서복이라는 방사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불로초를 얘기를 듣게 된다. 낭야대 정상.
옛 행궁은 사라진 채 진시황과 서북의 조각상만 남아 있다.
▲ 낭야대 정상에 진시황의 조각상
불로장생을 꿈꾸는 무소불위의 진시황.
그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나선 서복.
운명적인 이들의 첫만남은 과연 어떠했을까?
중국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 평가받는 사기에 이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제나라 방사 서북등이 글을 올렸다.
‘바다 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
세 신산이 있습니다’
‘그 곳에는 신선이 살고 있는데,
제가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오래 살 수 있는
선약을 구해 오려고 합니다.’
시황제는 이를 허락하고 동남동녀 수천과 함께
서복을 바다로 건너보냈다.』 - 사기 <진시황본기>
▲ 진시황의 명령을 받는 서복 (낭야대 조각상)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복의 불로초 탐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낭야대 바다가에 세워진 서복의 출항기념비.
기원전 219년 이곳 낭야대에서 서복은 불로초탐사를 나선
첫 출항을 나섰다.
그러나 사기에 등장하는 이 기록도 80년대 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서복의 존재 역시 베일에 가려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에서조차 진시황의 불로초 탐사는 그저 산둥반도 일대에서 전해지는
전설로만 인식되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82년 재야학자에 의해서 서북의 고향이 발견
되면서 진시황의 불로초 탐사가 전설이 아닌 역사라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복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다.
서복은 과연 실존인물일까?
산둥반도 남쪽에 장쑤성 감유현 근산향.
비포장 길을 따라 들어간 오지에 시골 마을이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이 마을이
서복촌이다.
지난 82년 서주 사범학원 나길상 팀이 인구조사를 벌이던 중,
우연히 이 마을 발견했다. 서복촌의 발견은 그 동안 전설로
알려지던 서복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서복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언제 생겼을까?
장영신 금산향위원회 서기
“여기가 서복촌이라고 명명된 것은 서복 후손들이 서복의
동쪽으로 출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복촌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마을 형성시기는 대략 진나라 말기나 한나라 초기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는 서가촌이라고 불렀다.”
서복을 모셔놓은 서복사.
지금의 서복사는 지난 1988년 다시 세운 것으로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장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나라 시대에 재건했다는 기록과 이후 흥해사라는 다른 이름을
불리워 오다 지난 1942년이 사당이 헐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 서복사
무소불위의 진시황에게 불로초 탐사를 제안한 서복.
그는 어떤 인물일까?
서복에 대해 사기<진시황본기>의 기록은
산둥반도 일대에 제나라 사람이며
방사였다는 사실 이외에 전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서복의 고향은 산둥반도 일대인 제나라 낭야군 혹은
함현으로 압축된다.
이곳 서복촌은 제나라 당시 낭야군에 속해 있던 마을로
낭야대에서 불과 20킬로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서복이 낭야 출신이라면 이곳 서복촌은 그의 고향이었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곳 서복사에는 이 마을에 전해져 오는 서씨의 족보도
전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이곳에 서복의 후손이
살고 있을까?
제작진은 이 마을에 살고 있다던 한 후손을 직접 찾아갔다.
30년째 이 마을에서 가구제조업을 하고 있다는 서형평씨
그는 자신이 서복의 72대 후손이라고 밝혔다.
서형평 (서복의 72대후손)
“서복이 떠나면서 후손들한테 ‘동도해서 오지 않으면 후손들이
피해를 볼까봐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거나 성씨를 바꾸라’했다.”
서복의 유언에 따라 후손들이 성씨를 바꾸거나 다른 마을에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복은 출항하기 전에 이미 돌아
오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과연 서복은 의도적으로 탈출을 계획한 것일까?
그 해답은 또 다른 서복의 고향에서 얻을 수 있었다.
산둥반도 북쪽 해안에 자리잡은 용구시.
공원으로 조성된 바닷가에 커다란 서복상이
자리에 있다.
▼ 용구시 공원에 서복상
중국에 일부학자들은
서복이 진나라 낭야군이 아닌 황현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용구시는 감유현 서복촌과 함께 유력한 서복의 고향으로
추적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서복이 동쪽으로 출항하기 앞서 삼천 동남동녀와 함께
하늘에 재를 올렸던 것으로 불로초 탐사에 최종 출항지로 추정되고
있다.
곡옥유 (용구시문화국부국장)
“여기가 지리적으로 봄이 되면 서남풍, 동남풍계절풍이 부는데
이것은 서복이 출항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여기에서 출발해 요동반도를 거치고 한반도와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이 제일 훌륭한 곳이다.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 역사학자들이 서복의 출항지로는 이곳
용구쪽을 많이 인정해주고 있다. 그래서 서복은 원래 제나라
황현사람이었는데, 여기 용구시가 예전 진시황때 제나라의
황현이었다. 그래서 서복의 고향은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서복의 고향과 출항지에 대한 논란은 여러곳 에서 일고
있다. 산둥반도에 일대에 허베이성과 산둥성, 장쑤성 심지어
저장성까지 서로 자신들의 마을이 서복의 고향, 혹은 출항지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진시황통일 이전에 산둥반도가 신선사상의 중심지이고
또 제나라였음을 감안할 때에 서복의 고향은 산둥반도의 일대가
유력해 보인다.
서복의 고향을 놓고 이렇게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서복의 존재가 그만큼 중국인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인강 (중국국제서복문화교류협회 비서장)
“서복은 역사적으로 매우 위대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진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한국과 일본에 전파하여 현지의 문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서복의 영향력이라면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다.”
산둥성 용구시 외곽에 세워진 서공사.
역시 서복을 모신 사당이다.
용구시가 서복의 고향으로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관련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용구시가 지난 98년에 조성한
것이다. ‘진나라 방사 서복의 고향’이라는 표석도 마련해 놓았다.
지난 99년부터 용구시는 해마다 서복문화축제를 대규모로
개최해 오고 있으며 서복 관련 국제학술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는 서복,
그 양쪽은 불로초 탐사에 나섰던 동남동녀의 모습도 함께 하고 있다.
2천2백년 전, 서복의 출항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양쪽 벽면에 서복이 불로초 탐사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진시황에게 인사를 구하는 서복의 모습,
그를 따르는 동료들의 모습과 배에 식량을 나르는 모습,
활과 칼을 지닌 군사의 모습, 그리고 배에 오르는 뱃공,
여러 기술자의 모습도 보인다.
서복의 불로초 탐사는 인원만 수천만에 달하는 그야말로
초대형 선단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219년에 감행된 첫 불로초 탐사는
실패로 끝이 났다.
사기에 기록을 보면,
“서복은 바다로 보내 신기한 물건, 즉 불로초를
찾도록 하였으나 서복은 돌아와 거짓 보고를 올렸다.
‘신은 바다 가운데에서 큰 신선을 만났습니다.
신선은 그대가 진시황의 사신인가를 물었고,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다시 물어 오래 살 수 있는 약을 원한다고
답했습니다. 신선은 진시황의 예물이 적다며 그 선약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중략)’
이에 진시황은 매우 기뻐하면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내기로 하고
오곡종자와 여러 기술자도 함께 보내겠다. 그러나 서복은 평원
광택(들판과 강물)을 얻게 되자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첫 출항이 실패로 끝나자,
진시황의 처벌이 두려운 서복은 오히려 잔꾀를 내어 더 대규모의
항해를 기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복은 마지막 항해
를 떠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의도적으로 탈출하였음을
보여 주는 대복이다.
조인강 <중국국제서복문화교류협회비서장>
“진시황이 통일한 후 폭정을 실시했기 때문에 서복이 폭정을 피해
진시황이 장생불로초를 얻겠다는 점을 이용해서 동쪽으로 도망
쳤을 가능성이 높다.“
산둥반도 남쪽 항구도시(장쓔성) 연운항.
서복의 또 다른 출항지로 알려진 것이다.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서복이 의도적으로 탈출한 항해였음을 학자들 역시 정설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서복이 정착했다는 곳은 어디일까?
일본 규수의 사가현(모로토미)
넓은 들판과 강물이 흐르는 이 지역은 사가평원으로도 불린다.
중국과 일본학계에서는 사기에 나오는 서복의 평원광택을 근거로
서복의 최종 정착지를 일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복은 어느 곳에서 기나긴 항해의 닻을 내렸을까?
사가현의 남서쪽 해안가 모로토미.
사가현을 흐르는 사가강 하류로 바다와 만나는 곳(부바이 해안)이다.
바로 이곳이 서복의 상류지로 알려져 있다.
해안 곳곳에서 자라는 갈대밭에 흥미로운 서복의 전설이 서려 있다.
서복이 배를 타고 이곳, 해안에 오를 때에, 무성한 갈대숲을 헤치며
들어왔는데, 서복이 한 손으로 갈대를 제쳤기 때문에 갈대 잎이
한쪽으로만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 해안에서는 잎이
한쪽으로 자라는 잎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모로토미 마을에는 이처럼 서복에 관한 전설이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과연 이 마을에는 어떤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을까?
마을 외곽 한 신사에 오래된 향나무(백진 향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오랜 세월에 고풍미를 자아내는 이 나무는 서복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무라오카아사 (사가현 서복회 부회장)
“이 나무는 수령이 2,200년 되는 나무로서 일본에서는
잘 볼 수가 없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있는 나무다.
서복이 이곳에 들어와서 갖고 온 씨를 심어서 자란 나무라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다.”
서복이 심었다는 이 고목은 수차례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세월의 무게 때문일까, 여기저기 뒤틀린 고목의 모습에서 2천의
신비가 빼어나는 듯하다. 서복의 전설은 마을의 한 주택에도
있었다. 기나긴 항해를 마친 서복이 손을 씻기 위해 파놓았다는
데라이츠 우물.
지금은 메말라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우물은 100여년 전, 집을 지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 한다.
서복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긴류신사.
모로토미와 같은 이름의 신사로 이곳이 분봉이다.
사가현 시가에서는 서복이 이 집에 정착해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주민의 병을 고쳐주고 의술을 가르쳤으며 오곡종자를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벼농사도 가르쳐 주었다. 서복이 이 지역의 주민들의
존경과 강한 신뢰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구와하라 다다시 (샤가시 주민)
“우리는 서복에 대해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서복은
우리에게 의학의 신이고, 비를 다스리는 도작(농경)의 신이다.
우리는 서복으로부터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는 많은 은혜를 입고
있었다. 서복은 우리의 조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우리 지역 사람
들은 모두 갖고 있다.”
서복은 이 지역에 정말로 많은 영향을 끼쳤을까?
제작진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 고대유적지로 찾아 갔다.
사가현 간사끼군에 요시노가리.
이 유적은 대표적인 일본의 야요이 유적지이다.
야요이 문화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일본 문화로
벼농사의 시작과 대규묘 마을의 형성 또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훗날 고대국가로 발달되어가는 문화를 말한다.
바로 요시노가리 유적은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이 사가현 일대가 일본 고대문화의 발상지임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시치다 다다아키 (사가현 교육위원회)
“요시노가리 유적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새로운 문화 즉, 벼농사,
금속문화 등을 받아들이면서 발전했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이 발전해서 도시가 되었고 외국의 많은 문화가 들어와서
발전했던 유적지이다."
일본 규수지방은 선사시대에서 중세시대까지 외국의 문화를 가장
받아들였던 일본의 관문이었다. 그래서 이곳 요시노가리 지역에서도
한반도에서와 중국에서 건너온 유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경에 유리옥들과 청동제 같은 중국제품들이
대량 들어왔다. 주로 지배층의 장식품으로 사용된 옥팔찌를 비롯해
옥으로 만든 귀걸이와 목걸이들도 중국에서 들어온 유물이다.
까맣게 숱이 되어 버린 볍씨와 벼를 수확할 때 쓰던 돌칼, 일본의
벼농사도 기원전 2세기경 바로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서복이 오복 종자와 벼농사 기술을 전파했다는 주민들의
주장들이 과연 사실일까? 그 해답은 옹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유시노가리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무려 2천여 개의 많은 옹관이
출토되었다.
이 안에서는 많은 유골이 나왔는데 머리가 함몰된 유골,
화살이 꽂힌 유골, 심지어 목이 잘려나간 유골이 출토되었다.
당시 치열했던 이곳의 전쟁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기 묻혀 있던 이 집단이 기존 토착민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살던 죠몬인은 남방계 황인종인 것에 비해 이 유적의 주인공들은
북방계 황인종들이다. 전혀 다른 외부 집단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시치다 다다아키 (사가현 교육위원회)
“야요이시대 이전에 일본에는 죠몬사람들이 있었는데 죠몬시대
사람들에 비하면 야요이 시대 사람들은 키가 훨씬 크다.
남자 163센티, 여자는 152센티 정도가 되는데
그것은 도래인 즉, 한반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야요이 시대의 문화로 바뀌었다.
도래인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경 청동검과 유리옥 등 중국유물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벼농사가 이 일대로 중심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북방계 외부 집단이 정착했다는 사실은 서복 집단과 분명 연관이 있어
보인다.
고고학계에서도 서복의 시기가 100년 가량의 차이가 보이고 있지만
서복의 집단이 일본의 죠몬문화를 야요이문화로 발젆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시치다 다다이키 (사가현 교육위원회)
“이곳 사가지방에도 서복 관련 전설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곳 지역은 서복 전설에 있어 하나의 유력지라고
할 수 있는데 서복 개인보다는 서복집단으로부터 훌륭한
문화가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고는 할 수 있다.”
기원전후 일본의 고대문화를 이끌었던 유시노가리 유적.
일부 학자는 이 유시노가리 유적을 일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국가 야마탄소 추정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기원전 3세기경
유시노가리 유적은 야요이 문화라는 새로운 상징문화를 이루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서복이라는 집단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의 고대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타 기요코 (사가현 의회의원)
“국제 친선이라는 관점, 또 평화의 상징이란 점에서 이
중국에서 훌륭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서복은 의학의 신, 농경의 신, 학문의 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문화가 전해져서 일본의 야요이 문화가 시작됐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망망대해를 건너온 서복,
사기의 기록처럼 그는 일본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존경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서복 관련 전설이 많은 사가현에도 유독 그의 죽음의 관한
전설이나 유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서복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일본반도 남쪽끄트머리에 위치한 아가야마현 신구시.
이곳 시내 중심가에 서복 공원이 자리해 있다. 화려한 중국풍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온화한 인상의 서복상과 불로의 연못이 편안함을
자아내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녹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는데 숲 한가운데에 서복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불로의 연못 뒤로 보이는 이 작은 나무숲이
바로 서복의 무덤이다.
서복의 무덤에는 커다란 바위로 세운 묘비만 남아 있다.
‘진서복지묘’ 이 묘비는 3백년 전 이곳에 부임한 관리가 세운 것으로
1940년대까지 이곳에 기와를 담장으로 두른 중국식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해마다 8월이며 이곳에선 서복을 모신 제례가 열린다.
조후쿠 마쓰리, ‘서복제’다.
이곳 주민 역시 서복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병을 낫게 하는 의약 기술을 비롯해 벼농사 기술과 종이를 만드는
제지법, 고래를 잡는 포경기술, 그리고 그물망을 이용한 어업기술
까지 사가현 지방보다 훨씬 다양한 기술과 많은 문화가 이곳에 전
해졌다. 그래서 신구시 주민들 역시 서복에 대한 경외심은 대단하다.
오쿠노 도시오 (일본 서복회 부회장)
“그 외에도 중국의 선진문화인 쌀농사, 제지, 어업기술 등을 가르
쳐줬다. 특히 당시 이곳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의학기술인데,
이것을 가르쳐준 사람이 서복이다. 그래서 서복을 사람들은
하느님, 신적인 존재라고 믿었다.”
신큐시 인근 마을에도 서복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미에민 쿠마노시의 해안 마을 하다스,
바다를 품에 안은 듯 주변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30여 가구가 사는 아담한 이 마을에도 서복전설은 역사로 전해지고
있다. 서복이 상륙했다는 해안가 언덕에 서복을 모셨다는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도 서복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묘비는 서복
의 무덤이 아니라 이곳에 상륙한 서복을 추모하는 묘비이다.
이 사당은 서복을 이 마을의 시조,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곳 전설에 따르면 서복이 이곳에 상륙한 후 오랜 기간에 살다가
인근 마을, 지금의 신규시로 떠나갔다. 하지만 나머지 서복 일행은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후손들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마을 이름도 진나라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뜻에
하다스(秦住)라고 되었다고 한다.
추지시호 (아이치연립대학 문학부 강사)
“서복이 바다를 건너서 이곳에 상륙했을 때 자신의
신분 위험을 생각해서 서씨성을 숨겨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의 진씨(하다)를 썼다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지명이나 인명은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서복이라는 걸 연관 짓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일 수도 있다.”
현재 진씨성을 가진 후손은 모두 마을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서복에 대한 전설이 역사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서복이 가지고 들어왔다는
진나라 시대의 동전도 전해지고 있었다. ‘반양전’
진씨왕이 화폐를 통일하면서 만든 것이다.
이 뿐만 아니었다. 서복이 약을 만드는 데 썼다는 약탕기를
직접 만날 수가 있었다. 이것들은 소중한 마을의 보물로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야마나시현 서복사]
서복이 자신들의 고향에 정착했다는 일화는
일본 전역에서 전해지고 있다. 규우시의 남녘 끝,
가고시마에서부터 훈시의 북녘 끝 아오모리현까지
모두 20여개의 지역에 달한다. 이는 서복이 일본에 끼친 영향이
자못 크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모자이 도라오 (동경해양대학 명예교수)
“서복이 일본에 왔을 때는 보통 인원 수가 아니었다. 그 많은
인원 가운데 일부는 일본에 그냥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의 후손들도 계속 살아왔을 것이고, 하여튼 그것이
죠몬시대와 야요이 시대가 바뀌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이 서복이 일본에 미친 큰 영향력이라고 생각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
신선사상에 심취한 진시황의 이름으로 멀고먼 항해 길로
오른 서복, 서복의 목숨을 건 불로초 탐사는 2천2백년 전,
감행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집단 망명사건이었다.
일본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추앙 받고 있는 서복. 그의
일본 진출은 고대 일본 문화의 커다란 발전을 가지고 왔으며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이동경로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 전설로 묻혀 있었던 진시황 불로초 탐사는
2천2백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서서히 그 진실이 밝혀졌다.
네/트/워/크/스/페/설 TBC
진시황, 불로초를 찾아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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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타] 『진시황, 불로초를 찾아서 1부』대구 경북 방송 [네트워크스페셜]를 녹취한 것입니다. 제주 서귀포에 있는 서복전시관에 대해서는 2부로 방영되었습니다. 참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