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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알평공 |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날 경주 하늘에 한 줄기 서운이 감돌더니 빛을 타고 신인 한 분이 홀연히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용모가 비범하고 덕과 위엄이 가득했다는 그 선인이 바로 경주이씨 시조 알평공이시다. 경주 표암봉, 이른바 밝바위에 하강하시니 광임대는 시조께서 첫발을 디디셨던 장소라고 전해진다. 당시 경주를 다스리던 진한은 여섯 부락의 연맹체로서 나라에는 질서가 없고 백성은 우매하였다. 이에 알평공께서 알천양산촌장으로 추대되시어 각종 문물제도를 정비하셨다. 특히 국사를 결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안건으로 채택치 않는 만장일치제도를 확립하셨는데 이는 후일의 신라 화백제도로 계승되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촌장들과 백성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었으나 시조께서는 13세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40여년간 섭정함으로써 신라건국의 기반 마련에 온 힘을 쏟으셨다. 건국 후에는 아찬의 벼슬에 올라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경제와 국방을 안정시키셨다. 3대 유리왕은 건국원훈인 알평공에게 이씨성을 사성하니 이로써 이천년 경주이씨의 도도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평공 이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천여년의 세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알평공을 시조로 소판공 거명을 중시조로 선대의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 |
소판공 이거명 사단 |
경산 울산시 청량면 양호단소는 중시조 소판공 거명의 사단을 모신 곳이다. 소판공은 고려말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 이제현의 묘지문에 그 선대가 신라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시조이후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가 되었다. 이로써 경주이씨 소판공으로 중시조로 문중사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라때 소판의 벼슬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를 누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판공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으로 번성하여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과거급제자가 백팔십두분, 재상 여덟분, 공신 열두분, 청백리 열분으로 이땅에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
경주 이씨 본종 분파 |
소판공 10세 춘천 순홍부사와 춘림 문하시랑 형제분을 시작으로 십오세 이후부터 주요계파가 형성되었는데 평리공파, 익재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 사인공파, 판정공파, 월성군파, 직장공파, 석탄공파, 교감공파이다. |
평리공 이인정 사단 |
평리공파 파조인 성암공 인정은 문하평리로 있을 때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부당한 관리임명에 반대하여 반대하여 임용서류에 서명을 거부 정직을 당한 일이 있었다. 성암공의 처자인 우헌납공 규 역시 왕이 승려에게 관직을 내리자 유배를 감수하면서까지 서명날인을 거부하여 나라의 법을 천하에 밝혔다. |
동암공 이진사단 익재공 이제현 사단 |
일헌공의 차자인 동암공 진은 아우인 세기와 더불어 왕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에 천장급제하여 대사성, 정당문학을 역임하며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그 슬하에서 고려 최초의 학자가 탄생하니 익재 이제현 선생이다. 익재공의 세 아들 서종, 달존, 창로의 후손들이 익재공파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
소경공 이지회 |
공의 이름은 지회 이시니 경주서 계출되어 계림부원군 문충공 익재 재현 의 현손이요. 병조판서 선의 아들로 출생하여 학업을 닦아 경전에 통했으며 학행으로 발탁되어 벼슬이 태상소경이 되고 방촌 황희 의 천거로 특진하려 하니 글을 올려 걸해하고 고향에 돌아와 스스로 가은이라 호 하며 숨어계시다가 천명을 마치니 장례는 금박산 아래 염불암 유좌 언덕에 정부인 안동권씨와 같이 드렸다. 이에 그 대략을 위와 같이 적으면서 새겨 이르되 창성하고 부러움내 동양갑족 경주이씨 문정 동암 문충 익재 고려 조에 드려났다. 공이 임금신임 얻어 경연관에 뽑혔으며 정승들의 천거받아 높은 벼슬 주려 할재 글을올려 겸손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불암봉 밑 골짜기에 공의 산소 모셨는데 오래세월 실전되어 길가는이 탄식하니 온갖 힘을 모아나가 단을 베풀어 제사를 지냈다 |
판윤공 이지대 |
시랑공(侍朗公) 서종(瑞種)의 증손인 판윤공 지대는 단종복위를 꾀하는 사육신의 거사소식에 호응하여, 한성판윤의 벼슬을 버리고 벽촌에 우거하였다. 거처에 손수 심었다는 수령 오백살의 은행나무는 세월을 뛰어넘는 충절의 의미를 전하는듯 한다. |
밀직공 이창노 |
익재공의 삼남으로 개성윤에 올았던 밀직공 이창노. 밀직공은 우리국토를 침략병합하려는 원나라와 친원파 세력의 책동을 예견하고 이를 적극 방어견제하여 나라와 왕실이 보존에 신명을 다하였다. 당대의 석학이자 충신이었던 익재공의 음덕 때문이었을까? 대대로 학문과 절개가 빼어난 자손들이 푸르게 일어나니 익재공파는 문중에서 자손이 가장 번창한 대종문으로 일컬어 진다. |
송암공 이세기 사단 |
송암공 세기를 주벽으로 모신 단구서원, 송암공은 천장급제하여 대제학과 검교정승직을 지냈다. 슬하에 네 아들 또한 잇달아 대과에 급제 문명이 일세에 떨치니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맥금리에 설단하였다. 송암공의 장남 천은 국당공파, 차남 매는 부정공파, 삼남 과는 상서공파, 사남 조는 사인공파를 형성하였다. |
국당공 이천 |
국당공 천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얻고 왕에게 경서를 시강하였다.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재상급인 문하시랑평장사와 월성부원군의 봉호를 제수받았다. 네아들 문정공 경중, 판서공 배중, 제정공 달충,정선공 성중의후손이 국당공파의 세계를 계승하였다. |
상서공파 |
상서공파는 조선조에 정승이 여섯분, 행직판서가 십여분이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국충절에 앞장섰던 공신도 여러분이 있어 인재의 가문으로 일컬어진다. |
사인공 조 |
사인공 조는 일찍이 학덕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강직고절한 성품으로 인하여 화를 입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곽산으로 배소를 옮겼다. 이성계가 신하된 도리를 저버리고 조선을 개국하자, 두문동에 우거하며 조선왕실의 입조 권유를 끝내 뿌리셵다. 두문동 청절사에 배향된 절신 이십인 중 한분으로 8세손 촌림, 춘우 형제분 또한 병자호란 중에 순절한 하늘이내린 충절의 가문이다. |
판정공 이강 사단 |
판정공파의 파조인 강은 득견의 삼남이며 열헌공의 막내아우가 된다. 벼슬은 고려조 정순대부 판전객시사를 역임하였고, 아들 신유는 봉의대부 예의판서에 올랐다. 원무, 운경을 거쳐 공의 고손 수,경,자,오,사등 다삿형제의 후대가 계대를 번창하게 이어지고 있다. |
월성공 이지수 사단 |
월성공파 파조인 지수 역시 묘소 실전으로 충남 논산군 연산읍 어은리에 사단을 모셨다. 행장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력을 살필수 없으나 고려조 상서좌복야와 월성군의 봉호수를 제수받았다. 아우인 지연의 후손은 원주이씨로 분적하였고 월성군의 장남인 정렬공 규, 원나라에 억류된 충숙왕의 화를 면케 한 공로롤 이등공신의 첨의평리에 오른 차남 진의 후손들이 월성군파의 맥을 이었다. 소판공의 9세 차손되는 문하시랑 춘림의 9세손에 와서 양오 직장공파, 존오 석탄공파, 존사 교감공파로 나뉘었다. |
석탄공 이존오 |
석탄공파 파조 존오 선생은 높은 학덕과 직간충신으로 만세에 추앙 받는 대명현이다. 원래 강직한 성품에 도의 신념이 굳건했던 석탄선생은 군민왕의 총애를 입고 방자하게 국권을 농락하는 신돈을 탄핵하는데 승소하여 앞장섰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다가 풀려 공주 석탄에서 우거하던중 나라를 걱정하던 중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이 병이 되어 마침내 경륜응 펴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다. |
익재 이제현 |
명문에는 그 명성에 걸 맞는 위대한 인물이 있다. 구강서원에 주벽으로 모신 익재 이제현선생은 고려말 충선왕에서부터 공민왕까지 여섯왕을 섬기며 학자이자 정치가요 문장가로 추앙 받았던 대명현이다. 공민왕조는 네 번이나 제상에 올라 많은 치적을 남겼다. 고려사 명신록에 따르면 익재 선생은 우리 나라 성리학의 개척자인 백이정의 문인으로 열 다섯에 성균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충선왕이 연경에 만권당을 세우고 특별히 선생을 불러 학문을 연구토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원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고려에 새로이 전래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특히 문학에서는 고려 문학을 한차원 높이 끌어 올렸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였다. 구한말 한문학의 대가인 김택영 선생의 시를 일러 공교정준하고 만상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대가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충성심이다.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럭하여 내정간섭이 극심하던 때로 원에 의해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이 잇달아 양위당하고 충선왕이 원으로 소환, 유배되자, 선생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원나라 조정에 간곡한 상소를 올려 왕을 석방토록 하였으며, 공민왕 즉위 후에는 섭정승에 올라 몽고풍 일소, 내정간섭 기관인 정동행성의 폐지, 부원세력의 숙청등 자주성 회복과 부국강병을 위한 대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이 16년 하세하니, 시호를 문충이라 하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
석탄공 이존오 |
난세에 충신이 난다고 했던가? 정국이 혼미했던 공민왕 말기, 국권을 잡은 신돈이 오만과 실정으로 나라를 그르치고 있었으니, 조정대신 모두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탄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석탄 존오선생은 26세 정언의 신분으로 분연히 붓을 들어 척돈상소를 올리고 어전에서 왕과 나란히 앉아 있는 신돈의 불손함을 호령하여 내려앉게 했던 직간충신이다. 선생은 이 상소로 왕의 진노를 받아 장사감무로 좌천 , 유배되었다가 풀려 공주 석탄에 우거하였다. 이때 신돈의 횡포가 날로 극심해지니 나라걱정이 병이 되어 우국의 한을 품은 채 신돈이 망해야 내가 죽는다고 외치며 별세하시니 학문과 경륜을 펴보지 못한 아까운 나이 서른하나! 고려사를 읽던 조선조 숙종대왕은 석탄사적을 보고 감동하여 공의 늠연한 충절을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빛났으며 그 높은 명망은 반천년간에 뉘라서 당할손가 라고 찬탄하였다. 석탄선생 별세 석달만에 신돈이 반역으로 처형당하자 공민왕은 늦게나마 선생의 충절에 감동하여 판삼사 대사성을 증직하고 열살 된 아들 래를 불러 직장벼슬을 내렸다. 조선 인조조에 충신 정문이 내렸고 네곳 사원에 배향되었다. |
경절공 이래 |
석탄선생의 아들인 경절공은 어린나이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사려깊고 굳건한 성품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문장이 출중하였다. 우왕 구년 문과에 급제, 간의대부로 출사하였다. 그러나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옛말처럼 경절공 역시 강직한 성품으로 세도가의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풀린 후에 공주 석탄에 우거하며 조정의 부른에 응하지 않았다. 경절공이 관직에 복귀한 것은 조선 개국 후 옛 친구 정안대군 방원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은 왕위계승을 울러싸고 왕자들 간의 알력이 심할 때였다. 이때 정안대군을 없애려는 반란을 눈치채고 이를 미리 평정케한 분이바로 경절공 이래다. 태종이 즉위하자, 경절공은 세자사부,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전력하였다. 공이 사헌으로 있을 때 살인한 왕족을 사면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그 부당함을 직접 간언하여 의법처리 함으로써 개국초기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 잡았다. 태종 16년 55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 애관을 보내 예장치제케하고 영의정의 증직과 개성부원군을 추봉하였다. 또한 종묘배향과 더불어 불천지위의 특전을 내려 종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
양평공 이철견 |
밀양군 단장면 국전리의 추원제는 양평공 철견의 위패를 모셨다. 양평공은 다재자능하며 무과에 급제하였고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등 다섯 임금을 모시며 애국충정을 다한 명신이다. 성종조, 한성부판윤으로 재직할 때 백성들을 이주시켜 국경을 안정시킨 사민의 공이 있었고 나라의 중대사마다 탁월한 경륜을 발휘하여 신멍이 두터웠던 성종조의 총신이다. 조리공신과 월성군을 봉하고 의금부오위도총부도총관과 형조, 호조의 판서, 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두 번 한성판윤이 되고, 재차 대사헌을 지내 문무를 겸비하고 국사에 밝았다. 연산군 2년에 별세하니, 나라에서는 시호를 양평이라 하고 불천지위를 명하였다. |
창평공 이공린 |
평안관찰사 윤인의 아들인 창평공 공린은 장인인 박팽년의 죄에 연루되어 삼십년간이나 출사치 못하다가 공의 어머니 남양홍씨가 절부로 장려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환로에 올라 창평현감을 지냈다. 창평공은 팔별집의 일화로 더욱 유명한데 신혼 첫날밤, 꿈에 한노인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아침상에 쓰려던 자라 여덟 마리를 방생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들이 모두 헌달하여 팔별집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재사당 원은 사화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
재사당 이원 |
창평공의 셋째 아들인 제사당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19세 어린나이로 문과에 급제, 예조좌랑에 올랐다. 연산조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인들이 화를 입을 때 재사당 역시 곽산에 유배되었다가 6년 뒤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처남 최명남이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모시니 경기도 양주군 회전면 덕계리에 있는 지금의 묘쏘이다. 당시 공의 나이 서른 넷, 충절이 지조를 지키다가 아까운 나이에 참화르 당하였으나 중정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연산군의 무오, 갑자사화에 이어 중종조 또 한 번의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훈구파에게 화를 당했던 기묘사화, 이때 성균관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뜰로 나가 조광조의 무고함을 극간했던 이가 모산공 해이다. 본시 영달에는 욕심이 없어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으나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초개처럼 여겼던 것이다. |
용재 이종준 |
경북 안동시 서호면 금계리에 위치한 경광서원, 이곳에는 높은 학덕과 절개로 안동유림의 추앙을 받는 용재공 종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용재공은 김종직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대의 명유인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교우가 되었다. 홍문관직제학을 지냈던 공이 시와 글씨는 당대 으뜸이라 중국사람들 조차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가 화근이라 했던가?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 유배가는 도중,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담아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이 시가 나라를 비방하고 임금을 원망한다는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던 중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중종반정 후 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이 신원되었으나 복관되지 않다가 용재공의 절개를 추앙한 안동 선비들이 조정에 주청하여 숙종조에 마침내 신원되었고 부제학을 증직받았다. |
백사 이항복 |
사화와 당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선조조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하니 사상 초유의 국난을 맞아 경주이씨 충절의 전통은 국난극복의 민족혼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임지왜란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병조판서로서 비상시의 대 국방 책무를 맡았던 백사 이항복선생, 백사선생은 뛰어난 지모와 불굴의 의지로 바람앞에 등불 같았던 국운을 구한 조선조 4대 명신 중의 한 분이다. 왜란당시 도승지였던 백사선생은 탁월한 지혜로 숱한 위기를 넘기며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하고 근왕병을 모집하여 전란 평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왜란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올라 국정을 이끌었고 전란 후에는 영의정으로 질서회복과 민심수습에 전력했던 선생은 광해군조 인목대비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고 북청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서거하였다. 임진왜란과 당쟁으로 온 나라가 혼미하던 시대를 살면서 전시에는 충신이요. 전란 후에는 당쟁의 조정에 힘썼던 명신 이었으며, 청백리였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완벽한 선비의 전형이었으니 선생이 빛나는 삶과 지조 있는 죽음을 후학들의 사표로 영원히 추앙 받고 있다.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백사선생의 선영, 이곳에는 평생 벼슬을 멀리했으나 학덕으로 추천되어 좌찬성에 증직되었던 선생의 조부 예신, 춘방보덕 편수관 평안부사를 거쳐 직제학에 추증되었던 백부 봉윤. 그리고 부친 정헌공 몽양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정헌공은 진천수령으로 있을 때상전을 모략하는 종을 엄벌하여 몰락한 선비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었던 명관이었다. 정헌공의 삼남인 송복은 병자호란때 왜군에 굴하지 않고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백사선생의 사남으로 병자호란때 공을 세웠던 기남과 선생의 뒤를 이어 가문의 이름을 빛냈다. |
충무공 이수일 |
백사선생이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안, 전장에서는 또 한사람의 경주이씨가 혁혁한 무공으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었다. 충무공 이수일장군, 임란중 두 분의 충무공이 있었으니 한분은 해전에서 전승장군 덕수후인 이순신이요. 또 한 분은 육전의 전승장군 경주후인 이수일이다. 의식주를 사병들과 똑같이 나누어 병사들의 정신적인 숭상을 받았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다. 인조조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평안도 관찰사겸 사원부원수가 되어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 공으로 진무이등공신 계림부원군에 봉군되고 형조판서에 책봉되었으며 하세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료가 충무이시며 불천지위의 특전을 받았다. 나라에 공이 많았으나 항시 겸양의 덕을 잃지 않았고, 성품이 청렴강직하여 수원부사로 재직 시에는 군량미 백석을 요구를 해온 왕자 암해군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도 있었다. 장군의 뜨거운 충절과 청렴은 지금도 후세에 기림을 받고 있는데…. 평생 깁지 않은 옷은 걸친 적이 없고 가족들이 기거할 집이 없을 정도로 청빈했던 충무공 이수일 장군! 슬하에 경림군 정, 좌봉공 용, 정익공 완, 첨사공 재의 4형재분을 둔 장군은 후손에게 재물대신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고 한다. "벼슬에 나가서는 겸약하고 몸가짐을 겸손히 하고 남을 대할 때는 충심을 다하라." 장군의 가르침은 후손들에게 어떤 재물보다도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
정익공 이완 |
충무공의 가르침을 좇아 평생 병자호란으로 피폐된 이 나라의 부국강병과 자주성 회복을 위해 한 몸을 초개처럼 던졌던 효종조 북벌정책의 기수 정익공 이완장군은 바로 충무공의 삼남이다. 정익공은 지모와 용맹과 불굴의 충성심을 타고난 문무겸비의 대장군이었다. 청의 강요로 명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명의 장수에게 미리 연락하여 종일토록 싸웠으나 사상자가 없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효종의 신임 두터워 사사로이 골육지정이요 공으로는 군신지의로 뜻을 합하여 회천대업의 소명인 북벌을 위한 부국강병, 군비확충, 전국의 요새축성에 평생을 바쳤으나 효종의 급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재에서 얻은 상처의 재발로 73세에 별세하였다. 후대 정조는 공의 충절을 추앙하여 "정익공이야말로 이순신 이후 제일이 대충절이니 국가는 이순신과 똑같이 예우하라"고 명하였다. 종묘 효종 묘정에 배향되고 불천지위로 모셔졌으며 조정암 대통묘에 병자호란 10현으로 배향되어 지금까지 춘추로 재향되고 있다. |
경양군 이사공 |
과거에 급제하여 곽산부사 겸 동지부사로 재직중 임진왜란을 당한 경양군 사공은 고관대작들조차 살길을 찾아 떠나버린 외로운 몽진길을 지켜 수 차례 위급한 상황을 넘겻으나 한시도 임금 곁을 떠나지 않고 나라 일에 전력하였다. 공의 헌신으로 선조는 무사히 의주에 당도하였고 평란 후, 호성공신 자헌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증직하고 경양군을 진봉하였다. 인조조에 별세하니, 임금은 사흘 동안이나 조정사무를 폐하고 위로 3대를 증직하였다. 오재공 탕은 현달한 아들 팔 형제를 두어 속칭 팔정집으로 불린다. 이 팔정집에서 임진왜란의 명장 두 분이 배출되었다. |
오재공 이탕 |
오재공은 사직서령을 지내고 증직 영의정과 오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아들인 사류재공 정암은 임진왜란 중 육지에서 거둔 삼대승첩의 하나인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명장이며 사류재공의 아들인 정형 역시 황해도 사수에 성공하여 전란평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사류재 이정암 |
왜란 당시 이조참의였던 사류재공은 선조가 급히 몽징을 떠나 미처 호종을 못하자,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이끌고 연안성 사수를 결의, 왜적과 대치한다. 총포로 무장한 사천명의 왜적에 포위된 채 의병중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오일 낮밤에 걸친 사투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치니 이것이 유명한 연안대첩이다. |
지퇴당 이정형 |
지태당 정형은 좌승지로 암금을 호송하던 중 개성유수를 제수받아 성거산에서 적의 북진을 저지하는 공을 세웠고 평양탈환전에서는 명나라 원군 제독 이여송과 더불어 왜적을 격파하니 제독이 일찍이 이공같은 주선과 계획을 보지 못했다고 격찬하였다. 왜적이 전국을 유린한 상황에서도 의주 행재소의 왕명이 삼남으로 전달되어 전국의 의병이 창의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황해도를 철통같이 사수한 지퇴당고의 공로였으니 청사에 빛날 위업이 아닐 수 없다. 전란 후에는 이조참판, 대사성, 대사헌으로서 전란수습과 민생문제 해결에 지성을 다하여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오십구세로 별세하니 춘천 문암서원에 배향되어 만세의 충신으로 후학들의 추앙을 받았다. |
벽오공 이시발 |
벽오공 시발은 청주 진천 일대에서 왜적을 격퇴하여 몽진길의 선조를 환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전란 후에는 평양감사가 되어 국경에 침입한 여진을 저지하였고, 병자호란을 예견하여 관서지방에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조련과 군사시설 정비에 평생을 바쳤다. 병자호란의 마지막 요새였던 남한산성 또한 수축되었으니 벽오공의 선견지명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인조조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정헌대부에 제수되고 왕으로부터 백금띠를 하사받았다. 향년 58세로 하세하니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익이라 했다. 경주시 인왕동에는 충효의 상징인 정려각과 창의비가 나란히 서 있어 이채롭다. |
관란 이승증 |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구국충절의 선구가 되었던 관란 이승증 선생은 하늘이 내린 효자로 더욱 유명했다.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감화되어 도둑조차 마을을 피해갔으며 선생이 시묘하던 마을은 지명이 충효동으로 바뀌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분연이 궐기할 것을 촉구하고 칠십팔세의 고령임에도 의병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려는 일념으로 황무지였던 보문평야를 개간하고 보를 막아 옥토를 일구었으니 지금 경주에서 수리시설의 상징이 된 보문호는 선생의 크나큰 유덕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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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이득윤 |
예로부터 스승은 임금, 부모와 같은 격이라 했으니, 하물며 왕자의 스승임이랴. 주역의 대가였던 서계 득윤선생은 학덕으로 명망이 높아 선조가 특명으로 왕자사부를 재수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홀연히 낙향하여 충청도 옥화산에 우거하며 풍광이 좋기로 이름난 옥화구곡의 제5곡에 춘풍당과 추월정을 세우고 옥화서원을 열어 인재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역학의 대유로서 세계비결을 저술했으며 음악에도 정통하여 거문고 연구서인 현금동문유기를 남겼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우리 음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회재, 퇴계선생과 더불어 광해조 국정을 어지럽히는 정인홍 무리를 유적에서 삭제하는 운동에 앞장섰고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때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는 등 강철같은 의지로서 사도의 정의를 지켰다. |
초려 이유태 |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큰 어른을 산림으로 모셨으니 용문서원에 모셔진 초려 유태선생은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더불어 호서산림 오현으로 일컬어지던 대학자이다. 초려선생은 사계 김장선생의 문인으로 유학의 큰 뜻을 통하고 사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송시열, 송준길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의 큰 뜻을 품고 산림제헌을 불러 대업을 의논하매 선생은 선두에서 효종의 뜻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십여년동안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방안을 구상하여 장장 4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해봉사를 완성하였다. 선생을 존경한 현종은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등 숱한 벼슬을 내려 곁에 두려 했으나 선생은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평생 공명부귀에 흔들리지 않고 학자의 고고한 풍도를 지켰으며 관로들의 부정부패를 견제하고 민생의 고통을 대변하는 산림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
구충당 이의립 |
전란의 상처와 당쟁으로 암울하던 조선후기. 입신양명의 길을 마다하고 피폐한 광산의 개발과 철강제조법 연구에 몰두하여 우리나라 광업사에 한 획을 그었던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 구충당 이의립선생은 고대이래 철과 유황산업의 맥이 끊겨 생필품은 물론 무기제작조차 어려운 실정임을 통찰하고 위국안민의 일념으로 십여년에 걸친 탐사 끝에 마침내 철과 유황광을 발견하고 제철법까지 독학연구로 밝혀내니 현종은 선생의 지성에 감동하여 "장하도다 임진난과 병자난을 겪고 거의 백년이 됨에 군비가 풍성해서 남북이 평안하고 백성들이 쟁기로 논밭 갈고 가마솥으로 음식을 만드는 편리함이 어찌 이의립의 덕인줄 모르리오."라고 칭송하였다. |
오천 이종성 |
당쟁의 골이 깊어만가던 영조조.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간신배들은 왕위를 이을 사도세자까지 모함하여 죽이려 들었는데, 이때 영조의 진노를 무릅쓰고 인륜의 도리를 극간했던 이가 오천공 종성이었다. 사도세자가 참소 후에는 후환을 없애려는 간신배들의 끈질긴 계략에 맞서 훗날 정조로 등극한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을 끝까지 보호하였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충간하는 절의와 정적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아끼지 않는 공평무사한 처신으로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당파를 초월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
광암 이벽 |
경기도 광주 천진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유멸한 이곳에는 경주이씨 가문에서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이 한분 모셔져 있다. 광암 이벽선생. 선생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모순을 깨닫고 천주교 서적을 치밀하게 연구한 결과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하여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권철신, 정약용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천주교를 전파는 한편우로 이승훈을 중국 북경대교구로 보내 세례를 받도록 하고, 선생도 세례를 받았으니 세례명은 요한세자. 유헉에 바탕을 둔 교리해석과 교단조직 정비를 통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인 천주교를 수용이라는 기적을 이룩했으나 부친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고뇌 끝에 단식으로 순교하였다. 서른한살의 짧은 생애를 오직 이 땅에 천주교 발전을 위해 바쳤던 광암 선생의 거룩한 희생은 후일 천주교가 대박해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
중남 이인영 |
20세기로 접어든 조선사회는 또 다시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종주국인 중국을 패배시키고.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서양세력에 맞서 대원군을 중심으로 치열한 척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일제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 때 황후시해의 만행에 의분하여 결연히 창의했던 중남 이인영 장군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룬 후 유인석 부대에 합류, 충주점령작전에 참가하였다. 을사보호 조약으로 사실상 국권이 상실되자 재차 봉기한 장군은 전국의 의병장에 격문을 돌려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고 격문에 호응한 만여명의 의병으로 전국 십삼도 창의대진소를 창설하고 총대장으로 추대받아 서울진격작전을 선두 지휘하였다. 그 후 부친상으로 귀향중에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처형 순국하였으니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천안 독립기념관에 이인영 장군 충혼어록비를 건립하여 장군이 남긴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만세에 전하고 있다. |
보재 이상설 |
충북 진천군 숭렬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산봉우리였던 보재 이상설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보재선생은 신학문을 독학으로 통달한 수재로서 포부가 원대하고 세계정세에 밝아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밝힐 수 있는 당대의 동량으로 추앙받았다. 의정부참찬으로 을사보호조약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제의 저지로 참석치 못하고 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즉각 을사조약반대사직상소문을 올려 고종에게 순사의 각오로 조약체결에 가담한 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년 뒤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 용정에 항일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조선독립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하니 후에 설립된 모든 민족학교의 모범이 되었다. 1907년, 용정을 떠나는 보재선생의 품안에는 한 장의 밀서가 들어 있었다. 고종의 특사로서 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보재선생 일행은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사건은 조선문제가 서구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분노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등 대대적인 민족탄압을 자행했다. "동포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그 재마저도 물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국 땅에서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 분골쇄신하던 보재선생은 과로로 병을 얻어 48세로 생을 마쳤다. 유언에 따라 유해조차 화장하여 이국의 강에 띄웠으니 생가외에는 묘소도, 일제의 유품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난기 민족교육의 터전을 닦고, 민족의 나아갈 바를 명시했던 선생의 생애는 후손들의 가슴 속에 위대한 민족혼으로 영원히 기억되 것이다. |
우당 이회영 |
젊음의 거리, 대학로. 이 번화한 거리 한 켠엔 독립지사 우당 이회영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우당선생은 부친이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본래 평민의식이 강하여 고종이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오직 조국 광복에만 정열을 쏟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우당선생 육형제분 모두가 사재를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 고난에 찬 독립투쟁의 길에 나섰다. 보재선생과 함께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유하현 삼원보에는 신흥무관학교를 두었는데,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양성의 총본산으로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이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임정의 소극적인 운동방향에 반대하여 단재 신채호, 김좌진장군과 더불어 군사행동을 통한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국의 앞날을 위해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한 대대적인 사회개혁 방안 마련에도 부심하였으니 우당선생은 당시로는 보기드문 냉철한 행동가이면서 동시에 열렬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평새을 항일 구국운동에 바쳤던 선생은 재만주 항일 독립투쟁기지 구축과 일본고관 암살을 목적으로 대련으로 가던 도중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니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성재 이시영 |
성재 이시영선생은 우당선생의 친동생으로 형제분이 만주에서 활발한 활동울 전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919년에는 상헤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본의 대륙침략으로 항주, 남경으로 쫓길때도 끝까지 임정을 지키며 싸웠다. 해방을 맞아 40년만에 귀국, 초대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의 반민주적인 행태와 독재, 부패에 반대하여, 국민에게 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작에서 사직, 야당지도자로 변신했다. 성재 선생이 해방정국의 분열된 사회상 속에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을 계승하여 설립했으나 정치적 압력으로 빼앗긴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학의 전신이다. 독립운동가로, 야당지도자로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성재선생은 1953년 85세의 나이로 별세, 온 국민의 애도속에서 국민장으로장례를 치렀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
우정 이규채 |
우정 이규채 선생은 지금의 국회의원격인 임시정부의 의정의원으로 임정의 주요정책결정에 참여했다. 1928년에는 공산주의에 대힝한 민족진영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해서 김구, 안창호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정치부위원 겸 군사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복역했으며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
상화 이상화 |
천안 독립기념관 뜰에는 일제치하 최고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삼일운동 당시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상화선생은 문학동인지 백조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문학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한다. 개혁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수 많은 지식인, 학생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던 민족혼의 등불이었다. |
호암 이병철 |
경기도 용인군에 위치한 동양 최대의 사립 호암미술관. 호암은 우리나라 경제계의 거두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아호이다. 호암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열망을 품고 동경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세계 대공황에 허덕이는 일본 국민들의 생활상을 보고, 경제력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사업구국의 신념을 마음에 새기고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 대구에서 삼성상사를 설립을 시작으로 제일제당, 제일보직, 중앙일보, 삼성전자 등 그룹을 형성하여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또한 호암선생은 지금의 명륜동 중앙화수회 건물을 문중에 헌납하여 경주이씨들의 구심점 역할을 맡도록 하였으며 시조사당인 표암재 성역화 사업에도 공로가 많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성장하였으나 탁월한 선견지명과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이 되었으며 특히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분야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생산 세계 1위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
경주 이씨 소명 |
매년 3월 중정일.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경주이씨 시조사당에는 수 많은 후손들이 운집한다. 시조 알평공의 재향일인 것이다. 이 몸의 살과 피를 주신 조상 앞에 경건히 옷깃을 여민 후손들. 조상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인가? 시조 알평공께서 이 땅에 내려와 경주이씨의 문을 연지 어언 이천년. 돌이켜 보매 그 장구한 세월을 경주이씨로 살아온 선조둘의 삶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사람들은 경주이씨를 일컬어 충절의 가문이라고 한다. 시조 알평공께서 겸양지덕으로 왕위를 양보하신 이래 세상의 부귀영달을 멀리하고 충절과 효도로 가문의 전통을 세웠으니 대대로 충신, 절신, 효자가 수 없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인륜과 도덕이 흔들리는 이 시대. 겸양과 충절로 쌓아올린 참되고 아름다운 가문의 전통을 계승발전 시키는 일은 오늘을 사는 경주이씨 모두의 소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