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여름날에 기차창 밖의 녹색으로 펼쳐진 풍경이나 겨울의 하얀 설원의 풍경은
아직도 내 눈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 증평,음성,충주 지역은 산세가 강원 지역에 비하여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고정인구가 많지 않아 사람들이 이용할 기차이외의 교통 수단이 많지 않아 이지역 사람들은
이 충북선기차를 이동의 수단으로 많이 이용하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차안 풍경은 항상 시골 수다장이같은 장터를 그대로 옯겨논 모습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오리 또는 깨,고추같은 밭작물들을 가지고, 동네 조그만 장터보다
좀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군 또는 면 단위로 열리는 장에 팔기위해 기차를타는 시골 아낙들.
군청, 도청 근처의 막일거리라도 찾아 가는 중년의 시골 농부,
지역마다 돌아가며 열리는 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 타는 장돌뱅이들,
그런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삶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그런 정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산세를 차창밖으로 제공하는 완행기차로 세시간 정도 가면
봉양이란 충청북도 산골의 조용하고 한가로운 마을 기차역에 도착 한다..
역무원이라야 역장님 한분, 검게 그을린 얼굴로 승객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아마도 농부일것만 같으신 개찰구에서 승객을 안내 하시는 아저씨 한분,
그리고 철도청 마크가 새겨진 정복이 어색한 기차표 매표창구의 아주머니 한 분
이렇게 세분이 내가 15년간 그 역을 지나는 동안 변함없이 그 역을 지키고 계셨다
기차역 앞 마당엔 역장님이 직접 심으시고 가꾸신다는 개나리, 철쭉, 장미, 먹단 같은
조그마한 꽃 나무들이 마당둘레를 따라 곱게 심어져 화사한 꽃들이 오랜 기차여행에
지친 기차 승객들을 마중하였다
산골마을의 기차역이라곤 하지만 그나마 그 지역에선 큰 마을이었고
그 지역의 다른 더 작은 마을들에겐 아주 중요한 교통의 중심이었다.
기차역을 빠져나온 몇 안되는 승객들은 기차역 앞 마당을 가로 질러 건너편 국도에서
잠시 후 올 완행 버스를, 해를 피하여 나무그늘 아래에서 각자의 짐을 챙겨 기다렸다.
그렇게 2~30분정도 기다리고 있으면,
시골길 먼지를 함박 뒤집어쓰고, 버스 문이 가운데 하나달린 오래된 완행버스가 오고
승객들은 느릿느릿 짐을 들고 버스에 탔다
승객들 짐이 만만치 않게 무거운 탓에, 버스차장은 연약한 아가씨가 아니고
아주 건장하고 젊은 청년이었는데, 버스가 도착 하여 문이 열리면
재빠르게 내린 청년 버스차장이 승객들의 짐을 매우 익숙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버스안에 싣고 또 먼고 험한 시골길에 흔들리지 않도록 정렬을 하였다
오랫만에 만난 반가운 사람들끼리의 인사와 수다스러운 대화에, 가지고온 보따리나 짐을
버스 승강장이나 나무그늘에 그대로 두고 버스에 오르는 경우도 가끔 있어
출발했던 버스가 되올아와 짐을 싣고 출발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느리고 시끄러운 완행버스의 여행은 어렸던 나엔겐 참 즐거운 추억 이엇지만,
나이드신 분들에겐 꼬불꼬불한 길과 포장이 안된 시골길은 매우 고역이었다,
버스는 승객들의 멀미나 기본적 생리현상 해소를 위한 정차 요구를 그때마다
매번 다 들어 주었고 그에따라 버스는 항상 버스 시각표보단 늦게 움직였다
봉양에서 버스를 타면,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먼지 함빡 뒤집어 쓰면서 한참을 지나고
게다가 이 버스 노선의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있는 박달재를 느림보 버스는 한시간에
걸쳐서 넘었었다
지금이야 박달재 아래로 터널까지 생겨서 일분남짓이면 지나는 터이지만
그시절 힘없는 느림보 완행버스로는 한시간이 넘게 걸렸었다
구름도 쉬어넘는 박달재 고개를 말굽모양의 구불구불한 길을따라 덜컹거리며 정상에 올라서면
저멀리 저 아래 평동읍내가 한눈에 보였다
힘들게 올라온 버스도 마치 제가 잘생기고 빠른 고속버스인양 휴게소에 멈춰 잠시 숨을 고르고
올라온길보다 더 험한길을 올라올때보다 더욱 조심스럽고 느리게 내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평동읍내 버스 승강장에서
다시 두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할머니댁에 도착 했었다.
그곳이 내 어릴때 기억의 외갓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