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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王記(백제왕기) 백제서기 우대왕은 신격화가 되었어요.
라디오 추천 0 조회 245 09.03.12 13:44 댓글 6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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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3.12 16:35

    재사대왕의 출자도 유리왕인가..대무신왕인가 이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비를 공유햇다고 봅니다.

  • 09.03.12 16:34

    새로씁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사초가 위작이라니까요. 10년을 추정한 것을 옮긴게 아니라, 뒤로 옮긴거죠.

  • 09.03.12 16:36

    제 생각에 의하면 유리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명의 왕이 있었고, 그 왕의 통치기간 덕분에 대무신왕 나이는 변하지 않죠.

  • 09.03.12 16:35

    근데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없애느라 뒤로 미루어 버린 것입니다.

  • 09.03.12 19:38

    고구려사초가 위작인 부분의 대부분은 신라와 백제의 기년조작이지, 고구려의 역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게중에 진짜를 골라낸다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답답하지만 그렇습니다.

  • 작성자 09.03.12 19:39

    여율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유리왕의 재위 기간 10년 늘어 난 것은 합리적이에요. 역사문에도 글이 또 올라왓듯이..대무신왕은 나이에 문제가 잇어요.

  • 작성자 09.03.12 19:41

    고구려본기 유리왕은 47년을 재위햇고.. 대무신왕은 태자가 된 이후에 동부여를 정벌합니다. 삼국사기는 31년 기사인가가 누락되면서..순서가 뒤바껴서 기술되었어요.

  • 09.03.12 20:33

    재미있는 것 발견했습니다. 온조도 서기28년에 죽었고, 유리도 서기28년에 죽었습니다. 고구려사초에 온조가 10년을 더 살았다고 나오는데, 대무신왕의 초반 10년은 아무래도 온조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정립할 수 있다면 골때리는 이야기기 될 것 같군요.(뒷글에 수정하였습니다)

  • 작성자 09.03.12 19:55

    고구려사초 기년은 우선 믿어도 되요. 대무신왕 원년 AD28년. 여율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 09.03.12 20:26

    선생님// 고구려사초와 고구려본기가 10년 차이가 납니다. 이 10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연히도 고구려사초의 유리왕의 말년과 온조왕의 말년이 같고, 여느책(추모경?)에선가 온조를 유리의 아들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였더니 유리의 늘어난 10년이 수상합니다. 왜 유리가 재사공주의 아들에게 한남 정윤의 지위를 내렸을 까요. 그리고 동명묘는 왜 세웠을까요. 바로 유리의 실제죽음은 고구려본기가 맞다는 것이죠. 늘어난 10년의 치세가 누구의 것이냐가 중요한데...

  • 09.03.12 20:29

    대무신왕의 초년10년이 온조의 것이 아니라, 유리왕의 말년이 온조의 것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동명묘는 아무때나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죽은 다음에 세우는 것입니다. 고구려사초 서기18-20년 기록을 주목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09.03.13 14:22

    정성일님 // 제가 그랬잖아요. 유리왕 뒤의 10년과 대무신왕 앞의 10년은 다른 사람꺼라고. 유리왕 뒤의 10년에 유리왕의 자식들의 출생기록이 하나도 없어요.

  • 09.03.13 15:04

    서기18-28년의 기록은 유리왕의 것이 아닌것은 확실하지만 대무신왕 앞10년은 대무신왕의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 작성자 09.03.13 18:20

    여율 문제까지 해야 하남유? 신명대제(재사대왕)의 갈사태후의 나이문제로 어차피 기년을 앞으로 땡겨야 합니다만..

  • 작성자 09.03.13 18:21

    그 폭을 20년으로 땡겨야 갈사태후가 여러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뎅...

  • 09.03.13 20:32

    해명인가 해술인가 창에 뛰어들어 죽은 유리왕의 아들을 보니, 그 때가 고구려가 온조에게 병사를 주어 마한을 정벌하던 시기이더군요. 결국 유리왕의 아들은 유리가 온조를 돕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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