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서기 우대왕.
北夫餘解夫婁王之庶孫也 解夫婁王以日神降靈之後布德 北方天下泰平 分遣王子于列國 以監民疾苦
북부여 夫婁王해부루왕의 庶孫서손이다, 해부루왕이 태양신이 강령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 왕자를 열국으로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의 병으로 인한 고통을 보살피게 하였다.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 召西奴 甚美 優台聞之 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微不許 優台乃私行至卒本 與召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欲禁之 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溫河)
이 때 졸본태수 연타발에게는 딸이 있는데 소서노라고 하며 대단히 아름다웠다. 優台우태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청하러 갔다. 왕은 優台우태의 어머니가 미천하다고 불허하였다. 우태는 이내 사사로이 졸본에 가서 소서노와 정을 통하였다. 연타발이 왕으로서 허락치 않고 금지하고자 하니, 이내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으로(현재 백두산 온하)으로 도피하였다.
祀河神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使人迎皈遂以卒本之地 皈之時 漢元年 初元二年 甲戌歲也
하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류라 하였다.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의 땅에 맞이하였다. 돌아 온 해는 한 원년 초원2년 갑술년(BC47년)이다.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이 해에 해부루왕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優台우태에게 명하여 졸본의 왕노릇을 하게 하였다.
元年 甲戌 五月 立召西奴爲妃
원년 (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세워 妃비로 삼았다.
立東明廟於沸流川
동명사당을 비류천에 세웠다.
四年 丁丑 三月 次子溫祚生
4년 (BC 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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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 庚辰 正月 王母乙氏薨於夫餘 王往迎其喪而皈至得疾而薨
7년 (BC 41) 경진 1월 왕모 을씨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태왕이 어머니 상을 왕영하다가 돌아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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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봐요.
선민님은 제 말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백제의 개별 기사를 점검해 보라고 얘기를 했었는데, 님 스스로 점검을 해 보면 될 것을..
왜 안 해요?
위 기사를 함 봅시다.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金蛙가 왕이 됬는데, 優台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동부여의 절대권력자인 金蛙가 優台을 낳았나요? 만일 낳았다면, 優台는 왕자의 신분입니다. 優台는 金蛙왕의 사생아인가요?
믿을 수 있습니까?
優台에게 명령하여, 졸본의 왕노릇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졸본의 연타발은 허수아비 왕인가요?
말이 안 됩니다.
우대가 소서노에게 반해서 연타발에게 딸을 달라고 요구를 했는데, 연타발은 우대의 어머니가 신분이 미천하다며, 거절을 하니, 태백산으로 소서노와 함께 도망을 갔던 사람입니다.
우대의 어머니가 미천하다면, 우대도 왕족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추모경에서는 소서노가 우대보고는 자살하라고 강요했다면서요?
백제서기내에서도 서로 모순된 기사가 적혀 있어요.
게다가, 백제 사서들은 비류왕 다음에 온조왕이 왕을 해 먹었다고 얘기를 하는데, 고구려사초에서는 비류는 미추홀로 간 다음에는 3대 지나다가 망하였다고 하죠.
그런데, 백제 사서들은 비류를 비류왕으로서 백제 초기의 왕 계보에 포함시킬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어요.
그런 결과, 비류왕- 온조왕으로 계보를 서로 연결시켜 놓았죠.
비류의 끈을 놓지 않을려는 백제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사서는 다른 나라를 역사왜곡도 하지만, 자국의 역사도 신격화 내지는 왜곡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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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백제왕기에 3종류의 백제 사서가 옵니버스로 짜집기가 되었으니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합쳐서 총 4개의 사서입니다.
이 4개의 사서를 프린트해서 원문과 함께 오류도 고치면서 동시에 서로서로 연대를 비교해 가며, 맞춰 봐야해요.
우대왕편은 28년이 아니라, 29년까지 되어 있어요.
그 연대의 기준점은 서소노가 죽은 해는 BC6년입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전/후의 기사를 비교해 가며, 나이라든가 출자등등을 분석하고 파악해 나가야 하는거죠.
누가 해요?
관심이 있는 사람이 하지 누가 하나요?
현재 저는 이쪽에 관심이 별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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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성일님 정서한 거 봐요.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 甚美 優台聞之 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微不許 優台乃私行 至卒本與山 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 欲禁之 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溫河〉
당시 졸본태수(卒本太守) 연타발(延陀勃)에게는 소서노(召西奴)라 불리는 딸이 있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優台)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우태가 이에 사사로운 용무로 졸본 여산(與山)에 이르러 (소)서노와 상통(相通)하였다. 연타발은 (해부루)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하여 상통하기를 금지하니, 이에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 상류〈백두산 온하〉로 도피하였다.
優台乃私行 至卒本與山 西奴相通
= 우태가 이에 사사로운 용무로 졸본 여산(與山)에 이르러 (소)서노와 상통(相通)하였다.
優台乃私行至卒本 與召西奴相通
= 우태는 이내 사사로이 졸본에 가서 소서노와 정을 통하였다.
與召西奴相通 與 ~ 相通
이런 문장 한두번 해석해 봐요. 수백번도 더 했어요. 산에 가서 산신이랑 섹스합니까?
띄워쓰기도 다르게 되어 있고, 남의 해석글 보기나 했나요?
연타발이 주어인데, 해부루가 왜 나옵니까? BC47년에 해부루가 살아 있었나요?
결과물이 이렇게 나와 있는데, 나보고는 어떻게 하라는 얘기입니까?
재사대왕의 출자도 유리왕인가..대무신왕인가 이중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비를 공유햇다고 봅니다.
새로씁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사초가 위작이라니까요. 10년을 추정한 것을 옮긴게 아니라, 뒤로 옮긴거죠.
제 생각에 의하면 유리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명의 왕이 있었고, 그 왕의 통치기간 덕분에 대무신왕 나이는 변하지 않죠.
근데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없애느라 뒤로 미루어 버린 것입니다.
고구려사초가 위작인 부분의 대부분은 신라와 백제의 기년조작이지, 고구려의 역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게중에 진짜를 골라낸다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답답하지만 그렇습니다.
여율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유리왕의 재위 기간 10년 늘어 난 것은 합리적이에요. 역사문에도 글이 또 올라왓듯이..대무신왕은 나이에 문제가 잇어요.
고구려본기 유리왕은 47년을 재위햇고.. 대무신왕은 태자가 된 이후에 동부여를 정벌합니다. 삼국사기는 31년 기사인가가 누락되면서..순서가 뒤바껴서 기술되었어요.
재미있는 것 발견했습니다. 온조도 서기28년에 죽었고, 유리도 서기28년에 죽었습니다. 고구려사초에 온조가 10년을 더 살았다고 나오는데, 대무신왕의 초반 10년은 아무래도 온조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정립할 수 있다면 골때리는 이야기기 될 것 같군요.(뒷글에 수정하였습니다)
고구려사초 기년은 우선 믿어도 되요. 대무신왕 원년 AD28년. 여율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선생님// 고구려사초와 고구려본기가 10년 차이가 납니다. 이 10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연히도 고구려사초의 유리왕의 말년과 온조왕의 말년이 같고, 여느책(추모경?)에선가 온조를 유리의 아들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였더니 유리의 늘어난 10년이 수상합니다. 왜 유리가 재사공주의 아들에게 한남 정윤의 지위를 내렸을 까요. 그리고 동명묘는 왜 세웠을까요. 바로 유리의 실제죽음은 고구려본기가 맞다는 것이죠. 늘어난 10년의 치세가 누구의 것이냐가 중요한데...
대무신왕의 초년10년이 온조의 것이 아니라, 유리왕의 말년이 온조의 것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동명묘는 아무때나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죽은 다음에 세우는 것입니다. 고구려사초 서기18-20년 기록을 주목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정성일님 // 제가 그랬잖아요. 유리왕 뒤의 10년과 대무신왕 앞의 10년은 다른 사람꺼라고. 유리왕 뒤의 10년에 유리왕의 자식들의 출생기록이 하나도 없어요.
서기18-28년의 기록은 유리왕의 것이 아닌것은 확실하지만 대무신왕 앞10년은 대무신왕의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여율 문제까지 해야 하남유? 신명대제(재사대왕)의 갈사태후의 나이문제로 어차피 기년을 앞으로 땡겨야 합니다만..
그 폭을 20년으로 땡겨야 갈사태후가 여러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뎅...
해명인가 해술인가 창에 뛰어들어 죽은 유리왕의 아들을 보니, 그 때가 고구려가 온조에게 병사를 주어 마한을 정벌하던 시기이더군요. 결국 유리왕의 아들은 유리가 온조를 돕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