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14일부터 8월 15일까지 청소년 수련회를 마치고 그 후기를 올린 글,
제43호 진주소씨 회지 특집란에서 발췌하여 올립니다.
수련회를 다녀와서...
서울 오금고등학교 1학년 소진호
2004년 8월,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한 수련회에 다녀왔다.
1박2일 동안 조상님들의 묘를 돌아보며 참배를 하고 신도비와 비석을 보며 조상들에 대한 업적과 소씨 역사를 대종회 어른들의 설명으로 학습했다.
진주 소씨 청소년 수련회를 통하여 씨족 사랑을 느꼈고, 조상님들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아 진주 소씨라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생활해야 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 뿌리수련회를 가짐으로써 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큰 영향과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 동안 몰랐던 역사를 새롭게 알게된 것은 시조 경공 할아버지의 지조와 절개있는 선비정신이 한편 이해도 되면서 아쉬움이 있음을 느꼈다.
진덕여왕이 승하하고 왕위 계승의 가장 유력한 자리인 각간 상대등과 귀족회의의장인 위치에서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으로 옹립하니 참으로 그 높은 무욕의 겸양정신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역사란 가정이 없지만, 만약 경공 할아버지께서 욕심을 버리지 않으시고 왕위 계승을 하였다면 우리 소씨의 위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왕족으로써 지금보다는 더 번창한 위치에서 이 나라에 제일 가는 씨족이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당시 겸양으로 왕위를 사양하신 시조 할아버지의 사양심이 아쉽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비록 우리 소씨의 씨족 수가 적으나 그래도 우리는 귀족의 후손으로써 대단한 자존심을 지닌 명문가의 맥을 유지해왔다고 자부심을 갖고 싶다.
어느 성씨보다도 역사가 깊고 신라 귀족의 집안이 고려시대로 오면서 씨족의 수도 만만치 않았으나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우리 소씨는 벼슬과 거리가 멀어져 가고 씨족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는 것을 금번 수련회를 통하여 깨달았다.
고려시대 15만이 넘는 우리 씨족이 지금에 와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어른들 말씀을 통해 4만여명이 채 못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진주 소씨 들은 이런 우리 씨족의 상황을 인식하여 좀더 단결하여 진주 소씨의 이름을 널리 퍼뜨리고 당당한 자세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금번 수련회에 참여한 모든 청소년 일가들도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으로 믿는다.
익산 용화산에 모셔진 진주 소씨 조상들의 묘역은 참 대단했다. 또한 우릴 따뜻하게 맞아주신 일가분들은 대대로 그곳에서 살면서 조상님들의 묘를 돌보고 매년 시제 때마다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니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익산 용화산과 이서 벌명당에 조상님들의 묘역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편안함과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림을 느꼈다.
선조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그 곳에서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 품안에서 하룻밤을 묵고 오는 길은, 내게는 사기충천하고 용기와 신념이 넘치는 길이었다.
제1회 진주소씨 뿌리수련회 참가자로서 대단한 용기와 자부심을 가졌으며, 명문집안 소씨의 후손으로 영광스러움은 물론 만족할 만한 수련회 활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제2회 제3회... 수련생들이 배출되길 바라며, 수련생들은 맹목적으로 참가할게 아니라 선조들에 업적과 발자취를 꼼꼼히 살펴보길 바란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깊이 연계시켜 생각해 보고 진주 소씨라는 훌륭한 피가 내 몸속에 흐른다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이 수련회를 이끌어 주신 종친회 어른들과 우리 아버지 소자 재자 만자 분과 큰아버지 소자 재자 운자 분께 감사 말씀드린다.
글 / 소진호(곤암공파 49세손)
서울 오금고등학교 1학년
소재만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