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배공이었다. 일 이년도 아니고 십 여년 넘게 도배일에 몸 바쳤다. 1986년 어느 날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정보로 YWCA에서 도배공 직업 훈련을 받았다. 우리 사회가 직업 선택에 있어서 남녀의 벽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남자 도배공들은 자기들의 활동 무대가 축소됨에 따라 우리 여자 도배공들에 대한 질투와 대립으로 서로가 날이 서 있었다. 고용주 입장이 되는 지업사(紙業社)측에서는 노동 인력의 수요와 공급이 원활해져서 여자 도배공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긍정적으로 수용평가하고 있었다. 일 솜씨가 늘고 작업 환경을 보는 안목이 느는만큼 나를 부르는 곳도 많아졌다. 나는 작업에서 오는 미적 성취감과 경제적인 수입 증가로 일이 고된 줄도 몰랐다. 자고나면 새로운 힘이 생겼고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나는 아주 신이 나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단골 지업사 사장이 배정해준 집으로 작업할 재료를 갖추고 방문 했다. 교양이 있어보이는 그댁 부인은 여자 도배공이 들어서니 놀란 듯 하면서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한눈에 봐도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집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크 시대에서부터 고전파, 낭만파를 거쳐 현대 음악가들의 (작곡가나 지휘자) 초상이 거실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속으론 부러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작업에 착수했다. 칫수를 재고 벽지를 재단하면서 인사치레로 “이 댁은 음악을 하시는가 봅니다.”하고 그 댁의 주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예, 우리집은 내외가 음악 선생이지요. 나는 얼마 전에 퇴직했지만 영감님은 아직까지 현직에 있고요. 딸내미까지 음악 선생으로 일합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응수하기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그것도 가족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그럼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부인은 커피와 과일을 내어오며 나에게 넌즈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럼 색시도 음악을 좋아합니까?” 나는 잠시 망서렸다. 도배공으로 일하러 온 처지에 음악은 무슨 음악, 개발에 편자지. 그러나 상대는 내가 보기에 십오륙 년 정도 연상으로 보이는 인생 선배로 보였기에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대충 에둘러 말했다. 나는 바쁘게 작업에 열중했다. 조금 뒤에 부인은 좀 더 진지하게 좀 전의 질문을 반복했다. 어딘지 모르게 내 성의없는 대답에 대한 그분의 섭섭한 심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담담하게 “음악의 전 장르를 좋아합니다. 동요에서부터 오페라 아리아까집니다.” 실토를 하고나니 후련하면서도 왠지 부끄러웠다. 그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얼굴엔 상대를 신뢰하는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부인은 잠시 쉬었다 하라고 권했다. 그래도 나는 못 들은 척 하던 일에 몰두했다. 부인은 드러내놓고 내 작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나꿔채듯 갑자기 내 손을 이끌고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데려 갔다. “색시가 좋아하는 노래 한 곡 듣고 싶어요. 물리치지 말아요.” 그 목소리엔 명령과 간청이 함께 있었다. 〈그집앞〉을 그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했다. 그분은 “한 곡 더”를 명령했다. 그분은 전직 음악 교사에서 현직 교사로 변신해 있었다. 이어서〈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그분은 나를 위한 답가로 <또 한송이의 모란>을 불렀고 나는 그분의 아름다운 가창력에 황홀해했다. 귀로 먹는 성찬이었다. 우리는 즉석에서 듀엣을 결성해 그분은 소프라노 나는 알토. 중창집으로 편곡된 가곡집 한 권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마스터했다. 일은 저만치 밀쳐둔 채로. ^^ ㅎ~
이제 그분은 말을 놓으며 나를 자네라고 불렀다. 출신학교와 나이를 물었다. 그때의 내 나이는 마흔이었다. 결손 가정에서 자랐기에 제 때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초등학교 음악수업 시간에 습득한 약간의 시창과 청음 실력을 바탕으로 간간히 익혀온 독학이었다. 그분은 나를 제자로 보는 듯 했다. 나보다 이십 년 연상이었다. "일이 없을 땐 뭐하노? 일이 없을 땐 우리 서로 연락해서 산에 가자. 등산도 하고 노래도 함께 하자. 김밥은 내가 쌀게, 자네를 만나게 되서 너무 반갑고 기분이 좋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전화번호를 주며 신신당부했다. 큰 실수를 했다. 선생님께 받은 전화번호는 가방에 넣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작업복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아뿔사! 깜박했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내 작업복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선생님의 전화번호. 그리고 연이은 작업 물량으로 쉴 틈이 없었다. 몇 개월 뒤, 일이 없는 날이면 선생님의 집을 찾으려고 <그집앞> 주위를 몇번이나 서성거렸다. 그 집이 그 집이고, 그 골목이 그 골목이었다. 희미한 기억, 아쉬움만 가득한 채 종내 찾을 수 없었다. 멀고도 아련한 추억이다.
첫댓글 노래 잘 하는 사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럽던데.
선생님은 재주가 많은 듯 합니다..부럽부럽
노래를 잘 하지는 못합니다.글치만 흥얼거리기는 좋아합니다.책읽기 80%,쓰기 20%. 음악은 감상이 80%,부르기 20%. 합창을 좋아하죠. 교과서에 동시가 실린 우남희 선생님이 부럽부럽부럽^^
한 편의 단편소설 같습니다.
마음이 아련해집니다.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지요.관심 주셔서 고맙습니데이~^^
읽으면서 점점 집중하게 만드시네요~ 추억을 글 잘 읽었습니다^^
벌써 37년 전의 이야깁니다. 시답잖은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주시다니요.
소설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두근두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