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 눈 마을 람브레히트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곳의 수도원으로 2차 대전 때 정치범을 수용하였다. 17개의 수용소를 히틀러는 만들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낭만적이고 넉넉하고 순박하고 촌스럽다고 한다. 아마 산속에 사는 이들이라 그럴 것이다. 비엔나는 사목활동이 활발하다. 람브레히트 수도원이 보이는 람브레히트 호텔 223. 창밖에는 어릴 적 그린 성탄절 카드처럼 고요히 눈이 내린다. 이 깊은 산중에 해발 1,024미터 수도원 마을에 밤눈이 내린다.
5시가 넘어 수도원에 도착할 때는 어둠이 내렸다. 제카우 850미터 시골 마을에서도 눈이 뿌리더니 어디 주유소에서 차가 설 무렵 나비처럼 알프스 산속에 눈이 내리고 길에도 눈이 쌓였다. 체코 운전기사는 제카우 식당에 지갑을 두고 왔다. 전나무 가득히 가지가 휘도록 쌓이는 눈, 산골마을 집들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굴뚝에는 나무연기가 난다. 저물녘 이국에서 그림처럼 정겨운 향수어린 정경을 본다. 뭉클한 그리움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친다. 아, 그렇게 어릴 때의 집 마루가 그립다. 그때의 가족이 그립다. 눈은 세상을 뒤로 확 몰고 간다.
람브레히트 수도원의 어두운 복도에서 안내하는 여자는 불 켜는 속도가 느리다. 어둠 속에 우리는 우두커니 서 있다. 수도원은 낯선 자리가 아니다. 추운 복도 밖 정원에서도 눈이 펑펑 내린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박물관을 보고 예수님의 손가락은 ‘예수 그리스도’, 성광 십자가는 ‘나는 있는 자다’라는 말을 듣는다. 큰 성당에서 드린 저녁기도와 미사에는 원장신부님과 4명의 수사와 한 남자가 제대에서 기도를 시작한다. 원장신부님의 인사는 우리를 환영하며 그랏쯔 교구는 마산교구와 자매결연이라 한국을 잘 알며 왜관 수도원 화재 때 한국교회에서 도와주어 감사하다고. 청원기도에서는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셨다. 성무일도 내용은 잘 모르지만 분위기에 빠져서 예수님을 본다.
저녁마다 예수님은 수많은 수도승의 찬미기도를 받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분의 마음은 어떨까? 한국말로 주님 기도를 바친다. 우리는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으로 정성껏 기도한다. 영성체는 감동적이며 맨 앞에서 거양성체 쪼갠 것을 받는다. 이 시간 우리 주님은 눈물 나도록 부드럽고 부드럽다. 영성체의 은혜를 깊이깊이 새긴다.
미사 후 서로 인사하고 여운으로 가슴 벅차다. 그새 눈은 발목을 넘는다. 이렇게 고운 눈을, 푸짐하게 내리는 눈을 어디서 맞을까. 불빛에 비친 눈보라는 동화처럼 아름답고 로맨틱하다. 알프스에서 바라던 풍경이다.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듬뿍 눈을 덮어쓰고 들어선 따스한 호텔 렘브레히트, 저녁은 아래층 뷔페식, 외국인들이 많다. 그들은 왁자하게 들어서는 우리가 낯설다. 이 겨울에 이 산골까지 찾아온 동양인이 묘하다는 듯.
마을 끝까지 가서, 그리고 돌아서 호텔을 지나 수도원까지를 왕복하며 밤길을 걷는 몇- 마르따, 선희 데레사, 몽골언니-은 행복하다. 전나무는 성탄 트리가 되고 빈가지 나무들은 설화가 된다. 그래 그냥 눈꽃이 아니라 온갖 추억들과 그리움을 주렁주렁 매단 눈꽃이다. 신나게 거리를 걷는데 버스가 들어온다. 지갑 찾아 눈길 제카우 산위 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산길을 돌아오는 아저씨가 반갑다. 9시가 넘었다. 손뼉을 치니 아저씨는 불을 켜고 팔을 머리 위로하여 하트 모양을 만든다.
“좋으신 주님, 얼마나 아름다운 밤인가요? 알프스만으로도 둥둥 마음이 떠있는데 듬뿍 환희를 얹어주십니다. 오래된 수도원의 문을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알프스 속의 수도원에서 중세의 신앙과 이야기만으로도 그득한데 이렇게 풍성히 눈을 주십니다. 저녁기도와 미사를 드리는 다섯 명의 베네딕토 사제들의 독일어가 얼마나 낯선지요? 어쩌면 저는 주님께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늘어놓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사랑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독일말처럼 듣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흘려버렸지요. 흐르는 맑은 알프스 물처럼 그렇게 흘려버리고 말았음을 기도시간에 생각했지요. 우리말로 그대로 잘 알아듣겠노라고 했지요. 여러 터널을 지날 때 그 캄캄한 순간, 하느님을 떠나는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늘 빛이신 당신께 머물게 해달라고. 아직도 눈은 고요히 내립니다. 밤 11시가 가까워지고 옆 세실 언니도 한참 전에 잠들었습니다. 내일은 주님, 어떤 날을 마련하셨을까요? 눈에 젖어, 주님 사랑에 젖어 오늘은 깊은 감동으로 몸이 떨립니다. 영혼이 파르르 흔들립니다. 이 좋은 시간에 여기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히 찬미와 영광으로 빛나는 님이시여. 아름다운 맑은 고운 순례의 시간입니다. 크림뮌스터의 아침미사와 꽃 뿌려 님의 공덕 기리라는데 당신께서 눈을 뿌려주십니다. 이 밤에 알프스의 이 고요한 밤에."
밤중에도 눈 내리는 거리를 내다본다. 가로등 불빛에 나비처럼 풀풀 날리는 고운 눈 자락. 이러다가 길이 다 묻힐 지도 모른다. 자리에 누워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을 감는다. 1월 17일, 람브레히트 해발 1,024미터의 이른 아침은 포근하고 고요하다. 간밤, 곧바로 떨어져 내리던 조용한 눈발은 지나간 꿈처럼 그리움이 가득했다. 모든 것이 껑충 옛날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아침 6시 반 수도원으로 간다. 어둡다. 문이 잠겼다. 길은 밤새 치워놓았다. 밤중에 눈 치우는 차가 덜덜거리며 몇 번이나 지나갔다. 마을 끝 연못까지 가본다. 아침의 마을은 눈 속에 잠겼다. 아침 먹을 때 다시 눈이 내린다. 다친 데레사님과 전 신부님은 람브레히트에서 빈 공항까지 택시로 가서 저녁에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수산나님이 빈까지 동반한다. 개운하지 않고 안타깝고 자꾸 송구스럽다.
첫댓글 진솔한 글안에서 풍경이 어슴푸레 그려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