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趙州, 因僧問, “某甲乍入叢林, 乞師指示.” 州云, “喫粥了也未.” 僧云, “喫粥了也.” 州云, “洗鉢盂去.” 其僧有省.
無門曰, 趙州開口見膽, 露出心肝. 者僧聽事不眞, 喚鐘作甕.
頌曰, 只爲分明極, 飜令所得遲, 早知燈是火, 飯熟已多時.
I. 본칙 조주 선사에게 한 중이 물었다. “저는 선방이 처음 입니다. 스님께서 교시를 내려주십시오.” “아침에 죽은 먹었느냐?” “예, 죽을 먹었습니다.” “발우는 씻었고?” 이에 스님이 곧 알아차렸다.
무문 화상이 평하시기를, 조주는 입을 열어 쓸개를 내보이고, 심장과 간장을 드러내 보였다.
그런데도 이 중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종을 항아리라고 하고 있다.1
게송으로 가로되,
너무 확실한 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알아채는데 시간이 걸린다.
등불이 곧 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밥은 벌써 다 되었을 것을!
II. 배경
조주 선사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조주曹州의 학향郝鄕 출신으로 속성은 학郝씨이다. 어린 나이에 고향 호국원護國院2으로 출가하여 경과 율은 익히지 않고 곧바로 참선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은사스님을 따라 지양池陽에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 선사를 참례하고는 입실,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을 시봉하였다. 남전 화상 사후, 60세에 행각에 나서 80세가 되어서야 행각을 끝내고 고향 근방 조주趙州 관음원觀音院에 주석하여 ‘조주趙州’라 한다. 선사의 「12시가十二時歌」에 묘사된 것처럼 청빈하게 살면서 납자들을 지도하다 120살에 입적하였다.
조주 선사는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와 거의 동시대에 살면서 활약하였으나 그 가풍은 완연히 달랐다. 임제 선사는 거친 할, 방을 사용하였는데 반해, 조주 선사는 주로 대담을 통하여 사람을 제도하였다. 임제 선사가 주석하던 하북下北 진주성鎭州城이 변방이라 군인들이 많아 그랬다고도 하는데, ‘마음이 부처’ ‘중생이 부처’라는 두 선사의 기본 사상은 같다고 하겠다.
임제스님의 할喝이나 덕산스님의 방棒에 비견하여 조주스님의 선은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 평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조주스님의 무無자 공안은 종문의 제 1공안처럼 보편화되어 있다. 또 ‘뜰 앞의 잣나무’, ‘청주의 베옷’, ‘진주의 큰 무’ 등의 공안도 조주스님의 인연에서 채택되었다. 『벽암록碧巖錄』 100칙 가운데서 조주스님의 인연에 관한 공안이 12칙이나 된다. 설봉스님이 조주스님을 가리켜 “고불古佛 고불古佛”이라 한 면목을 드러내는 것 같다.3
총림叢林과 청규淸規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으로, 많은 수행승들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마치 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는 모양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선종에서 총림의 성립은 대체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로 부터라고 보는데, 마조도일의 제자였던 백장은 총림에서의 의식儀式 및 수행 및 생활 규범을 정한『백장청규百丈淸規』4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청규淸規는 선원에서 대중이 지켜야할 규칙들을 정한 일종의 법규로, 그때까지 율종 사찰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였던 선종이 마조 이후 크게 번창, 독자적인 도량이 생기고 대중이 늘면서 그에 따른 법규도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백장청규』에는 입실참문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원문은 전하지 않지만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유명한 구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입실入室이란 간화선 수행자가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꾸준히 스승의 방(祖室)에 들어가 자신의 수행 과정에 대한 개별 점검 받는 것을 말한다.5 간화선 수행의 근간은 화두참구에 있으므로, 그 참구한 결과를 점검 받기 위하여 입실이 필요한 것이다. 선종에서 입실이 제도화 되어 있음은 청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선원청규로 알려진 것은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요지를 전하고 있는 『선원규식禪院規式』인데, 여기에서 ‘선원의 모든 대중은 아침에 참문하고, 저녁에 모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6 즉 아침마다 입실참문 하도록 청규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화두를 사용하는 입실제도는 약 천 년 전 송대宋代(960~1279)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波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25),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등의 명승들을 통하여 서서히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전반적인 간화선 수행풍토는 평상시 정기적인 입실제도 보다는 제자가 의문이 있을 때 참문 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알고 있다.7
백장 선사 당시에는 화두점검을 하는 입실제도는 아직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고, 수행하면서 생기는 의문을 묻거나 또는 고칙古則에 대한 문답을 하는 입실참문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입실참문의 모습은 『조주록趙州錄』등 선어록禪語錄에서 그 일단一端을 볼 수 있는데, 이후 염고拈古와 송고頌古의 형식을 거쳐 간화선 수행이 보편화 되면서 지금의 화두 점검을 위한 입실제도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도회 입실제도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무문관』을 바탕으로 하는 입실제도는 일본의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 삼보교단三寶敎團,8 그리고 한국의 선도성찰나눔실천회 등의 수도단체에서 사용한다. 관음선종觀音禪宗9의 창설자인 숭산(崇山, 1927~2004)은 십문관十門關10이라는 일련의 화두에 입각하여 입실제도를 확립했는데, 그 열 칙則 중 일곱 개가 『무문관』에 나오는 고칙古則이며, 그 첫 번째가『무문관』과 마찬가지로 ‘조주구자趙州狗子’이다.11
『조주록趙州錄』
조주 선사의 행장이나 어록 등을 정리한 『조주록』12에는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구성된 약 520여 가지 일화가 실려 있다. 독특한 비유와 절제된 언어, 고준한 뜻이 담긴 조주 선사의 말에 당대의 선사들조차 별다른 견해를 붙이지 못했다고 하는데, 선기가 번뜩이는, 선적禪的이라는 말이 가장 부합되는 최고의 어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입실참문 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한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師問南泉, “知有底人, 向什麽處去.” 泉云, “山前檀越家, 作一頭水牯牛去.”
師云, “謝和尙指示.” 泉云, “昨夜三更月到窗.”
檀越 : 시주施主. 중에게 또는 절에 물건物件을 베풀어주는 사람. 산스크리트 다나파티(danapati)을 음역한 것으로 시주(施主)라 번역한다. 본래의 뜻은 은혜를 주는 사람이다.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불법을 아는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갑니까?”
남전, “산 밑 시주 집의 한 마리 소牛가 된다.”
조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전, “지난 밤 삼경에 달이 창을 비추고 있더라.”13
<해설>14
지유저인知有底人을 직역하면 ‘있음을 아는 사람’인데, 도를 아는 사람, 불법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안다(知)는 것은 단순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깊이 아는 것을 말한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도를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 여기에 대하여 남전 스님은 사람들의 소가 된다고 말한다. 소는 주인을 위하여 묵묵히 일한다. 밭을 갈고, 수레를 끌어 물건을 나른다. 소는 말이 없고 힘들어도 불평이 없다. 불평이 없고 말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 같지만 없어서 안 될 것이 소이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수행자는 한낱 평범한 소처럼 산다. 권위가 없고 형식이 없으며 따로 불교라는 테두리도 두지 않는다. 몇 명이나 도움을 받을지 생각하지도 않고 묵묵히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헌신할 뿐이다.
지난 밤 삼경에 달이 창을 비추고 있었다는 말은 진작 자네의 그릇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선사는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바로 알아들으니, 자네 참 훌륭하구먼.’ 하고 말하는 방식은 선가의 말이 아니다. 선禪은 절대 단정斷定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법을 아는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갑니까?’라는 질문에 남전은 왜 ‘산 아래 시주 집 한 마리 소가 된다.’고 했을까? 깨달은 사람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자유자재하여 원하면 다시 태어나지만, 원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갔다 온 사람이 없으니 그 진위를 알 길은 없다. 그런데 왜 굳이 시주한 집에 소가 된다고 했을까? 시주로 살아가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말한 것은 아닐까? 다시 태어날 것도 없이 지금 시주한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한 것일 뿐이다. 조주는 그걸 바로 알아차리고 감사하다고 했고, 남전은 그런 제자를 보고 너무 기뻐 운치 있게 아름다운 시로 인가하고 있다. 『조주록』의 도입부는 이와 같이 남전이 조주를 인가하는 일화가 많이 등장한다.
有俗官問, “佛在日, 一切衆生歸依佛. 不滅度後, 一切衆生歸依什麽處.” 師云, “未有衆生.” 學云, “現問次.” 師云, “更覓什麽佛.”
어떤 속인 관리가 물었다.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는 일체 중생이 부처님께 귀의하였지만 부처님이 멸도하신 다음에는 일체 중생이 어디에 귀의합니까?”
“중생이란 있은 적이 없다.”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무슨 부처를 찾는가?”15
중생이 곧 부처인데 부처가 또 무슨 부처를 찾는가라는 말이다. 『조주록』곳곳에 보이는 ‘마음이 부처’ ‘중생이 부처’라는 선사의 기본 사상이 잘 드러난 문답이다.
問, “正修行邸人, 莫被鬼神測得也無.” 師云, “測得.” 學雲, “過在什麽處.” 師云, “過在覓處.” 學云, “與麽卽, 不修行.” 師云, “修行.”
한 스님이 물었다.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도 귀신에게 들킵니까?”
“들킨다.”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하고 찾는 데 있다.”
“그렇다면 수행을 하지 않겠습니다.”
“수행하여라.”16
왜 수행하라고 하였겠는가? 수행하지 않으면 계속 구하고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행 없이는 비슷한 의문들이 계속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問, “牛頭未見四祖, 百鳥銜花供養. 見後, 爲什麽百鳥不銜花供養.” 師云, “應世不應世.”
학승이 물었다.
“우두牛頭 법융法融 선사가 아직 4조 도신 선사를 친견하지 않았을 때에는 백 가지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을 드렸는데, 친견하고 난 후에는 어찌하여 백 가지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드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세간에 응하는 것과 응하지 않는 것의 차이이다.”17
<해설>
우두 법융 스님은 출가하여 49세가 되자 건강 우두산 유서사幽棲寺 북쪽 바위 아래에 선실禪室을 짓고 살았다. 이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보고 갖가지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을 올렸으므로 사방에 꽃이 쌓여있었다. 하루는 4조 도신 스님이 와서 법 일러줌을 받고 심요心要를 깨달았다. 이로부터 사방의 도속道俗들이 몰려와 교화를 받게 되니 문인이 100인이 넘었다. 그런데 도신 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는 이상하게 새들이 꽃을 물고 오지 않았다. 법융 스님은 64세(652)에 건초사建初寺에서 죽었다. 후에 법융의 선은 우두선牛頭禪이라 하여 크게 흥성하였다.
마음에 신비로움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고, 고고한 수행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으면 아직 때가 묻은 것이다. 즉, 옳고 그른 것이 끊어지지 않은 유심有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하여도 신선과 같은 경지는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새들도 그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고 갖가지 꽃을 물고와 공양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선사의 법문을 듣고 한번 깨달아 마음에서 시비심이 끊어지고 평등심이 회복되면 마음은 투명하여 마치 허공과 같이 말끔하게 된다. 그러면 새들은 절대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대저 선사의 마음은 항상 무심無心이어서 귀신도 알아채지 못하는데 어찌 한낱 미물인 새들이 선사의 마음을 알겠는가. 그러하니 꽃이 쌓이지 않는 것이다. 꽃이 없고 공양물이 없는 것은 그 선사의 마음이 그만큼 말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師示衆云, “擬心卽差.” 僧便問, “不擬心時如何.” 師打三下云, “莫是老僧辜負闍黎麽.”
擬 헤아릴 의. 辜負고부; 마음에 거슬림. 생각대로 되지 않음. 그 본의가 기대에 어긋나는 짓을 함. 闍黎도려; 아사리阿闍梨,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지도하여 그 모범이 될 수 있는 승려.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으로 무언가 헤아리려하면 어긋나 버린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은 세 번 치고 말하였다.
“노승이 그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18
방금 헤아리면 어긋난다고 했는데, 헤아리지 않을 때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주장자로 세 번이나 두들겨 주었다. 그것도 헤아리지 말라는 것이다. 생각을 쉬라는 말이다. 생각 없이 보고 생각 없이 행하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있다! 생각만 쉬면된다.
問, “龍女親獻佛, 未審將什麽獻.” 師以兩手作獻勢.
한 스님이 물었다.
“용녀龍女가 몸소 부처님께 친히 바쳤다고 하는데 무엇을 바쳤습니까?”
조주 스님은 두 손으로 바치는 시늉을 했다.19
<해설>
용녀헌공龍女獻供은 <법화경>「제바품」에 나오는 이야기다. 용왕의 여덟 살 난 딸은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주寶珠를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이것을 기꺼이 받으시었고 용녀는 즉시 성불하였다.
용녀가 보주를 공양 올리고 성불한 것은 보주를 올리고 성불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보주를 올리고 성불하였다면 수많은 불사를 하였던 양나라 무제도 즉시 성불하여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지 않은가. 용녀가 성불한 것은 부처님께 믿음을 바친 것이다. 믿음은 도에 들어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런데 용녀가 올린 보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받들어 올린 빈 양손이다. 알겠는가?
조주 선사가 ‘두 손으로 바치는 자세’를 취한 이유를 선객의 입장에서 한번 해석해 보라. 선객의 눈에는 보주를 든 손이나 빈손이나 같다. “보여줄 테니 직접 보시게!”
問, “如何是衲依下事.” 師云. “莫自瞞.”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납승 문하의 일입니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20
1967년, 원택 스님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친구 따라 백련암에 간다. 이때 성철 스님을 뵙고, 평생 마음에 담을 한 마디를 해달라고 하는데, 부처님 앞에 만 번의 절을 하고나서 성철 스님으로부터 겨우 얻은 좌우명이 ‘속이지 말라!’였다. 처음에는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듣던 이야기라 싱거워서 실망이 컸다고 한다. 그런데, ‘남을 속이지 말라’라고 하면 별게 아니었는데, 하루는 ‘자기를 속이지 말라’라고 하고 보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큰 가르침으로 다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큰스님을 찾아뵙고 <삼서근> 화두를 받아 정진하다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남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를 속이지 말라고 했을까? 원래부터 속일 수 없는데 왜 또 속이지 말라고 했을까? 오직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와 타협한다. 약속을 어기기도 한다. 오히려 자기를 속이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참 무서운 말이다.
問, “不隨諸有時如何.” 師云, “合與麽.” 學云, “莫便是學人本分事.” 師云, “隨也隨也.”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응당 그래야 할 것이야.”
“그것이 바로 학인의 본분사였군요.”
“끄달리는 구나, 끄달려.”21
참 명쾌하다.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이 과연 이것일까?
問, “如何是平常心.” 師云, “虎狼野干是.”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평상심입니까?”
“여우나 늑대나 들짐승 같은 그것이다.”22
<해설>
평상심에 대해서 조주 스님은 여기서 확실하게 여우처럼 사량계교에 능하고, 늑대처럼 거칠고 이기적이며, 온갖 들짐승 같이 다듬어지지 않는 보통의 마음이 곧 평상심이라고 하였다.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에게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조주 스님이 평상심을 이해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담이다.
사람이 비록 지금 마음이 거칠고 망상이 가득하다하여도 모두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무한히 자유로운 변화를 짓는다. 따라서 분노라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슬픔이라고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계교모사라고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이 평상심이 바로 불교에서 지향하여 가는 도道의 경지인 것이다. 다만 스스로 부처인 것을 깨달은 자는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을 사용하지만, 깨닫지 못한 자는 어리석은 이기심을 위하여 사용될 뿐이다.
평상심을 드러내는 표현은 많이 있다. 그런데 조주 선사는 왜 그중 부정적인 ‘호랑이나 이리 같은 들짐승’ 이라고 했을까? ‘평상심’하면 보통 일상적인 마음, 인간 본래의 편안한 마음 상태를 떠올린다. 그 선입견을 깨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서양철학에 있어 ‘인간의 본성이 사악하다’ 그래서 계약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 토마스 홉스(1588~1679)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bellum omnium contra omnes)’, 서로 물어뜯는 이리떼와 같다고 하였다. 루소(1712~1778)는 인간의 불평등은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사회체제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문명이 사악한 것이지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도올은 『중용中庸』강의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서양의 시각을 이와 같이 설명하면서, 『중용』 첫 장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근원적으로 선하다 악하다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규정성은 모두 종교적구원론을 전제로 한 픽션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자사子思는 인간의 성性에 대한 모든 규정성을 거부했다. 인간의 성은 천지와의 끊임없는 교섭의 과정일 뿐이다.23
선문에서는 이를 본래면목이라고 표현한다. 본래면목이란 생각이전의 경계, 들리면 들리는 대로 (통신시이通身是耳, 온 몸이 귀), 보이면 보이는 대로 (통신시안通身是眼, 온 몸이 눈), ‘호래호현胡來胡現’하고 ‘한래한현漢來漢現’한 경계이며, 그렇게 드러난 경계가 바로 ‘평상심平常心’이다. 그러면 조주 선사가 왜 평상심을 ‘호랑이나 이리 같은 들짐승’ 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호랑이나 이리가 비쳤나 보다.
問, “作何方便卽得聞於未聞.” 師云, “未聞且置, 你曾聞箇什麽來.”
한 스님이 물었다.
“무슨 방편을 써야만 이제껏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제껏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은 그만두고 자네는 이제껏 무엇을 들어왔느냐?”24
문재답처問在答處요 답재문처答在問處라, 물음은 답하는 곳에 있고, 답은 묻는 곳에 있다.
問, “萬法本閑而人自鬧, 是什麽人語.” 師云, “出來便死.”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萬法은 본시 한가한데 사람 스스로가 시끄럽다’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나오는 족족 죽는구나.”25
<해설>
삼라만상 유정무정은 본래 한가하다. 본래 고요하다. 수많은 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고요한 가운데에 거품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시끄럽고, 슬프고, 복잡하고, 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시끄러워서 그렇다. 정말 그렇다. 마음이 동요하고 있으면 시끄럽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은 항상 고요하다.
그런데 ‘만법이 본래 한가하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스승의 스승을 계속 추적해간다면 결국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다. 만일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뭐라고 설명하면 그는 이미 죽어버린다. 설명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데 누가 감히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본래 한가하다’라고 하면 어긋난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26.
問, “如何是, 的.” 師云, “一念未起時.”
* 的 과녁 적, 과녁, 참, 진실(眞實), 목표(目標), 표준(標準).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바로 그것(的)’입니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다.”27
問, “學人擬作佛時如何.” 師云, “大煞費力生.” “不費力時如何.” 師云, “如麽卽作佛去也.”
학승이 물었다.
“제가 부처가 되려고 할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대단히 고생하게 될 거야.”
학승이 말했다.
“고생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부처가 된 거지.”28
<해설>
하하, 선문에 들어와서 부처가 되려고 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도 부처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애석한 것은 금생에 뼈를 깎는 수행을 하다가 부처가 되지 못한다면 다음 생을 기약하겠다고 다음 생까지 헛된 고생을 맹세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두가 참된 스승을 찾지 못해서 생기는 병통이다. 차라리 누더기를 기우면서 세월을 보낼망정 부처가 되겠다는 헛된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힘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그러면 ‘부처가 된 것’이라고 대답한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사람에게 길은 멀 뿐이다. 그렇게 따지고만 있다가 언제 수행이나 한 번 제대로 해 보겠는가. ‘스스로 쾌락을 능히 버릴 수 있으면 성인과 같이 믿음과 공경을 받을 것이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할 수 있으면 부처님처럼 존중받을 것이다.’29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는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하였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롤프 메르쿨레)’는 말도 있다. 알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즐기게 되나니.
有秀才見師手中柱杖乃, 云, “佛不奪衆生願是否.” 師云, “是.” 秀才云, “某甲就和尙乞取手中柱杖得否.” 師云, “君子不奪人所好.” 秀才云, “某甲不是君子.” 師云, “老僧亦不是佛.”
한 선비가 스님 손에 있는 주장자를 보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중생의 바람을 빼앗지 않는다는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스님께 손에 든 주장자를 달래도 되겠습니까?”
“군자는 남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군자가 아닙니다.”
“노승도 부처님이 아닙니다.”30
師到道吾處, 纔入僧堂. 吾云, “南泉一隻箭來.” 師云, “看箭.” 吾云, “過也.” 師云, “中也.”
스님께서 도오(道吾, 769~835) 스님의 처소에 이르렀을 때였다. 승당에 들어서자마자 도오 스님이 말하였다.
“남전의 화살 하나가 왔구나.”
“화살을 보십시오.”
“지나갔다.”
“명중하였습니다.”31
問, “如何是學人本分事.” 師云, “與麽嫌什麽.”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의 본분사입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꺼리느냐?”32
問, “佛祖不斷處如何.” 師云, “無遺漏.”
한 스님이 물었다.
“불타와 조사가 서로 끊이지 않는 곳은 어떻습니까?”
“누락됨이 없다.”33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한 마디입니까?”
“무어라 하였느냐?”
“무엇이 한 마디입니까?”
“두 마디가 되었구나.”34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함이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함이 있는 것이다.”35
한 스님이 물었다.
“잣나무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언제 성불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허공이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36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과 짝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이 아니다.”37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스님의 가풍입니까?”
“안으로는 한 물건도 없고 밖으로는 구할 것이 없다.”38
한 스님이 물었다.
“참으로 쉬는 곳을 스님께서는 가르쳐 주십시오.”
“가르치면 쉬지 못한다.”39
III. 사설
일용이부지日用而不知
『조주록』에는 또 다른 <조주세발>이 전한다. 본칙 ‘某甲乍入叢林, 乞師指示’ 대신 ‘여하시학인자기如何是學人自己, 어떤 것이 학인의 자기입니까?’라고 묻는데, 이에 대해 본칙과 같이 ‘죽을 먹었으면 발우를 씻으라.’고 대답한다. 앞부분은 다른데 뒷부분이 같다.
한편 『조주록』에는 또 다른 ‘某甲乍入叢林, 乞師指示’ 일화도 전하는데, 똑같은 질문에 한번은 “창천蒼天, 창천蒼天”으로 답하였고, 한번은 “총림에 들어오기 전에는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총림에 들어왔으니 그 정도라도 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총림이라는 곳은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고 자각하는 곳이다. 가르침을 바라지 말고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자각하여 깨달음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40고 장황하게 설명한다. 어쨌든 이 화두는 목적에 맞게 편집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에 매일 매일 잠시도 쉬지 않고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그것을 모른다는 일용이부지日用而不知라는 말이 있다.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일상생활을 하는 생활 속(삶)에 있다. 現成公案이라는 말처럼, 지금 여기서 자기의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일이 매사 진실 된 깨달음의 생활이 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중략)
이 공안은 우리들이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일상생활의 모든 일을 마음으로 자각하라는 수행공부로 여기고 사회 생활하는 가운데에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말고 자신의 하는 일과 혼연일체가 되어 지혜롭게 정신 차려서 잘 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설법이다.41
일상사가 그대로 도라는, 평범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 도道도 어디까지나 인간사人間事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평상의 행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죽을 먹었으면 발우를 씻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신통과 묘용이란 물 긷고 땔나무 하는 것’42이며, ‘밭 갈고 주먹밥 먹는 것’43이라는 것이다.
이 화두는 영화 <전우치>44에도 인용할 만큼 쉬우면서도 도의 진수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끽다거喫茶去>,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등과 같이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하여 ‘제법실상형’45 화두로 구분하기도 한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알아차림
일상사가 곧 수행이고 평상심이 바로 도라는 선종의 깨달음과 일상에서 동작과 행위를 알아차리는 위빠싸나 수행은 다르게 보이지만 비슷한 측면도 있다.
마조의 선풍을 대표하는 언구로서 ‘평상심시도’라는 구절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이지 별도로 특별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무엇이 평상심인가? 평범한 일상의 마음인데 구체적으로는 밥 먹고, 똥 싸는 일이다. 걷고 눕고, 일하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것이 그대로 도이지 별도의 가르침은 없다는 말이다. 이런 가르침은 북방과 남방이 서로 다르지 않다.
남방의 수행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초기경전은 『염처경』46이다. 여기에 의하면, 일상의 걷고 눕고 하는 일상의 동작과 행위가 모두 명상의 일부가 된다. 걸을 때는 걷는 그 행위를 분명하게 알고, 숨을 쉴 때는 그 숨이 짧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모두 명상이고 수행의 길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명상의 기술적인 용어는 사띠(正念)와 삼빠잔나(正知)이다. 사띠는 현재의 경험 내용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으로서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현재의 경험내용은 다름 아닌 일상의 평범한 마음이다. 이 마음에 대해서 시비, 선악의 판단이 없는 깊은 자각은 다시 그 존재에 대한 존재하는 그대로의 분명한 앎을 제공한다. 이것이 삼빠잔나이다.
이들은 현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이다. 판단 없는 자각이란 분별이 없다는 의미이고, 어떤 지적인 개념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경험에 의한 알아차림이지만, 열반이나 깨달음과 같은 그 결과를 의도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험에 대한 깊은 자각, 깨어있음이 바로 일상의 삶에서 구현되는 것, 이것이 평상심시도이다.47
일상 경험에 대한 ‘판단 없는 자각’이란 분별이 일어나기 전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한다. 앞서 보았던 『조주록』에서 ‘擬心卽差, 헤아리면 어긋난다’라든지 ‘一念未起時,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때’라고 하는 것이고, 승려 코이케가 떠오르는 온갖 잡념들을 지우기 위해 마음속으로 ‘걷는다!’를 계속 외치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그럼 분별심分別心, 즉 생각을 과학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
<생각>은 육체의 주인공이 아니다.
『과학시대의 불교』저자 미즈하라 슌지는 ‘생각’을 우리 몸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분비물로 보았다. 즉, 생각은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땀이나 호르몬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배설물은 직접 육체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분비물48은 영향을 미친다. 소화액이나 호르몬, 화학전달물질이 과잉되게 분비되거나 부족하면 여러 가지 병이 생긴다. 이런 점에서 <생각>도 이들 분비물과 유사하다. 생각의 분비 이상은 위궤양을 일으키기도 하고, 히스테리나 노이로제를 일으키며 신체의 실조失調나 호르몬 분비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49
생각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어 의학에서 다루는 분비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것을 일종의 분비물로 보는 의도는 ‘<생각>은 육체의 주인공이 아니며 오히려 종속적인 것인데, <생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기 위함’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생각도 분비물처럼 필요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인데 유독 육체의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머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 머리가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산흥정內山興正)50
우리는, 우리 몸이 우리 생각대로 움직인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우리 몸을 움직이는 힘은 따로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신체 자체는 ‘자신의 생각’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 이전의 힘, 즉 ‘영원한 생명’의 섭리대로 운영되고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생명의 힘에 의하여 탄생하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이지, 생각에 의해 생로병사를 겪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심장이나 허파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소화도 마음대로 시킬 수도 없다. 먹는 것 하나 생각대로 조절하지 못해 비만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생각에 이끌려 엉뚱한 일을 벌이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해 무모한 일에 뛰어들기도 한다.
몸은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시종일관 염불하고 있다. 생각이 염불을 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미택영웅米澤英雄)
생각이 막히는 것이지 ‘자신’이 막히는 것이 아니다.51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어떤 목적을 가지든, 결국 남는 사실은 “어떤 일을 하였거나 혹은 하고 있을 뿐”이다. 괜한 생각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머리의 분비물에 휘둘리어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다. 시시각각 차별지差別智, 분별지分別智로 고苦를 만들면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생각에 이끌려 있지도 않은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었다 없앴다 하며 노예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의 멸진滅盡에 이르는 길은 오직 “생각의 제어”에 있다고 하겠다. 수행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무분별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머리를 놓아버리고 생명의 실물로 돌아온다. 이것이 발심發心의 정의이다. 수행이란 그러한 발심을 백 천만 번 내는 것이다.
자기自己, 자신自身, 자아自我
미즈하라 슌지는 생각의 제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나”를 자기自己, 자신自身, 자아自我로 구분하여 새롭게 정의하였다. 그 메커니즘을 알면 생각에 대한 이해가 쉽고 생각의 제어 또한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는 순수경험 상태의 나, 자타분리 이전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진아眞我를 말한다. 순수한 본래의 나(본래면목)인 것이다. 다음 <자신>은 말나식(아욕我慾)의 개입이 있기 전인 나로, 분별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를 그대로 집적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문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학자라든가 창작에 열중하고 있는 예술가의 마음 상태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아>란 말나식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태, 모든 ‘식’이 작용하고 있는 상태의 나를 말하는데, 저자는 뻐꾸기 소리를 예로 들어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뻐꾹 뻐뻐꾹>하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이것이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선종禪宗식으로 표현한다면 <천지가 둘 아닌 하나>의 경지이다. 그런데 그 소리는 뻐꾸기의 소리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즉 분별지가 끼어든 것이다. 이미 대원경지에서 떠나고 만 것이다. 또한 “아름다운 소리”라고 생각하거나 “별로 아름답지 못하군!”하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한 마리 잡아 볼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52
소리를 단지 인식하는 것은 <자기>이고, 뻐꾸기 소리로 분별하는 것은 <자신>이며, 잡겠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것은 <자아>라는 것이다. ‘뻐꾸기 소리가 아름답다’는 분별심이나 ‘잡겠다’는 망상이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이 진실한 나, <자기>이다. 소위 깨달음이고, 평상심이다.
인간은 자신의 육신조차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남까지도 자신의 생각대로 하고 싶다는 유혹에 몰리며 더구나 그에 대한 반성이 거의 없는 것 같다.53
한번 깨달으면 그것이 정착되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말나식(自我)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54
간화선 수행은 끊임없이 분별심과 망상을 제거하여, 모르는 사이 <자아>가 <자신>을 거쳐 <자기>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화두 참구는 잡다한 생각을 쉬게 하고 집중력을 높이고 직관을 발달시켜, 이런 일련의 모든 과정을 자각하고 <자기>를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자기>, <자신>, <자아>를 오가며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다. 오로지 끊임없는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유지해야 하겠다.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가치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모든 일시적 규정성은 허구다. 인간의 삶은 과정이다. 과정이란 끊임없는 수도의 세계이다. 수도는 결국 몸의 닦음이다. 나의 몸Mom이야말로 나의 하느님God이다.55
수행을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수행이 곧 깨달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열반이다.56
IV. 참구
견해를 제시할 곳을 찾고 그 곳에 맞는 바른 경계를 제시하라. 막망상莫妄想!
V. 착어
선림구집禪林句集 오언대구五言對句.
VI. 재독
1. 만일 여러분이 조주선사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 승려에게 ‘세발우거’ 대신 어떻게 응대하겠는가?
2. 조주선사께서는 ‘세발우거’ 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그 승려였다면 그 말씀에 어떻게 응대하겠는가?
3. 승려는 무엇을 깨달았나?
VII. 감상
겨울은 선공부하기 좋고, 봄은 산나물이 향기롭다.
여름은 한가함을 즐기고, 가을은 과일이 달콤하다.
* 선 공부는 아침나절을 다 보내야하고, 산나물은 산과 들로 나서야 한다. 한가함은 잔디를 깎은 다음에 오고, 과일은 봉지를 씌워줘야 겨우 맛 볼 수 있다. 여유란 할 일을 다 했을 때이고, 만족은 원할 것이 없을 때이다.
참고한 책과 글
1) 왜 종을 항아리라고 했다고 했는가? 선가에서 ‘죽(밥)을 먹었는가?’는 본분사를 해결했느냐는 의미로 물은 것인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대답한 때문이다.
2) 혹은 호통원扈通院, 『조당집』에는 용광사龍光寺라고 되어있다.
3) 『조주록趙州錄』 백련선서간행회 지음, 장경각, 1991.04.20, p. 9.
4) 중국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선사가 지은 청규淸規. 원래 당唐나라의 백장 선사가 선종禪宗 사원의 규범을 성문화成文化한 것을 『고청규古淸規』라고 하였는데,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등의 제도를 설정하고, 중승衆僧에게 동서東序, 요원寮元, 당주堂主, 화주化主 등의 각 직책을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당, 송 시대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없어졌으므로, 1335년 원元나라 때, 백장 덕휘百丈德輝가 순제順帝의 칙명을 좇아 수정, 전국 선원에서 시행시켰는데, 바로 이것이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이다. 9장으로 되어 일종청규一宗淸規의 대강大綱이 망라되어 있다.
5)『禪院規式」(『大正藏』권51, 251上), “除入室請益”.
6) 앞의 책, “基闔院大衆朝參夕聚”.
7) 서명원徐明原 (Bernard SENÉCAL S.J.), 「간화선의 서구문명에의 전달과 수용, 입실제도入室制度를 중심으로」2010년 한국선학회 춘계학술대회, 주제 : 禪과 현대사회, 한국선학회, The Korean Society of Seon Studies.
8) 창설자인 Hakuun Yasutani가 임제종과 조동종의 법맥을 이어받았음.
9) 15개국에 창설한 국제수도단체로서 구라파에서 30여개 선원을 운영하고 있음.
10) 나중에는 화두 2칙 더 집어넣어서 그 십문관이 십이문관이 되었다.
11) 서명원徐明原 (Bernard SENÉCAL S.J.), 「간화선의 서구문명에의 전달과 수용, 입실제도入室制度를 중심으로」2010년 한국선학회 춘계학술대회, 주제 : 禪과 현대사회, 한국선학회, The Korean Society of Seon Studies.
12)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이라고도 하고,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산廬山 서현棲賢 보각선원寶覺禪院의 징시澄諟가 편찬한 상정본(詳定本: 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찍은 책)을 1131년(소흥 원년)에 고산鼓山에서 중간한 것으로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과 『조당집』, 『송고승전』 등에 전하던 조주의 어록을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머리에 953년(남당 보대
11)에 쓴 조주의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 하권 말미에는 학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모은 대기對機와 감변勘辨, 게송이 실려 있다. 상당어上堂語와 시중어示衆語, 문답 등을 비롯하여, 모두 520여 가지의 일화를 담고 있는데, 거의가 일상적인 평범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책의 뒷부분에는 신라 승려와의 일화도 나오고, 당 말에 신라인들이 산둥반도에 세운 신라원新羅院을 방문한 내용도 전한다.
13) 『조주록趙州錄』 백련선서간행회 지음, 장경각, 1991.04.20, p. 30. 무불선원無不禪院 석우石雨 스님 해석.
14) 여기서 <해설>은 모두 무불선원無不禪院 선원장禪院長 석우石雨 스님의 <조주록 강의>를 인용하였다.(cafe.daum.net/mubulsunwon).
15) 『조주록趙州錄』 백련선서간행회 지음, 장경각, 1991.04.20, p. 46.
16) 앞의 책, p. 50.
17) 앞의 책, p. 53. 번역은 석우 스님 해설에서 인용.
18) 앞의 책, p. 54. 번역은 석우 스님 해설에서 인용.
19) 앞의 책, p. 54.
20) 앞의 책, p. 58.
21) 앞의 책, p. 59.
22) 앞의 책, p. 77.
23) EBS 기획특강, 도올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제3강 천명天命이란 무엇인가?」. 자사子思는 공자의 손자이며 『중용』의 저자이다. 서양은 불변의 절대성의 추구로부터 인간본성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인간본성이 악하다는 전제에서 근대사회로 이어지는 사회계약설이 나온 것과는 달리, 동양에는 불변이란 개념이 없다. 현상을 넘는, 현상과 구별되는 존재도 세계도 없다. 그러므로 도올은 ‘天命’을 하늘의 명이 아닌 천지자연의 명이라고 보았다. 인간 본성(性)은 천지자연과 늘 상호 교섭하는 과정에 놓여있어 변화하면서 그 안에서 항상성(인격)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性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다.
24) 『조주록趙州錄』 백련선서간행회 지음, 장경각, 1991.04.20, p. 77.
25) 앞의 책, p. 79.
26)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1장. 말로 형상화形狀化된 도(可道)는 늘 그러한 원래原來의 도(常道)가 아니고, 말로 형상화形狀化된 이름은 늘 그러한 실제實際의 이름이 아니다.
27) 『조주록趙州錄』 백련선서간행회 지음, 장경각, 1991.04.20, p. 83.
28) 앞의 책, p. 88. 번역은 석우 스님 해설에서 인용.
29) 自樂能捨, 信敬如聖. 難行能行, 尊重如佛. (원효 스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30) 앞의 책, p. 92.
31) 앞의 책, p. 93.
32) 앞의 책, p. 96.
33) 앞의 책, p. 102.
34) 앞의 책, pp. 106~107.
35) 앞의 책, p. 116.
36) 앞의 책, p. 117.
37) 앞의 책, p. 134. 방거사가 석두화상과 마조화상을 참문하여 물은 질문과 같다.
38) 앞의 책, p. 137.
39) 앞의 책, p. 139.
40)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 p. 92.
41) 앞의 책, pp. 89~90.
42) 방 거사는 마조 선사의 유일한 재가 제자로 선의 황금시대인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초까지 당대 마조 선사나 석두 선사가 선풍을 날리던 시대를 살았다. 방거사가 처음 석두화상을 참문하여 “만법과 짝을 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니,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두화상이 방거사의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깨친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은 차별이 없다. 오직 내 스스로 짝하고 어울릴 일이다.
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하는 일마다 취하거나 버리지 아니하면, 가는 곳마다 베풀고 어긋나지 아니하는데,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높은 벼슬을 누가 귀하다고 하겠는가? 저 산도 한 점의 티끌에 불과한 것을.
神通竝妙用 運水及搬柴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은, 물 긷고 땔나무 해올 줄 아는 것일세.
43) 『종용록從容錄』 12칙 지장종전地藏種田 (지장이 밭에 씨를 뿌리다.) 본칙에 나온다.
擧 地藏問脩山, 王甚處來. 지장이 수산주脩山主에게 묻되, “어디서 왔는가?”
脩云, 南方來. 수산이 대답하되, “남방에서 왔습니다.”
藏云, 南方近日佛法如何. 지장이 다시 묻되, “요즘 남방의 불법은 어떠하던가?”
脩云, 啇量浩浩地. 수산주가 대답하되, “헤아리려 해도 끝이 없습니다.”
藏云, 爭如我這裏 種田慱飯喫. 지장이 다시 이르되 “내가 여기에서 밭에 씨 뿌리고 주먹밥을 쥐어먹는 것만이야 하겠는가?” 하니, 脩云, 爭奈三界何. 수산주가 말하되, “삼계는 어찌하시겠습니까?”
藏云, 你喚甚麽作三界. 지장이 되묻되 “그대는 무엇을 삼계라 하는가?” 하였다.
44) 다음 카페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 山房 閑談> 「영화, 그르믈 버서난 달처럼」.
45) 이정섭, 「간화선 수행론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pp. 99~100. 이외 단도직입형, 격외도리형, 진퇴양난형 등이 있다. 라이트(Dale S. Wright)는 화두의 기능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낯섦, 침묵, 파격적인 어법, 그리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46)『염처경念處經(Satipaṭṭhanā Sutta)』은 위빠사나Vipassanā수행 경전으로 ‘염처 수행’은 불교에서 깨달음과 지혜를 얻기 위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가운데 첫 번째 수행 방법이다. 『대념처경(Mahasatipaṭṭhanā)』과 더불어 『염처경』은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anā)의 수행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수행자가 자신의 몸(身, kāya), 느낌(受, vedanā), 마음(心, citta), 법(法, dhamma)의 네 가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고로 위빠사나는 ‘위(vi)’와 ‘빠사나(passanā)’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여성명사로 접두사 ‘위(vi)’는 ‘빠스(paś)’라는 어근을 가진 동사 ‘빠사띠(passati, 보다)’와 결합하여 ‘분명하게 봄’, ‘통하여 봄’, ‘꿰뚫어 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본다는 의미가 강조된 ‘insight(통찰)’, ‘intuition(직관적 통찰)’, ‘inward-vision(내적관찰)’, ‘introspection(내적성찰)’등으로 영역되어 사용된다.
47) 인경 스님, 「평상의 행위 떠난 도는 존재하지 않아, 현재에 깨어있는 것이 바로 명상의 길」,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법보신문 1042호. 사티(sati)는 기억과 재생을 의미하는 알아차림(正念)을 말하고, 삼빠잔나(sampajanna)는 철저한 앎과 바른 이해를 의미하는 분명한 앎(正知)을 말한다,
48) 우리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소화액, 땀, 피지 등이 외분비물이고 호르몬, 화학전달물질 등은 내분비물이다.
49) 미즈하라 슌지(水原舜爾) 지음, 이호준 옮김, 『과학시대의 불교』 대원정사 (1986), p. 125.
50) 앞의 책, p. 126. 內山興正 (우치야마 코쇼)은 『坐禪の意味と實際―生命の實物を生きる 좌선의 의미와 실제』, 『자기 : 종파가 아닌 종교』의 저자.
51) 앞의 책, pp. 138~139.
52) 앞의 책, p. 133.
53) 앞의 책, p. 123.
54) 앞의 책, p. 147.
55) EBS 기획특강,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제5강 이성과 감정」.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하늘이 명한 것(교섭하는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56) 미즈하라 슌지(水原舜爾) 지음, 이호준 옮김, 『과학시대의 불교』 대원정사 (1986), p. 147.
첫댓글 세발- 설거지는 하고 나오셨읍니까?
강아지 길잃을까봐 이구석 저구석 오줌싸고 다니는듯 한다고
전원 법사님 뭐라 한마디 하시겠다.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데, 이집저집에 문좀 열어 달라고 벨 눌르는 소리가 들린다.
예비군 통지서를 돌리나?
출입구에 와보니, 어느 여자 두분이서 좋은 말씀(전도) 전하러 왔다고......
" 지금 이집저집 벨 누르셨읍니까? "
" 우리집 큰애, 오늘 쉬는날이라 새벽에 들어와서, 잠을 자던데.
집집마다 사정은 다있읍니다, 피해주고 다니지 마세요!"
그런후에
" 좋은말씀 전하는것보다, 좋은일 하는것은 어떻겠읍니까??"
- 제가 들고 있던 쇼핑빽을 벌려 보이며, " 어느 노숙자를 주려는것 입니다".
" 찐 고구마 몇개, 찐계란 몇개, 치즈 두장, 사탕 몇개, 귤 두개 입니다,
하루 쓰는 용돈 조금만 줄이면, 티 안나게 남 도울일 있읍니다"
(이리해서 얻어지는것이 있다면, 마음이 편해짐)
뒤 돌아서서 가는 뒷통수 에다 대고 또 한마디-
" 아침 일찍부터 설거지는 하시고들 나오셨읍니까??"
또 공치사, 득로 합장
재미있습니다만.....
생략하시는 부분들이 많아 한참 들여다 보아야 말씀하시는 뜻을 알겠습니다.
위의 글은 아직도 확연하게 내용이 전달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생략하지 마시고 써주시면 읽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
전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