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효천고 서창기 감독과 야구부원들. (사진 좌로부터) 박건우, 허률, 서 감독, 차명진, 박계범(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고교야구는 프로야구의 ‘마르지 않는 샘’이다. 고교야구의 활성화 없이 프로야구의 항구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한국 고교야구팀은 53개 팀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고교 53개 팀에서 프로 9개 구단에 선수를 수급하는 셈이다. 전국 4천28개(2010년 고시엔 대회 기준)의 고교야구팀이 프로 12개 구단에 선수 수급을 책임지는 일본을 상기하면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스포츠춘추>에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미래의 꿈나무를 배출하려 노력하는 전국의 53개 고교 야구부를 소개하려 한다. 그들이 한국야구의 진정한 희망이자, 숨은 일꾼이라 믿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간으로 전라남도 순천 효천고를 찾았다.
호남야구의 메카는 광주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선 광주제일고, 광주 동성고, 광주 진흥고 출신의 수많은 야구인이 활동하고 있다. 광주가 호남지역의 야구 메카로 자리 잡은 덴 다른 지역보다 탄탄한 중학야구부가 큰 배경이 됐다. 실제로 현재 광주엔 4개 중학교 야구부가 있다. 여기다 광주 인근엔 화순중학교도 있다. 실질적으로 5개 중학교 야구부가 광주 고교야구팀들의 젖줄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광주를 제외한 호남야구는 열악 그 자체다. 전북에 전주고, 전남에 화순고와 순천 효천고가 있지만, 늘 선수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전북과 전남을 합해 중학교 야구팀이 고작 3개(화순중 제외)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효천고는 호남에서도 가장 이남에 자리 잡아 신입생 수습에 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효천고 서창기 감독은 “야구부원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고 강조하듯 우리도 야구부가 있는 이상 결코 선수수급 때문에 좌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우리에겐 꼭 이뤄야 할 꿈 있다”고 강조했다.
'4전 5기'를 꿈꾸는 순천 효천고
2003년 청룡기대회 준우승 직후 기념사진(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교훈이 ‘자주, 창조, 진취’인 효천고는 1984년 개교했다. 학교를 세운 이는 재일교포 사업가 고 서채원 순천학원 이사장이었다. 고향이 순천인 고 서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청소년에게 달렸다고 판단, 개인재산을 털어 고향에 효천고를 세웠다.
사학을 돈주머니로 생각하는 일부 이사장들과 달리 고 서 이사장은 몇 배나 돈이 더 드는 일본 건설사에 교사 건축을 맡기고, 우수교원 확보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교육부에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순전히 자신의 사재를 통해 학교를 운영했다.
고 서 이사장의 노력에 효천고는 개교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고로 자리 잡았다. 야구부가 창단한 건 개교한 지 10년이 지난 1994년이었다. 이때도 순천학원은 프로 출신 지도자를 영입하고, 야구장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적지 않은 지출을 감수했다.
효천고가 야구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4대 사령탑인 서창기 감독이 부임했을 때부터다. 해태(KIA의 전신)와 쌍방울에서 현역으로 뛰고, 쌍방울에서 수비코치와 스카우트로 활약했던 서 감독은 3년 정도 아마추어 야구를 배울 요량으로 1998년 효천고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그해 황금사자기대회에서 투수 정성기의 대활약으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서 감독은 일약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떠오르는 지도자’가 됐다. 그도 그럴 게 서 감독이 초보지도자인 까닭도 있었지만, 창단 이후 전해까지 효천고의 최고 성적은 전국대회 16강에 불과했다.
아마추어 야구관계자들조차 유니폼에 새겨진 ‘효천고’를 보고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만큼 전국적 지명도가 떨어졌던 효천고는 이 준우승으로 단숨에 호남야구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야구계는 개인역량보다 팀워크를 중시하고, 화려한 공격보다 내실 있는 수비를 중시하는 서 감독의 야구에 높은 점수를 줬다.
효천고 야구부 기숙사 내 웨이트트레이닝장(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2000년 효천고는 봥황대기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전국 강자로 우뚝 섰고, 2003년엔 청룡기대회에서 투수 김수화의 불꽃투로 역시 준우승을 맛봤다. 2009년에도 미추홀기대회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결과는 준우승이었다. '4전 5기'의 신념으로 5번째 도전을 우승의 기회로 삼았던 효천고는 그러나 이후 별다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부분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했고, 통과했다손 쳐도 32, 16강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효천고는 김선규(LG), 진명호(롯데), 이태양(한화), 장민익(두산), 박정준(넥센) 등 뛰어난 유망주를 대거 배출하며 현재까지 전남야구의 화수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내실을 다지는 효천고
효천고 재단은 야구부에 한해 6천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학교의 무관심으로 학부모들의 지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부 야구부와는 달리 효천고는 학교의 관심과 지원을 한몸에 받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올 시즌 효천고는 상위권 도약을 노렸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먼저 선수수급이 문제였다. 올 시즌까지 효천고는 야구부원이 20명에도 미치지 않아 팀 운영에 곤란을 겪었다. 순천 이수중과 여수중에 야구부가 있다는 걸 고려하면 효천고가 야구부원 부족에 시달릴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면을 들추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웬만한 중3 유망주는 광주지역 고교로 진학하려 한다. 순천에 남아있으려는 유망주들도 다른 지역 고교야구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짐을 싸게 마련이다. 중3만 되면 유망주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통에 지난 몇 년간 제대로 된 신입생을 뽑지 못했다." 서 감독의 한숨이다.
서 감독은 "주변에서 '효천고도 다른 학교들처럼 스카우트비를 주고, 유망주를 데려오라'고 권유하지만, 나까지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하고 그런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며 "상급학교 선택은 전적으로 선수와 학부모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서 감독이 이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야구관을 펼칠 수 있는 건 그가 현직 체육교사이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하며 교원자격증을 취득했던 서 감독은 효천고 감독 부임 때부터 체육교사를 겸직했다. 현재는 감독과 체육교사에 야구부장까지 맡는 등 1인 3역을 도맡고 있다.
그런 까닭일까. 서 감독은 14년 동안 효천고 감독을 맡으면서도 일체의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흔한 돈에 관련한 루머에도 휩싸이지 않았다. 오히려 학부모들의 지나친 간섭에 휘둘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는 평이다.
서 감독은 '선수' 이전에 '학생'이라는 신념에 따라 정상 수업이 끝난 이후 훈련을 지도한다. 효천고 야구부원들이 대회가 눈앞에 있어도 4교시 수업을 반드시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서 감독은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기숙사 운영도 남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효천고 야구부원들은 야구부 기숙사에서 식사하지 않는다. 점심, 저녁을 학교 식당에서 먹는다. 야구부 기숙사에서 식사하면 별도로 사람을 둬야 하고, 학부모들도 돌아가며 당번을 서야 하기 때문이다.
서 감독은 "학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게 비용도 저렴하고, 학부모들도 귀찮게 하지 않는다"며 "무엇보다 학생선수들이 일반학생들과 원활히 교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익한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서 감독이 야구부 전력 강화를 등한시하는 건 아니다. 올 시즌 서 감독은 자신의 효천고 제자이자 지역 야구계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황덕찬, 김선일 두 코치를 새롭게 영입했다. 두 코치의 지도로 학생선수들의 기량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올해 효천고가 배출한 6명의 졸업생 역시 프로행엔 실패했지만, 모두 대학에 진학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야구기능인보다 지.덕.체를 겸비한 야구인 양성이 목표다!
효천고 야구부원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서 감독은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내년 시즌 상위권 도약을 자신한다”고 밝혔다. 이유는 있다. 오랜만에 신입생을 충분히 수혈했기 때문이다. 11월 15일 마무리 훈련을 위해 학교 운동장에 모인 야구부원은 26명이었다. 졸업생 6명이 빠진 걸 고려하면 꽤 많은 수였다. 서 감독은 "중학 졸업 예정자 14명이 참가했다"며 “효천고 부임 이후 가장 많은 수의 신입생을 뽑았다"고 환하게 웃었다.
14명의 신입생을 충원한 효천고는 내년 시즌 대반격을 노리고 있다. 중심엔 탄탄한 투수진이 있다. 서 감독은 올 시즌 속구 최고구속으로 시속 142km를 기록한 우완 정통파 투수 차명진(3학년)과 제구와 공끝이 좋기로 소문난 우완 허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차명진은 187cm의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적인 속구로 벌써 프로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허률 역시 탁월한 제구로 ‘잘만 다듬으면 대어급 투수가 될 수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야수 가운덴 포수 박건우(3학년)와 유격수 박계범(2학년)이 돋보인다. 서 감독은 박건우를 가리켜 “과거 이성열(두산)을 보는 것 같다”며 “포수로서의 능력이나 타자로서의 재능이 이성열 못지않다”고 강조했다. 박계범은 1학년 때부터 주전 유격수와 1번 타자로 활약하며 ‘성장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국 고교야구 지도자의 롤모델로 불리는 부산고 김민호 감독과 가장 친하다는 서 감독은 “전국대회 우승만큼이나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지.덕.체를 갖춘 건전한 야구인으로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것이 바로 나와 우리 그리고 학교가 꼭 이루고자 하는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런 목표라면 효천고는 이미 이루고 있다는 게 야구계의 중평이다.
효천고 야구부원들 스카우팅 리포트(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