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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천국의 처소 중 1천층의 전반적인 환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상급이 없는 낙원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입니다. 더욱이 1천층부터는 개인 소유의 집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의 처소를 가장 아름답고 좋게 만드는 데 총감독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하실 정도로 낮에는 복음 전파의 사역을 바삐 이루시고 밤이면 산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길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지요. 이러한 주님의 헌신과 사랑의 대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 1천층의 환경
1) 1천층의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
낙원은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상급이 전혀 없지만 1천층부터는 개인 소유의 집과 면류관 등 개인적인 상급이 주어집니다. 이들에게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천국의 보석들로 만든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고전 9:25).
인간경작이 마쳐지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지만 천국의 모든 것은 영원히 변치 않고 세세토록 그 가치가 빛납니다. 가령 천국에서 어떤 상급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1천층에 들어가는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라는 것은 이 면류관의 빛이 결코 흐려지지 않으며 그 가치도 영원함을 나타냅니다.
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금빛, 은빛, 붉은빛, 푸른빛 등 보석의 단순한 빛을 띠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모양과 형태도, 면류관으로서 기본적인 형태만 단순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높이가 낮고 머리에 얹을 정도의 크기로 일정하고, 다양한 보석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지는 않았으며, 다만 상급으로 받는 영혼들의 특성에 따라 빛깔과 형태가 약간씩 차이날 뿐입니다. 그러나 1천층에 들어간 영혼들은 이러한 면류관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으로 주어졌다는 자체에 너무도 감사하며 영광스럽게 면류관을 쓰게 됩니다.
2) 개인 소유의 집과 시설들
1천층이 낙원과 크게 다른 점은 개인 소유의 집이 상급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천국에서 개인 소유의 집이 상급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이 자체만도 큰 영광이 되므로 낙원에 들어간 영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1천층에 예비된 개인 소유의 집은 이 땅의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와 같은 형태로 금은 보석 등 천국의 재료들로 지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아파트와 다른 점은 내부가 아름답게 장식된 엘리베이터만 있고 계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운행되어 고장 나지 않으므로 계단이 필요 없기 때문이지요.
이 땅에서는 층수의 버튼을 눌러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여지지만 천국에서는 타면 자동으로 원하는 곳에 세워 줍니다. 천국을 다녀온 사람들 중에 간혹 아파트와 같은 건물을 보았다고 하는데 천국의 1천층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 1천층에 있는 아파트 형태의 집 안은 어떻게 단장되어 있을까요? 집 안 내부는 생활하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고 주인의 취향과 기호에 맞추어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가령 음악 애호가라면 악기가 주어져서 언제든지 연주할 수 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독서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1천층만 하더라도 낙원과는 그 행복이 현저히 차이나며 이 땅에서 만끽할 수 없었던 기쁨이 넘치고 많은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섬세하신 사랑의 배려이지요.
1천층에 들어가는 것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범주에 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을 믿음으로 여기시고 개인의 취향과 기호에 맞춘 집과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1천층에서는 개인의 집과 면류관 외에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마치 아파트 내 조성된 공원이나 스포츠 시설 등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과 같지요. 1천층에도 예쁜 정원이 많고,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드넓은 공원들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으며, 또한 각종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놀이공원과 수영장, 골프장 등 많은 스포츠 시설도 있습니다. 생명수 강가에는 아름다운 벤치들이 있고 생명과일나무가 나란히 심겨져 있어서 벤치에 앉거나 혹은 생명수 강가를 거닐며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그리고 공동 시설물이나 공공장소는 천사들이 관리하므로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1천층의 천사들은 그곳 영혼들이 시설을 이용하려고 하면 공손하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줍니다. 비록 개개인의 수종을 드는 천사는 없지만 어디를 가든지 천사의 안내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점도 낙원과 차이가 나는 부분으로, 낙원에서는 천사들이 모든 시설을 관리만 할 뿐 그곳의 영혼들을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1천층에 들어간 영혼들이 생명수 강가 벤치에서 대화를 하다가 과일이 먹고 싶으면 그곳을 담당한 천사에게 생명 과일을 따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낙원에서는 천사에게 따달라고 할 수가 없고, 직접 따서 먹어야 합니다. 이처럼 1천층과 낙원에 들어간 영혼들과는 생활수준의 차이가 크게 날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훨씬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습니다. 꽃의 색깔과 향이 다르고 동물들의 깃털의 윤기와 아름다움이 다르며 모든 것에 현격한 차이가 나지요. 과일의 맛과 향과 빛깔이 낙원보다는 1천층의 것이 훨씬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공의 가운데 최대한의 사랑의 배려로 최고의 만족을 느끼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믿음의 2단계 영혼들이 들어가는 1천층
1천층은 믿음의 2단계에 해당하는 영혼들이 들어가며 믿음의 2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여 디모데후서 2:5에도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어떤 경기라도 출전한 선수가 경기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실격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경기처럼 영적인 공의에 적합한 법칙이 있고, 그 법칙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원수 마귀 사단도 송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공의에 적합한 신앙생활의 법칙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갓 성령을 받은 믿음의 1단계에서는 신앙생활의 법칙들을 잘 모릅니다. 술, 담배를 끊지 못하거나 혈기를 내고 험한 말과 거짓말도 하는 등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지요. 그러나 예배와 각종 모임을 통해 말씀을 배움으로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정녕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도 변화되어 배운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지만 믿음의 2단계에서는 온전히 행하지는 못합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혼자서 걸어보려고 노력하지만 힘없고 연약하여 자꾸 넘어지는 것과 같지요.
믿음의 2단계는 일단 운동 경기에 참가하긴 했는데, 아직은 규칙을 숙지해 가면서 그 규칙대로 싸워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 선수들에 비해 힘이 적고 실력이 부족하여 경기에서 진 횟수가 더 많거나 등수 안에 들지 못한 선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운동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좋은 경기를 펼쳤을 때는 비록 진 팀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마라톤 같은 경우는 비록 꼴찌로 들어온다 해도 끝까지 완주한 것에 큰 의미를 두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동일하게 ‘참가상’을 주기도 합니다. 1천층에 들어온 영혼들에게 개인의 집과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참가상’과 같은 개념이지요. 1천층의 영혼들은 말씀은 알되 행치 못한 것이 더 많았고, 죄를 버려야 하는 줄 알지만 버리지 못한 죄가 더 많은 상태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든 행하려고 노력했다는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시고 그에 해당하는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2단계까지는 “부끄러운 구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2단계의 영혼들이 육을 벗고 천국에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행치 못하고 버려야 하는 줄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다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 심히 민망하고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고, 어떤 죄성이든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천층의 영혼들은 신앙의 경주에 참가는 했지만,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별로 힘입지 못함으로 인해 힘들게 신앙생활을 한 경우에 해당하지요.
그래서 영적으로 피곤해 하기도 하고 때론 낙심하여 주저앉아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영적으로는 정체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혹, 어떤 분들은 ‘내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니 믿음의 1단계는 지났을 것이고 적어도 1천층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요, 만일 죄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불법을 행한다면 1천층은커녕 낙원에도 들어가지 못할 수 있음을 깨우쳐야 합니다(약 2:14).
이번에는 믿음의 2단계에 있는 영혼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앙생활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믿음의 2단계
천국의 1천층은 믿음의 2단계 곧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영혼들이 들어가는 처소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장과정 중에서 믿음의 2단계는 신앙생활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전에 몰랐던 자기 마음의 죄성이 발견되므로 스스로도 놀라며 실망하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알지 못했을 때보다 더 곤고해집니다. 왜냐하면 내주하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자신의 선한 양심도 그래서는 안 됨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린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 숱하게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 걷고자 하면 결국 혼자 일어나 걷습니다. 만일 그 과정이 힘들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아이는 평생 걷지 못하게 되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믿음의 2단계에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 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고 더 나은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1천층에 들어가는 믿음의 2단계의 신앙상태
1천층을 영원한 처소로 받는 믿음의 2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한 달에 열 번 혈기를 냈던 사람이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다음 달에는 여덟 번으로 줄고, 그 다음 달에는 네 번, 두 번으로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속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겉으로는 혈기를 내지 않았다면 믿음의 3단계에 입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혈기 한 가지를 내지 않았다고 믿음의 3단계라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어 행하는 모든 비진리의 행함 중 ‘혈기’를 한 예로 든 것뿐입니다. 그 외에도 온전한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일조도 드려야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하지 말라” 하신 것들(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일)을 최소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2단계에서는 마치 배를 타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같이 힘이 듭니다. 그렇다 하여 노 젓기를 멈춘다면 배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지요. 믿음의 2단계에서도 육체의 일을 끊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정체되고 퇴보하기 마련입니다. 믿음의 1단계로 떨어지거나 다시 세상으로 완전히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아무리 힘들게 느껴져도 결코 죄와의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됨을 깨우쳐 주는 한 예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알프스 산 정상에는 산장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산장에서 약 5m 떨어진 곳에 십자가가 꽂혀진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은 이렇습니다. 한 등산가가 알프스 산을 오르다가 심한 눈보라를 만났습니다. 그는 정상에 가면 산장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정상에 오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가 져서 사방은 어두워지고 말았지요, 그는 점점 심해지는 눈보라를 맞으며 어둠 속을 걸었으나 가도 가도 산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 1m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헤매던 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절망하게 되었고,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다음 날 눈보라는 걷혔고 등산하던 사람들은 정상 가까이서 얼어 죽은 그 등산가를 발견했는데, 그 지점이 산장에서 겨우 5m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어둠의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5m만 더 갔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만 절망에 빠져 주저앉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님들도 신앙의 최종 목적지인 새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때로는 눈보라와 같은 시련이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는 암담한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럴 때 이 예화를 떠올리시며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전진해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든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일어서는 여러분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사야 40:31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힘들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갈 수도 있게 해 주실 수 있음을 중심에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의 2단계에서 정체되는 이유
신앙생활은 등산처럼 정상을 향해 올라야 하는데, 더 이상 오르지 않고 믿음의 2단계 1천층에 정체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등산을 하다가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자 힘들어 산 어귀에 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정상을 향해 가는 '근본 목적'은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머물러 있는 산 어귀에서 힘들지 않은 다른 일을 찾아서 하지요. 이는 신앙 안에서 죄를 벗어버리는 싸움이 힘들기 때문에 이 일은 뒷전에 두고 다른 일에 마음을 쏟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각종 봉사를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거나 ‘찬양이나 무용 등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하면 되겠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비진리를 벗어내는 마음의 할례라는 사실입니다. 비진리를 벗고 참마음이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영적인 믿음과 온전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종 충성 봉사를 할 때도 반드시 마음의 할례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런 충성, 봉사도 않는 사람보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성결되기 쉽습니다. 각종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자신과 다른 성품,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고 몰랐던 마음의 죄성을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이때 발견된 죄성들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은 약해지고, 진리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강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기도와 금식을 하는 분들 중에서도 믿음의 2단계에서 오랫동안 정체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되 정녕 믿음과 사랑으로 성령의 주관하심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의 할례도 하게 됩니다. 봉사 자체만을 즐겨하는 경우처럼 기도만 즐겨하는 경우,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이 기도해도 머리로 아는 내용을 떠올려 기도하거나 자기 만족 속에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금식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금식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 사람은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습니다. 그런데 혹 어떤 경우는 죄를 버리기 위해 금식하는데 금식 자체만으로 죄가 벗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만족에 빠지기도 합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철저히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의 고통과 힘듦을 통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라는 각오를 다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금식이나 기도 자체로 마음의 할례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금식과 기도를 통해 마음을 다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끌어내림으로써 마음의 할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끌어내리지 못한 금식과 기도라면 아무리 오랜 시간 많은 양을 한다 해도 영으로는 더디 들어가게 되지요.
기도, 봉사, 찬양, 전도, 심방 등 그 어떤 형태의 사명감당도 근본 목적은 마음의 할례를 통한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자체나, 봉사 자체, 찬양 자체 등 사명 자체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충성하는 일꾼인데도 실상은 믿음의 2단계에서 더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천국' 설교말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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