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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삶을 반영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조상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생활 양식 등 문화가 담겨 있다. 이러한 조상들의 생활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언어문화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전통적인 언어문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말을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어린 손자가 배앓이를 하면 할머니는 “할미 손은 약손.” 하시며 손자의 배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그러면 손자는 아픔이 가시고 편안해졌다. 할머니의 손이 아픈 곳을 어루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손자가 믿게 하고 그 믿음으로 아픈 배를 낫게 했던 민간요법이었던 셈이다. 또 갓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돌이, 개똥이’와 같이 천하게 지어 부르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이름은 본명이 아닌 아명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름이 천하면 염라대왕도 관심을 갖지 않고 내버려두어서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에 힘이 있다고 믿는 태도는 속담에서도 나타난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나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은 말에 힘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 온다.’나 ‘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와 같은 속담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옛글에서도 말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가) 벌써 네 나이가 십삼 세에 이르니 이제 아내를 맞아 어른이 되는 것이 멀지 않았다. 그러니 어미를 그리워하는 정은 생각하지 마라. 스승이란 그 밑에서 하루를 배워도 종신토록 공경하는 것이니 스승을 공경하고 조심하여라. 또 버릇없고 상스러운 말을 하여 잘못된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하여라. 마음을 쏟아 착실히 배워 선비의 도를 잃지 않는 것이 자식의 효도이다. 온순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하는 것과 걷는 것을 천천히 하여 부디 네 성급한 성품을 가다듬어 고치기를 바란다.
(나) 무릇 사람의 자제가 된 자는 반드시 항상 낮은 소리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상세하고 느리게 할 것이요, 큰 소리로 떠들어대거나 허튼소리로 시시덕거려서는 안 된다. 부형이나 윗사람이 가르치고 타이르는 일이 있으면 다만 마땅히 머리를 숙이고 받아들이거나 해야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어른이 단속하거나 꾸짖을 때 비록 잘못이 있어도 곧장 스스로 해명해서는 안 되고, 이를 감추어 두고 잠잠히 있다가 한참 만에 천천히 세밀한 내용으로 조목조목 말하여야 한다. - “동몽수지(童蒙須知)”
(가)는 멀리 공부하러 떠난 아들에게 쓴 어머니의 편지이고, (나)는 조선 시대 어린이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와 예절을 다룬 책의 한 부분이다. 우리 조상들은 말을 사람들이 지켜야 할 예절과 도덕의 기초로, 그리고 인품이나 덕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창하게 말하는 것보다 진솔한 마음을 담아 진중한 태도로 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옛글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일상생활에서 말을 삼가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언어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전통 사회에서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말이 많은 것은 좋지 않은 태도라고 여겼다.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사람됨을 보여 주고,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힘을 가졌다고 여겨 꼭 필요한 만큼만 신중하게 가려서 말하도록 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돌려서 말하고, 말보다는 침묵이나 행동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같이 따뜻하고, 사람을 해치는 말은 가시같이 날카로워서, 사람을 이롭게 하는 한마디 말은 천금같이 소중하고, 사람을 해치는 한마디 말은 칼로 살을 베는 것같이 아프다. - “명심보감(明心寶鑑)” •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처세의 중요한 방편이기도 하므로 말을 하는 상황과 상대방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말하도록 했다. 즉 상황에 맞는 말을 필요한 만큼만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아직 말할 때가 아닌데도 말하는 것은 조급함이고, 말을 해야 할 차례인데도 하지 않는 것은 숨김이다. - “논어(論語)” • 고기는 씹어야 맛이요, 말은 해야 맛이라. • 말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전통 사회에서는 듣기에 좋더라도 아첨하고 거짓으로 꾸미는 말을 경계하였다. 그런데 거짓으로 말을 꾸미는 것보다 더 경계한 것이 남의 단점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혹시 나에게는 그런 잘못이 없는지, 그 잘못이 상대가 아니라 나 때문인 것이 아닌지를 먼저 살피라는 것이다. 즉 말하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태도를 중시하였다. 또한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였다. 남의 일에 참견하여 하는 말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아예 쓸데없는 참견 자체를 경계하였다. 어른들이 말할 때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하고 말을 할 때 몸짓 사용에 조심해야 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치켜세우면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자랑거리가 있어도 겸손하게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할 때에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아야 하고 공손한 태도로 차근차근 말하도록 하였다. 칭찬을 받으면 “부끄럽습니다.”, 선물을 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면 “변변치 않은 겁니다.”, 많은 음식을 차리고도 손님에게 “별로 차린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넘치는 것을 모자라게 표현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강조하며 내 덕도 남의 덕으로 표현하였다.
•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 것이며 자기의 장점을 말하지 마라. - “문선(文選)” • 물이 깊을수록 소리가 없다.
‘세 살 먹은 아이 말도 귀담아들으랬다.’는 속담이나 남의 칭찬에 우쭐대지 말라는 등의 경계는 듣기와도 관련된다. 상대방의 외면(外面)만 보고 판단하여 듣지 말고, 우선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것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남의 말만 듣고 행동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신중하게 판단하여 들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언어문화는 인격 수양의 한 방법으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말하기와 듣기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문화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보다는 실수하지 않는 말하기, 거짓 없는 말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극적으로 말을 하는 태도를 갖게 하기도 했다. 즉 전통적인 언어문화에서 강조하는 이러한 소극적 태도가 유창한 말하기보다는 어눌한 말하기를, 웅변보다는 침묵을 미덕으로 여기게 되는 관행으로 나타나면서 토론과 논쟁, 대화와 논의가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소홀히 해 왔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전통 사회에 비해 말할 기회가 많아졌다. 학교에서는 토론이나 발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사회에서는 면접이나 보고 등 제한된 시간 내에 인상적이고 효과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겸손이 지나쳐 자신을 낮추기만 하는 것은 자신감이 없어 보이므로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자신만만해한다면 건방지거나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언어문화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언어문화를 되돌아보고, 현대 사회에 맞는 바람직한 언어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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