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융합(인문+사회)] (가) ‘18세기 북학파의 북학론’ (나) ‘18세기 후반 청의 사회·경제적 현실’(6)(20년수능기출)(박제가, 이덕무, 북학)
(가)
18세기 북학파들은 청에 다녀온 경험을 연행록으로 기록하여 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을 구체화하였다. 이들은 개인적인 학문 성향과 관심에 따라 주목한 영역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들의 북학론도 차이를 보였다. 이들에게는 동아시아에서 문명의 척도로 여겨진 중화 관념이 청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 각각 다르게 반영된 것이다. 1778년 함께 연행길에 올라 동일한 일정을 소화했던 박제가와 이덕무의 연행록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확인된다.
[A] <북학이라는 목적의식이 강했던 박제가가 인식한 청의 현실은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조선이 지향할 가치 기준이었다. 그가 쓴 북학의에 묘사된 청의 현실은 특정 관점에 따라 선택 및 추상화된 것이었으며, 그런 청의 현실은 그에게 중화가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이기도 하였다. 중화 관념의 절대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은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보다 중화와 합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생각이 그의 북학론의 밑바탕이 되었다.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당시 주류의 견해에 대해 그는 의리 문제는 청이 천하를 차지한 지 백여 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으로 여기고, 청 문물제도의 수용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논하며 북학론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대체로 이익 추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주자학자들과 달리, 이익 추구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긍정하고 양반도 이익을 추구하자는 등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덕무는 「입연기」를 저술하면서 청의 현실을 객관적 태도로 기록하고자 하였다. 잘 정비된 마을의 모습을 기술하며 그는 황제의 행차에 대비하여 이루어진 일련의 조치가 민생과 무관하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청 문물의 효용을 ⓑ도외시하지 않고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삶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다. 스스로 평등견 이라 불렀던 인식 태도를 바탕으로 그는 당시 청에 대한 찬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청과 조선은 구분되지만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즉 청을 배우는 것과 조선 사람이 조선 풍토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국인들의 외양이 만주족처럼 변화된 것을 보고 비통한 감정을 토로하며 중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등 자신이 제시한 인식 태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나)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명대 이래의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해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향촌의 정기 시장부터 인구 100만의 대도시의 시장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시장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국내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장거리 교역의 상품이 사치품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적 물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상인 조직의 발전과 신용 기관의 확대는 교역의 질과 양이 급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이었다. 은의 유입, 그리고 이를 통해 가능해진 은을 매개로 한 과세는 상품 경제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은과 상품의 세계적 순환으로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청의 번영은 지속되지 않았고, 19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심각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해 급속한 하락의 시대를 겪게 된다. 북학파들이 연행을 했던 18세기 후반에도 이미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여러 문제는 새로운 작물 재배, 개간, 이주, 농경 집약화 등 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았다. 인구 증가로 이주 및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통적인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거나 단절된 사람들이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직이 ⓔ성행하였다. 이런 결사조직은 불법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곤 했고 위기 상황에서는 반란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인맥에 기초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 역시 인구 증가와 무관하지 않았다.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늘어났지만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관료 조직의 규모는 정체되어 있었고, 경쟁의 심화가 종종 불법적인 행위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 청의 화려한 번영의 그늘에는 ㉠심각한 위기의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었다.
통치자들도 번영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조정에는 외국과의 접촉으로부터 백성들을 차단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확대로 인해 이런 경향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18세기 후반에 청 조정은 서양에 대한 무역 개방을 축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위기가 본격화되지는 않았고,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사회 변화의 부정적 측면을 염려 하거나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1.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가)는 18세기 중국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견해의 형성 배경 및 견해 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② (가)는 18세기 중국을 바라보는 사상적 관점을 제시하면서 각 관점이 지닌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
③ (나)는 18세기 중국의 사회상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사회상을 시대별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서술하고 있다.
④ (나)는 18세기 중국의 사상적 변화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지니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분석하고 있다.
⑤ (가)와 (나)는 모두 18세기 중국의 현실을 제시하면서 그러한 현실이 다른 나라에 미친 영향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① 글의 구조와 전개 방식
[해설] (가)는 1778년 함께 연행길에 올라 함께 일정을 소화했던 박제가와 이덕무의 연행록을 바탕으로 18세기 중국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제시한 글로, 1문단에서 개인적인 학문 성향과 관점에 따라 주목한 영역이 달라 18세기 북학파들의 북학론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고 언급하고 있다. 2문단에서는 청의 현실을 중화가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이라고 보았던 박제가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3문단에서는 청의 현실을 객관적 태도로 기록하고자 하면서 청에 대한 찬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던 이덕무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가)는 18세기 중국에 대한 북학파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견해의 형성 배경 및 견해 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가)의 ‘박제가’와 ‘이덕무’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박제가는 청의 문물을 도입하는 것이 중화를 이루는 방도라고 간주하였다.
② 박제가는 자신이 파악한 청의 현실을 조선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였다.
③ 이덕무는 청의 현실을 관찰하면서 이면에 있는 민생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다.
④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성을 긍정하면서 청이 중화를 보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⑤ 박제가와 이덕무는 모두 중화 관념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④ 세부 내용 파악
[해설]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을 도외시하지 않고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삶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인들의 외양이 만주족처럼 변화된 것을 보고 비통한 감정을 토로하며 중 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청이 중화를 보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 없다.
3. 평등견 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조선의 풍토를 기준으로 삼아 청의 제도를 개선하자는 인식 태도이다.
② 조선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청의 방식에 따라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 태도이다.
③ 청과 조선의 가치를 평등하게 인정하고 풍토로 인한 차이를 해소하려는 인식 태도이다.
④ 중국인의 외양이 변화된 모습을 명에 대한 의리 문제와 관련지어 파악하려는 인식 태도이다.
⑤ 청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지양하고 청과 구분되는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하자는 인식 태도이다.
⑤ 생략된 내용 추론
[해설]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평등견’이라 불렀던 인식 태도를 바탕으로 당시 청에 대한 찬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시각에서 그는 청과 조선은 구분되지만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평등견은 청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지양하고 청과 구분되는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하자는 인식 태도라고 볼 수 있다.
4. 문맥을 고려할 때 ㉠의 의미를 파악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새로운 작물의 보급 증가가 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군.
② 신용 기관이 확대되고 교역의 질과 양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군.
③ 반란의 위험성 증가 등 인구 증가로 인한 문제점들이 나타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군.
④ 이주나 농경 집약화 등 조정에서 추진한 정책들이 실패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군.
⑤ 사회적 유대의 약화로 인하여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군.
③ 내용의 인과관계 파악
[해설] (나)의 1문단에서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명대 이래의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2문단에서는 19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청이 심각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해 급속한 하락의 시대를 겪게 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도 이미 그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징후들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것으로, 인구 증가로 이주 및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 통적인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거나 단절되자 사람들이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직이 나타났는데 이런 결사 조직들이 불법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곤 했고 위기 상황에서는 반란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인맥에 기초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 역시 인구 증가와 무관하지 않은 일로서 ‘위기의 씨앗’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은 반란의 위험성 증가 등 인구 증가로 인한 문제 점들이 나타나는 여러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보기>는 (가)에 제시된 북학의의 일부이다. [A]와 (나)를 참고하여 <보기>에 대해 비판적 읽기를 수행한 학생의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기>
우리나라에서는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많이 나는 산물을 다른 데서 산출되는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여 풍족하게 살려는 백성이 많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 … 중국 사람은 가난하면 장사를 한다. 그렇더라도 정말 사람만 현명하면 원래 가진 풍류와 명망은 그대로다. 그래서 유생이 거리낌 없이 서점을 출입하고, 재상조차도 직접 융복사 앞 시장에 가서 골동품을 산다. … 우리나라는 해마다 은 수만 냥을 연경에 실어 보내 약재와 비단을 사 오는 반면, 우리나라 물건을 팔아 저들의 은으로 바꿔 오는 일은 없다. 은이란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물건이지만, 약은 사람에게 먹여 반나절이면 사라져 버리고 비단은 시신을 감싸서 묻으면 반년 만에 썩어 없어진다.
① <보기>에 제시된 중국인들의 상업에 대한 인식은 [A]에서 제시한 실용적인 입장에 부합하는 것이라 볼 수 있어.
② <보기>에 제시된 조선의 산물 유통에 대한 서술은 [A]에서 제시한 북학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볼 수 있어.
③ <보기>에 제시된 중국인들의 상행위에 대한 서술은 (나)에 제시된 중국 국내 교역의 양상과 상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어.
④ <보기>에 제시된 은에 대한 평가는 (나)에 제시된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한 요소를 참고할 때, 은의 효용적 측면을 간과한 평가라 볼 수 있어.
⑤ <보기>에 제시된 중국의 관료에 대한 묘사는 (나)에 제시된 관료 사회의 모습을 참고할 때, 지배층의 전체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 진술이라 볼 수 있어.
④ 글에 드러난 관점, 내용 비판
[해설] (나)에서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이었으며, 이를 통해 가능해진 은을 매개로 한 과세는 상품 경제의 발전을 자극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보기>의 ‘은이란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물건이지만, 약은 사람에게 먹여 반나절이면 사라져 버리고 비단은 시신을 감싸서 묻으면 반년 만에 썩어 없어진다.’라는 내용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한 은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은의 효용성을 간과하고 있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본 박제가의 견해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에 제시된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은이 기여한 요소를 고려할 때, <보기>에 제시된 은에 대한 평가는 은의 효용적 측면을 높이 사는 평가라 볼 수 있다.
6. 문맥상 ⓐ~ⓔ와 바꿔 쓰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① ⓐ : 드러난
② ⓑ : 생각하지
③ ⓒ : 그치지
④ ⓓ : 따라갔다
⑤ ⓔ : 일어났다
③ 단어 사용의 적절성 파악
[해설] ‘한정되다’는 ‘수량이나 범위 따위가 제한되어 정해지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그치다’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어떤 상태에 머무르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므로 문맥상 ⓒ는 ‘그치지’로 바꿔 쓸 수 있다.
(가) 해제 : 이 글은 18세기 북학파들 가운데 박제가와 이덕무의 북학론 형성 배경과 견해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박제가는 18세기 청의 현실이 중화가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이라고 보고, 청 문물제도의 수용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논하며 북학론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삶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지만, ‘평등견’이라는 인식 태도를 바탕으로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덕무는 중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 주제 : 박제가와 이덕무의 북학론 형성 배경과 견해 차이
(나) 해제 : 이 글은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했던 18세기 후반 중국의 상황을 제시하면서 당시 청의 번영이 19세기 들어 내외의 위기에 직면해 급속한 하락의 시대를 겪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중국은 국내 교역이 활발했음은 물론대외 무역이 발전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여러 문제가 나타나면서 불법 활동과 반란의 기반이 된 결사 조직이 출현하고 정체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씨앗들은 통치자들의 불안으로 이어져 서양과의 교역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 주제 : 18세기 후반 정점에 달한 청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불안 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