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관악의
어제와 오늘(2)
신상호
(전북대학교 음악대학)
전북의
관악
전북
관악을 논하기 앞서 우선 구할 수 있는 자료가 한정되어 있고 또 서양음악
도입 초기 활동에 대한 말씀을 해주실 분들이 이미 타계하셨거나 연로하셔서
기억을 충분히 되살리지 못하기에 일정시대 관악음악의 흔적을 정확히
살펴볼 수 없었음을 미리 토로한다. 분명한 것은 공립학교에 관악대가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강제 징용 나가는 환송식에
브라스 밴드 환송음악이 꼭 있었음이 그를 반증한다. 여하간
가능한 한 전북 관악음악교육의 초기를 유추해보면 <전북 사범학교>가
1923년 5월 1일 개교하고 1925년 5월에 바이올린 전공자인 <나가에
이찌로> 음악선생이 부임한다.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겸임하였으며
해방까지 20년 넘게 근속했다. 공교육 기관이던 도립 사범학교가 없어지고
1936년 6월 5일 관립 사범학교로개교하면서 심상과와 강습과를 설치한다. 1940년
7월 2일 전주사범학교에 부임한 <이마요시 사도루>가 관악을 지도하여
초기 전주지역 음악에 큰 공적을 남겼다. 허나 당시 1학년이었던 유승국
선생은 <무라야마 사다오>라는 피아노 선생이라고 기억하며 그는
매일 아침 <하논> <바하 인벤션> <체르니 40번>을
기본으로 연습한 후 곡을 연습하는데 당시 피아노 음악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고 회고한다. <무라야마 사다오>선생은
튜바, 바슨, 앨트색스폰, 피콜로 등을 갖춘 대략 12인조로 구성된 취주악단을
창단, 지도하였는데 1937년 입학한 유승국 선생님은 트럼본을 불었고
<서울 음악대학>에서 정년 퇴임한 정회갑 선생님은 당시 앨트
유포늄을 불었는데 1938년 익산(당시는 이리)에 KBS방송국이 개국할
때 개국기념 연주회가 첫 연주회였다 한다.(당시 정회갑은 서울 심포니
멤바로 있던 이재옥과 교류, 관악을 배우고 또 가끔 서울 심포니 멤바로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함). 같은 때 7,8명 인원의 소규모인 전매청 관악대가
있었는데 대장은 역시 일본인 <오오꾸보>로서 편곡하여 연주한다고
하는데 대부분 유니슨(Unison)이었다하며 그중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훌륭한 능력의 한국인 클라리넷 주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마요시
사도루>와 <무라야마 사다오>가 무슨 관계인지 ㄴ확인할 수
없어 그에 대한 논의는 훗일로 미룬다. 당시 사범학교 학생들로 후에
음악계에 공헌한 분들을 몇몇 분 적어보면 심상과
2회 졸업자 : 정회갑, 유승국 3회
졸업자 : 박찬석, 유재금 4회
졸업자 : 최영환, 이득주 6회
졸업자 : 오진동 그리고
특설 강습과 4회 졸업자로 김인수 등이 있다. 전쟁말기
선생님들이 차출되어 전쟁터로 나갈 때 사범학교 브라스 밴드가 환송했으며
당시 <전주북중>에도 밴드는 있었는데 전문 선생님이 없어 활동은
미미했다. 여하간 사범학교 밴드부는 교내음악회를
해마다 개최했으며 현악기들도 있어 <챠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현악4중주로 연주하는데 첼로(Cello) 연주자가 없어
유승국 선생이 트럼본으로 첼로 파트를 담당하기도 했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음악반의 서양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새벽 4시경부터 학교에
가서 촛불 켜놓고 연습하고 아침 먹고 연습하고 수업 받고 그리고 연습하고
저녁 먹고 연습하고 방학때도 집에 안가고 연습하고 하였다 한다. 끼니도
잊고 연습할 정도였다 한다. 당시 전주에 피아노는 총 7대 정도 있었다
한다. 1945년 8월 하순 해방 후 김홍전(1941.11.15
충남 한산 출생. 신흥학교, 경신고보를 1932년 졸업. 1934년 동경에서
음악을 개인교수 받음. 미국 유니온 신학교 신학박사 등. 관동대학교
이사장, 극동방송 이사장 역임 등.)이 전주 관현 합창단을 조직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는데 연주에 임구(林九)의 클라리넷 독주도 있었다(전매청의
훌륭한 클라리넷 주자와 동일인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1930년대
활동하던 신흥학교 밴드부는 한때 폐교로 인해 악기까지 없어졌는데,
1948년 인톤 교장의 주선으로 미국인 독지가로부터 24인조 밴드를 기증받아
음악전문학교 출신인 조윤식(김제 난산교회)선생에게 악기 조작법을
배우고 전주사범학교 시절 밴드부장을 했던 (심상과 3회) 유재금 교사(클라리넷)와
장승하 교사(트럼펫)가 지도했다. 당시 3학년 학생 김완주가 주법의
기초를 가르쳐서 실력이 향상되면서 밴드부가 정식으로 출범하였고 음악교사로
이석규 선생이 부임하여 지휘하였다. 전북관악에
큰 공헌을 한 고광호 선생께서 1947년 <전주공업중학교>에 부임하여
(1917년생이시니 당시 30세) 1946년 4월에 창단된 16인조 관악부를 지도하게
된다. 1950년 <전주문우동우회> 주최로 <3.1절 기념 예술제>가
후생극장에서 개최되었는데 박찬석, 오진동, 강병규 등의 피아노 연주와
함께 고광호 선생은 플륫을 연주한다. 고광호
선생님의 공적사항과 경력 그리고 활동상황은 유갑수 회장께서 발표하시니
생략한다. 다만 특별히 기술하고 싶ㅊ은 고광호 선생님의 창의적 음악교육의
한 양상은 고광호 선생님은 유년의 질병(아들 고재천 님의 생각으론
장티프스인 듯하다는 증언)으로 청각기능이 크게 손상되어 항상 보청기에
의존하였는데 학생지도에 필요한 시창 교육을 (시창이 되면 청음이 된다)
계명창의 모음구조에 의한 음정 구조와 입모양을 연계하여효율적인 독특한
기초 음정 교육을 개발한 점이다. 그에 따는 시창 교본을 발간하였으나
교육청 및 주위 음악 선생님들의 인식부족으로 용납받지 못했음을 생시에
본인에게 섭섭하게 토로하시었다. 이 분야 또한 계속적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1950년 10월 <전북 경찰악대>가
창설되었다가 1969년 초 해산되었는데 처음엔 대장에 김시영, 악장은
박종대(2000년까지 한국예총 군산지부장, 2000년 작고)이었으나 후에
최학연과 박종대가 지휘를 이어 맡았다. 1952년 <전북 음악가
협회> 창립. 당시 전북상고에 재직하던 정회갑 선생님, 성모병원
병원장이던 유승국 의원(유승국 선생은 1941년 5월 사범학교 5학년때
퇴학을 당하여 그후 일본 밀항,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돌아온 후 익산 의료원에 있다가 성모병원장으로 초빙됨), 전주서중에
재직중인 고광호 선생님 등이 창립하였는데 연배에 따라 고광호 선생이
초대 지부장을 맡고 정회갑 선생이 작곡부장, 유승국 선생이 평론부장을
맡았다. 1959년 경팔악대와 전주공고 관악대를
지도하던 고광호 선생의 주도로 박종대 선생과 함께 전북관악연맹 조직,
이 연맹은 해마다 관악제를 주관하여 전국적 관악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 경찰악대 연주회를 고광호 선생이 지휘하는 경우 경찰이 아닌
고광호 선생님은 경찰복을 임시로 입고 지휘하되 답답하여 모자는 자주
벗었다 한다. 1962년 4월 1일<예술 문화단체
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가 결성되어 종합 예술제인 전라예술제를
매년 개최함. 1963년 1월 10일 김인수, 고광호,
김용환, 김지용을 중심으로 <전북관현악단> 창단. <삼남극장>에서
김인수 지휘로 창단연주 이후 1964년 11월 제2회, 1965년 6월에 제3회,
1966년 12월에 제4회 등 정기연주 후 전북교향악협회 산하의 <전북교향악단>(이사장:
유승국)으로 바뀌어 정기연주회를 갖고 전라예술제 및 여러 행사에 참여하는
등 1960년대 음악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함. 1960년대
전주에서 전주서중, 신흥고, 전주공고, 전주농고, 전주고, 전주남중상고의
고적대 및 관악대 활동이 활발함. 1971년 원광대학교에
음악교육과 신설. 1973년 전주대학교 전신인 영생대학에
음악교육과 신설. 1975년 1월 전주시향 전신인
<전주교향악단> 창단. 지휘 유영수, 김용환 악장, 김인규 인스펙타.
전주시민회관에서 창단연주회 1976년에 단원을
보강, 전주시립관현악단으로 변경 1978년 5월
<전주시립교향악단>으로 개칭한 후 활동한다. 1979년
전북대학교와 군산대학교에 음악교육과와 음악과 신설. 1988년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신설.
이상은
전주를 중심으로 한 개략이고 이후 전북관악의 전체상황은 젅, 익산,
군산 등으로 나누어 연구원들이 조사한 세세한 내용을 지역별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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