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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1963, Alfred Hitchcock)에 대한 분석>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2024130052 김묘진
어느 순간부터 까마귀를 보면 이상의 『오감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결대로 정돈된 털에서는 윤이 나고, 부리는 물론이거니와 길게 돋은 발에 심지어 발톱까지 새까만 그것들이 삼삼오오 전봇대 줄이나 빌딩 돌출부에 앉아 인파를 관망하다가 까악, 하고 울어대면 절로 시선이 향했다. 나는 나름대로 까마귀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치 모든 이들의 반려동물인 양 거리요 골목을 전전하는 비둘기들이 다리에 부딪히는 것은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괜히 까마귀가 주변에 내려앉으면 신경이 쓰였다. 인간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주워 들은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했고.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자유마루에 앉아 점심시간과 전공 수업 사이 애매하게 뜨는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이유도 없이 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끼니를 해결하려고 무언가를 먹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니,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모여든 것이 아니었을까. 옆에 앉아있던 친구는 길게 뻗었던 다리를 다소곳하게 모으며 넌지시 뱉었다. 새가 무섭다, 라고. 그리고서는 덧붙인다. 눈이 공허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첨언했다. 새는 괜찮은데 물고기 눈동자가 그렇게 무섭더라. 친구도 덧붙인다. 물고기도 그래, 비슷해서 둘 다 무서워. 그래, 그제서야 새의 눈과 물고기의 눈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의 집에는 금붕어가 세 마리 있었는데, 친구의 집에 가서 가만히 금붕어들을 관찰하다가 물비린내가 훅 끼치는 순간에는 괜스레 공포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대체 생각을 하고는 있는 건지,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고, 떼를 지어서 모여있을 때 유독 역겨웠다. 한두 마리 개체로 떠다닐 때는 그냥 물고기다, 새다, 하고 지나칠 것들이 수백, 수천, 수만 마리가 모여든 광경은 사뭇 다른 감각을 안겼다. 공허한 눈에 가만히 초점을 맞춘 순간과,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온 집중이 분산되는 순간, 어쨌든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는 두 양분된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 항상 비슷한 정도의 역겨움을 선사했다. 특히나 나에게 있어서 새는 일반적으로 역겹고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라 일컬어지는 여타의 생물들과는 좀 다른 부류다. 한 마리가 있으나 백 마리가 있으나 징그러운 벌레들과는 다르게, 한 마리가 있을 때와 백 마리가 있을 때의 새들은 다소 다른 관점에서 보인다. 대체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여즉 발견하지 못했지만.
히치콕이라. 영화 감상을 취미로 삼게 되었던 이 년 반간 가장 많이 들어본 사람 이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대학에 가서 시간이 나면 보려고 벼르던 것을 이렇게 처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을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는 많은데, 실제로 두 시간으로 된 작품을 한 편 보고 나니 꽤 이상한 기분이 든다. 과평가된 건 아닌가? 싶다가도 자그마치 58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고 나면 그 평가를 단숨에 지우게 된다.
감독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 그러니까 귀여워하던 새들이 떼로 모여있는 걸 목격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해서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1963년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새들이 떼로 모여들어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영화를 만들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감독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가 의문스러워진다고 해야 할까. 땅에 사는 것은 네 발 달린 동물들과 두 발로 선 인간들을 비롯한 다소 눈에 익은 생명체들이고, 바다에 사는 건 지느러미 달린 해류와 웬 외계생명체들처럼 느껴지는 심해 어류들 정도인데, 하늘에 사는 건 오로지 조류들뿐이다. 조류들의 생김새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해류들처럼 썩 다양하지 않다. 어떤 것의 부리는 길기도 하고 어떤 것의 부리는 뭉툭하기도 하고, 어떤 것의 깃털 색은 화려하기도 하고 어떤 것의 꼬리는 길게 늘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본질적으로는 공허한 눈, 부리, 날개 두 짝에 가냘픈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귀결이 된다. 그들은 날개를 가졌다는 이유로 모든 인류가 어릴 적-어쩌면 대다수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쭉- 한 번쯤은 가져본 ‘날아보고 싶다’의 꿈을 매일 실현하며 살고 있다. 그러한 새들만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의도치 않게 새들에게 항상 관음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발 달린 짐승들이 공간상의 제약으로 인해 발 디딜 수 없는 곳을 아주 쉽게 넘나들며 허공 혹은 그 아래에서 상황이 되어가는 형편을 살핀다. 괜히 마음 깊숙이 켕기는 것이 있을 때 시선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극도로 피하지 마지않는 인간의 본능에 있어서 새들은 굉장히 무서운 존재들이다.
이러한 존재들이 이유를 불문하고 무고하게 각자의 삶을 영위해 나가던 사람들을 덮친다. 처음에는 한 마리가, 다음에는 참새 무리가, 그다음으로는 까마귀와 갈매기 떼, 결말에 이르러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것들이 합심하여 인간들을 습격한다. 지금껏 인류가 궁극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온 것들은, 적어도 새는 아니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우리가 항상 새에 의해 감시당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발에 채는 비둘기들을 보며 성가시고 더럽다며 헐뜯는다. 우리와는 다소 다른 삶을 살아가던 존재들이, 느닷없이 관망의 대상이었던 우리에게 무차별하게 공격을 가하고 마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깨닫는다. 새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주체였던 적이 없었음을. 응시의 대상이 된 순간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우리는 항상 그들의 객체였다. 감독은 이러한 새들의 특성(낱낱이 따져보면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을 이용해 일종의 재난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새 수백 마리가 우리 마을을 덮쳤어요!’하는 제보는 좀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딱 만우절에 하는 장난 전화 정도의 성가심을 안겨준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잔인한 재앙이다. 새에게 물어뜯긴 사람들은 파상풍에 걸릴 걱정을 하고, 극 중에서 몇몇 사람은 새에게 쪼여서 우스꽝스럽거나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처참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한 죽음을 맞이했다. 2024년쯤 되어서야 사람들이 온갖 노출과 자극에 익숙해져 더욱 잔인하고 더욱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원하고야 있다지만, 1963년 당대에 이 영화는 대중에게 극도로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최근까지도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그 누구도 소재 삼지 않을 주변 것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영화를 보고 조류 공포증이 생겼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부터도 나중에 누군가가 ‘너 히치콕의 새를 봤냐’라고 묻는다면 엔딩 시퀀스에서 집 앞을 빼곡히 채운 갈매기 떼가 자동차 움직임에 느긋하게 달아나는 광경을 떠올리며 약간 소름이 돋을 것 같으니까. 영화를 보는 당시에는 크게 힘들다거나 징그럽다거나, 싶지는 않았는데 분석하면서 영화의 장면들을 생각하다 보니 제법 비위가 상할 것도 같다(이것은 아마 상술한 현대인의 가치관으로 인한 것일 터. 나 또한 새를 지극히 일상적인 대상으로 여겨 어쨌든 간에 나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을 것들 정도로 취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 남는 장면은 아무래도 학교 아이들이 까마귀 떼의 습격을 받은 이후 식당에 모여 언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취미로 조류학을 공부한다던 노파와 멜라니의 의견 충돌을 시작으로 세상에 종말이 도래했다며 울부짖는 신도와 이 참혹한 재난 상황을 믿지 않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는 손님 대다수. 겁에 질린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여자와 그를 인도하는 남자 손님이 가게를 떠난 것을 시작으로 새들의 습격이 시작되고, 멜라니를 비롯한 목격자들의 말을 믿지 않던 이들을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건물 안으로 숨어들거나 공격 대상이 된 이들을 구하려 부단히도 애쓴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식당 구석에는 멜라니를 제외한 마을의 모든 여자가 모여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용기를 내서 여행객 멜라니에게 ‘당신은 악마야’라며 그녀를 매도한다. 작중에서 멜라니는 자신에 대고 ‘이용당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멜라니가 캐시에게 선물하려던 잉꼬 한 쌍이 정말로 이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인가.
재난 영화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 또한 집단의 이기주의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 영화가 그러한 풍조의 초석이 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반드시 이기주의의 부적절성만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그 두 마리의 잉꼬가 보드가 만에 마치 바이러스처럼 흘러들어온 것을 계기로 본래 거주민들이었던 새들이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다면 잉꼬를 데리고 온 이방인 멜라니를 향해 당신이 온 이후로 마을이 이상해졌다며 폭력적인 언어를 던지는 마을 주민은 정말 나쁜 사람인가. 만약 나쁜 사람이라면, 정말 이 주민만이 나쁜 사람인가. 멜라니가 우체국에서 캐시의 이름을 수소문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멜라니에게 교사 애니는 ‘그래서 이 마을에서 편지가 잘 가는 일이 없죠’라며 던진다. 이 대사에서 마을 사람들 간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그러니까 보드가 만은 상상의 공동체로써의 ‘집단’이라는 개념의 배타성을 잘 띠고 있지 않는 공간이라는 설정을 읽어냈다. 실제로 식당에서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 것 또한 그러하고. 그러나 서로에게 지독하리만치 무관심한 보드가 만의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침입에 대해서는 하나가 되어서 굉장히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미치와 캐시의 권유에 의해 보드가 만에 며칠 머물게 된 멜라니를 향해 노골적인 시선을 던지고, 미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보드가 만에 정착한 애니는 학교 옆 거주지에만 머물 뿐 집단과의 소통이 단절된 듯하지 않나. 리디아 또한 이러한 집단의 이기심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오직 미치만이 자신과 어린 딸 캐시를 보호할 대상으로 여기며 ‘네 아버지가 있었더라면’과 같은 말을 꺼낸다. 애니는 ‘오이디푸스에게 외람되지만 리디아는 아들에게 소유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 리디아는 그녀가 줄 수 없는 사랑을 내가 미치에게 줄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던지고, 멜라니는 이에 대고 ‘그게 질투와 소유욕이에요’라며 대답하지만, 애니는 ‘리디아는 미치를 잃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니고,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다.’라며 반론한다. 리디아는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딸 하나 더 생기는 셈으로 치면 되지 않냐는 멜라니의 말에 이미 딸이 있지 않냐는 애니의 대답이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리디아의 남편이 죽었을 때 장남 미치가 그녀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 매우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미치는 이 순간부터 아들을 넘어서서 리디아의 응당 남편이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지막 습격 때에, 새들이 들이닥치는 창문을 걸어 잠그고 뚫리기 일보 직전인 문에 못질하는 미치에게서는 가장으로써의 일종의 애환 같은 것이 드러난다고 해야할까. 이러한 상황에서 미치는 아내를 얻어 리디아의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리디아는 쉽게 그런 선택을 내릴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또한, 비단 인간들에게서만 이러한 모습이 읽히는 것이 아니다. 새들 또한 그렇다. 새들이 인간들을 덮치며 마을을 점령하는 것은 토착 주민 새들만의 배타성이 외부 침입자인 인간, 혹은 잉꼬 한 쌍을 내쫓는다는 결론을 낸 것은 아닐까. 본래대로라면 차의 엔진 소리나 움직임에 분노하며 공격을 가했을 새들이 캐시가 잉꼬를 데리고 탄 순간에는 얌전히 끼룩대며 비켜난다. 꼭, ‘안녕히 가세요’라며 작별 인사를 건네기라도 하듯이.
배타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 유지적 행위가 때때로는 올바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만약, 멜라니와 잉꼬가 보드가 만에 머무르지 않았더라면, 보드가 만의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며 쭉 살아갔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이 영화는 자꾸만 이 일차적인 결과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마을 주민 캐시를 지킨 것은 이방인 애니의 목숨이었고, 이방인 멜라니가 새에 습격당한 순간 마을 주민이었던 브레너 가의 사람 모두가 마을을 떠난다(어쩌면 멜라니가 옥탑방에서 새에게 습격당함으로써 리디아 혹은 캐시가 습격당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방인의 설정 또한 굉장히 모호하다. 인간 대 새의 관점에서 멜라니는 인간으로 연대할 수 있지만, 마을 주민 대 이방인의 관점에서 멜라니(또한 애니)는 외부 존재로 규탄받는다. 이러한 상대적 개념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일상에서 생각해 볼 기회를 얻지 못한 대상들에 대해 생소한 관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집단으로 연대하며 자신들의 생활 공간을 지키려 하는 존재들의 모습, 특히나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던 일상적인 소재인 새를 끌어들여 이러한 배타성을 두 주체의 관점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냈으며, 범상치 않은 대상을 통해 생소한 재난의 상황을 공포스럽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려 60년이 넘 영화라는 생각을 하면 더더욱 그러하고.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 때 히치콕의 영화들에서 영감을 얻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꼭 같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묘사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히치콕의 주를 이루고 있다면,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의 길을 좇을 만하다고 판단된다.
‘개인의 이타심은 국가에 대한 이기주의로 전환된다.’라던 니부어의 주장이 불현듯 떠오르게 되는 작품이었다. 어느 입장에서는 나 또한 멜라니로써 누군가에게는 외부 존재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입장에서는 나 또한 새로써 누군가를 마을 주민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논제 1. ‘이방인’의 규정은 상대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 존재로부터 ‘우리’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의미가 있는가?
논제 2. 인류가 일궈낸 문명은 본래 자연이 존재하던 것을 파괴하고 쌓아 올린 것이다. 인류는 언젠가 본래의 주인들에게 우리의 유산을 되돌려주어야 하는, 임차인인 셈이다. 자연의 존재들이 인류의 문명을 내쫓아 내고자 할 때, 오늘날의 우리는 이에 순응할 수 있는가?
<박쥐(2009, 박찬욱)에 대한 분석>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2024130052 김묘진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어냐’라고 물으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영화를 취미로 삼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 처음 본 날로부터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자그마치 열세 번을 보고 이 년 반 동안 서른다섯 번을 돌려보며 심신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영화, 누군가에게 있어서 악몽의 원인이요 구역질이 나게 했다던 2009년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를 여러 번 보니 해석할 여지가 많았다. 이 인물의 관점, 저 인물의 관점, 의상을 가지고 하는 분석이라던가, 화면 구도를 가지고 하는 연출이라던가, 소재를 가지고서도 할 말이 많고, 원작하고 비교 분석을 해도 풀 이야기보따리가 한둘이 아니기야 하다만, 이번에는 <새>와 연결고리를 지을 수 있는 관점에서 한 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새>에서 리디아의 남편이 죽자, 맏아들 미치는 장남의 역할을 넘어서서 남편이 도맡아야 하는 역할, 즉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박쥐>에서도 그런 가장 역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데에 크게 이점을 취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 바로 ‘상현’이 그 인물이 되시겠다. 상현은 또한 <박쥐>에서 ‘이방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집단을 표상하는 수요 마작 모임 ‘오아시스’의 일원들은 새로운 구성원으로 신부(神父) 상현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종의 이점을 취하고자 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태주’가 상현에 대고 ‘넌 병균이야’라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박쥐>에서 외부 존재이자 이방인으로 표상된 상현이 가장으로써 영화에서 어떠한 서사를 지닐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상현의 인생사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상현은 고아로, 어려서부터 성당 보육원에서 자랐다. 의대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신께 귀의하기 위해 사제의 길을 택해 성당 산하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환우들을 보내기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염증을 느껴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생체실험의 대상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굉장히 독실한 사람으로 비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상현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통상적인 가정의 형태, 즉 가부장제 하에서 돌아가는 가족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인물이라는 데에 있다. 생체실험 중 감염되어 과다출혈로 사망한 상현이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받아 기적적으로 부활하고서 반 년 후, 그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강우를 만나고 상현의 기도를 통해 강우의 병이 낫자 강우의 어머니인 라 여사는 상현을 반갑게 가정 구성원으로 맞아들인다. 강우는 굉장히 특수한 인물이다. 그는 본디 체질이 허약해 온갖 잔병치레를 해야했으며, 작중에서 언급되기로는 부활절을 앞둔 4월에 보일러를 켜놓고서도 강우는 춥다며 조끼를 껴입고 핫팩을 몸에 끼고 있다. 항상 훌쩍거리며 콧물을 달고 사는 게 예사이고, 라 여사는 과부가 된 이래 그러한 강우를 돌보기 위해 평생을 한 몸 바쳐 살아왔다. 강우는 어른이 되지 못한, 마마보이 그 자체이다. 정리해 보자면, 라 여사의 가정에는 가부장제에서의 가장, 즉 남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강우조차 아들로써의 통상적인 역할인 어머니를 보호하는 모습은 고사하고 스스로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와중에, 라 여사가 남편이자 아들로 마음을 붙일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가정에 상현이 편입되며, 라 여사는 상현을 꼭 둘째 아들처럼, 더 나아가 남편처럼 여기며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라 여사가 리디아처럼 상현에게 의지하게 되어버리기 이전에, 상현은 가정에 들어온 목적을 충실히 달성한다. 바로, 강우의 처이자 라 여사의 며느리인 ‘태주’를 차지하는 것이다.
본래 외부 존재로, 이방인으로 라 여사의 집을 오가던 상현은 신부복을 벗어 던지고 태주와 간통을 저지르기 위해 지하실(뱀파이어이므로 햇빛을 피하기 위함이다)에 매트리스를 깔고 살기 시작한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없었더라면, 어딘가 불안정한 세 사람(라 여사, 강우, 태주)의 가정에서 상현이 그저 두 번째 아들 역할을 하는 데에 그쳤더라면 네 사람은 나름대로 괜찮은, 새로운 형태에 가족을 꾸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이 영화에 있어서 하등 쓸모가 없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에 이르기도 이전에 상현과 태주는 합심하여 태주의 남편 자리에 미리 앉아버린 강우를 살해하기 때문이다. 상현은 강우가 태주에게 폭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하여 강우를 죽이겠다고 결심했으나, 이것은 어려서부터 강우와 라 여사가 눈엣가시로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한 태주가 상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한 계획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니까, 상현이 태주의 꾀에 넘어가 강우를 살해하게 된 것은 상현 딴에는 강우를 죽이고 태주를 차지하겠다는, 더 나아가 완전한 가정의 일원이 되겠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의 결과였겠지만 태주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도구 삼아 이 지긋지긋하고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태주는 상현을 사랑하긴 했어도, 결단코 가정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감정이 격해져서 본심이 나오는 순간에는 ‘오순도순 우리 세 식구 잘 사는 집에 들어와서’라며 상현에게 침을 뱉지.
감독은 박쥐에 대고 “언제나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내 영화는 대부분 가장의 애환을 그린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 강우가 죽은 다음에는 거의 상현과 태주가 부부처럼 느껴지는데 그들의 비밀이 폭로될 때 태주가 비명을 지르고 안기고 그럴 때 상현이 보여주는 표정이 바로 그런 가장의 애환을 담고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다시, 가장으로써 상현의 인생 일대기를 되짚어 보며 감독의 주장을 영화와 결부지어 보도록 할까. 세 사람이 오순도순 살던 집에 ‘병균’으로 묘사되는 뱀파이어 남자가 들어온다. 이 남자는 체질이 본디 허약하고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해 여전히 엄마를 온 우주로 알고, 여동생이자 아내를 친구로 대하는 집안의 병든 아들을 대신하여 남자 행세를, 다시 말해 가장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라 여사가 상현에게 의지하며 그를 ‘아들처럼 대해주’는 것은 상현이 강우를 살렸다고 믿는 구석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보드카에 취해 상현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라 여사의 모습은 어쩐지 남편을 향해서 고민을 토로하는 아내의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나? 오랜 시간 동안 라 여사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보살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마마보이 강우와 얼떨결에 떠안게 되어 노예처럼 부리고 있긴 하지만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과묵한 수양딸 태주뿐이었다. 이러한 라 여사의 어머니로써의 인생에 아버지의 역할, 다시 말해 자녀 돌봄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존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집중해야만 하는 것은 ‘라 여사가 상현을 남편으로 생각함’이 아닌, ‘상현이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창작물 상에서의 남자다운 모습을 보임’이라는 점이 되겠다.
이후 상현은 아예 수도원에서 나와서 행복 한복의 지하실에 눌러 앉아버리고, 결말에 가까워지며 경찰이 심문할 때는 “현 신부가 필요 이상으로 집을 많이 드나들었다던데.”라는 대사를 던지기도 한다. 라 여사는 “언제까지라도 계셔요, 이 집에. 알았지?”라며 상현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이 순간부터 상현에게서는 태주를 향한 집착과 독점욕이 극도로 강화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결국 이는 강우를 살해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행동화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상현이 강우를 살해한 것은 일차적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구원하겠다는 마음이 컸겠지만, 어느 정도는 그를 향해 일종의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도 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상현은 고아였고 평생을 신에게 귀의하며 무력함에 젖은 채 살아왔건만, 강우는 속되게 말해 사람 구실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무한히 사랑해 주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서 살아왔다. 상현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강우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고자 했으리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좀 더 가정을 올곧게 뒷받침할 수 있고, 좀 더 강인하게 두 여자를 책임질 수 있는 방식. 결국 상현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은 지금껏 체험해 본 적 없던 가부장제의 방식뿐이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이를 택하고자 했을 것이다.
강우가 죽고 라 여사가 마비된 이후로 집안의 유일한 남자가 된 상현은 태주와 부부처럼 보이기 시작하며 마침내 이전부터 느슨하게 해오던 가주 행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오죽하면 태주가 상현에 대고 “근데 상현 씨가 대장이야? 이래라저래라, 막 때리고.”라며 넌지시 농담을 던지겠는가. 히어로나 가질 법한 대단한 초능력을 고작 아내의 바람을 의심하는 용도로 써먹는 광경은 우스꽝스럽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상현은 더 나아가 그녀에게 배신감을 표출하며 손을 대기까지 했다. 이러한 행동들이 표상하는 것은 결국 태주(아내)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상현(남편)의 욕망이며, 전형적인 가부장제가 만연한 가정 내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낸 장면 중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아내를 일종의 소유물로 여겨 가장으로써의 위신과 책무를 위해 그녀를 억압하려고 하고, 이는 상술했듯 태주의 가장 큰 억압 요인으로 상현이 자리 잡는 원인이 된다.
그렇지만 상현은 온전한 가부장제를 현실에서 실현 해내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상현이 가장이 되게 만든 근원적 원인이 되는 태주는 상현을 “지옥에서 나가”기 위해 철저하게 이용한 면모를 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이 먼 상현은 그런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그녀가 설계한 길을 좇아 신부와 인간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말아버리지만, 태주가 상현을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고 그의 손으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전략적인 도발로 보이기까지 한다. 태주는 정말 상현의 손에 죽은 상태였을까? 분명 그의 손길에 목이 부러지고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긴 했는데, 상현의 품에 안긴 순간에 고개가 돌아가고 손아귀에 붙잡힌 팔이 늘어지는 것은 완전히 죽은 사람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죽은 척을 하는 사람의 다소 과장되고 격양된 그것에 더 가깝지 않나. 물론, 이 장면에서 태주가 정말 죽음을 초월한 자가 되었는지, 아니라면 죽음의 문턱에서 상현의 손에 붙들려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는 그렇게 옳고 그름의 여부를 따질 문제가 아니긴 하다. 중요한 점은, 태주가 상현을 이용하여 남편은 물론이고 자신의 죽음마저 꾀할 수 있는, 상현이 집안 구성원이 된 이래로 은연중에 표출한 가장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아 온 강인한 여성이라는 데에 있다.
아내가 남편의 억압에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 이로부터 가부장제를 실현코자 한 상현에게서는 가장의 애환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애환은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책무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멜로 장르의 영화를 상정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가부장제라는 유교적 생활 양식하에서 바라보았을 때 남편의 아래 종속시키고 명령을 따르게 시켜야 하는 아랫사람인 안사람(아내), 태주의 짐승적 본성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하는 상현의 모습, 더 나아가 그녀에게 종속당하는 듯한 모습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고뇌가 드러나는 부분의 그 최초로는 태주의 외도에 배신감을 느껴 그녀를 살해하고 부활시키는 서사가 있다. 먼저, 태주는 상현이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뱀파이어는 어떻게 해서 되는 거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졌던 그 밤에 당장 피를 나누어 주었을 터. 상현은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에 대해 일종의 선택받은 기분, 타인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남몰래 가지고 있었고, 피를 나누어주는 것에 대한 거부는 신부로서의 신념을 표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신은 남들보다 윤리 의식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니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의 손에 이 힘이 들어간다면 필시 그 힘은 파멸을 낳을 것이라는 식으로. 그 때문에 태주는 더 잃을 것도 없는 인생에 가장 큰 최후의 도박을 걸어본 것이 아닐까. 어차피 강우의 환상에 시달리고, 상현은 꼬리표처럼 자신의 꽁무니를 평생 쫓아올 것이며, 사지마저 마비된 라 여사의 수발이나 들다가 늙어버리느니. 죽어버리던가, 아니라면 뱀파이어로 살아나서 상현과 동등한, 어쩌면 상현보다 더 우월한 입지를 점하던가. 행운인지, 불운인지, 상현은 결국 우발적으로 태주를 살해하고서는 그녀를 뱀파이어로써 부활시켰다. 둘째로는 태주의 무자비한 인간 사냥을 막아보려 그를 감금하지만, 결국 죽어가는 그녀를 살려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인간의 경계를 넘어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환자의 죽음을 바란 의사)을 집으로 끌어들여 그녀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장면일 것이다. 이어 세 번째로 오는 것은, 라 여사에 의해 두 사람의 범죄가 드러난 직후 태주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에 안기던 순간에 지어 보이던 허탈하다는 듯한 표정과 무자비하게 지인들을 향한 살육을 벌이던 태주와 몸싸움을 하는 부분이 된다.
두 사람의 살해 행각이 폭로된 직후, 마작 모임의 일원이었던 댐 환경과장 영두의 필리핀 아내 이블린이 울부짖으며 영두에게 안기자, 태주는 그 모습을 섬뜩하게 응시하더니 이블린보다 더 과하게, 마치 우는 연기를 지시받은 배우처럼 상현의 품에 애처롭게 달라붙어 억지로 날카로운 비명을 벼려낸다. 지친 듯이 태주를 떼어내고서 식당 바깥으로 나가 커튼을 치고 남은 일원들의 탈출로를 차단하는 와중에도 그는 초지일관하게 권태롭고 피곤하다는,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직후, 마치 마녀와도 같이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신나게 영두의 목을 조르는 태주를 본 상현은 태주의 목을 졸라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시도는 좌절당한다. 도리어 상현을 껴안았다가 그의 목을 조르고 품에서 빠져나오는 태주에게서는 상현이 지향하고자 했던 상하관계의 완전한 역전이 발생했음이, 즉 그들의 관계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뒤집혀 버렸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부장제가 좌절된 가장은 어떠한 선택을 하나, 뱀파이어와 신부(인간)의 갈림길에서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고르지 못하고 방황하던 상현은 결국 아내마저 자신의 그림자 아래에 둘 수 없음을 깨닫고 큰 결심을 내리게 된다. 상현의 그 위대한 선택은, 신도들의 앞에서 강간을 꾸며낸 후 태주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신도들의 앞에서 거짓된 극을 연기하는 상현의 모습은 어쩌면 그의 품에서 배우처럼 행동하던 태주의 일부를 닮은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붕대 감은 성자요 예수의 재림으로 불리며 어쩌다 보니 자신만의 신도들을 형성하기까지 한 사제로서의 자아를 완전히 떨쳐내려는 시도이며, 가정 구성원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여 발생하고 말아버린 부정의 죄를 기꺼이 짊어지는 숭고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는 결국, 오랫동안 인간과 짐승의 사이를 방황하던 상현이 결국 태주를 좇아 뱀파이어가 되기로 결정 내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 되겠다. 이후 상현은 태주를 데리고 일출이 보이는 절벽으로 향해 서로를 품에 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전자와 더불어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자의 희생, 종교적으로 엮어보자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절대자의 희생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결론적으로, 상현은 일반적으로 한국 가정에서 표상되는 가부장제를 겪어본 적 없는 인물이지만 남성이 부재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얻으며 가장으로서의 욕망을 표출한다. 이 표출 방식은 태주를 억압하고 자신 하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두드러지나, 이 제도에 순응하지 않는 태주는 도리어 상현을 휘둘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완전한 가부장제의 실현이 좌절된 상현은 가장의 애환을 드러냈고, 종내에는 가정 내 구성원의 죄를 대신 짊어지며 그와 함께 희생한다.
이하의 분석들로부터 결론지어 최종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박쥐>의 시나리오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제의 실현을 위해 아내를 종속하고자 하는 남편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때 남편으로 표상되는 상현은 아내로 표상되는 태주를 억압하는 데에 실패하여 완전한 가부장제 실현에 장애를 겪음으로써 가장의 애환을 표출하게 된다. 이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라는 영화 주인공으로써의 특수성의 개입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자살이라는 형태로 귀결지어지며, 이때 이 행위는 극 내내 신부와 뱀파이어 사이의 양립되는 자아를 가진 채 갈등한 상현이 태주로 표상되는 뱀파이어로써의 죽음을 택한 반종교적 행위로, 그리고 가정 구성원인 아내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가장으로써의 책무 불이행에 대한 희생적 행위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주성철, 「<박쥐>가 난해하다는 건 정말 인정 못하겠다」, 『씨네21』 1051호 별책부록 『박찬욱』, p. 71-77
논제 1. 가부장제란 가장인 남성이 강력한 가장권을 가지고 가족구성원을 통솔하는 가족 형태 또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지배를 뒷받침해 주는 사회체계를 일컫는 제도를 말한다. 2008년 1월 1일, 호주제가 폐지됨으로써 큰 축을 잃은 가부장제는 사라질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2024년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는 대한민국의 유교 사회에서 대개의 통상적인 가정-가정의 다양한 형태를 접해보지 않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으나-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 가부장제로 표상될 수 있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한 대한민국 현대에서, 여러분은 가부장제에 의헤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 그 영향은 긍정적이었는가, 아니라면 부정적이었는가?
논제 2. (본 분석에서는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박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키워드는 ‘구원’이다.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언 6:5)”는 동일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진상을 해결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문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여러분은 타인이 자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라면, 자신의 삶은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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