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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창녕曺씨들은 부제학공파 후손들로 영암읍, 군서, 시종, 미암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부제학 조상치의 6세손인 남은처사 조세풍 선생을 기리는 영암읍 서남리 소재 제각 남은제 전경. |
■ 신라 진평왕의 사위 조계룡이 시조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전해 오는데,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우연히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가 번영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이 밑에 曺(조)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기하게 여겨 성씨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진평왕의 사위가 되고,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태자태사에 올랐으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창녕조씨 중시조는 조겸(謙)인데 겸은 시조의 5대손으로 신라 말에 아간시중을 지내고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曺(조)씨는 창녕 외에도 가흥(진도), 남평, 능성, 수성(대구), 안동, 영암 등 여러 본관이 있으나 모두 창녕조씨의 분파로 보아 曺(조)씨는 '창녕' 단본으로 통한다.
■ 과거 급제자 350여명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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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제 뒷쪽에 위치한 낭주사에는 남은처사 조세풍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창녕조씨세보에 의하면 창녕조씨는 고려시대에 8대에 걸쳐(8세 延祐~15세 自奇) 문하평장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광산김씨의 10대 평장사와 함께 기록적인 일이다. 그 외 좌정승을 지낸 양평군 익청(益淸)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을 지낸 민수(敏修) 등 많은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제학을 지낸 상치(尙治), 공조판서를 지낸 비형(備衡), 영의정을 지낸 석문(錫文), 예조참판 효문(孝門), 대사헌을 지내고 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숙기(淑沂), 강원도관찰사 문수(文秀), 예조참판을 역임한 한영(漢英), 왜구와 야인 토벌에 공을 세워 병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한 윤손(潤孫), 중종 때 반정공신 계형(繼衡) 등 많은 관직자들을 배출하면서 번성하였다.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던 위(偉)는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문집 "매계집"을 남겼다.
신(伸)과 한보(漢輔)는 시인과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고, 계상(繼商)은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 공조판서·우참찬를 지냈으며, 광원(光遠)도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불린 효창(孝昌)과 우인(友仁)이 있고, 대사간 하망(夏望), 이조참판·예문관제학을 지낸 명교(命敎)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윤형(允亨) 등이 있다.
대석학 남명 식(植)은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으며,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남명집", "파한잡기" 등을 남겼다. 만식(晩植)은 민족운동가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창녕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113명, 무과 37명, 사마시(생원,진사) 202명 등 350여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영암은 부제학공파의 후손
창녕조씨의 분파는, 분류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감사공파, 대호군공파, 대사헌공파, 매계공파, 밀직사공파, 부사직공파, 부제학공파, 사의공파, 사정공파, 사직공파, 상서공파, 상호군공파, 생원공파, 선무랑공파, 수찬공파, 승지공파, 시랑공파, 시중공파, 장양공파, 중추공파, 지중추공파, 진사공파, 참판공파, 청구당공파, 총제공파, 충순위공파, 충익공파, 태복경공파, 태학사공파, 판부사공파, 판윤공파, 현감공파, 헌납공파가 있다.
창녕조씨 집성촌으로는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 화순군 북면·동면 일원,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산청군 삼장면 일원,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읍 등이 있다.
창녕조씨의 인구수는 2000년 조사에서 전국에 105.282가구 338.222명으로, 전국 총인구의 0.7%대인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우리 영암지역에 살고 있는 창녕조씨는 466가구에 1,143명으로 영암 인구의 1.9%를 차지했다.
영암의 창녕曺씨들은 주로 영암읍을 비롯하여, 군서, 시종, 미암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부제학공파 후손들이며, 이곳 입향조는 부제학 조상치의 6세손으로 남은처사 조세풍 선생이다.
南隱처사는 당초 경상도에서 살았으나 당시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1580년 조상의 땅을 버리고 영암으로 와서 현 군서면 도갑리 평리마을에 강당을 짓고 인근 강진, 해남 등지의 청장년과 선비 수백명을 규합하여 학문연마에 심혈을 기울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령을 돌보지 않고 솔선하여 문하생들과 군수물자 보급에 헌신했다.
정유재란 때는 문하생 100여명과 의병을 조직하여 강진 도암 병치제 전장에 출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나 후에 전상의 후유증과 노령으로 별세했는데 향인들은 '남은처사'라고 불러 나중에 호가 되었다.
후손 중 영암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지방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조극환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바둑기사 조훈현, 변호사 조희채, 조희종, 조영상, 해병대 준장 출신의 조광호, 의학박사 조두훈, 조정인, 구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조옥환, 서울에서 운수사업가로 성공한 조희량, 희삼 형제 등이 후손이다.
■ 효자와 애국지사 등 다수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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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주사 입구에 세워진 비석 |
한편 우리 영암지역 인물로, 효자로는 조린수(曺麟壽)가 있다. 그는 천성이 순하고 효성스러웠다. 15살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퍼하며 상을 치르는데 끝까지 예절을 다 하였다.
편모를 섬김에 있어 43년을 하루같이 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또한 행동과 몸가짐을 올 바르게 하여 사군자의 칭복이 있었다.
의사(義士) 조행립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태호(兌湖)이다. 도사 조기서의 아들로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박동렬(반남박씨, 장원급제, 대사성)의 문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중에 큰아버지와 형제를 잃었고, 광해군 때 정국의 혼란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서울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던 중,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이괄의 난 때 호남의 많은 인사들과 더불어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여 이 사실이 모의록에 실려 있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거의(擧義)하였다. 인조때 여러번 발탁되어 여러 군현을 맡아 칭송 받았으며, 늙어서는 구림으로 물러나 향악을 가르치고 향민들의 풍속순화에 힘썼다.
또한, 영암의 소화산(小華山)에 별당을 짓고 10여년간 독서하였으며, 뒤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영암의 구림사(鳩林祠)에 제향되었다. 생년은 1580년(선조 13)이며 몰년은 1663년(현종 4)이다.
유현(儒賢) 조기서(曺麒瑞)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부제학 충정공 조상치의 7세손이다. 증조는 창산군 조계은(繼殷), 할아버지는 별제 조응경(應卿)이고, 아버지는 판관 조세준(世俊)이다. 선조 15년(1582년) 식년생원 1등 2위(2/100)로 합격하였다.
생원으로 태학에 있으면서 홀로 강해(姜海)와 양천경(梁千慶)의 신원을 구하는 상소를 하였고, 기축옥사가 일어나 호남의 선비들이 연루되자 소를 올려 그 억울함을 말하여 반대파의 미움을 샀다.
오윤겸ㆍ김상용ㆍ이홍주와 파산(坡山)에서 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반대파가 벌하고자 (정여립옥사에 연루된 강해, 양천경 일파의 탄핵) 하였으나 이항복의 도움으로 영암으로 낙향하여, 37세로 일찍 죽으니 주변 사람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우암 송시열이 묘갈문(碑文)을 지어 칭송하였다. 생년은 1556년(명종 11) 몰년은 1591년(선조 24)이며, 묘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에 의인(宜人) 선산임씨와 합장분이다.
조일주(曺一周)는 군수 조행립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조경포(曺敬甫)이다. 영특하고 온화하였으며 사람됨이 곧고 엄격하고 청렴하였다. 5살에 글을 알고 18살에 우암 송시열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이때 우암의 제자가 많았으나 우암이 여러 가지 책을 주었고 공을 애중하게 여겼다.
절의를 숭상해 집안 제사 축문 등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으며(당시 민간에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 '숭정'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음) 그가 거처하는 곳에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한가로운 삶을 토대로 정한(靖閒, 靖閒齋)을 호(號)로 삼았다.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유풍(遺風)을 사모하였다.
과환(科宦, 과거 급제자)으로, 문과 급제자 조명윤(曺命胤)은 1693년 계유생이다. 부는 조석주, 생부는 조석환, 조는 조일흥, 증조는 조경위, 외조는 홍재원이다. 그는 영조 17년(1741년) 신유년 식년시 병과 14위(24/37)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당시 나이 49세였다. 첨지사(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를 역임하였다.
조귀수(曺龜壽)는 공(功)으로 무과에 등과하여 동지충추를 역임하였다.
그외 호남읍지에 음직(蔭職. 과거를 통하지 않고 벼슬한 사람)으로 분류된 인물로, 조기서는 선조 15년(1582년) 식년생원 1등 2위(2/100)로 합격하였고, 마지막 직은 도사이다.
조행립은 조기서의 아들로 군수,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명조는 영조 5년(1729년) 식년진사 3등 37위(67/100)로 합격하였고, 용양위부호군을 역임하였다. 아버지는 조구수이며 형으로 조명로,조명훈,조명달이 있다. 조석진의 마지막 직은 생원이며, 조일계도 음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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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태영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