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호박과 오 세 춘 향우
유정란
"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 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보이는 건 눈길뿐이다. 대처로 공부하러 나가는 아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어머니는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눈길을 내려다보며 하소연 하는데...
장흥군이 배출한 천재 작가 고 이청준작가의 자전적 소설 눈길의 한 대목이다.
작가의 어머니가 아들의 눈 발자국을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엔 이제는 서러움 대신 이정표가 서있다. 진목마을 알리는 표시다. 대규모 호박재배 단지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나무 터널도 서있다.
지루한 장마가 걷히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기다. 녹음이 짙다. 장마철에 수분을 저장했던 나무들이 일제히 토해내는 기쁨의 탄성이다. 긴 장마로 눅눅해졌던 산과 들은 티끌 하나 먼지 한 점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칠월의 투명한 창을 통해 푸름을 목청껏 노래한다,
진목 마을을 포근히 감싸며 내려다보고 있는 뒷산은 마치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한없이 자식을 염려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진목마을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하다. 살림살이도 넉넉하다.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논농사와 한우사육 양파재배와 호박농사로 진목마을은 농한기가 따로 없다.
진목마을이 이처럼 잘사는 마을이 되기까지는 마을 사람들의 천성의 부지런함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숨은 공로자가 있다. 회진초등학교26회, 대덕중학교 25회로 졸업한 오 세 춘 향우가 주인공이다. 그가 이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은 지자체들이 앞 다퉈 환경 살리기에 초점을 맞추던 시기였다. 장흥군도 녹색 농촌 체험 마을 공모를 통해 조건에 맞는 마을을 선정하기에 이르고 진목 마을은 선정의 영예를 안게 된다.
오 세 춘 향우는 소박하나마 진목 마을의 청사진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해당기관의 이해와 도움을 구하게 된다. 본격적인 사업 구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산골마을 특성에 맞는 사업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농한기를 활용해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묘안을 짜기에 이른다. 다락 논이 많은 진목마을은 묵은땅이 많아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면 뜻밖의 소득원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했다. 호박심기였다.
사업비 2천만 원을 보조 받고 시작한 오 세 춘 향우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 향우들이 편히 머물고 갈수 있도록 마을 회관을 개보수 하였다. 단 호박을 비롯한 식용 호박심기에 주력한다. 별다른 농법이 필요치 않은 호박농사는 그해 적은 금액의 투자로 풍작의 결실을 이루었다. 그러나 판로가 문제였다. 호박이 주는 저가의 이미지가 한계였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오 세 춘 이장이 종묘 구입관계로 서울에 위치한 아세아 종 묘사에 들렀을 때 그곳 사장님은 귀가 번쩍 뜨이는 정보를 준다. 외래 워 종인 관상용 호박을 재배할 것을 권한다. 단순히 먹는 것에서 탈피해 보여주는 것으로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자는 의도였다. 생각의 전환은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신선한 발상에 마음을 움직인 장흥군 마케팅 과에서는 호박을 이용한 축제를 만들어보자고 한다. ‘못생긴 호박축제’라는 재미난 제목을 걸고 잘생긴 마을 주민들의 분주한 축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나무를 이용한 긴 호박터널엔 130여종에 달하는 관상용 호박이 즐비하게 달렸다. 그 생김새도 다양하고 기발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식용 호박을 이용한 다양한 먹을거리도 인기였다. 호박막걸리 호박식혜 호박 부침개 등 일일이 손수 만든 자연식은 맛도 최고였다. 성공이었다.
각종 언론 매체의 뜨거운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방송을 본 출향 향우들의 고향특산물 팔아주기 운동이 일어난다. 신바람이 일궈낸 즐거운 소동이었다. 직거래를 통한 수입 창출로 농가들의 가계에도 여유가 생겼다. 여세를 몰아 오 세 춘 향우와 주민들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마을 진입로에 대형 호박 조형물도 세우는 등 본격적인 홍보 전략이 시작된다. 축제는 3년 동안 이어졌고 주민들은 늘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축제를 위해 협력하였다.
오 세 춘 향우는 말한다.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낸 쾌거요 기쁨이라고. 덧붙여 당시 마케팅과 이 재 희, 임 형환 두 공무원이 고생을 많이 하였고 군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고 말이다.
마을에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있다. 하나하나 석축을 쌓아 올린 본당의 건축 기법으로 보아도 100년의 전통을 가늠 하게 한다. 시골 단일 교회로는 드물게 30여명의 목회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종교의 힘은 때론 상상을 초월한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마을 교회에 다니는데 그들의 단합된 힘의 원천은 바로 신앙이다. 오 세 춘 향우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키워왔단다.
부인 김 미 화씨와의 사이엔 2남 1녀가 있다. 착하고 인정 많은 아내와 예의바른 아이들이 있는 그의 가정은 늘 화목하다. 부자다. 물질적인 풍요의 부자가 아니라 행복이 샐 틈 없는 탄탄한 가정이라서 부자라는 것이다.
봉사는 사랑이다. 사랑은 몰입이다. 몰입은 조건 없는 질주다. 그 상대가 유형이던 무형이든 상관없다. 내 것을 다 주고도 내 마음이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장흥군 회진면 진목마을에 그런 사람 있다. 못생긴 호박과 5년을 동거한 오 세 춘 향우가 바로 그런 마음의 소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