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수기
조용히, 꾸준히, 오래오래
신학교 다닐 때 어떤 친구의 자칭 “개똥철학”을 마음 깊이 새겨들었던 적이 있다. 그는 사람이 입을 열면 꼭 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자기주장] [자기자랑] [자기변명]이라고 했다. 이 글도 필경 내 자랑과 변명이 될 것이니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미리 양해를 구한다. 기독교사상이라는 역사적인 잡지사에서 원고를 청탁하니 감사했지만, 내놓을 것이 없어서 한참 고민했는데, 그래서 나는 완전히 주님의 자비를 입어서 목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가면서 자주 ‘내가 복을 많이 받았구나’ 생각했는데, 다 하느님 은혜였다. 목회 초기에 내가 갖고 있던 희망이라면 단지 괜찮은 목사 한사람이 되는 것 뿐이었다.
목사가 되기 전에
나의 모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포중앙교회인데, 그때 담임목사님이 작고하신 김해동목사님이셨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고등부 때부터 김해동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속으로 ‘오늘 교회 안 나왔으면 저런 좋은 말씀을 못들을 뻔 했네’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김해동목사님은 명설교가였다. 고등부 예배를 따로 드렸지만 이른바 “대예배”는 친구들도 많이 참석했었다.
신학교는 교회 선배의 권유로 가게 되었다. 고등부학생회 2년 선배가 먼저 교단신학교인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갔는데, 철학이니 신학이니 독일이니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물론 신학교에 들어갈 때도 나중에 목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유신반대 데모가 일상이 되었고 교수님들 따라서 삭발하고 단식하고 동맹휴학하고, 군대 갔다 오고, 5월 광주항쟁을 겪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광주한빛교회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광주한빛교회 담임목사는 윤기석목사님이었는데, 기도와 민주화운동에 진심이신 분이었다. 내가 198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광주한빛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는데, 5.18 직후여서 당시 광주의 분위기는 삼엄하고 살벌했다. 봄학기만 시작되면 거리에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고 광주시민들은 눈물콧물 다 흘리면서 다녔다. 청바지 청자켓에 흰 투구를 쓴 이른바 백골단은 시위대 위로 날아다니며 곤봉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렇게 살벌하던 전두환 군부정권에서도 광주한빛교회만은 많은 시국기도회와 연합예배를 드렸다. 광주지역 연합모임이 있으면 으레 한빛교회에서 모이다시피 했는데, 그것은 윤기석목사님의 강인한 성품과 정의로운 신앙 때문이었지만 목사님이 전두환과 육사 동기였던 배경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본디 윤목사님이 전두환과 육군사관학교 입학동기였는데, 결핵으로 중퇴하고 고향 강진에서 기도하시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병을 치유받고 목사가 되신 분이다. 하여간 우리는 윤목사님을 든든한 배경으로 알고 아무 걱정도 없이 담대하게 민주화운동을 했던 추억이 있다.
광주고백교회 담임목회
광주한빛교회 부교역자 사역 3년이 딱 되어서 이듬해 정기노회에서는 목사임직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는데, 그때 나는 막 개척된 광주고백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광주 모 교회에 정의로운 목사님이 계셨는데, 5.18 광주항쟁 때 시민 측 수습위원을 맡았다가 몇 달 동안 수배되고, 정보부의 조사를 받고 나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 당회원 몇이 외압을 받았는지 목사님을 사임시키자 거기 반발하며 수십 명의 교인들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나섰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더 이상 광주에서 목회할 생각이 없어서 이미 전주로 이사를 가셨고, 새로운 교회를 꿈꾸며 나온 교우들은 두 달가량 목회자 없이 예배를 드리다가 그 목사님의 사위인 나를 부른 것이다.
담임목회에 대해서 준비가 전혀 없었던 내가 이미 청장년 5~60명이 모이는 개척교회에 부르심을 받자 바짝 긴장해서 예배와 설교를 준비했다.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는 초보가 성경메시지를 편향되게 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계교회력에 의한 [주일성서일과]를 따라 설교했다. 예배는 기장총회에서 발간한 [예식서]와 WCC의 [리마예식서]를 참고하여 당시에는 좀 생소했던 [예배부름] [말씀] [성찬] [파송]이라는 구조를 주일예배에 정착시켰다.
성경은 그 즈음 발간된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했다. 공동번역은 새 신자나 젊은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고, 설교나 성경공부를 할 때에도 옛날 문장을 해설하는데 시간 들일 필요가 없었다. 2003년쯤인가 신구약 모두 [표준새번역]이 나오자 예배성경을 새번역으로 바꿨다.
주보기록을 보니 1987년부터 교회력에 의한 세 본문 설교를 했는데, 2023년 퇴임할 때까지 36년 6개월을 변함없이 주구장창 세 본문 설교를 했다. 3년 사이클 주일성서일과를 12번 넘게 반복해서 설교한 것이다.
교회력을 따라 설교하니 좋은 점이 많았다. ① 주일설교 본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할 것 없이, 무조건 해당 주일의 세 본문을 주님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설교준비를 하니, 나 자신 말씀을 듣는 자세로 설교를 준비했다. ② 구약과 서신과 복음서에서 뽑은 중요한 말씀들을 반복해서 읽고 공부하니, 세계교회 성서학자들이 선정한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다. ③ 다음 주일 성경본문을 교우들도 알고 성가대 곡 선정이나 제단장식 등을 연계할 수 있으니 편리했다.
1990년부터는 성찬을 회복하고자 매 달 첫 주일 예배에 성찬식을 가졌다. 성찬을 회중석으로 배달하지 않고 교우들이 제단으로 나와서 성찬을 받았는데, 그렇게 하니까 예배의 중심에서 예배자들이 제단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는 의미가 있는 예식이 되었다. 아쉬웠던 것은 미리 성찬의 신앙을 교우들에게 잘 설명하고 교육하여 깊이 새기기도 전에 실행부터 한 것이었다.
30대 젊었을 때는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청소년들의 아픔에 많이 공감했던 때였다. 청소년들의 어렵고 힘든 상황을 듣거나 보면 눈물이 날 만큼 청소년들에게 진심이었던 것 같다. 청소년 수련회를 해마다 재밌게 열심히 했다.
교회성장에는 별로 능력이 없었다. 분립 개척 시 출석교인이 5~60명이었는데 40년이 지나 퇴직할 때에도 출석교인은 130명 정도였으니 내내 ‘작은 교회’였다. 나중에는 ‘교회개척 초기에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미 때가 늦어있었다. 개척초기에는 주일예배 출석률이 재적인원 대비 90%였는데, 한 10년 지나니까 60%정도였다.
8,90년대 우리의 지대한 관심과 기도는 [5.18 진상규명]과 [민주화]였다. 광주고백교회에서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 생활야학을 열었는데, 커리큘럼은 검정고시준비가 아니라 대부분 의식화교육이었다. 당시 광주에서 노동자 야학은 우리교회의 [한얼야학]과 광주 YWCA의 [Y야학] 뿐이었다. 감시와 탄압이 따라다니던 때였는데, 고백교회 청년들과 광주지역 강학들의 용감하고 의로운 헌신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광주고백교회는 끊임없이 북녘 동포들을 위해,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했다. 예배드릴 때면 기도문으로 전교인이 함께 기도했으며, 매달 여신도회에서 주관하여 [평화통일헌금]을 했고, 북녘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장총회나 KNCC를 통해서 보냈다. 광주교도소에 비전향장기수 몇 사람이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을 위하여 기도하며 소통하며 우리교회에서 돌보아드렸다. 그분은 수십 년 옥살이를 마치고 만기출소 후에 정부에서 비전향장기수 귀향을 추진할 때 북으로 가셨다.
목회 수업
광주고백교회 목회를 시작하고서는 한신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했다. 정태기목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을 배웠다. 그런데 나는 교회를 떠나서 서울로 공부하러 다니던 이 시기에 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었다. 월요일 하루였지만 서울에서 목회상담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광주에 있는 교우들이 생각나고 찐하게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원시절에 비로소 목회자의 마음을 갖게 된 것 같다.
40대에는 영성수련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리처드 포스터의 [영적 훈련과 성장], 김경재교수님의 [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에서 영성에 관한 기본을 배웠고, 안소니 드 멜로의 책들과 러시아의 어느 수도자가 쓴 [이름 없는 순례자]를 감명 깊게 읽었다.
전원살림마을을 거쳐서 진달래교회에서 이병창목사님에게 [에니어그램]을 배웠는데, 에니어그램은 목회자들이 꼭 배우면 좋을 것 같다. 천차만별 다양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비로소 할 수 있었고, 성격과 성질이 다른 교우들을 위한 영적지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정태기목사님이 이끄는 치유목회연구원 공부는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원인과 치유를 보고 배우는 중요한 목회수업이었다.
시흥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향심기도]와 [렉시오 디비나]를 배우고 순천에 있는 예수회수도원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배웠다. 발산하기보다는 수렴하는 쪽인 나의 성향에는 뜨거운 통성기도보다 오래된 침묵과 순종의 영성이 더 좋았다.
[선과 성서]의 저자 가도와키신부가 이끄는 수련회에서 [숨기도]를 배웠고 아리랑산촌에서는 이종원목사님에게 [선치료]를 배웠다. 숨기도는 숨을 쉴 때마다 주님을 부르며, 낮추고 섬기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몸에 축적하는 듯 한 수련이었다. 몸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교회목회를 하기에 부족한 점들이 많았지만, 특히 새벽잠이 많아서 새벽기도회가 힘들었다. 다행히 우리 교우들도 힘든지 잘 나오지 않아서 새벽기도회는 점차 없어졌다. 또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해서 새로 오는 교우들에게 실례가 많았다. 길눈이 밝아서 운전은 잘 하는데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니 주일예배에 누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도 모르는, 목회자로서 큰 약점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나중에는 ‘그래 내가 못 하는 것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장점을 잘 활용해서 목회하자’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예술적 능력이랄 것은 없었지만 가까이하고 즐기기는 했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예술과 교육에 관한 관심은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딱 알맞은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면 나는 목회하는 동안 늘 예배와 설교와 교육을 중시하고 전념했다.
우리교회 예배는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였는데 사람들이 좋아했다. 중요한 것은 사람보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셔야 되는 것이지만, 아마 하느님께서도 좋아하셨을 것이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교우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빛나는 것을 늘 보았다.
예배실에는 교단의 표어나 성경귀절이나 어떤 말도 걸어놓지 않았으며 오직 중앙의 제단과 십자가만 예배자가 바라볼 중심이 되게 했다. 예배를 집례할 때마다 마음을 오직 주님께 모으려고 애를 쓰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설교를 할 때 시선은 교우들의 머리 약간 위쪽을 주시했다.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생각이 흩어질까 싶어서 그랬다. 그리고 사람을 볼 때는 되도록 눈을 반짝이면서 설교를 잘 듣거나 찬송을 잘 부르는 교우들을 보았다. 그것이 예배 때 딴전피우고 있는 사람 보는 것보다 더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다.
또 노래를 좋아하고 기타를 조금 칠 줄 알았기 때문에 사회복지시설 [귀일원]에 목요일마다 교우들 대여섯 분과 함께 가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병원 입원실 복도에서 잔잔한 노래와 연주를 하고 싶었다. 동요와 가곡과 아름다운 가요들을 조용하게 화음을 만들어 부르면 입원 환자들이 듣고 평화와 기쁨을 얻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입원실이 있는 규모의 병원에서는 방문연주를 허락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교회와 한 동네에 있는 귀일원을 찾았다. 귀일원은 ‘맨발의 성자’ 이현필선생이 세운 동광원의 자매기관 같은 곳이다. 우리는 음악의 치유력을 믿으며 꾸준히 코로나 팬데믹 전까지 10년쯤 노래를 불렀다. 귀일원에 오래 다니니까 자매들이 우리만 가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인기 짱이었다. 귀일원 자매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만을 바란다.
교회당 건축
교회 개척하고 20년쯤 되었을 때 교회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 한 분이 보자기에 소중하게 모아온 200만원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도 이제 교회건축을 하면 좋겠다”고 하신 것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물론 전부터도 교회당 지을 땅을 관심 있게 찾고 있었으나 이 권사님의 200만원은 추진력 없는 목사의 등을 떠밀어버리는 일이 되었다.
내가 아는 소리를 많이 했던 탓인지 교우들은 담임목사에게 건축위원장을 하라고 했다. 안 그래도 교회당 건축이 멋지게 된 곳은 지나치지 않고 찾아다니며 연구하고 있던 중 동료목회자의 소개로 참 신실한 건축사를 만나게 되었다. 전에 어디서 듣기로 건축은 건축주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해서 나는 교회당 설계의 개념을 이렇게 잡았다. [밖에서 보면 들어가보고 싶은] [안에 들어가 앉으면 기도하고 싶은]
재정형편상 2년에 걸쳐서 대지 500평에 바닥면적 150평 2층으로 아름다운 교회당을 지었다. 흰 벽에 주황색 스패니쉬 기와를 얹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교회당 예쁘다고 칭찬했고, 우리교회 교인이 아닌데도 교회당이 예뻐서 여기서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신랑신부들이 나타났고, 우리는 기쁘게 교회당을 개방했다. 즐거운 일이었다. 값비싼 결혼문화를 개선하려는 뜻을 지닌 한 웨딩플래너는 우리교회 잔디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려 신랑신부가 예식장 비용을 절약하게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당을 짓고 나서 누가 이 교회당과 닮은 건물을 짓고 싶다면 보여주려고 나는 설계도도 보관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이었을 뿐이지 설계도 보자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교회당이 평일에 닫혀있는 캄캄한 건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1층에 까페를 만들고 [아름다운가게]를 유치했다. 까페는 1970년대 기장총회에서 만들었던 무교동의 [아가페]를 회상하며 동네사람들이 드나들고 만나는 장소로 활용되기를 바랐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찻값은 무료지만 성금함을 놓아서 천 원씩 모아진 돈은 인도의 달릿계급 미감아 공동체에 교육비로 보냈다. 우리교회가 까페를 만든 이후 광주지역에서는 교회당을 신축할 때 거의 다 까페를 만드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가게]는 지역민들이 헌책이나 헌옷 같은 것을 기증해주면 약간의 금액을 받고 팔아서 수익금을 지역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사회적 기업인데, 교회에서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고 공간만 무상으로 제공하는 식이었다. 동네도 좋고 건물도 좋다는 호평을 많이 들으면서 운영되었다. 교회 다니지 않는 동네사람들도 평일에 [아름다운가게]에 와서 물건을 사고, 까페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단골이 생기고, 이웃끼리 정기적으로 까페에 와서 영어공부 모임을 갖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는 목회를 조용히 했다. 예배순서 하나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티 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또 내가 변방의 목회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생활과 세속생활의 경계에 있는 구도자들을 위하여 기독교신앙을 소개하고 변증하고 교육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는 듯했다. 나의 설교는 좀체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신앙의 신비를 강력하게 선포하기보다는 서서히 차근차근 설명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우리교회에서 믿음이 뜨거운 마그마 같은 신자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광주고백교회에서의 목회인생을 자평하라면, 잘못한 것은 너무 많아 여기서 다 열거하기도 부끄럽고, 뭐니 뭐니 해도 교회를 떠나는 교우들이 있었던 것은 내가 목회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목사 때문에 상처 입은 교우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한다.
잘한 것이라면 일찍이 공동번역 성경을 사용한 것, 꾸준히 교회력을 따라서만 설교한 것, 교회당을 크지 않고 아름답게 지어서 지역사회에 개방한 것, 평생 한 교회에서 목회하여 안정적인 신앙공동체를 이룬 점 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젊은 목사였을 때 이런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소박하게 어디 작은 마을에서 평생 목회하면서, 어린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결혼하여 부모가 되는 것을 보며, 교우들의 영적 지도자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비슷하게 되었다. 정년퇴직 했을 때, 우리교회 청년들이 자신들의 감회와 축복을 큰 종이 한 장에 모아서 선물해주었는데 그 글들을 보면 행복해져서 벽에 붙여두고 옴서 감서 읽는다. “목사님, 어려서부터 목사님을 뵙고 하나님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믿음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인생을 빛으로 인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로서 나의 생애는 행복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은혜였다. 주님은 이 게으르고 부족한 종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작지만 당신의 거룩한 일에 사용해주셨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고백교회 원로목사 김성룡
첫댓글 김성룡목사님께서 기독 월간지인 "기독교사상"에서 부탁해서 쓰신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목사님의 개인적인 목회 수상의 글이지만 우리 교회 역사를 더듬고, 우리 교회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목사님의 깊은 내면을 엿볼수 있는 글이라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교우들과 공유하기 위해 이곳에 올렸습니다. 모쪼록 교회와 교우들을 향한 목사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을 함께 공유하며 소중한 고백교회와 그 정신을 우리가 잘 이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님,감사드립니다.
김성룡목사님의 귀한 글을 대하면서,참으로 마음이 먹먹해지고, 목사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과 더불어 함께 한 시간에 감사 드리며, 우리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목회를 하신 김성룡 목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참으로 우리 교회가 목사님을 잘 만나서 또한 훌륭한 목회자님을 모시고 지낼 수 있었음에 행복했고, 목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함께 성장하고 커 온 저로써도 감회가 남다릅니다.
김성룡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늘 건강하시고,자주 소식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교회 안 나왔으면 저런 좋은 말씀을 못들을 뻔 했네’라는 말씀이, 이번 수요예배때 황범현목사님이 나눠주신 설교말씀과 오버랩되어 다시금 예배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김성룡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은퇴식때 사회를 볼 수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목포로 이사한 목사님 댁에 방문했을때 서재 문에 청년들의 편지가 붙어 있어도 저도 좀 훔쳐 보았는데, 은혜로 고백하셔서 청년들이 무척 좋아할 거 같습니다.
돌아보면 발걸음마다 은총이었다는 고백처럼 다가오는 목회수기에 감사드리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고백교회당의 설계도를 들여다보러 조만간 다시 목사님께 방문해야겠습니다.
귀한글 공유해주신 황범현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