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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가 발레를 보러 가잔다. 큰일이다. 저번에도 무슨 발레인가를 보러 갔다가(공연 제목은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졸음과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 적이 있다. 게다가 평일 저녁 8시 공연이라니. 상사 눈치 보며 칼퇴근을 해서 헐레벌떡 약속 장소까지 간 다음 밥을 코로 먹고 공연장에 들어갈 모습이 상상된다. 아아, 제대로 씹어 주지도 못한 음식물들은 소화기관에서 또 얼마나 잠을 부를 것인가.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님. 평범한 직장인에게 평일 문화생활은 사치예요.' 분명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입 밖에 나오니 이런 말이 되고 만다. “그래, 그러자. 언제라고?” 나는 여자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의외로 티켓 값은 비싸지 않았다. 그래, 문화생활도 필요한 거지. 나름 정신문화의 정수인 글을 다룬다는 편집자인데 문화생활을 안 해서야 쓰나. 회사 이념에 맞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장했다. 예상대로 가는 시간은 빡빡했지만, 그래도 제 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코로 김밥도 먹었다.
자리는 3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저렴한 좌석이었는데, 워낙 건물 설계가 잘되어 있어 공연을 보기엔 별 지장이 없을 뻔했다. 어떤 외국인이 내 앞 좌석에 앉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내하는 분께 부탁드려 여차저차 자리를 옮겼고, 후에는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 어려운 발레를 공연하는 곳에서도 불편하면 자리를 바꿔 준다. 주눅 들지 말고 당당히 이야기해 볼 일이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발레는 현장에서 직접 연주해 주는 음악을 듣는 맛이 쏠쏠하다. 내가 좋아하는 하프도 있었고, 또 좋아하는 캐스터네츠, 트라이앵글도 있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마시라, 듣다 보면 이 아이들 없이 어떻게 음악을 완성시키나, 생각이 들 정도로 중요한 악기들이다. 악기들을 둘러보고 무대로 시선을 돌렸는데, 특이한 것이 보였다. '제1장: 돈키호테의 서재'라고 쓰여 있는 스크린이었다. 오호, 저번엔 저런 게 없었는데?
2장이 되었다. 스크린에 설명이 나왔다. '가난한 이발사 바질은 선술집 주인 로렌조의 새침하고 사랑스러운 딸 키트리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로렌조는 가난한 바질이 못마땅하여 키트리를 멍청한 부자 귀족 가마슈와 결혼시키려 한다.' 이 친절한 해설이라니! 나는 발레 공연에 아주 푹 빠졌다. 그러니까, 저번 공연에서 나는 그들의 춤이 지루했던 게 아니라 그들이 대체 왜 춤을 추고 있는지 몰라서 지루했던 셈이다. 알고 보니 어찌나 재밌던지!
알고 보니 보였다. 그들의 몸과 움직임, 열기와 생명력이 참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결국 몸에 감동한다. 몸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다. 무용수들의 기기묘묘한 움직임은 수없이 자신을 절제한 훈련의 정직한 결과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마침내 날았다. 탄성이 나왔다. 그들의 표정도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키트리와 바질은 사랑을 이루었을까? 우리의 돈키호테 아저씨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혹 나중에 공연을 보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니 결말은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발레, 알고 보니 그리 어려운 것도 지루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소통이 문제다. 그들의 몸짓이 이해되는 순간, 어렵고 따분한 공연은 즐겁고 흥미진진한 것으로 바뀐다. 오늘은 공연장을 한번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연극이나 뮤지컬은 물론, 어려워 보이는 발레나 클래식 공연도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 나처럼 예기치 못한 감동과 즐거움을 한 아름 선사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글 · 단행본편집실 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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