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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물질 속으로 십자가의 추락(The Fall of the Cross into Matter).
영(nought) 혹은 0이 고대 어느 기간에 최초로 나타나는지 지금까지 그것이 아직 확증되지 않았다고 반대하면서 피타고라스파의 이 상징에 대하여 논쟁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이시스 언베일드 2권, pp. 299, 300 이하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논의를 위하여 고대 세계가 아라비아 숫자 혹은 우리의 계산 방식을 알지 못했다는—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것을 인정하지만, 원과 지름에 대한 개념이 우주발생론에서 최초 상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거기 있다. 복희의 괘 이전에, 양(Yang), 통일성 그리고 음(Yin), 2개조가 있다고 엘리파스 레비가 교묘하게 설명하였다 (상위 매직의 도그마와 의례, 1권, p. 124): — 중국은 중국의 공자와 노자를 가졌다. 공자는 “태극”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가진 원 속에 에워싼다; 노자는 거대한 원 아래에 세 개 동심원을 놓는 반면, 송의 현자들은 “태극”을 윗부분 원에서 그리고 하늘과 지구를 두 개 아랫부분 작은 원 속에서 보여주었다. 양(Yang)과 음(Yin)은 훨씬 후대의 발명이다.
플라톤과 그의 학파는 신성을 결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물 위에 신(God over all:ὁ ἐπὶ πᾶσι θεός)”에게 적용한 많은 별칭이 있다. 플라톤은 입문하였기에, 인격신—인간의 거대한 그림자—을 믿을 수 없다. “군주”와 “우주의 입법자”라는 그의 별칭이 모든 오컬티스트가 잘 이해한 추상적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인 못지 않게 오컬티스트는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의 대법(One Law)을 믿으며, 동시에 그것이 불변이라고 인식한다. 그가 말하길, “모든 유한한 존재들과 이차 원인들, 모든 법칙, 개념과 원리들 너머에, 대지성(Intelligence) 혹은 마인드(MIND) [누스(nous)], 모든 원들의 최초 원리, 모든 다른 개념(이데아)이 토대를 두고 있는 지고의 이데아(Supreme Idea) . . . 만물이 그들의 존재와 본질을 가져오는 궁극의 질료, 우주를 침투해 있는 모든 질서와 하모니 그리고 미와 탁월함 그리고 선함의 최초이자 효율적인 원인이 있다”—그는 탁월성과 탁월성으로 지고의[1] 선, “신(ὁ θεός))” 그리고 만물 위의 신(god over all)으로 부른다. 이 말은 “창조자”나 근대 일원론자의 “아버지”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 추상적 원인에 적용한다는 것을 플라톤 자신이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듯이, “이 데오스(θεός), 만물 위의 신은 진리나 지성이 아니라, 그것의 아버지” 그리고 최초 원인(Primal cause)이기 때문이다. 태고의 현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제자인 플라톤은 자신이 현자로 이 생에서 단 하나의 성취 목적만이 있었으며—진정한 지식(Real Knowledge)—가장 사소한 도발에도 인간을 저주하고 비난한 신을 믿었을까?[2]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에 반대되는 실재로 존재하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을 진정한 철학자이자 진리의 학생들이라고 생각한 그는 아니다; 일시적인 것에 반대되는 항상 존재하는 지식; 그리고 커지고, 약해지고, 번갈아 가며 발전하고 파괴되는 것에 반대되는 영원히 존재하는 그것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을 진정한 철학자이자 진리의 학생으로 생각한 그는 아니다.[3] 스페우시포스와 크세노크라테스도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하나(One), 원래(original)는 유한한 인간이 적용하는 의미에서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티미온(τίμιον) 영예로운 하나(honoured one)는 둘레에 거주하듯이 중심에 거주하지만, 그것은 신성—세계 혼[4]—의 반사에 불고하다—원의 표면의 계이다. 십자가와 원은 보편적 개념이다—인간의 마인드 자체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긴 시리즈의 국제적 상징의 리스트에서 가장 앞에 있으며, 그것들이 심리학적 그리고 심지어 생리학적 신비와 직접 관련 있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자주 위대한 과학적 진리를 표현하였다; 이 상징은 이런 종류 중에 하나이고, 가장 오래된 비의적 우주발생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엘리파스 레비가 말할 것처럼, 신, 보편적 사랑(Love)이 남성 단위(unit)가 여성 2개조 속에 심연 혹은 카오스를 파헤쳐서 거기서 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다. 어느 무엇 못지않게 천박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너무 인간 같은 신의 방식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은 채 그것을 상상하는 어려움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런 인격화된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입문자들은 우주에 있는 하나의 유일무이 원리(One and Secondless Principle)를 지칭하는 데 “신(God)”이라는 별칭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이렇게 전세계 씨크릿 독트린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 충실하게—그들은 절대적 완성에 의해서 그런 불완전하고 종종 매우 깨끗하지 않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여기서 한층 더 거대한 형이상학적 어려움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추론적 무신론과 바보스러운 신인 동형론 사이에 어떤 철학적인 평균(중용)과 어떤 조정이 있어야 한다. 모든 성질에 두루 보이지 않는 원리의 실재, 그리고 지상에서 그것의 최고 현현인 인간만이 그 문제를 푸는 데 도울 수 있으며, 그 문제는 수학자의 문제로 그 x가 지상의 대수학의 이해를 언제나 벗어난다. 힌두인들은 그들의 아바타로 그것을 풀려고 노력하였고,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하나의 신성한 화신으로 풀었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으로 둘 다 틀리다; 비의적으로 둘 다 진리에 매우 가깝다. 서구 종교의 사도들 중에서 바울만이 십자가의 고대 신비를—실제로 드러내지는 않았더라도—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보편적 실재(Universal Presence)를 통합해서 개체화시킴으로써, 이렇게 그것을 하나의 상징—십자가 속에 있는 중심점—으로 통합하는 나머지 사도들의 경우, 그들은 그들이 크리스트 가르침의 진정한 영을 결코 잡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들의 해석으로 그들은 그것을 한 가지 방식 이상으로 품위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그 보편적 상징의 영을 잊어버렸고 이기적으로 그것을 독점하였다—마치 무궁과 무한성이 한 인간 혹은 심지어 한 국가 속에 개체화된 하나의 현현으로 제한되고 조건화될 수 있는 것처럼!
“X”의 네 팔, X자형 십자가 그리고 “헤르메스”의 네 가지가 사방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이 수 천년 전에 유럽에서 그것에 대하여 듣기 전에, 힌두교도, 브라만 그리고 불교도의 신비적인 마인드가 잘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상징은 전세계에 걸쳐서 있었고 발견되었다. 그들은 그 십자가 끝을 구부려서 그것을 스와스티카( )로 만들었으며 이제는 몽골 불교도의 만자가 되었다.[5] 그것은 “중심점”이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한 개인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 원리(신)가 인류 속에 있고, 나머지 모두처럼, 대양 속에 있는 물방울처럼, 인류가 그 속에 있으며, 네 끝은 사방위점을 향하며 그래서 무한성 속에서 사라진다.
입문자, 이사림(Isarim)이 헤브론에서 헤르메스의 죽은 육체 위에서 잘 알려진 에메랄드 태블릿을 발견하였다고 말하며, 그것은 헤르메스 지혜의 본질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 . “불에서 땅을 분리시키고, 조잡한 것에서 섬세한 것을 분리시켜라 . . . 땅에서 하늘로 상승하고 그리고 다시 땅으로 하강하라”라고 그 위에서 발견되었다. 십자가의 수수께끼가 이 단어들 속에서 간직되어 있고, 그것의 이중 신비가 풀린다—오컬티스트에게.
“철학적 십자가, 반대 방향으로 뻗어가는 두 선, 수평선과 수직선, 높이와 너비는 기하학 원리를 적용하는 신이 상호 교차하는 점에서 나누고, 마법뿐만 아니라 과학의 사중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그것이 완전한 사각형 속에 내접될 때, 오컬티스트의 토대가 된다. 그 신비한 영역 속에 모든 과학, 물질 과학뿐만 아니라 영적인 과학의 문을 여는 만능 열쇠가 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원이 십자가 네 점을 둘러싸고, 그 네 점은 연속적으로 탄생, 삶, 죽음 그리고 불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들이 말하길, ’그대 자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배치된 테트라그램 (네 글자)에 불이라: 그대가 처음에는 그것들을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름의 글자들이 거기 있다. 전달할 수 없는 금언이 카발라적으로 그 속에 간직되어 있고, 이것이 대스승들이 마법의 신비로 부르는 것이다.’” (“아이시스 언베일드.”)
다시: 타오 와 이집트의 천문 십자가 가 팔렝케 유적의 몇몇 구멍들에서 눈에 띈다. 앉아 있는 인물 바로 밑에 그림문자로서 조각된, 팔렝케 궁전 서쪽면에 있는 부조들 중에 하나에, 타오(Tau)가 있다. 서 있는 인물이 첫 번째 인물 앞으로 굽히며 입문의 베일을 든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덮는 행동을 한다; 반면에 중지와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오른손을 뻗는다. 위치가 축복을 주는 정확한 기독교 주교의 위치이거나,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동안에 자주 나타내어진 위치이다. . . “이집트 대사제는 그의 역할을 하는 동안에 항상 그가 입어야 하는 사각형의 머리 장식을 썼다. . . 완전한 타오는 수직선 (하강하는 남성 광선)과 수평선 (물질, 여성 원리)으로 구성되고 세계의 원은 아이시스의 속성이었으며, 죽음에서만 이집트인의 십자가가 미이라 가슴 위에 놓여 졌다.” 이 사각형 모자를 지금까지 아르메니아 사제들이 쓰고 있다. 불가타 성서에서 번역되었듯이, 주(Lord)를 두려워한 (에스겔 ix. 4) 유다 사람들 이마에 타오 인장을 찍는 에스겔을 발견할 때, 십자가가 우리 시대에 소개된 순전히 기독교 상징이라는 주장이 진실로 이상하다. 고대 유대인에서는 이 표시가 이렇게 생겼지만, 원래 이집트 그림문자에서는 완전한 기독교 십자가로서 (타트:Tat, 안정성의 엠블럼)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알파와 오메가” (영과 물질), 첫째와 마지막이 선택받은 사람들 이마에 그의 아버지 이름을 찍고 (p. 323, 2권), 모세는 출애굽기 xii. 22에서 “주 신(Lord God)”이 실수해서 심판받을 이집트인들 대신에 선택된 그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도록, 그의 사람들에게 문설주와 상인방에 피로 표시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 표시는 타오이다! 동일한 이집트인이 십자가를 다루었고, 그 십자가 부적 반을 가지고, 필레에 있는 조각 잔해에서 보이듯이, 호루스가 사자를 일으켰다.
스와스티카와 타오에 대하여 본문에서 충분히 말했다. 진실로 십자가가 헤아릴 수 없는 태고 시대 심연 속으로 추적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이스터 섬 동상에서 발견할 때, 그것의 신비가 분명해지기 보다 더 깊어진다—타오와 스와스티카로 암석 위에 조각된 고대 이집트, 중앙 아시아 그리고 기독교 이전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헤브르 이집트 신비”의 저자가 그것이 다시 고대로 던지는 끝없는 신비 앞에 당혹해하며, 그는 그것을 어느 특정 국가나 인간으로 추적할 수 없다. 그가 번역으로 애매해진, 유대인에 의해서 전해진, 타르굼 (구약성서의 아랍어 부분역)을 보여준다. 아랍어로 된 여호수아 (viii. 29)와 요나단의 타르굼에서, 말한다: “아이(Ai)의 왕을 그가 나무 위에 못박았다.” 70인역의 표현은 이중의 말씀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에 대한 워즈워드) . . . 이런 종류의 가장 이상한 표현이 민수기에 xxv. 4에, 온켈로스(?)가 이렇게 읽는다: “태양을 등지고 주(여호와) 앞에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여기서 단어 , 못박다(to nail to)가 불가타에서 십자가에 못박다(to crucify)로 적절하게 (프에르스트) 표현되었다. 이 문장 구성이 매우 신비하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의 정신이 언제나 오해되어 왔다. “태양 (등지고가 아니라)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입문에서 사용된 구절이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오며, 일차적으로 인도에서 온다. 입문의 신비의식에서 그 열쇠를 찾는 것으로만 그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다. 입문을 받은 초인이 모든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후에 부착되고, 못박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잠 속에 빠져서 단순히 네 개의 연장 부분이 없는 ( 이 아니라, 이렇게 ) 스바스티카의 타오( ) 형태의 카우치 위에 묶인다. (소아시아, 시리아 그리고 심지어 상 이집트에서 오늘날까지 입문자들 사이에서 “실로암의 잠”으로 불린다.) 그는 3일 낮과 3일 밤 동안 이 상태로 있게 되며, 그 기간 동안에 그의 영적인 자아가 “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나라에 따라서) 하데스, 아멘티 혹은 파탈라로 내려가서, 인간의 혼 혹은 엘리멘탈 영이건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자비의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의 육체는 사원 지하실이나 지하 동굴에 항상 그대로 있게 된다. 이집트에서 그것은 꾸푸의 피라미드 왕의 방에 있는 석관 속에 놓이며, 다가오는 셋째 날 밤에 지하 복도 입구로 옮겨진다. 거기서 특정 시간에 떠오르는 태양의 광선이 깨어나서 오시리스와 지혜의 신 토트에 의해서 입문된 황홀 상태의 후보자 얼굴에 가득히 비추었다.
그 진술을 의심하는 독자가 부인하기 전에 헤브르 원전을 참조해보라. 그가 가장 암시적인 이집트 부조로 관심을 돌리게 하라. 특히 필레 사원에 있는 것이 입문의 장면을 나타낸다. 두 명의 신-대사제, 한 명은 매(태양)의 머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은 따오기 (머큐리, 토트, 지혜와 비밀 가르침의 신, 오시리스-태양의 보좌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 방금 입문한 후보자의 육체를 내려다보듯이 서있다. 그들은 두 가지 흐름의 물(생명과 새로운 탄생의 물)을 그의 머리 위로 붓는 행위를 하고, 이 흐름이 십자가 형상으로 서로 교차하고 작은 고리 모양의 십자가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아침 태양 (오시리스)의 광선이 그의 머리 정수리로 비출 때, 후보자를 (이제는 입문자) 일깨우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황홀 상태에 있는 그의 육체가 광선을 받도록 나무의 타오 위에 놓인다) 그러면 대사제-입문주재자와 성찬의 말이 표면적으로 태양-오시리스에게 외쳐지며, 사실상 새롭게 태어난 인간을 깨우치는 (밝히는) 내면의 영 태양(Spirit Sun)에게 말한 것이다. 독자가 아주 먼 고대 시대부터 발생 역량과 영적으로 재생하는 역량에서 태양과 십자가의 연결관계에 대하여 명상하게 하라. 독자가 무덤을 람세스 II 통치기간에, 바이트-옥스리의 무덤을 조사하게 하라. 거기서 모든 형상과 위치에 있는 십자가들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그 군주의 왕좌 위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칸-아렌레의 숭배를 나타내는,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존된, 토트모스 III세의 조상들의 홀에서 나온 파편들 위에서도 그렇다.
이 비범한 조각과 그림에서 태양의 원반이 갈보리의 십자가들이 완전한 복사판인 그 십자가 위에 놓인 고리 모양의 십자가 위로 비추는 것을 본다. 고대 사본에서 이것들을 “(영적인) 산고, 자신들을 낳는 행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딱딱한 카우치”로서 언급한다. 최고의 입문 끝에 완전한 트랜스 상태로 들어간 후보자가 놓이고 보호되는 많은 그런 십자가 형태의 “카우치”가 이집트 사원 파괴후에 지하 홀에서 발견된다. 키릴의 성스러운 교부들과 테로필루스 유형들은 어떤 새로운 개종자들이 그것들을 가져와서 거기에 숨겼다고 믿으면서 그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오리겐 혼자 그리고 그를 따라서,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우스와 다른 이전 입문자들은 잘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용히 있기로 하였다.
다시, 독자가 동양학자들이 부르는 힌두의 “우화”를 읽고 비스바카르마, 창조력, 위대한 세계의 건축가의 비유를 기억하게 하라. 베다에서 그는 “자신을 자신에게 희생한” (유한자의 영적인 자아가 그 자신의 본질로, 그래서 그와 하나이다) “모든 것을 보는 신(all-seeing god)”으로 부른다. 그가 데바 바르디카(Deva Vardhika) “신들의 건설자(builder of the gods)”로 불리고 대중적 비유에서 수리야 (태양), 그의 양자를 선반에 묶어 놓는 것이 바로 그라는 것을 기억하라; 지상에서 그가 대사제 입문주재자이듯이, 비의 전통에서 스와스티카에 묶어 놓고, 그의 찬란함 일부분을 잘라 낸다. 비스바카르마는 요가-싯다의 아들, 즉, 요가의 성스러운 힘이고 마법의 아그네야스트라(Agneyastra), “불의 무기”의 제작자이다. 다른 곳에서 그 이야기가 더 충분하게 주어진다. 자주 인용된 카발라 문헌의 저자가 묻는다:
“십자가형의 이론적 사용이 이 상징을 의인화하는 것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으로 상징된 파라다이스 정원의 구조)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상징은 창조적 법칙 혹은 디자인을 개략으로 보여주는 측정의 근원을 가졌다. 인류와 관련하여 실질적으로 실제 십자가형이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이 똑같은 체계의 어떤 신비스러운 작용의 초상 (인형)으로 간직된 것이 바로 그 사용의 사실에서 보인다. 이 숫자 값들이 신비스럽게 작용하는 것에 대하여 저 깊은 곳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에 의해서, 113 : 355이 20612 : 6561와의 연결의 상징). 그것들이 대우주 속에서 작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감으로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와 관련되는 조건을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며, 예언자들은 연결하는 연결고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 . . 어떤 체계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숫자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법칙을 표현하는 힘이 언어의 우연이 아니라, 그것의 바로 본질이며, 일차적 유기적 구성이라고 생각될 때 회고가 점점 더 관련된다; 그러므로 언어도, 수학 체계가, 나중에 쓸모 없게 된 이전 언어에 근거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에 부속된 언어나 수학적 체계도 인간의 발명일 수가 없다. . .” (p. 205)
저자는 더 심오한 설명으로 이 점들을 증명하고, 아마도 man (인간)은 원초의 단어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한 가지 사문화된 이야기 이상의 비밀의 의미를 드러낸다 — “man 소리로 그 개념을 전하는, 그들이 누구이건, 유대인이 소유한 최초 단어. 이 단어의 본질은 처음부터 113 (그 단어의 숫자 값)으로, 펼쳐진 우주 체계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이미 말했듯이, 비쉬누의 한 형태, 힌두인의 비토바(Wittoba)로 나타내어진다. 비토바의 형상은, 심지어 발 위의 못자국까지,[6] 십자가를 제외하고 모든 세부 사항에서 십자가형된 예수의 형상이다; 그리고 인간(MAN)을 의미한다는 것이 입문자가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위에서 십자가형 후에 다시 태어나는 사실로 증명된다. 이 “나무”가 이제는 로마인들이 사용함으로써 대중적으로 고문의 도구로 되었고, 초기 기독교인 책사들의 무지로 죽음의 나무로 되었다!
이렇게 그 체계—그 체계의 원래의 정교함과 채택이 신비의식의 정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의 신비한 발명가들이 십자가형의 이 신비 속에 암시한 일곱 가지 비의적 의미들 중에 하나가 인간 진화의 역사를 간직하는 기하학 상징 속에서 발견된다. 유대인들은 예언자 모세가 이집트의 비의 지혜에 아주 박식하였고 그들의 숫자 체계를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나중에 그들의 대부분의 카발라 신비주의를 차용한 이방인들로부터 채택하여, “이교도”의 우주 상징 및 인류학 상징들을 가장 독창적으로 그들의 독특한 비밀 기록들로 각색하였다. 만약 기독교 성직 제도가 오늘날 그것의 열쇠를 잃어버렸더라도, 기독교 신비의식의 초기 편찬자들은 비의 철학과 유대 오컬트 도량형에 능통하였고, 그것을 능숙하게 사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단어 아이쉬(aish) (인간(MAN)을 나타내는 유대의 단어 형태들 중에 하나)를 채택하여 그것을 예수의 “아버지”로 추정된 여호와의 이름과 신비하게 연결된 “태음년” 샤나(Shanah)의 단어와 함께 사용하였으며, 천문학 값과 공식에 있는 신비한 개념을 소중히 간직하였다.
공간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인간”의 원래 개념은 확실히 고대 힌두인에게 속한다. 그리고 뮤어가 그것을 비토바를 나타내는 조각으로 그의 “힌두 판테온”에서 보여준다. 플라톤은 그것을 공간 속에 있는 십자로 교차된 십자가, , “십자가 형태로 우주에 자신을 새겨 넣은 두 번째 신”을 채택하였다; 크리슈나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보였다. (룬디 박사의 기념비적 기독교, 그림 72 참조.) 다시 그것이 구약성서에 있는 태양, 주 앞에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기묘한 명령에서 반복된다—그것은 결코 예언이 아니라, 직접적인 남근 숭배 의미를 가진다. 카발라 의미에 대한 가장 암시적인 서적 “유대-이집트 신비”의 II에서 다시 읽는다:
“상징에서, 십자가의 못은 그 머리의 형상으로 단단한 피라미드이고, 못으로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사각형의 오벨리스트 축 혹은 남근의 상징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사람의 사지에서 세 개 못의 위치를 보면, 그것은 형상에서 삼각형을 표시하거나 형성한다. 하나의 못이 삼각형 각 구석에 있다. 사지에 있는 상처 혹은 성흔은 필연적으로 사각형을 표기하는 넷이다. . . 세 개 상처와 함께 세 개 못은 숫자 6에 있고, 이것은 인간이 그 위에 놓이는 펼쳐진 (세 개 수평면과 네 개 수직면을 세면, 7 혹은 인간 형태 혹은 십자가를 만든다) 육면체의 6면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것이 육면체 가장자리로 전달된 원형의 (순환하는) 척도를 가리킨다. 발이 분리될 때 발에 있는 한 개 상처가 두 개 상처로 되어, 모두 합쳐서 셋을 만들며, 분리될 때 넷을 만들어서 전체로 7일 만든다—또 다른 가장 성스러운 (그리고 유대인에게) 여성 기본 숫자.”
이렇게 “십자가형 못”의 성적 의미 혹은 남근 숭배 의미가 기하학과 숫자 해독으로 증명되는 반면에, 그것의 신비한 의미는, 위에서 제시되었듯이, 프로메데우스와 연결된 그리고 관련된 그 위에 있는 짧은 말로 나타낸다. 그는 또다른 희생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 속에 있는 영적 요소의 대의에 대한 그의 헌신에 대한 희생으로, 인간의 격정이라는 바위 위에 있는, 사랑의 십자가(Cross of Love)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
이제 십자가의 개념 근저에 놓여있는 이중의 그림문자, 태초의 체계가 “인간의 발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관념작용과 신성한 자아-인간의 영적인 대표가 그 토대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이 채택된 아름다운 개념 속에서 확장하였고 신비의식에서 재생된 인간, 육체 인간과 그의 격정을 고문의 프로크르스테스의 침대 위에 못 박음으로써, 불멸자로서 다시 태어나는 유한자의 개념을 나타냈다. 뒤에 남겨 놓은 육체, 동물 인간을, 빈 번데기처럼, 입문의 십자가에 묶인 채로 남겨놓고, 자아 혼은 나비처럼 자유롭게 되었다. 여전히 나중에, 점진적으로 영성의 상실 때문에, 십자가가 우주발생론과 인간발생론에서 남근 숭배 상징보다 높게 되지 못하였다.
비의가들에게, 가장 오랜 시간부터 보편 혼(Universal Soul) 혹은 애니마 문디, 비물질의 이상(Immaterial Ideal)의 물질적 반영이 모든 존재들의 대생명의 근원이자 세 개 왕국의 생명 원리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헤르메스 철학자들과 고대인들에게 칠중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칠중 십자가로 나타냈고, 그 십자가의 가지가 각각 빛, 열, 전기, 지상의 자성, 아스트랄 방사, 운동 그리고 대지성 혹은 자-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른 곳에서 말했다. 십자가 혹은 그 표시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채택되기 오래 전에, 십자가 표시가 초인들과 신참자들 사이에서 인정의 표시로 사용되었고, 신참자들이 크레스트(Chrest)로 불렸다. (고난과 비애의 인간, 크레스토스(Chrestos)에서) 엘리파스 레비가 말한다: “기독교인이 채택한 십자가 표시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발라적이고, 원소들의 대립과 사중적 균형을 나타낸다. 원래는 그것을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혹은 최소한 그 의미를 표현하는 두 가지 매우 다른 공식이 있다고 주기도문(Paternoster)의 오컬트 구절에서 본다—하나는 사제-입문자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참자들과 대중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예를 들면, 입문자는 그의 손을 이마에 가져가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그리고 그가 “속합니다”라고 추가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면서 — “왕국”; 그리고 나서 왼쪽 어깨로 — “정의”: 오른쪽 어깨로 — 그리고 “자비”. 그리고 나서 그가 두 손을 합쳐서 추가한다: “발생하는 주기 내내”: “왕국, 정의 그리고 자비가 영원히 당신에 있습니다(Tibi sunt Malchut et Geburah et Chassed per AEonas)”’ — 절대적으로 그리고 장엄하게 카발라적인 십자가 표시로, 그노시스의 신성모독이 호전적이고 격식 차린 교회가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상위 매직의 도그마와 의례, II권, p. 88.)
“호전적이고 격식 차린 교회”가 더 했다: 교회에 결코 속하지 않았던 것을 마음대로 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속세인”이 가진 것만, 즉 남성과 여성 세피로트의 카발라 의미만을 취하였다. 그녀는 내적인 그리고 상위 의미를 결코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파스 레비가 로마에 영합하는 것이다. 라틴 교회가 채택한 십자가의 표시는 처음부터 남근 숭배이고, 그리스인에게 신참자, 크레스트(Chrest)의 십자가였다.
[1] 코커,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 xi., p. 377.
[2] 몽로지에 백작이 그의 책 “인간 생명의 신비”(p.117)에서 말한 절망의 외침은 우주에 스며들어 있다고 플라톤이 생각한 “탁월성과 선함”의 원인이 그의 신이나 우리의 세계도 아니라는 보증이다. “한편으로 그런 광대함을 보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비애를 보며, 이 거대한 전체를 연구하기 시작한 영은 한층 더 광대하고 더 엄격한 신성이 분쇄하고, 산산조각 내서, 전체 우주에 두루 단편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얼마나 위대한 신성을 누가 아는지 그려본다.” 그렇게 “선하다”고 추정되는 이 세계의 신보다 “한층 더 위대하고 그리고 한층 더 엄격한 신성”이 카르마이다. 그리고 이 진정한 신성이 더 작은 신, 즉 우리 내면의 신 (당분간 인격신)은 더 작은 원인들을 발생시키는 우리의 행동으로 깨어난 대원인(Cause), 보상의 법칙(Law of Retribution)으로 불리는, 더 거대한 신성의 강력한 손을 저지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3] “아이시스 언베일드,” 베일 전에, xii (1권).
[4]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141, E.
[5] 스와스티카는 확실히 고대 인종들의 가장 오래된 상징들 중에 하나이다. 케네스 R.H.멕켄지가 말하길, 우리 세기에, 그것(스와스티카)은 “메이슨 형제단에 있는 말레트(나무망치) 형태 속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저자가 그것에 대하여 제시한 많은 “의미들” 중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메이슨들은 그것을 분명히 모른다.
[6] 무어의 한두 판테온 참조. 거기서 비토바의 왼쪽 발에 못 자국을 가지고 있다—그의 우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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