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 이성복 지음 -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 동시집에서 -
"序詩"
..................- 이성복 지음 -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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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이성복 지음 -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동시집에서 -
![](https://t1.daumcdn.net/cfile/cafe/1319BF1B4A44095291)
"정 물"
...............- 이성복 지음 -
꽃들, 어두워가는 창가로 지워지는 비명 같은 꽃들 흙이 게워낸 한바탕 초록 잎새 위로 추억처럼 덤벼오는 한 무리 붉은 고요 잔잔한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물너울을 일으키는 꽃들 하나의 물너울이 다른 물너울로 건너갈 동안 이마를 떨구고 풍화하는 꽃들 오, 해 떨어지도록 떠나지 않는 옅은 어질머리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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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
...................- 이성복 지음 -
그렇게 쉽게 떠날 줄 알았지요 그렇게 떠나기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꽃핀 나무들만 괴로운 줄 알았지요 꽃 안 핀 나무들은 설워하더이다
오늘 아침 버스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무슨 삼줄 훑어놓은 것 같아서
오랜 후 당신의 숱 많은 고수머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마 멀리 가지 마셔요 바람 부는 낯선 거리에서 짧은 편지를 씁니다
- 동시집에서 -
![](https://t1.daumcdn.net/cfile/cafe/1419BF1B4A4409549D)
"샘가에서"
................- 이성복 지음 -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는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 동시집에서 -
![](https://t1.daumcdn.net/cfile/cafe/2019BF1B4A44095397)
"이별 1"
...................................- 이성복 지음 -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겟습니까
- 동시집에서 -
![](https://t1.daumcdn.net/cfile/cafe/1319BF1B4A44095499)
"강가에서 3"
.................- 이성복 지음 -
저렇게 밀려가면서도 당신은 제자리에 계십니다 저렇게 파랑치고 파랑치면서도 당신은 머물러 계십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밀려가고 밀려오면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당신
당신에게 이끌려 기어코 나는 흐르고야 맙니다 오, 한없이 떨리는 당신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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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가까이 5"
..................- 이성복 지음 -
그대 가까이 하루종일 햇빛 놀고 해질녘이면 동네 뒷산을 헤맸습니다
신화나 예감 같은 것, 그런 것에 홀려다니면서 그것이 쫓기는 일인 줄 몰랐습니다
오, 전설의 기미 같은 것, 그런 것에나 쫓겨다니면서 지치면 겨울, 나무들이 줄지어 선 곳에 나도 섰습니다
한쪽 어깨가 바람에 깊이 파이도록 마른 나무들의 호흡을 받았습니다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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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성복 지음 -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데울 수 있으리라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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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埃及"
................- 이성복 지음 -
1
오늘 다 외로워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속에서 한 편 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愛人, 나는 퀭한 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慾情에 떠는 늙은 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主여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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