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주자가 해석하는 프렐류드(일곱번째 16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시122:1)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로다(시121:1)
3. 낮의 해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121:6)
4.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시122:3)
5.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실 지어다(시134:3)
반주자가 해석하는 프렐류드 일곱번째입니다.
프렐류드는 우리말로 전주곡이라고 해요.
전주곡에 대한 음악적 설명과 예배적 의미는 전에 올린 글들에서 참고하시면 좋겠어요.
우리가 현재 예배식에서 쓰고 있는 프렐류드는 고김홍전 목사님께서 작곡하신 곡들이에요. 총 24곡이 있는데 그중에 17번과 18번은 멜로디가 같은 곡으로 피아노 버전과 오르간 버전이고요 10번은 신령한 곡 378쪽의 주님의 사랑과, 19번은 경배송 33번 117쪽과 멜로디가 같아요. 그리고 쪽수로는 한 페이지로 되어있는 곡이 세 곡, 두 페이지로 되어 있는 곡은 열세 곡, 세 페이지로 되어있는 곡은 다섯 곡, 네 페이지로 되어 있는 곡은 세 곡이 있어요. 그중 네 페이지로 되어있어서 곡이 길거나 그 곡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나 성탄에 관련되어 있는 곡은 해당 절기나 성찬식같은 특별한 주일에 연주해요.
1.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오늘 살펴볼 16번도 네 페이지로 되어 있는 긴 곡이에요. 지난 11월 26일 성찬식때 연주되었는데 기억나세요? 여러분이 받으신 악보에 소제목을 달아놨으니까 참고하면서 한번 들어볼게요.
이 곡은 B(시)를 플랫해주는 F(바)장조에요. 그리고 곡을 시작하는 두 마디를 동기라고 해요. 동기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 일이 시작되는 시작점을 말해요. 이 곡의 동기에서 둘째 마디 둘째 음 레는 F장조 음계의 6번째 음이에요. 음악 용어로는 6도라고 해요. 음계의 각 음들은 신기하게도 그 음이 나타내는 의미나 특징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1도는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은 편안함을, 4도는 집 밖으로 나가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은 진취성을 나타내어요. 그럼 6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6도는 “~했어?” “~할까?” 이렇게 물어보는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1,2마디는 “예루살렘 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고, 3,4마디는 “빨리 가고싶어”라고 말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왼손을 보세요. “예루살렘 갈까?”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듣는 사람이 너무 기뻐서 기다렸다는 듯이 “쪼아 같이가” 그러네요.
시편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이 시에서 시인은 친구가 내게 성전에 올라갈 것을 청했을 때 나는 기뻐하였다고 했어요. 반대로 이 곡에서는 내가 성전에 올라가자 말하니까 친구가 “좋아”라고 대답했는데 “좋아”의 최상급, “쪼아”라고 표현해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가자고 청유하는 첫 동기와 같은 말이 다시 반복됩니다. 5마디부터 8마디까지 들어볼게요.
그리고 이번엔 6,7마디의 (괄호)를 제외하고 들어볼게요. 처음 동기와 멜로디가 같죠?그런데 처음 동기에서는 단선율로 그리고 두 번째에선 화음으로 되어있어요. 이것은 처음 동기의 확장을 의미해요. 이건 뭐냐면 이 화자는 친구에게만 “예루살렘에 올라갈까”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가자고 말한 거예요. 그랬더니 그 여러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나도 갈게”(9마디), “나도 갈게”(10마디), “나도 갈게”(11,12마디) / “나도 갈래”(13마디) “나도 갈래”(14마디) “나도 갈~래”(15,16마디) 그랬답니다.
그런데 보니까 쩌~어기 동네 맨 끝에 고아가 사는 집, 그리고 과부가 사는 집에는 아직 그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네요? 그래서 크게~ 멀리~ 높은 소리로 저~뒤에 있는 박윤에게 “박윤아 가자”(17,18마디) 그리고 가까이 있는 진욱이에게 “진욱이도”(19,20마디)
“이렇게해서 모든 동네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행을 하기로 하였답니다.”(21-24마디). 21-24마디는 나레이션이 이렇게 설명해는 것 같아요.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은 어디였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살고 있다고 가정해봤어요. 우리가 교회학교에서 너무나 재미있게 배우고 있는 성경지리에서 배운대로 나사렛은 갈릴리 산지에 있죠?
제가 벤허라는 영화를 여러번 보았는데요 벤허가 친구 메살라의 모함으로 로마의 반역죄인이 되어 종으로 끌려가게 되었어요.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차고 먹지도 못하고 목이 너무 마른데 나사렛 동네를 지나가게 되어요. 동네 우물에 다다랐을 때 병사들은 자신들이 타고가는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자기들도 물을 마셔요.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물을 길러 죄수들에게 물을 먹여주는데, 특별히 벤허에게는 물을 못주게 해요. 반역죄인이라 그러는지 메살라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때 어떤 목수 청년이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물을 떠서 벤허에게 먹이려하자 죄수를 인솔하는 대장이 그 놈에게는 물도 주지 말라고 해요. 그때 그 목수가 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봐요. 그러자 이 대장이 어떤 기에 눌렸는지 기가 팍 죽어서 아무 말도 못해요. 그 청년은 벤허에게 물을 먹여요. 벤허는 다시 그 산길로 끌려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 그 청년을 바라보아요. 3년 후 벤허는 로마의 장군을 위험에서 건져준 대가로 장군의 양아들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요. 거기에서 어떤 청년이 십자가를 메고 가는 것을 보게 되어요. 이에 측은지심을 느낀 벤허는 옆에 있는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그 청년에게 주려고 해요. 그 때 그 청년을 호송하던 군병이 그 물 바가지를 쳐버려서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해요. 그런데 벤허는 이 청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요. 왜냐하면 그 청년은 3년 전 자신이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던 중 나사렛에서 물을 주었던 그 목수 청년이었기 때문이에요.
벤허는 1959년에 제작된 흑백영화예요. 3시간 40분의 긴 러닝타임이라 큰 맘 먹어야 보게 되는데 최근에 리메이크해서 컬러 영화로 시간도 단축되어 나왔어요. 내용은 거의비슷한데 어쩐지 저는 옛날 것이 좋더라구요. 옛날 영화에서는 벤허를 이름은 벤이고 성은 허씨인 것처럼 허씨 가문이라고 번역해서 나와요. 벤허는 허씨 가문이 아니고 유다가문 입니다. 왕족이에요. 유다 벤허예요. 혹시 벤허를 보고싶어지게 될 친구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구요.
제가 벤허를 얘기하는 것은 나사렛이라는 지형때문이에요. 갈릴리 산지에 있는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을 가려면 나사렛에서 이스르엘 평지로 내려가야 해요. 그 다음 다시 사마리아 산지인 세겜, 실로, 벧엘을 지나서 유다 산지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산지 길, 족장들의 길이라고도 하는 산길을 계속 가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지형을 잘 몰랐을 때는 이스라엘의 산지를 우리나라의 산처럼 나무들이 빽백히 들어차있는 푸른 산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벤허에서 갈릴리 산지를 보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의 산들은 나무가 거의 없는 바위산이 많더라구요. 크고 작은 바위들과 그 사이에 나무들은 아름드리 이런 나무가 아니라 관목 종류의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그런 거칠고 메마른 산들이었어요.
어린 아이들과 과부들과 노인들도 함께 하는 여행길. 차도 없고 탈 것도 없이 오직 걸어서 직선 거리로는 40km정도라지만 산길을 걷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길이랍니다. 그래서 이 화자는 앞으로 여행해야 할 산들을 바라보아요.
그 산이 꼭 예루살렘의 시온산일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산을 바라볼 때마다 시온산에 좌정하여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요.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하늘에서 천사들의 합창처럼 들려와요.(25-34마디) 마치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죄와 예루살렘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단9:23)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천사들이 이렇게 합창해요.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25-34마디)
3. 낮의 해가, 밤의 달도 너를 해치아니하리로다
나사렛에서 족장들의 길을 통해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면 5일이 걸린다고 해요. 그러니 왕복 열흘과 무교절과 유월절을 합쳐서 8일, 총 18일동안 먹을 양식과 갈아입을 옷등을 챙겨서 이제 긴 여행을 떠나려고 동네 사람들이 다 마을 어귀에 모였어요. 나사렛은 인구 1~2백 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에요.
34마디와 35마디 사이에는 겹세로줄이 있어요 악보에는 여러가지 줄이 많아요. 세로줄, 가로줄, 이음줄, 붙임줄, 이 중에 세로줄이 두줄인 것을 겹세로줄이라고 하는데 주로 조표나 박자가 바뀔 때 사용되어요.
그런데 여기는 박자도 조표도 바뀌지 않았는데 겹세로줄이 있네요? 여기에 겹세로줄은 장면이 바뀐 것을 의미해요. 이제 출발할 날이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첫마디의 딴딴딴딴 하는 4분음표가 뭔가 진취적인 느낌이 들게 해요. 씩씩하게 내딛는 첫 걸음을 표시하는 듯 해요. 그리고 음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산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아요.
42마디에서는 노래가 잠시 멈추는 듯 해요. 아마도 갈릴리 산지를 내려와 이스르엘 평지까지 잘 도착했나봐요. 그런데 43마디부터는 음이 고조되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다시 사마리아 산지를 올라야 하니까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걷는 산길은 참 위험해요. 사마리아 산지도 나무는 거의 없는 돌과 바위만 있는 거친 곳이에요. 그래서 돌에 걸려 넘어져서 다치는 환자도 발생하고, 전갈같은 독충에 물리기도 하고, 나무가 없으니 햇빛이 내리쬐면 피할 그늘도 없어요. 이런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걷는 모습들을 많은 임시표들로 나타내는 것 같아요.(50-54마디)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임시표들은 조성(음계)을 바꾸기 위한 장치들이에요. 살짝살짝 조성이 바뀌고 있어요. 장조에서 단조로, 그리고 다른 관계조로 계속 바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화학기호같은 이 음표들을 보면서 ‘아~~오늘은 이곳에서, 내일은 저곳에서 잠을 자고, 어느 날은 좀 더 힘들고, 어느 날은 좀 덜 힘든 길을 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어요.
어느새 밤이 되었어요. 돈이 넉넉하면 여관에서 잘 텐데 나사렛은 가난한 동네이니 텐트를 치고 잤을련지, 아니면 그냥 침낭만 펴고 잤을련지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산의 위험으로부터 해의 위험으로부터 그리고 산 속에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강도질을 하는 불한당으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푹~~~~쉬는 모습을 55마디의 온음표가 그려주고 있어요. 여기 온음표의 계이름은 “도”입니다. 이 “도”는 바장조에서 계속 조바꿈을 해서 다장조의 1도가 된 거예요. 1도는 집이라고 했잖아요. 비록 객지에서 잤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집처럼 편안하게 잤나봐요.
다음날 아침이 되었어요.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 볼까요?(56마디) (사마리아산지)길보아산-도단-사마리아-세겜-실로-벧엘 이렇게 5일 동안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걷다보니 힘들고 지쳐서 속도는 느려졌지만 “야호! 예루살렘이다” “야호! 도착했다” 이렇게 환호하는 거예요. 속도가 느려진건 poco ritardando(포코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로, 물결같은 꾸밈음은 몸이 곤하여 휘청거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야호!”하며 환호하는 것은 64마디에서 표현하고 있어요.
4.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어요. “예루살렘아 5일 동안 쉬지 않고 걸어서 붓고 부르튼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하고 노래를 불러요. 이 순례자는 마치 오늘날 성지순례자들이 통곡의 벽을 쓰다듬듯이 성전의 벽을 쓰다듬어요. 그리고 또 노래해요. “예루살렘아(얼마나 다정하게 그리운 이를 부르듯 해요)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통곡의 벽에서 미루어볼 수 있듯이 얼마나 큰 바위들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잘 지어진 건물이 아름다워서만 조밀한 성읍이라고 노래하지는 않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성이기에 아름답고, 대제사장의 인도에 따라 열두 지파의 순서대로 단정하고 질서있고 규모가 있게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가기 때문에 조밀한 성읍인 거예요. 그래서 주의 제단에서 집을 짓고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은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하면서 노래를 해요.
반복되는 멜로디이지만 두 번째 주제는 천사들의 합창이고, 네 번째 주제는 백성들의 합창인 것에요.
5.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이제 성전에 올랐으니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해요.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의 산에 올랐지만 여호와 앞에 나아갈 죄인인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면 한없이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77-79마디는 아주 낮은 음으로 되어있어요.
짐슴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기의 죄를 전가시키고 제사장이 짐승을 토막내어 번제단 위에 불로 태워 제사를 드려요. 그러면 번제단에서 짐승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요.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결국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에 닿게 되어요. 80-86마디는 이런 내용을 나타내어요.
그럼 마지막 87-88마디의 세 음표는 무엇을 나타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네 제사를 ‘받, 았, 다~’ 라고 응답하시는 거라고 해석했어요. 하나님께서 직접 큰 음성으로 “받, 았, 다” 이렇게 들려주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사를 다 마친 대제사장은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 그 백성에게 복을 베풀어주시겠다고 언약하심이 제사를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절기를 모두 마치고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받고 이제 집을 향하여 시온산을 내려갑니다. 앞으로 5일 동안 또 걸어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은 어떨까요? 여호와께서 지키신다 했으니 넘어지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을까요? 피곤하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내 예배를 받아주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으니 그런 어려움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뿐이에요. 그러면 집에 도착해서는 일상생활을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는 여전히 게달의 장막과 같은 거친 세상에서 살았고, 내가 화평을 말할지라도 나와 싸우려 달려드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어요. 그러나 그럴때마다 산을 바라보며 시온산에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서 절기가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산에 오르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어요. 또한 자기의 산업을 열심히 일궈서 소득의 십일조와 레위인을 위한 십의 이조뿐만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그리고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여행의 비용을 위한 십의 삼조를 충성스럽게 드렸어요.
그리고 절기가 돌아왔어요. 그가 여호와의 집에 오를 것을 생각하며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친구가 그에게 와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말해요. 그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해요. 그러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요. “지난번에 쩌~~기 어르신이랑 00이 엄마를 보니까 잠자리가 불편해 보여서 참 마음이 아팠다네. 나도 여유롭게 사는 형편은 아니지만 먹는 것 입는 것 아껴서 돈을 조금 모았으니 이번에는 그분들을 여관에서 주무시게 할 수 있을 것 같네….”
오늘날 우리도 아침이면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서 하늘을 바라보아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찬송하며 하루를 살아요. 게달장막과 같은 거친 세상을 살다가 주일이면 성산과 같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려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또다시 게달장막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또 일주일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자답게 주의 성산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요.
이렇게 프렐류드 16번을 통해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사람의 행보를 시간의 진행에 따라 구성해보았어요. 구약 이스라엘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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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 슥 8 : 21ㅡ22 )
스가랴를 읽으면서 ....
이 구절이
프렐류드와 닮아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