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요일 5:5-8)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아멘.
원어 중심 성경강의 요한일서 50번째 <성령과 물과 피> 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라고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기는 자라고 하는 거죠. 바로 앞에서 세상, 호 코스모스. 나를 이기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죠?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지만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내가 없어질 때, 내가 없어진다는 건 나의 두 마음의 판단이 없어지는 거, 이걸 말하는 거죠? 두 마음의 판단이 없어지는 걸 죽었다고 하는 거죠? 자기부인의 죽음, 무트 타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내가 죽을 때 믿음의 주이신 주님의 믿음이 나에게 전가되고 나로부터 그 믿음이 발현되는 거죠.
그렇지만 성도는 이땅을 사는 동안에 믿음을 가졌다고 자신하거나 확신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지만’, 이라고 했지만 그렇기 때문이에, 라고도 할 수가 있겠죠.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이신 주님의 믿음이니까. 그래서 그 믿음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믿음을 가졌다고 자신할 수가 없는 거죠. 성도가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육의 영향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있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면 아, 내가 믿는 자 맞는가? 하는 그 의심과 회의가 들기도 하고. 그래서 괴로워하면서 가슴을 치기도 하는 거죠.
이러한 일들은 잘못된 일들이 아니라 사실은 잘 가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괴로워한다는 것 자체, 그거는 뭔가를 알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뭔가 과오가 있고 잘못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깨닫지 못했다면 괴로워할 일도 없는 거죠? 그러니까 괴로워한다는 것 자체는 깨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거예요.
그리고 이거는 무엇보다도 육을 통해서 영을 알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한 거죠. 육의 그 불합리, 육의 불가능을 처절하게 잘 깨닫고 그리고 영을 소망하라는 거죠. 영은 진리란 말이죠, 영. 프뉴마는 깨끗한 진리의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영은 진리란 말에요. 진리로 자유케 되는 일이 참된 구원이라는 걸 우리는 육을 통해서 배우는 거란 말이에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육으로 부대끼고 절망하면서 체득하라고 하시는 거란 말이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부인이죠? 포기하고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는 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것, 호 코스모스인 나를 이기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인 거죠.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구절이죠? 장차는 멜로라고 했어요. 미래의 어떤 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곧, 지금 즉시 뭘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멜로. 그러니까 지금, 바로의 의미인 거죠. 너는 지금 받게 되는 그 고난, 그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진다고 하는데 요거는 에크, 너희로부터 비롯된 마귀가. 우리 안의 그 율법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율법이 옥에 던져서 시험을 받게 할 것이다, 라는 거죠. 그 율법이 우리 안에서 발현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옥에 갇힌 상태라는 말이에요. 그 옥에 던지는 시험을 우리는 받게 되는 거죠.
그리고 십 일 동안에 환난을 받는다고 할 때, 십일 동안은 열의 날의 환난이라고 했죠? 성경에서 숫자는 문자대로 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 성경의 진의를 오해하게 되는 거예요. 육십 배, 백 배 이런 말들도 있죠? 그리고 천년왕국이라고 할 때 천도 있고. 전부 내용을 담고 있는 말이란 말에요. 그 일곱 이라는 것도 그렇고. 일곱 우물이라고 할 때 일곱 개의 우물이 아니라 일곱, 언약. 언약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십 일 동안의 환난도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헤메라, 날, 날은 히브리어로 욤이라고 했죠? 욤은 오르라고 했죠. 빛.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잖아요? 그래서 오르가 낮이란 말에요. 낮이 빛인 거예요, 오르. 그리고 어둠은 호셰크라고 하고 호세크르 밤, 라일이라고 하자고 했단 말에요. 그러니까 진리의 빛이 있으면 낮이고 빛이 없는 어둠이면 밤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의 빛이 있으면 낮이고 빛이 없는 어둠이면 밤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표면적으로 보면 일상의 그 밤낮을 만드시는 일처럼 보이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진리를 모르는 성도를 가르쳐서 빛의 아들로 만드는 교육의 과정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인 거란 말이죠.
그래서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 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그 일상의 하루하루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양육하셔서 진리의 아침으로 인도하겠다고 하는 언약의 말씀인 거죠. 그 말씀을 일곱으로 하셨잖아요? 일곱, 일곱이 언약이란 말에요. 맹세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가 반드시 너를 아침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십 일의 환난은 그 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보이는 대로 보면 그 율법 상태의 성도에게 욤, 진리의 빛을 주심으로서 환난, 들립시스를 겪게 하시는 일인 거란 말이죠. 이게 환난이에요. 율법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에게 빛을 주시면 우리는 혼란스러워하게 돼 있죠? 그 일이란 말에요. 이게 맞는가? 하면서 반항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어둠 속에 오래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빛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단 말이에요. 그러한 상태인 거예요, 환난은.
그 환난을 받는다, 라고 하는데 받는다는 말은 에코에요. 받는 게 아니라 에코, 갖는다고 하는 거예요. 원래 성도 거라는 거예요. 환난은 받는 게 아니라 원래 성도의 것이니까 에코라고 쓰는 거고 그래서 그거 달게 받으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알게 된다는 거는 자기부인의 죽음을 죽는다는 말과 같죠. 세상에서 가장 큰 환난은 자기의 전 존재가 부정되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환난이란 말이죠. 그 환난을 성도가 갖는 거예요, 인생 속에서.
그 십 일 동안에 환난이에요. 이게 바로 다나토스, 그 무트 타무트의 환난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성도가 겪는 환난은 모두 말씀 때문에 겪는 거예요.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 때문에 환난과 박해가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모든 일상에 주시는 그 일, 사건들, 관계들, 이게 전부 말씀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 말씀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우리가 환난으로 감지하거나 박해로 느끼거나 이런 것들은 모두 그게 말씀에 의한 작용이라는 걸 깨닫는 거라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모든 일을 겪는 자라는 말이죠. 그게 환난으로 박해로 보이기도 한다고 하는 거예요.
자, 말씀으로 말미암아. 디아 호 로고스란 말이에요. 말씀을 통하여, 말씀 때문에. 환난 박해가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환난은 들립시스고 박해는 디오그모스라고 하죠? 박해, 박해가 일어난다. 기노마이라고 해요.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곧 넘어지는 자다, 라고 해요. 유뒤스, 곧 즉시라는 뜻이에요. 넘어진다, 스칸달리조에요. 넘어지는 자, 분사가 되겠죠? 유뒤스는 곧, 즉시라는 뜻이에요.
(막 1: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제자들이 즉시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그 모습이죠? 곧, 유뒤스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일상의 모든 일, 모든 관계, 모든 사건 사고들, 전부 말씀이라고 했어요. 그 모든 말씀을 사랑으로 깨닫고 곧, 즉시 십자가 들고 주님을 따라가는 거죠, 성도는. 그게 성도란 말에요. 근데 우리는 자꾸만 그 말씀 때문에 환난, 박해라고 생각하면서 곧, 즉시 넘어지고 있단 말에요. 이거는 괴로움이야, 이거는 고난이야, 이러면서. 환난이야, 박해야 이러면서 그걸 괴로워 고통스러워, 그것 때문에 넘이지고 있단 말이죠. 그게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말에요. 잘 살펴보시기를 바래요.
그러니까 그 말씀을 사랑으로 깨닫고 즉시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게 성도잖아요? 성도인데, 사랑으로 깨닫고 자기부인의 그 십자가 들고 따라가야 되는 건데 즉시 우리는 환난, 박해라고 하면서 넘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끊을 수 없는데 성도는, 거기에서 나눠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코리조, 분리되지 않는다, 나눠지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아무도 나눌 수 없다고 하는 거죠? 하나라는 거에요. 지금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전부 성도가 감지하는 환난의 내용들인 거죠? 근데 이것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인 거예요. 그것들은 전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사랑이신 그리스도와 나눌 수가 없다고 하는 거죠.
(막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못 나눈다고 하죠? 절대로 나눌 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성도는. 그러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 게 사랑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하는 게 환난이가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냐? 라고 묻고 있는 거죠? 환난은 들립시스에요. 들립시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봤죠? 수고하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가고 있는. 그러면서 그걸 환난으로, 내 마음에, 나의 탐심의 그 두 마음으로 봤을 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걸 괴로움으로 고통으로 느끼는 게 들립시스인 거죠. 그럼으로써 자기의 전 존재가 부정되는 십자가 죽음이 환난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곤고나, 라고 해요. 스테노코리아에요. 곤궁이라고도 하고 곤란이라고도 하죠? 이게 답답하다는 거예요. 굉장히 좁은 곳에 갇힌 듯한 그런 고통, 고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스테노스라는 말에서 온 건데 이게 폭이 좁다는 거예요. 좁은 길, 좁은 문이라고 할 때 스테노스죠. 그러니까 자기의 그 율법에 의해서, 그것들로 인해서 좁아진 그 길과 문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박해나, 디오그모스라고 해요. 디오그모스, 박해. 아까 앞에서 환난과 박해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환난과 같은 의미고요. 그것들이 전부 율법에 의해서 나를 핍박해오는, 압박해오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으로 감지하지 못할 때 그 말씀은 율법이 되고 그 율법이 박해가 되고 환난이 되고 해서 나를 핍박하는 거죠.
그리고 기근이냐? 기근은 리모스라고 하고요. 먹을 게 없는 상태죠? 양식이 없는 상태. 말씀을 율법으로 먹을 때는 먹을 게 없잖아요? 그래서 헛되이 이만 간다고 하죠? 어두운 곳에서 이만 간다. 이게 빛없는 그 율법의 상태, 거기에서 진리의 양식, 자기를 살리는 양식으로 먹지 못할 때, 말씀을 먹지 못할 때 헛되이 이를 간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적신이나, 귐노테스라고 해요. 벌거벗은 거죠. 의의 흰옷 입지 못한 상태. 그래서 벌거벗은 상태. 진리를 덧입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리고 위험이나, 킨뒤노스라고 해요. 이게 성경에 아홉 번이 나오는데 여덟 번이 이 고린도후서 11장 26절에 나와요.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기에 여덟 번 나와요. 이 위험을 당한다고 하는데 여행을 하면서 겪는 위험들이죠? 여행을 한다고 하는 거는, 사십 년 광야 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도가 광야 길을 가면서 겪는 그 율법의 위험. 이게 전부 율법이란 말이에요. 여기에 또 여러 가지 나열되고 있지만 결국은 율법이에요. 그 율법의 위험을 겪는다고 하는 거죠.
칼이랴, 라고 해요. 마카이라. 칼은 히브리어로 헤레브죠? 헤레브는 같은 글자가 호레브라고 해요. 발음은 다르지만 자음이 같죠? 가뭄이란 뜻이에요. 물, 진리가 없는 그런 율법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이건 전부 율법을 이야기하는 거고 그러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떨어트리지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환난이나 박해는 우리 안의 그 율법에 의한 환난이고 박해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뒤이어서 나오는 거에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충성하라는 말은 이게 피스토스에요. 믿으라는 거예요. 충성하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이에요. 환난, 박해 이러한 이야기들이 나오다가 그 율법에 의한 것들이니까, 그래서 네가 믿는 자가 되라고 하는 거죠. 죽도록, 이란 말은 아크리 다나토스라고 해요. 다나토스의 그 죽음까지. 그 죽음을 죽을 때까지 기노마이 피스토스라고 해요. 믿는 자가 되라는 뜻이에요. 이게 명령법 현재에요.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영 단번으로 믿는 자가 될 수 없죠. 그래서 명령법 과거가 아니라 명령법 현재에요. 계속해서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명령이죠? 명령이니까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언약된 말씀이 되는 거죠.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하면, 이란 말은 조건이잖아요? 그렇게 하면 주시겠다는 말로 들리잖아요? 그리하면 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준다고 하는 그런 조건은 성경 전체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그러한 해석인 거예요. 왜냐하면,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고 안 하고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거는 말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구원의 주도권이 없단 말이죠.
그리하면, 이란 말은 역시 잘못된 번역이에요. 이거는 카이라는 거예요. 카이는 ‘그리고’ 잖아요. 영어 성경을 찾아보면 전부 and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성경을 번역할 때 영어 성경을 참고하기도 하는데 영어 성경을 참고했다면 절대로 그리하면, 이라는 번역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번역자가 굉장히 탐심을 가지고 번역한 구절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어려운 단어도 아니고. 어려운 구절도 아니고. 그리고 영어 성경도 전부 and로 하고 있는데 이걸 그리하면, 이라고 했다는 거는 번역자가 뭔가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 거죠. 이러한 성경 번역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그 교리를 막아버리는 거죠.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도에 지나는 어떤 열심을 끌어내는 그러한 방편으로 삼는 그런 구절이 되는 거죠.
우리에게는 그리하면, 이라는 말을 해결할 능력이 없단 말이죠.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을 때까지 믿는 자가 되라! 카이, 그리고 생명으 관을 줄 것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생명의 관은 호 스테파노스 호 조에, 조에가 생명이죠? 스테파노스가 관이에요. 왕관, 관. 자, 생명의 관. 생명의 왕관. 그러니까 결국 생명 주신다고 하는 거죠. 디도미, 준다. 선물로 준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리하면’, 이 아니라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을 때까지 믿는 자가 되라. 그렇게 내가 만들어준다고 하시는 거고 그리고 내가 생명의 면류관 준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요한이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절을 보면 질문이 나올 수가 있죠?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어떤 기초 위에 서 있는가? 하는 그러한 질문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그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러한 그 의문도 생길 수가 있는 그러한 서술이었단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요한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게 6절부터죠?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라고 서술하고 있단 말에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그 은혜, 그리고 공로로 이러한 믿음이 나온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믿음에 대한 궁극적인 증언은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다, 라고 하고 그리고 뒤에 보면 성령과 물과 피로 임하신다고 하죠? 그러므로 이 궁극적인 증언은 곧 하나님의 그 진리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거죠.
6절 같은 경우에 보면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라고 해요. 이 구절을 해석서를 보면 신학자들이 굉장히 어려운 구절로 보는 구절이에요, 6절이. 이게 요한일서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이다, 난해하다. 그리고 어쩌면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거기에 대해서 해석하는 내용들도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차이가 나는 그런 걸 볼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서 크게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데 그렇게 보는 신학자들이 많다는 거죠.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디아 휘도르, 그리고 하이마라고 해요. 휘도르가 물이죠? 그리고 하이마가 피죠? 그래서 물과 피에요. 휘도르 카이 하이마. 디아 전치사가 앞에 있어요. 그래서 물과 피를 통하여 엘코마이, 오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니까 물과 피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셨대요. 그분이 세상, 호 코스모스, 우리를 이기신 분이시다, 라는 거예요.
물로만 아니요, 물은 말씀과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많이 공부했었죠. 말씀과 진리로. 그리고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 피, 피는 어린 양의 희생과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르쳐주는 소재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물과 같은 의미라고 했어요. 담이라고 했잖아요. 구별된 말씀, 달렛과 맴이라고 했죠? 달렛은 문을 형성하는 문자란 말에요. 그래서 문을 통해서, 문의 밖과 안이 구분되죠? 구별됐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글자이고. 그리고 말씀이란 말에요, 맴. 그래서 구별된 말씀. 진리의 말씀을 뜻한단 말이죠.
(출 12:21-23)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이 구절이 지금 피에 대한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그런 구절이죠? 그 피로 인해서 우리가 산다고 하는 거에요. 그 피,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성도가 산다는 걸 가르쳐주시는 그런 구절이죠. 그러니까 피라는 의미 속에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나오는 게 피란 말에요. 그 희생의 의미를 알라고 하는 게 피에 담긴 의미인 거예요.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대요. 생명이라는 말은 네페쉬에요. 영원의 생명은 아니고 목숨이라고 해야겠죠. 육제, 바사르의 그 네페쉬, 목숨은 피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하나님이 주시는 거죠? 그걸 제단에 뿌린대요. 그러니까 주님의 피인 거죠. 희생의 피.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한다. 카타르라고 해요. 역청으로 칠한다, 그걸로 속죄한다고 하는 거죠? 덮어주시면, 그걸로 칠해주시면, 속죄가 되는 거죠.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라고 해요. 직역하면 그 네페쉬 안에 있는 목숨, 안에 있는 그 피가 카파르, 이게 피에요. 반드시 죄를 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주님의 육신. 그분의 육신에서 나온 피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에요. 주님의 피가 우리의 그 죄를 덮고 그리고 속죄시켜주신다고 하는 거죠. 십자가 은혜를 지금 가르쳐주시는 그러한 내용인 거예요. 그 피가 십자가에서 나오는 장면이죠?
(요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주님이 죽으시면서 피와 물을 내면서 죽어야 할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는 그러한 내용인 거죠. 그 희생의 피와 만물을 소성케하는 그 물, 물이 주님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생명이 탄생하는, 그 출산에서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이 같은 의미란 말이에요. 그걸로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로 생명이 산다.
(창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마 아사? 라고 해요. 무엇을 만들었느냐? 왜 죽였어? 가 아니라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만들었느냐, 라고 하는 거예요. 그 형제의 의미를 알고 네 안에 하나님 나라 만들었어? 라는 그걸 이야기하는 거죠.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라고 해요. 아우의 핏 소리. 콜담이라고 해요. 아우는 아흐죠? 콜담. 담이 피죠? 콜이 소리고. 피의 소리에요. 피는 주님의 그 희생을 가리키는 소재죠? 진리의 말씀이라고 했어요. 구별된 말씀, 진리의 말씀.
그런데 이 피가 9절에서는 복수로도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담이 아니라 대매라고 해요, 대매. 복수에요. 그러니까 피들의 소리라고 해요. 소리는 콜이죠? 콜이라는 거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 그거는 그저 소리로 들린다고 했잖아요? 그러한 소리란 말에요. 그리고 피, 피는 진리의 말씀인데 그걸 단수가 아니라, 그러니까 하나로 깨닫지 못하고 많은 것으로 보게 되는 것. 율법으로 보는 거죠? 율법의 조문으로 보게됐다는 거죠? 그래서 피가 복수로 나오는 거예요. 아벨의 피가 주님의 피를 가르쳐주시는 거고 그 피를 흘리게 한 우리는 그 의미 모르고 있다는 그런 내용이죠.
(요 2:7-9)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물로된 포도주라는 말이 나오죠? 물로된 포도주는 호 휘도르 오니노스에요. 호 휘도르 오이노스. 휘도르는 물이고 오이노스는 포도주에요. 휘도르와 오이노스가 명사 명사로 연결돼 있어요. 격도 같아요. 그러니까 두 단어는 붙은 단어에요. 서로 수식하거나 이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물로 된 포도주는 오역이고요 ‘물 포도주’인 거예요. 물 포도주. 이거는 휘로르나 오이노스가 서로 간에 뭔가를 수식하는 게 아니라 같이 서있단 말이에요. 서로 나란히 병렬로 서 있는데 격이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의미냐면, 물이 곧 포도주라는 거예요. 물과 피가, 포도주는 피죠? 주님이 포도주를 주면서 나의 피다, 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물과 피는 같은 의미라는 거예요. 같은 진리인 거죠. 물을 채운 항아리가 여섯이죠? 그래서 물 포도주는 여섯 항아리에요. 그런데 주님도 역시 함께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주님 안에 피 있죠? 포도주 있단 말이에요. 따라서 주님까지 물 항아리가 일곱인 거예요. 그래서 물 포도주가 일곱 항아리인 거예요. 구원의 언약을 가르쳐주시는 그러한 장면인 거죠.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기 술도 오이노스, 포도주에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지 말라고 해요. 포도주는 분명 진리라고 했는데 술 취하지 말라, 라는 말과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이 나오죠? 포도주는 곧 피고 피는 성령과 같은 의미죠? 진리의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원래 취해야 할 것은 성령이란 말이에요. 성령인데 우리는 그 포도주를 율법으로 알고 취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진리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취해 있는 잔데, 그런데, 그거는 그렇게 취해야 되는 게 아니라 성령에 충만함을 받는 거, 이게 진짜 술 취하는 거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명령법 현재, 그러니까 계속 술 취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계속 술 취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는 우리는 계속 취한다는 거죠. 계속 율법에 취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말라, 라는 거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거는 명령이죠? 내가 받게 하겠다고 하는 거죠. 성령의 충만을 받게 하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시겠다는 거예요.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라고 하죠?
그리고 7절로 넘어가서요.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라고 해요. 마르튀레오라고 합니다. 증언이에요.
(신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그래서 증인은 지금 셋이 나오는 거예요. 성령과 물과 피가 증인이 되시는 거란 말이죠.
(요 15:26-27)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주님이 보내시니까 그리스도의 영이신 거죠? 그리고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파라 파테르. 아버지의 곁으로부터, 에르포류오, 나오시는 주님이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세요. 그분이 진리의 성령이고 성령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했죠? 그가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마르튀레오, 라고 해요.
그런데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한다고 하죠? 아포 아르케. 성도도 태초부터, 영원부터 우리가 함께 있다고 했죠? 그래서 우리가 증언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근데 여기에 마르튀레오라는 말이 현재형이에요.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한다, 고 하죠? 증언하는데 그게 현재형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증언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가 광야 인생을 사는 것 자체. 엎어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실족하기도 하고 하면서 계속해서 가고 있죠? 그게 전부 증언하는 일인 거예요. 그게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우리가 그 길을 가고 있는 거란 말에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그 길을. 그 과정을 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죠. 이게 전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인 거예요.
(요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엔, 엔이에요. 안으로. 알레데이아 안으로 호데게오, 인도한다고 해요. 이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진리 가운데로,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진리를,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그걸로 말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
(출 15: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구약에서 인도하시는 그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걸 가르쳐주는 일인 거예요.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주의 인자하심, 헤세드. 지난 시간에 봤죠? 친절, 인자, 자비, 자애. 주의 그 사랑의 내용이란 말이죠. 주의 사랑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신다고 해요. 가알이라고 해요. 이게 구속이에요. 속량이라고 하죠. 근친의 역할을 하다. 근친의 역할을 하는 자를 고엘이라고 해요. 그를 인도한다. 라할이라고 해요. 인도한다, 이끌다. 이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 하시는 그 모습으로 보여주시는 거죠. 주의 힘으로, 오즈라고 합니다.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거룩한 처소. 처소는 나웨라고 해요. 그리고 거룩은 코데쉬라고 합니다. 거룩의 거처, 거룩의 목장이 되는 거죠. 그리로 들어가게 한다는 말은 나할이라고 해요. 나할 물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쉬게 하는 것.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피엘완료형이에요. 나할이라는 말이. 물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쉬게 하는데 그게 피엘형이에요. 피엘형은 강조용법이죠? 그러니까 반드시 물 있는 곳, 진리로 인도한다고 하는 거고 완료에요. 이미 들어가게 하셨다고 하는 거.
지금 광야를 가고 있는데 그게 이미 주의 말씀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인 거죠. 그게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거고 그걸 통해서 이미 들어가 있는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거룩한 처소, 그 물이 있는 곳. 말씀, 진리가 있는 곳. 주의 그 거룩한 처소, 성전이고 하나님 나라죠? 근데 그걸 미래의 어떤 날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게 아니라 이미 들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성경은 계속 같은 이야기 하고 있죠? 어느 날에 너희가 잘하면 들여보내 줄게, 라고 하시는 게 아니란 말에요. 이미 너희는 하나님과 하나고, 영원 전부터. 계속해서 그 얘기하고 계시잖아요. 이미 들어가 있다고. 인도함을 받고 있고 이미 하나님 나라고 천국이고. 천년왕국이라고 했잖아요? 지난 시간에. 광야를 걷는 것 자체. 광야 사십 년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천년왕국을 사는 거란 말이죠.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인도하신다는 말이 나할이에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해요. 이 구절은 굉장히 목가적이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구절이죠? 암송도 다 하시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암송도 하실 정도잖아요. 잘 아시는 구절인데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하는데 쉴만한 물가는 마임 메노하라고 해요. 메노하. 메노하가 안식이이에요. 누아흐, 그 말이 뒤에 있죠? 그 앞에 맴이 붙은 거예요. 그러니까 쉬는 곳이 되는 거죠. 안식처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물가라는 말이 마임 메노하인데, 이게 안식의 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안식의 물. 지금 물가로 인도한다고 했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의미죠? 물가가 아니에요. 가라는 말도 없고 그리고 물가에, 가 아니라 물로 인도하시는 거예요. 안식의 물로. 물은 말씀, 진리니까. 안식하게 하는 그 진리. 진리의 그 말씀으로 인도한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거죠? 안식, 메노하, 그게 누아흐란 말에요. 휴식하다 쉬다. 노아가 같은 글자죠, 또.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것 자체는 휴식하다, 쉰다는 말이죠? 나의 판단이 쉬는 거란 말에요.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그 두 마음이 쉬고 휴식하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휴식인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를 휴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쉼이라는 거는 안식이라는 거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나할, 피엘형이란 말에요. 반드시 인도하시는 그 안식의 물,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하는 그 물.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하는 말씀, 그 안식의 물. 그리로, 진리로 인도한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안식의 물 앞에 마임 메노아 앞에 알이라는 전치사가 있어요. 물 위로 인도한대요. 알은 위란 말에요. 물 위로 인도하는 거예요. 물 위에 뜨는 것도 아니고 물 위로 인도한다고 표현하고 있단 말에요.
이 ‘위로‘, 라는 알이라는 전치사는 위의 의미라고 했어요. 알라라는 단어가 있죠? 올라가다, 라는 뜻이에요. 같은 계통이란 말에요. 위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안식의 물 위로 인도하신다고 하면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창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궁창은 라키아라고 하죠? 라키아는 라카에서 온 말이에요. 치고 짓밟고 하는 거. 그래서 두들겨 맞아서 펴진 게 궁창이에요. 궁창이 하늘이에요. 근데 궁창이라는 자체는 십자가 죽음을 죽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을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의미가 있는 단어가 라키아에요. 그가 하늘이란 말에요. 그리고 그 십자가 죽음을 죽어야 하늘이 되는 그런 의미도 있는 거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에 물이 있단 말이에요. 이거는 율법과 진리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둘은 합쳐서 예수 그리스도가 된단 말이에요. 그걸 가르쳐주시는 소재에요. 그러니까 궁창 위의 물이라고 할 때는 알 라키아라고 해요. 알 라키아. 궁창 위. 물 위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그 알 마임은 위의 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그러한 말씀인 거란 말이죠.
위의 물은 진리란 말에요. 진리의 성령이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죠? 모든 진리. 모든 진리는 완전한 진리를 말하는 거고 그 안으로 인도해주시는데 그건 결국 우리를 온전하게 진리를 아는 상태로 만들어주신다는 그런 이야기인 거죠. 진리는 십자가 진리니까 완전히 죽여주신다. 이러한 의미인 거예요.
그러니까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말은 굉장히 아름다운 그런 말씀처럼 보이지만 내가 반드시 너를 십자가 죽음을 죽게 한다, 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맹세가 담기 그런 말씀인 거예요. 죽여서 살리는 그 영생 주겠다는 말씀인 거예요.
죽음과 부활, 그 부활 영생 이건 같은 말이란 말에요. 같은 일이에요. 그러니까 다나토스의 죽음은 곧 부활이고 영생이란 말이죠. 근데 우리는 다나토스의 죽음이 곧 부활이고 영생이야, 라고 하는데 그 사이, 그 찰라의 순간을 괴로워하면서 살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 죽음이 부활이고 영생이야, 라고 하는데, 죽음이 곧, 하는데 그 사이에서 이건 영원히 갈 거야! 하면서 괴로워 죽을라고 하는 거예요. 그 영원한 그 환란과 고난으로 오해하고 있는 거죠.
아랫물이 위로 올라가야 된단 말에요. 우리는 아랫물인데 위의 물로, 진리로 올라가야 하는데 올라가기 위해서는 기화를 해야 되는 거란 말에요. 기화라는 거는 물이 열을 받아야 되는 거죠? 불 시험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열이 가입이 돼야 하는 거란 말에요. 불같은 시험을 통해서 물이 열을 받아야 되는데 그냥 열만 바꾸는 거죠. 열을 받아서 불같은 시험을 받으면서, 받게 되면 어떻게 돼요? 물이 자기를 고집하지 못하게 되죠? 자기 모습을 잃게 되잖아요, 기화가 되니까. 그러니까 자기를 포기해야 하는 거예요. 자기의 본 모습을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데 올라가고 싶다고 하면서 나는 내거 포기 못 해. 내 모습, 내 생각, 내 판단, 이거 포기 못 해. 나의 하나님 됨. 이거 포기 못하고 여전히 액체에 머물러 있으면 어느 세월에 하늘로 올라가느냔 말이죠.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그 액체로 머물게 놔두시지도 않으시지만.
어쨌든 우리는 아랫물인 우리의 그 하늘로의 편입은 반드시 나의 그 본 모습, 나의 그 옛 모습 포기를 통해서만, 자기부인의 그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거 이걸 이해해야 하는 거죠. 그걸 위해서 주시는 그 가열을 우리가 고난과 환난으로 꽉 붙잡고 있지만 말자는 말이에요. 오히려 아랫물인 나의 그 기화를 위해서 주어지는 그 고난과 환난을 알고 보면 이게 은혜고 선물이란 말이죠.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그 기쁘신 뜻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거예요. 하실 건데 그 뜻을 성도는 좀 알잔 말에요. 좀 알아드리자는 말이죠.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도 암송하는 그런 구절이죠? 그리고 굉장히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죠? 선교에 나설 때 인용하기도 하고 그런 구절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대요. 주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죠?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는데 이거는 ’성령이 임하시면’ 이 아니라 너희가 성령이 임하시는 권능을 받는다는 거예요. 직역을 하면. 우리가 권능을 받는 게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는 권능. 하나님의 권능이에요, 그 능력이. 그 뒤나미스가. 우리에게 생기는 게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는 그 권능을 너희가 받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임하신다고 할 때 이게 에페르코마이라고 하는데 이거는 분사 과거형이에요. 그러니까 임하신 권능이에요. 이미 임해 계신 거예요. 일관성이 있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신 거예요. 이미 임해 계세요. 그렇게 임해 계신 그 권능을 우리가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 받는다는 말은 렘프세스데라고 해요. 이 말은 변형이에요. 원형은 람바노에요.
람바노는 많이 들어본 단어죠? 받는다는 말인데 렘프세스데라는 말은 이게 미래형이에요. 람바노의 직설법 미래형이에요. 많이 들어본 말이죠? 렘프세스데는 미래형이에요. 람바노의 직설법 미래형이에요. 그래서 받을 것이다, 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이게 명령법 과거로도 볼 수가 있는 단어에요. 람바노가 변형돼서 렘프세스데가 됐는데 이렇게 변형된 형태는 두 가지 용법으로 다 적용이 되는 그러한 형태란 말에요. 명령법 과거니까 영 단번의 구원의 명령이 되는 거죠? 한 번으로 영원히.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요, 너희는 성령이 이미 임하신 권능을 한 번으로 영원히 받으라! 는 거예요. 이게 맞는 말이죠? 성경은 계속 그 말씀 하시잖아요? 그 권능 뒤나미스. 뒤나미스는 히브리어오 오즈라고 했죠? 오즈, 힘, 능력. 그렇게 힘을 받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까 앞에서 본 출애굽기 15장 13절.
(출 15: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그 능력, 능력은 성도를 주의 거룩한 처소로 들어가게 하는 거란 말이죠. 근데 들어가게 하는 이 일은 성도를 주의 거룩한 성소가 되게 만드는 일인 거예요. 성전으로 만드시는 일이란 말에요. 이거를 문자적으로 보면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면 들여보내 주시나보다, 이렇게 보는데. 그게 아니라 거룩한 처소 자체가 ‘너희가 거룩한 성전’ 이란 말이죠, 우리가. 그래서 우리가 성전이 되게 하는 거.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는 걸 처소에 들어가기 하신다고 표현하는 거란 말이죠.
너희는 성령이 임하신 권능을 한 번으로 영원히 받으라. 카이,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해요. 이거는 흔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이게 선교의 어떤 순서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이런 순서대로 선교해야 된다. 땅끝까지. 그래서 미전도 종족까지 다 찾아서 전도를 해야 그때 주님이 오신다, 이러기도 하는데. 이거는 순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이르러라는 말이 있으니까 또 그렇게 보인단 말에요. 뭔가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그다음은 여기고 그다음은 여기고 그래서 끝까지 가야 되나보다, 라는 오해를 하게 되는데 이 번역 자체, 이 ‘이르러’ 번역 자체가 오역이에요. 없는 단어에요. 그대신에 그 앞에 엔이라는 전치사가 나와요. 엔 예루살렘, 엔 온 유대 사마리아 이렇게 나온단 말에요.
그리고 땅끝은 다른 전치사가 있어요. 헤오스라고 하는데 뭐 뭐까지라는 그런 전치사에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하는데 일단 이거는 지금 넷으로 이야기하고 있죠? 넷의 성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성전을 이룬다, 라고 하는 거예요.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살렘의 성전이죠? 살렘, 평강이란 말이에요. 평강의 성전이어야 되는데 엉터리 평강이었죠? 율법의 옛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 예루살렘이 주님이 십자가로 던져져서 죽으시잖아요? 그럼으로서 새 예루살렘이 되는 거죠. 엔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 안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서 너희가 증인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그 다음에 엔 온 유대. 온 유대라는 건 충만한 그 율법이기도 하죠. 유대주의, 율법. 율법이기도 한데 이 유다라는 야다에서 온 말이에요, 야다. 예후다가 히브리어인데. 유다가 예후다인데. 예후다는 야다에서 온 말인데 이게 찬양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이 죽을 때 유언을 남길 때 유다에게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충만한 율법으로 살다가 유다 자손으로 오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자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엔 온 유대가 되는 거죠, 파스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 사마리아는 히브리어로 샤마르라는 단어에서 왔어요. 샤마르는 간직하다, 지키다, 테레오라고 했죠? 계명을 지키다, 라고 할 때 많이 나오는 단어. 사마리아 자체는 이방인이잖아요? 이스라엘에서 볼 때 이방인으로 취급받죠?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 이방인으로 사는 자죠? 그렇게 사는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거예요. 계명을 간직하는 자가 되는 거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따라서 가는 자인 거죠? 그러니까 말씀은 언약이란 말에요. 언약을 간직하는 자인 거예요. 샤마르, 간직한다는. 샤마리아란 말 속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 일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오시는 주님이 이루어주시는 거죠.
그리고 땅끝. 이거는 헤오스라고 했죠? 헤오스 에스카토스 호 게라고 해요. 게는 땅이고 에스카토스는 맨 마지막. 가장 작은, 이런 의미죠. 그러니까 땅인 내가 가장 작은 그 땅이 될 때까지, 가장 작은 것. 겨자씨, 천국이란 말에요. 하나님 나라니까. 가장 작은 겨자씨 같은 하나님 나라가 될 때까지. 이 말은 바꾸어서 얘기하면 죽을 때까지. 죽어야 천국 되는 거니까. 하나님 나라가 되니까. 땅의 멸망을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땅의 죽음, 죽음으로 다시 사는 하늘로의 부활. 가장 작은 그 진리, 그게 된다고 하는 거죠. 그게 될 때까지. 헤오스라는 거예요. 그거 될 때까지 증인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은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율법으로 살던 내가 진리가 될 때까지. 내가 내 안에서 주님의 그 증인이 된다고 하는 거. 그 과정 자체. 이 성도의 삶 자체가 증거고 증언이란 말이죠.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해요. 마르튀스, 증인이라고 하는데요. 된다고 하는 말은 에세스데라고 해요, 에세스데. 이게 에이미 동사의 미래형이에요.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는 의미에요. 근데 이게 또 역시 명령법 용법으로도 쓰여요. 에세스데가. 근데 이거는 현재형이에요. 그러니까 증인이 되는 거는 계속되는 거예요. 계속 되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에서부터 광야 인생 내내, 율법에서부터 진리로 깨달아지는 그때까지 전부.
광야 인생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죽이는 자에서부터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서 믿는 자가 되는 때까지. 믿는 것도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지만. 그렇게 되라, 라고 하시는, 그런 의미까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될 것이고 되라, 라고 하시는데 역시 명령은 주님이 이루어주시는 일이죠? 내가 너를 내 증인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그런 의미인 거죠.
그러니까 성도는 광야 인생 속에서 괴로워하고 그것을 환난 고통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증인으로 만들어주시는 그 과정 속에 있다는 걸 이해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나의 그 불완전한 모습, 이게 당연한 거기도 한데 그 과정이 괴로운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이해하는 거예요. 그리고 감사하는 거란 말이죠. 그리고 이것까지도, 이러한 내 모습까지도 사랑하시고 결국은 믿는 자로 만들어주신다는 그걸 믿는 거예요. 그걸 이해하고 믿는 거란 말이죠. 이 말씀 속에서. 말씀은 전부 그 애기하고 있으니까.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셋, 트레이스라고 해요.
트레이스가 합하여 하나라고 하는데 에이스 호 헤이스라고 해요. 그리고 에이미 동사가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에이스라는 전치사는 뭐 뭐 안으로죠? 뭐 뭐 안으로. 또는 뭐 뭣을 위하여. 그리고 호 헤이스란 말에요. 헤이스는 하나에요, 하나. 셋은 합하여 하나다, 라고 하는데 셋은 에이스를 번역하면 뭐 뭣을 위하여, 니까. 하나를 위하여 있다. 이렇게 할 수가 있겠죠? 에이미 동사니까. 하나를 위하여 있다, 하나를 위하여 존재한다, 이렇게 될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성령도 진리도 물도 진리고 피도 진리란 말에요. 셋은 모두 하나님 백성을 진리로 자유케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 있다고 하는 거죠.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인데 다 진리란 말에요. 그리고 한마디로 말하면 말씀이에요. 그래서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해주신단 말에요. 너희는 이미 깨끗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 더러운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너는 나의 말로 이미 깨끗해졌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니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뜻,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로에 의해서. 그 말씀으로 오신, 우리에게 오신 그분의 공로로 인해서 우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는 거예요. 말씀을 주시는 것 자체가 씻는 거란 말에요. 씻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깨끗하다고 하는 거예요. 제자들의 모습은 영 아닌데,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치는데 너희가 이미 깨끗하다. 발만 씻으면 돼, 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 얘기란 말에요.
(삼하 11:2,4) 2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났대요. 쿰. 일어났어요. 십자가로 섰다는 거예요. 쿰, 일어났어요. 그리고 왕궁 옥상에서 거닐어요. 옥상, 이게 가그라고 지붕이라고 하는데 이게 출애굽기 30장 3절에,
(출 30:3) [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제단 상면, 이게 가그에요. 제단에서 지금 죽는 거예요. 주님이. 다윗은 주님의 모형이란 말에요. 주님이 십자가로 서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녁이에요, 에레브. 주님이 죽으시는 시간. 육이 죽는 시간, 에레브, 저녁때. 주님이 죽는 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는 때, 저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인, 잇샤, 아내란 말이에요. 아내가 성도가 목욕을 하는데 라하츠, 씻어요. 말씀으로 씻는 거란 말에요. 씻으면 깨끗해지는 거란 말이에요. 깨끗해졌어요. 그래서 심히 아름다워요. 토브, 선하다. 아가토스. 하나님의 그 뜻, 그 나라 이룬다고 하는 거죠. 성전이 되는 거. 성전 이루는 그 선. 선하다고 하는 거예요. 물로 씻어서 말씀으로 씻어서 선하다. 아가토스. 세례받고 죽었다는 거예요. 물로 씻었다는 건 세례받고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가토스의 선을 이루는 거죠.
그랬더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요. 말라크, 사자를 보내요. 말씀을 보내요. 성령을 보내요. 진리의 말씀을 보낸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여자가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트무아, 우리는 부정한데 그것이 카다쉬, 거룩하게 됐다는 거예요. 죽어서 성별됐다, 봉헌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더불어 동침하매.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나가 됐더니 그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리라. 이거는 불륜 끝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이트, 성전, 성전으로 슈브, 돌아왔다고 하는 거예요. 회개했다는 거예요, 슈브. 실제로는 집에 돌아왔겠지만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시는 거란 말에요. 여자가, 우리가 회개하고 성전으로 회복됐다고 하는 거예요.
표면적으로는 다윗이 유부녀와 바람 피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성경은 그 속에 성도가 물로, 말씀으로, 진리로 율법 씻어내고 주님과 하나 되는 그 복음을 들려주시는 거라고 했죠. 그 속에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고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이 있단 말이죠. 이렇게 성도는 성령과 물과 피로, 즉 진리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지극히 아름다운 신부가 되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주님과 하나가 되고 성전으로, 사랑의 성전으로 회복이 되는 거죠.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 성령과 물과 피로 심히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성령과 물과 그 피 안에 담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은혜 잘 깨닫고 그 은혜만 찬송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