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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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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大邱)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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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玄紀)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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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藥峰) |
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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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忠肅)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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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소호리(蘇湖里)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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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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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抱川) 설운리(雪雲里)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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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선조 19) 별시(別試) 을과 급제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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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봉교(奉敎),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郎), 직강(直講), 제용감정(濟用監正), 내섬시정(內贍寺正),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曺參議),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 형조판서(刑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호조판서(戶曹判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경연성균관사(經筵成均館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숭록대부(崇祿大夫) |
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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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暗行御史), 경상우도감사(慶尙右道監司), 평안감사(平安監司), 함경감사(咸鏡監司), 경기감사(京畿監司), 개성유수(開城留守) |
증직및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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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년(인조 9) 영의정(領議政) 증직 병조참의(兵曺參議), 도승지(都承旨), 황해감사(黃海監司), 함경감사(咸鏡監司) 사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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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강직함 |
공은 뛰어난 재질에 풍채가 준수하여, 아름다운 수염에 안광(眼光)이 사람을 쏘았고, 성품이 강직했다.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되면 아무런 위협에도 굽힘이 없었으며, 화사한 옷을 입지 않았고 소실(小室)을 두지 않을 만큼 검소했으며, 미천한 사람 앞에서도 거만한 거동을 보이지 않았다.
벼슬길 40년에 한결같은 정성으로 국사(國事)에 몸 바쳐, 처절한 전란에 시석(矢石)을 무릅쓰기도 했고 애매한 누명으로 모진 형벌을 겪기도 했으며, 10년 남아 긴 세월 귀양살이의 쓰라림을 치르는 등 온갖 파란과 위험을 거쳤으나 조금도 두려움을 갖거나 굽혀 본 적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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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생활 |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봉교(奉敎),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좌랑(禮曹佐郞) 등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어, 어려운 일을 도맡아 물 흐르듯 처리하니, 상사(上司)와 동료들이 모두 공의 재주에 탄복했다.
임진왜란에 적이 서울을 핍박해 올 때, 공은 서행(西幸)하는 임금의 행차를 호종(扈從)하다가, 중로에서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어, 임해군(臨海君), 화순군(和順君) 두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회령(會寧)에 이르렀는데, 국경인(鞠敬仁)이 반란을 일으켜, 공과 황정욱 그리고 두 왕자를 붙잡아 왜적에게 넘겨 포로가 되어 있다가 공이 홀로 계교를 써서 간신히 탈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많은 의병을 모아 거느리고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도와 경성(鏡城)을 회복하니 육진(六鎭)이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 향응하여 명천(明川)·길주(吉州) 등의 적을 토벌했고, 관북을 회복함에 크게 공을 세웠으나 승첩을 보고함에는 매양 겸손하여 자신의 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윽고 왕의 부름을 받아 행재소(行在所:義州)에 이르러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정랑에 옮겼으며 1594년 다시 지평에 임명되어 직강(直講)으로 명나라 장수 유정(劉挺)을 접대했다. 암행어사가 되어 삼남을 순찰하고 군사의 기강의 해이함을 탄핵하여 이목이 숙연해졌다.
국운이 가물거리는 위태로운 고비를 당하여 비분강개하여, 구국제단에 신명을 바칠 결심으로 글월을 닦아 전수(戰守)의 계책을 올렸더니 대신들이 그 꾀를 기특히 여겨 공을 추천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당시 평양의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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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족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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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徐固) |
생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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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徐?) |
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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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固城李氏) 이고(李股)의 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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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영민함 |
2살 때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 이씨 부인은 어린 공을 데리고 서울 집으로 옮겼는데, 성균사예(成均司藝)인 숙부 서엄(徐?)에게서 자라면서 번거롭게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에 분발하여서 학업이 날로 나아갔으며, 독서를 좋아하여 항상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숙부 서엄이 죽으면서 몸이 몹시 여윌만큼 슬퍼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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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현달한 자식들 |
부인은 여산(礪山)의 명족(名族)인 목사(牧使) 송영(宋寧)의 딸이고 영의정(領議政) 송일(宋?)의 증손으로, 부덕이 있어서 공이 공경하며 중하게 여기었다.
7남 4녀를 두었는데, 그 맏아들 서경우는 우의정(右議政), 다음 서경수(徐景需)는 전첨(典籤), 셋째 서경빈(徐景?)은 현감, 넷째 서경주는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선조(宣祖)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결혼하여,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지는 등 모두 현달했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학 문
스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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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
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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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암서원(龜巖書院) |
학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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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학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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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이귀(李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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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의 서벽(書癖) |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인 사예(司藝) 서엄(徐?)에게 양육되었는데, 번거롭게 이끌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힘써 배워 학업이 날로 진취하였다. 사예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음으로 3년상(三年喪)을 입었는데, 과도하게 야위어 병을 자주 앓으면서도 더욱 많은 책에 몰두하여 하루도 독서를 폐하지 않았다.
독서를 좋아하여 보지 않는 책이 없으며, 더욱 역리(易理)를 강론하는 데 힘써서 얻은 바가 있었으므로 한때 기유(耆儒)들이 정밀하고 심오하다고 하며 받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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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의 학문 활동 |
계축년(癸丑年)에 화옥(禍獄)이 일어나자 간당(奸黨)들 가운데 공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자들은 공을 반드시 해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다시 금오(金吾:의금부)에 체포되어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로 옮겨졌고 또 원주(原州)로 옮겨졌다. 적소(謫所)에서 11년을 있었으나 모습을 바꾸는 것을 보이지 않았고, 문을 닫고서 『주역』을 연구하였으며, 배움을 청하는 선비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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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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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약봉유고(藥峯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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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유고(藥峯遺稿)』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성(徐賂)의 시문집으로 4권 2책이다. 서발(序跋)이 없어 필사 연대와 필사자를 알 수 없다.
권1에 시 177수, 권2에 시 37수, 제문·교서(敎書)·계사(啓辭)·계서(戒書) 각 1편, 서(書) 4편, 절목(節目) 1편, 발(跋) 1편, 권3·4는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지(識)·가장·사제문(賜祭文) 각 1편, 제문 9편, 만사 41편, 사적(事蹟) 1편, 시 3수, 기(記)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체로 시어가 세련되고 시상이 청아한 편이다. 「증의승학상(贈義僧學祥)」을 비롯해 「차이순신운(次李舜臣韻)」·「곽재우독여향병한주의령운고제(郭再祐獨與鄕兵閑住宜寧云故題)」 등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경험과 감회를 형상화한 것이다.
「과만월대시(過滿月臺詩)」는 망해 버린 고려의 만월대를 찾아 그 쓸쓸한 정경을 묘사한 회고시이다. 계사는 대사헌을 사임하면서 올린 것이다. 서의 「교계소서(敎戒小書)」는 부마(駙馬)인 자기의 자손에게 주는 경계의 글로, 부마가 된 사람은 흔히 세파에 휩쓸려 귀양을 가기가 쉬우니 근신하라는 내용이다.
「권유진주목사곽재우서(勸留晉州牧使郭再祐書)」는 경상감사로 있을 때 왜란이 평정되자 진주목사 곽재우가 은퇴한다는 말을 듣고 만류한 내용이다. 폐허가 된 국토의 재건에 힘을 모아야 할 때 그 대책을 세우지 않고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절목은 그가 지춘추관사로 있을 때 제정한 것으로, 모두 8항목으로 구성된 「태백산사고수직절목(太白山史庫守直節目)」이다. 부록에는 임금이 보낸 치제문을 비롯, 당대의 명인 오윤겸(吳允謙)·김시양(金時讓)·이경석(李景奭)·이귀(李貴)·장유(張維)·김상헌(金尙憲)·이성구(李聖求) 등의 제문·만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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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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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 소호헌(大邱徐氏 蘇湖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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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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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1리 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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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축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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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徐?, 1537~1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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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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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明宗) 재위(1545∼1567)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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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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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 종중(관리자 : 서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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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 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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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75호 , 1968년 12월 19일 지정, 1동 |
건축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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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은 원래 고성이씨인 이고(李股)의 집이었다. 이고의 무남독녀가 서해(徐?)에게 출가를 하였고, 서해의 아들 서성(徐?, 1558~1631)이 이 집을 상속하게 됨으로써 대구서씨 일문의 종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망호의 소호헌이 대구서씨, 그러니까 달성서씨의 생활을 실제적으로 담아내게 되는 것은 그 후대 가서의 일이다.
“약봉의 셋째아들 첨추공 서경림(徐景霖)께서 과천 현감을 마치시고 학문에 뜻을 두시어 병자호란 때인 1636년에 안동 소호리에 이거하시어 여러 번 벼슬을 제수 받으셨으나 배수하지 아니하고 약 30년간 거주하시다가 충주 용대리로 이거 하고…… 첨추공 증손 동지공 서종만(徐宗萬)께서는 서명즙(徐命楫), 서명해(徐命楷), 서명량(徐命樑), 명채(徐命采) 4형제분을 두시었는데 끝으로 서명량, 서명채 두 형제분이 1712년에 소호리에 이거하시어 현재 소호리와 명진리에 약 50여 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대구서씨 종중에서 펴낸 책자 속의 일절이다. 그러니까 이 집에 본격적으로 대구서씨 일문이 거주하게 되는 것은 1712년 이후의 일이라고 하겠다. |
건축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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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 건물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즉 소호헌 영역은 소호헌과 약봉태실이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소호헌이 정자라면 약봉태실은 살림집이고, 소호헌이 사랑채라면 약봉태실은 안채라고도 할 수 있다. |
건축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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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 북쪽의 정면 2칸, 측면 1칸은 누마루 영역이다. 아래쪽에는 앞의 두 기둥이 축대 아래까지 뻗어 있고, 뒤의 두 기둥은 축대 위에 짧게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의 안쪽 지붕 아래에는 서쪽 칸 쪽으로 소호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소호헌 현판이 걸려 있는 방향은 결국 이 건물의 정면이 북쪽임을 알게 한다.
누마루의 안쪽, 동서 2칸, 남북 3칸은 소호헌의 본 영역이다. 넓은 마루의 남서쪽 지붕 아래에는 약봉선려(藥峯先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 동쪽방의 서쪽 벽 위에는 약봉태실(藥峯胎室)이라는 현판이 있고, 대청의 남쪽 벽 위에는 중수기가 걸려 있다. |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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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蘇湖軒) |
이 집의 당호이다. 소호헌의 소호는 이 마을에 선주하였다는 소씨, 이 마을에 있었다는 호수 또는 연못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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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선려(藥峯先廬) |
넓은 마루의 남서쪽 지붕 아래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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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봉태실(藥峯胎室) |
안채 동쪽방의 서쪽 벽 위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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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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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을 쌓아 후손이 영화를 누리다 |
서해(徐?, 1537~1559)의 부인 이씨는 약물을 잘못 써서 실명한 장님이었다. 서해는 그녀가 장님인 것을 모르고 혼인을 하게 되었으나, 혼례 날 신부집에 가는 길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혼인을 파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서해가 덕을 쌓아 후손들이 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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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봉 집안의 음식 |
이씨 부인은 총명하였고, 음식 솜씨가 좋았다. 나중에 임금은 이 집안의 음식 맛에 감탄하여 약봉(藥峯) 집안의 음식이라고 하여 약식(藥食), 약과(藥果), 약주(藥酒) 등으로 명명하기까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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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직서숙 |
소호리는 권오설(權五卨) 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이다. 1920년경 소호헌에서 권오설 선생이 일직서숙(一直書塾)을 열어 신학문을 가르치고 농민 계몽을 하였다고 하며 , 그 경비는 대구서씨 문중에서 대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 > 남부권 > 소호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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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이씨와 달성서씨의 동성마을 |
소호리는 일직면사무소가 있는 5번 국도와 중앙선 운산역 사이에 있는 운산리의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말 소시랑(蘇侍郞)이 살았고 앞에 호수가 있어 소호리라 하였다 하며, 보물 제475호인 소호헌(蘇湖軒)이 이 마을에 있는 것도 마을 이름과 관련이 있다.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달성서씨(達城徐氏)의 동성마을로 북쪽으로 향한 음지마을과 남쪽으로 향한 양지마을이 있다.
대산종택(大山宗宅)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종택이며 뒤쪽에 대산의 불천위 사당도 있다. 대산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외손이자 밀암 이재의 제자로 퇴계학을 가일층(加一層) 현양(顯揚)시킨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아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과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種錫)으로 계승되었다.
수은종택(睡隱宗宅)은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의 종택이며, 수은는 목은(牧隱) 이색의 10대손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자다. 병자호란 때는 안동의 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출발했으나 이미 강화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고 한다. 수은은 안동 입향조이기 때문에 수은종택을 한산이씨 안동종택이라고도 한다. 이 종택 사랑채에 관가당(觀稼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수은의 증손자이자 대산의 아들인 이태화(李泰和)의 호이다. 종택 뒤에는 수은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수옥정(漱玉亭)은 수은이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1953년에 지은 정자다.
안동소호헌(安東蘇湖軒)은 임청각 이명의 다섯째 아들 이고의 분가 주택으로 건립한 것을 무남독녀 사위인 함재(涵齋) 서해(徐?)에게 물려준 집이다. 이 건물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직접 세우지 않고 평방(平枋) 모양으로 귀틀을 짜 돌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점과 기와에 새겨진 쌍비용문(雙飛龍紋)은 특히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약봉태실(藥峯胎室)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봉 서성(徐?)이 태어난 곳이다. 약봉은 율곡의 문인으로 대구 귀암서원에 부친과 함께 제향되어 있다.
깟방우는 망호리 동쪽에 있는데 큰 바위가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며 손암이라고도 한다. 안망실(安望室)은 인근 마을에 비해 고지대로서 앞 전망이 좋아 평안히 바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네미·성남은 약 400년 전 진주(晋州) 목사(牧使)를 지낸 성남(星南) 장문보(張文輔)가 정착하여 거주하였으며 성남정(星南亭)이란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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