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차(19) 2010/7/8 차인
서울 사대문안에 유일한 600년 영당 한산 이씨 목은 이색 종가
글/ 이연자 한배달우리차문화원장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다가
깨진 솥에 노아차르 달이는데
문득 귀가 밝아지더니
코가 열려서 신령스런 향기를 맡네
어느덧 눈에 가리운 편견도 사라지고
뭄 밖의 티끌도 하나 보이지 않네
차를 혀로 맛본 뒤 목으로 내리니
살과 뼈가 절로 바로 된다네
가슴 속 작은 마음자리는
밝고 맑아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라
그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랴
군자는 집안부터 바르게 하는 법 아니던가
고려 말의 선비 차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차시 <다후소영>이다.
차르 ㄹ끓여 마시는 일은 선비가 수양을 쌓는 길과 같다며
유학사상에 다도를 접목했던 목은 선생의 종가는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91번지에 있다.
비록 맏아들로 이어온 후손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살림집은 종친회 사무실로 사용했고,
영정을 모신 영당에서는
양력 5월 5일과 10월 10일에 선생을 추모하는 차례를 모신다.
하지만 차인의 차례 상에는 차가 오르지 않았다.
아쉽게도 한산소곡주가 찻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600년 지켜온 기적의 영당
서울 조계사 앞 오른편 길을 따라 200m 거리에
국세청 현재 건물과는 대비되는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 섬 같은 작은 공원이 빌딩 숲에 가려져 있지만 공원 때문에
더욱 넓어 보이는 200여 평 대지에 조촐한 단층 칠의 영당이 낯설게 앉아 있다.
성리학 연구와 정치적 실현에 큰 업적을 남기며
끝까지 고려왕조에 지조를 지킨 선생이 영당이
서울 사대문 안 이씨 왕가 바로 이웃동네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뜻 밖 이었다.
지난 5월5일 목은 선생의 봄 차례에 참석을 했다.
이날 정오, 전국에서 모인 500여 명의 후손들이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차려두고
600여 년 전 아득한 조상을 기리는 풍경은 우리 문화의 진면목을 보는 듯했다.
차례는 영정을 가렸던 휘장이 걷어지면서 시작됐다. 아얀 수염에 은근한 미소로
후손들을 반기는 인자한 모습의 고려인. 그래서 고려 관복인 홍포와 머리에는
날개가 아래로 늘어진 오사모를 쓰고 허리에는 각띠를 착용한 채
목화를 신은 반신상의 영정이 신비롭게 나타났다.
오른편에는 그의 제자인 양촌 권근이 쓴 화상찬도 보인다.
이 영정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5년 뒤
1404년에 그려진 것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차 대신 술이 오른 ‘차례’
향을 피우 혼을 강림시키고, 모사에 술을 부어 백을 모신 다음
제관이하 참석자 모두 두 번 절 했다.
이어 이상복 이사장이 첫 번째 술잔을 올렸고,
선생의 관직이 두루 적힌 축문 낭송이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술잔을 마지막으로 차례는 30여 분 만에 끝이 났다.
이날 차례 순서를 집례한 대종회 부이사장이시니 이 항규(83) 옹은 차례에
차가 아니라 술을 올리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줬다.
“차례란 본뜻은 차 한 잔을 올리는 간단한 고유제를 일컫는 말이지요.
하지만 한산에 있는 영당 등 전국 10여 곳에 있는
목은 선조의 차례에는 차를 올리지 않습니다.
목은이 지으신 <한산팔영>의 서문에는
‘우리 집 한산은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우리 부자가 중국에 가서 과거에 급제한 후로부터
천하가 모두 우리나라에 한산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즉 그 좋은 경치를 노래에 실어 전파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고향을 칭송하셨기에 한산 소곡주를 올리고 있어요.
한 잔으로는 섭섭해서 석 잔의 술을 올리고 있습니다.
기제사가 아니라서 밥은 올리지 않습니다.”
한편 대종회 상임이사 이상구씨는
600년 동안 서울의 가장 중심 터에 영당을 지켜올 수 있었던 애환을 말한다.
“지금의 영당 터는 목은 할아버지의 맏손자 이맹진이
서울 시장 같은 벼슬을 하면서 살았던 종가였습니다.
한때는 효종이 딸 숙경공주의 집을 짓기 위해
왕가에서 강제 매수 하려한 일도 있었지만 당시 사간으로 있었던 이익상이
‘전하께서는 동기간의 정리가 계시겠지만 그 대지에는
태조대왕의 친구로서의 예우를 받던 한산개 이색 목은의 영당이 있사오며
더구나 인목, 인열 두 왕후와 대왕대비는 모두 목은의 외손이 되사오니
공주의집을 짓기 위해 영당을 헐 수가는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라고 간하여
영당이 무사 할 수 있었어요.“
조선왕가에서도 탐을 냈던 금싸라기 땅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진
8층짜리 우뚝한 ‘목은관’건물의 준공식도 이날 갔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양반들의 종가가 사대문 안에 있을 법도 한데
옛집이나 조상을 모시는 사당만이라도 남아 전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이런 현실에서 기적같이 남아 있는 목은 선생이 영당이 더욱 찬연해 보였다.
차를 달이며 삶이 방식 체득한 차인
고려를 대표하는 차인, 목은 선생의 차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차생활의 체험에서 느낀 글들이라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버지 때부터 차를 즐기는 가풍으로
일찍부터 차를 달이며 삶의 방식을 체득했던 목소리여서 더욱 큰 감동을 준다.
‘몸가짐과 집안을 바르게 하고 나라와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군자의 길이
차 한 잔을 다루는데서 시작된다.’며
조선시대 이상향의 인간상 군자의 길이 바로 다도의 길임을 내 비친다.
외로움이 무엇인지, 뜻을 굽히지 않는 길이 또 무엇인지
바른길을 가고 참됨을 지키는 수신이 무엇인가를 차를 달이면서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바버지 이곡의시에서도 나타난다.
‘강호 호수에서 술을 실어 맑은 달 부르고
돌 부뚜막에 차 달이니 자색 연기 일어나네.
호랑이보다 무서운 정치 아니면
이곳이 모든 사람 신선이 무리라.‘
가렴주구의 무리를 매도 한 이 같은 차시 뿐 아니라
강릉 경포대를 노닐다가 지은 <동유기>에서
‘돌 부뚜막과 돌못과 돌우물이 그 곁에 있으니 신라 화랑들의 찻그릇이라’ 는
글을 남겨 일찍이 차유적지를 유람했던 풍유차인이었다.
선비정신에 차를 대입했던 이색은 스승인 익제 이제현과
아버지 이곡에게서 영향을 받아 김종직, 변계량, 권근 등의
제자들에게 대물림 되어 군자다도의 정맥을 이루게 된다.
탁월한 문장력으로 남긴 찻물 끓이는 소리의 다양함도 눈길을 끈다.
소나무 가지 끝에 드날리는 비를 보듯(송초간비우)이라는 비유법을 사용했고,
물소리(수성), 시보다 맑은 소리(청시률), 솥에서 차가 우는 소리(차맹석정),
솔바람(송풍)소리 같다고도 했다.
“물이 차의 몸이라면 차는 물의 정신이다.
좋은 차와 좋은 물이 만나야 제대로 차맛이 난다.”는 경험담을 말해주기도 했다.
선생은 도 찻종, 화자, 노아, 영아, 다합 다탑 등 차기와 차 이름도
그의 차시에 남겨 고려시대 차생활이 지금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준다.
또한 산골짜기의 벼랑에서 떨어지는 새우물가에서
부싯돌을 쳐서 차 달여 마시면서 “육우가 차를 좋아한 것도 별것 아니구나.”라며
자신의 차생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22대 600년 한곳에 머물다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할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그는
26살에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 대사성으로 새로운 학풍인
성리학을 도입하는 신흥사대부의 선두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두 왕권의 교체시기에 명리 보다는 의와 뜻을 따르게 된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곧은 절개 때문에
목은 선생의 두 아들 종덕과 종학은 피살당했고
그도 괴나리봇짐에 차와 차기를 챙겨 방랑생활을 하다
여주 강가에서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친다.
큰아들 후손들은 영정이 있는 서울에서 벼슬을 살았지만
국난으로 고향인 한산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자손이 귀해 맏집 종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손들 중에 둘째 아들 인제공 이종학(1361~1392)의
22대손인 이세준(68, 고양향교전의) 씨와 종부 이선호(65)씨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종택에서 만날 수 있었다.
수 백년 살았던 고택은 세월의 무게에 쓰러지고 그 자리에 번듯한 2층 양옥을 지었다.
종가답게 한옥으로 지으려 했으나 어렸을 적부터 살았던
한옥의 불편한 점을 아는 터라 편리한 양옥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림살이 구조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집 뒤뜰에 단을 높인 장독대 옆에는 볏짚으로 만든 토지신 제단이 있고,
고방에는 조왕신, 마루에는 성주신이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조상을 모신 사당과 재실도 전통 한옥으로 지어 종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40년 전 친구랑 배 밭 구경을 왔다가 종손의 눈에 찍힌 종부는
자신이 백마를 타고 종가집 대문 앞에 서있는 꿈을 꾸고서
종부자리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92세까지 사셨던 시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는 애환과
일 년에 60상이 넘는 제사 받드는 일 등 여느 종부와 다를 바 없는
분주한 일상이지만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천성 탓에
종부는 표정이 밝고 친화력이 있었다.
혹시 목은 선생의 두를 이어 차생활을 하는지
집안을 살펴봤으나 차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두 딸들은 차 예절을 배우게 해서 시집을 보냈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 차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선조께서 차르좋아했던 사실도 저희는 몰랐습니다.“
서울시 대학을 나온 종손은
지금껏 600년 전 터 잡은 선조의 땅을 떠나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상의 얼이 배인 당에서 부모님이 그렇게 살아 왔듯이
자신도 조상의 땅을 지킬 것이고 외아들과 손자도 이 땅을 그렇게 지켜 나갈 것이라며
3대가 한집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일 년에 모시는 65번 제사
22대로 지켜온 대 종갓댁이니 받들어야 할 조상님이 많다.
입향조의 손자이자 종손의 19대조인 이훈(1429~1481)은 효령대군이 사위로서
한성군에 봉해져 불천지위(영원히 지내는 제례)이다.
여기다 종손이 4대조 여덟 분까지 합하면 기제사만 일 년에 10번을 지내야 한다.
설 차례때엔 열 분의 상차림을 해야 하고, 추석 다례도 마찬가지다.
가을 시제를 받드는 조상이 또 서른다섯 분이나 되니
일년에 받들어 모시는 제사만 모두 예순 다섯 분이다.
여기다 성주신이나 터주신 등을 합하면 숫자는 늘어난다.
종손은 가을 시제를 11월 첫째 일요일날 강당 같은 넓은 재실에
위패를 모셔두고 하루에 다 모신다고 한다.
이 많은 위패 중에는 종손의 21대 선조의 장인, 장모 위패까지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외손도 제사를 받들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전하는 종가다.
이 댁의 내림음식은재로 만든 조처이다,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배를
무쇠 솥에 고은 다음 건지는 건져내고 황설탕을 넣어 걸쭉한 조청이 되도록 졸인다.
배조청의 활용은 다양하다. 식빵에 잼처럼 발라먹기도 하고,
멸치 볶음도 배조청으로 양념한다. 명태 찜에도 배조청이 들어가면 부드럽다.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찍어 먹으면 어렸을 적 할머니 생각이 절로 나는
추억의 음식이 된다. 그런데 이 댁에선 조청이 아니라 ‘배 쨈’이라 부른다.
젊은 주부들이 조청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