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도리
거듭남과 성령님의 도우심(1)
요한복음 14:16-31
우리가 지금까지 거듭남의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여러 주일 동안 생각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이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분기점(crisis)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 좋다’ 혹은 ‘아!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인식(認識)은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가 참된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므로 확신을 갖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적인 삶이 없고, 종교적 형식에 그치고 마는 정도로 끝납니다. 그런데 인식과 함께 오는 깨달음은 중생하도록 역사(役事)하시고, 중생함과 동시에 내주(內住)해 계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 되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거듭난 사람의 역할
그러면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깨닫게 하여 주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거나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심어주심과 동시에 내주해 계신 성령님께서 내 영혼의 기능, 즉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지적(意志的)인 기능을 순식간에 즉각적으로 온전하게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변화된 지적인 기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아주 좋게 고쳐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누가 시키셨느냐 하면 내주(內住)해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아주 좋게 변화시키신 것만이 아니라 중생한 사람의 지적인 기능에 작용하셔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이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생한 사람의 영혼의 기능을 변화시켜 주신 성령님께서 중생한 사람의 지적 기능을 완전히 억압하시고 주입하듯이 하여서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사람이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중생한 사람은 변화된 자기 영혼의 기능을 가지고, 그 기능이 움직여서 어떤 생각을 만들고, 그것이 종합해서 어떤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향한 어떤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役事)하심으로 만들어 내는 마음은 거듭나기 전에는 없었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소원하게 되고, 거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서 말씀을 깨닫고 확신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확신과 소망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책임이 성령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중생한 사람의 책임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을 성령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구원받은 우리 안에 언제부터 내주해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에게 새 생명의 본질 혹은 생명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심어주시는 것과 동시에 성령님께서 내주해 계십니다. 이렇게 해서 새사람으로 살아난 사람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중생한 사람의 영혼을 순식간에 극단적이고 온전히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새 생명의 본질적인 요소가 심어져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성령님께서 도와주심으로 자가 안에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먼저는 회심(conversion, 요일 1:9)이 일어납니다. 이 회심은 회개와 신앙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지난날의 삶에 대해서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지난날 하나님 없이 자행자지하며 살았던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이 자기 안에 새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낼 때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없이 죄를 짓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회개하고, 그다음부터 그리스도의 성품, 즉 그리스도의 인격을 을 갖추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중생한 사람이 변화된 지각을 사용하는 문제
거듭난 여러분들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오늘 제 설교를 들으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소원하면서 오늘 무슨 말씀을 들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자꾸 의문을 가지시고 그 의문을 놓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거듭난 여러분들의 신앙에 성장과 성숙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들은 말씀을 집에 가셔서 생각해 보고 알려고 하는 일이 없고 그냥 ‘다음에 알게 되겠지’ 하고 마는 것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매우 무책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저절로 알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하나님 말씀을 힘써서 알라고 했고, 변화된 우리의 지각(知覺)을 사용해서 아는 일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2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별”(dokimavzw)은 ‘자세히 파악해서 그것인지 아닌지를 늘 식별하고 캐내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자세히 살펴보아서 주의해서 과연 그것인지 아닌지를 계속해서 정밀하게 검사하고 연구하라’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알고 깨닫기를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알고 깨닫는 일에 자기 에너지를 써서 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다른 일에 에너지를 모두 다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자기 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헛된 데 자기 에너지를 사용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여력이 없게 되어서 깨달아 가는 노력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영혼의 지적인 기능을 사용해서 알고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진리가 자기의 것이 되어서 삶의 원동력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동력이 될 때 거기에 천국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3:7에 있는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에너지를 사용해서 깨달아 알고 깨달음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노력도 없이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인과(因果)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중생한 사람에게 중생의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는 동시에 내주하시지만, 그것에 앞서서 성령님께서는 중생의 새 생명이 중생하는 사람 안에 들어가는 일부터 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창조(創造)하시는 일과 예수님께서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모든 풍성한 은혜를 중생한 사람에게 직접 적용하여서 중생을 일으켜 주시고, 중생한 사람에게 은혜로써 나타내시는 일을 맡으신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person)으로서 제3위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에게 넣어주셔서 살려내시는 일에서부터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이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 안에 들어왔을 때 거듭난 사람이 되고, 거듭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역사(役事)하여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에게 새 생명의 본질적인 요소를 심어주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심과 동시에 중생한 사람 안에 들어와 영원히 계십니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이 자신이 언제 중생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언제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신지 사람으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언제 중생했는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중생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크게 회개(悔改)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아, 내가 지금 중생했구나, 성령님께서 지금 내 안에 들어와 계시구나’ 하고 알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언제 중생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새 생명이 발휘되어 죄를 회개하고, 삼위 하나님과 그분들의 사역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것을 통하여 ‘아! 내가 중생했구나, 내가 새사람이 되었구나, 내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중생한 사람 안에 내주해 계신 성령님은 중생한 사람을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6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복음 4:14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에 의하면 성령님께서는 중생한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을 제공해 주셔서 참된 만족 가운데서 영원히 살아가게 하십니다(고전 2:10). 성령님께서는 중생한 사람 안에 거하시다가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짓고 타락하면 떠나버리시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확신하고 있듯이 영원한 생명이 중생한 사람 속에 들어와 있다가 중생한 사람이 잘못하면 영생을 잃어버리고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가 비록 하나님께 잘못했을 때는 징계하시고 우리는 그 징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고치셔서 중생한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시고 아고(a[gw, 손목을 붙잡고 간다)와 호데게오(oJdhgevw, 가르쳐 지도하여 간다)라는 인도를 통하여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이를 때까지 함께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영생(永生)의 큰 사실이 영원한 것과 같이 성령님께서도 요한복음 7:38-39에서 “내가 주는 생명의 물은 그 배에서 강과 같이 흘러서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내주해 계신 성령님은 중생한 사람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도 거듭난 우리에게 한번 임하시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중간에 죄를 지으면 떠났다가 회개하면 다시 오셔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도우심의 역사를 중단하시는 경우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못하면, 성령님께서 중생한 사람 안에서 역사(役事)하실 때 전적으로 잘 순종하는 사람 속에서 역사하실 때처럼 역사하지는 않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는 거듭난 사람 안에 계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고 계시면서 거듭난 사람을 도와주시지만,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성령님께서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도와주시는 것을 멈추신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잘 순종하는 사람 속에서 역사하여 주시듯이 역사하여 주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경은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령님이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하는 사람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멸”(sbevnnumi)이라는 말은 ‘끈다’, ‘억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감화, 성령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 거룩한 정서(情緖) 같은 것을 다 지워 버리고, 사람의 육신 혹은 육신의 정욕과 감정과 사람의 뜻과 생각을 가지고, 그것이 훌륭하다는 구실로 그런 것이 마땅한 것처럼 보이는 유혹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하면 성령님께서는 분명히 그 사람 안에서 떠나지 않으시지만, 그 사람 안에서 탄식하십니다(롬 8:26). ‘내가 너를 위하여 엄청한 희생을 치루고 구원해 주었는데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어주었는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니?’라고 하면서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근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도 탄식이 나오고 내 마음이 근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제한적인 자기의 힘과 지혜를 의지해서 살아가면 삶의 평안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삶이 불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불안은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고 근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호탕하게 웃고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어서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다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아야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가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존해서 살지 않고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감으로 삶의 평안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갈 때 그냥 계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근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깊은 탄식을 하시면서 또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십니다. 로마서 8:26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이 중생할 때 중생한 사람에게 오시고 내주해 계신 성령님께서는 중생한 사람과 영원토록 함께하시고, 중생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시고, 깊은 탄식을 하시면서 중생한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여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경륜상 오시고 또 오시지 않으신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중생한 사람 안에 내주해 계시고, 또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러한 일들을 중생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런 성령님의 내주(內住)하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중생의 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흥회나 무슨 집회에서 보면 신자들의 삶을 독려하기 위해서 ‘거듭나야 한다’라고 외쳐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나는 일은 일생에 있어서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성령님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만일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감화가 아니면 예수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곧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 그렇습니다’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표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대로 오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오해는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복음(福音)을 기쁨으로 받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을 때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서 그 사람 안에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라는 것이, 만족이라는 것이 일종의 종교적 만족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므로 어느 때가 되면 눈은 주님을 향해 있지만 뒷걸음질하면서 점점 더 복음에서 멀어지다가 결국에는 복음에서 돌아서 버리고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아니 죽기 얼마 전까지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끝내는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평상시에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던 사람이 죽음이 임박해서는 이를 박박 갈면서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보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에게 이야기로는 들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말할 때 신학에서는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신앙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 가지고 있는 신앙이므로 ‘현세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일시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신앙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인생을 살면서 계속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살다가 죽음이 임박해서 거듭나서 깨닫고 주님을 믿고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비록 인생의 끝자락에서 믿었지만, 주 안에서 죽은 자이므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계 14:13).
성령님께서 중생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심어주시는 일을 하시고, 영원한 생명,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이 심어지는 동시에 중생한 사람 안에 같이 계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만일 중생한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성령님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성령님께서 자기 안에 내주해 계신다고,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왜 성령님께서 중생한 사람 안에 내주해 계시고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바로 알고 깨닫게 하시고 확신 가운데서 소망을 품고 이 땅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고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설교 본문인 16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서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보내주겠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땅을 떠나시면 이 땅에 남겨진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예수님이 보혜사이셨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보혜사”는 헬라어로는 ‘파라크레토스’(paravklhto")입니다. 헬라어 ‘파라크레토스’라는 말은 ‘위로자’라는 의미이고, ‘권유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며,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의 위로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바른지 그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떠난 다음에는 ‘다른 보혜사가’ 혹은 ‘대언자’(代言者)가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보혜사”라는 말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큰 역사(役事)의 하나를 성격화(性格化)한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은혜를 끼쳐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룩한 말씀으로 계시(啓示)하신 거룩한 말씀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며, 거룩한 말씀을 보증하여 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6절을 보시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해서 중생한 사람에게 오셔서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받고 또 받고, 오시고 또 오시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은 한번 받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번 받은 성령님은 중생한 사람을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진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7절의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는 이 말씀은 ‘내가 간 다음에 이제 너희 안에 진리의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 거룩하신 영이신 그분을 보낼 것이다. 세상은 그분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들이 저를 아는 것은 그분이 너와 함께 늘 거하실 것이고, 또 네 속에 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6절을 보시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셔서 무엇이 옳고 그름을 알게 하셔서 그 옳음을 따라서 알게 하시는 분이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신 보혜사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께서 중생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役事)’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그냥 내 버려두지 않기 위하여 다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동거(同居)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28:20에도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재림하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다시 임재하셔서 같이 있겠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권고하고 말씀을 가르치겠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이 땅에 다른 보혜사, 제2의 보혜사로 오실 성령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이상한 비정상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하여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내주해 계셔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그래서 깨달아 알게 하시는 지적(知的)인 역사부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님이 중생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고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기능과 그러한 실증(實證)을 우리 속에 자꾸 넣어주시는 데서부터 성령님께서 중생한 우리 안에 거하신 중요한 역사(役事)를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은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한다”라고 말씀하고, 고린도전서 2:12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중생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첫째의 중요한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辨證)하시는 역사(役事)입니다. 즉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죄와 이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내 마음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고, 그럴까? 과연 그럴까? 하고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를 모르고 방황하고 끝까지 회의(懷疑)하던 나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과연 정당하냐? 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 성령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확증을 준다. 믿을 수 있는 모든 감응(感應)을 너에게 준다.’ 하시고, 우리 마음과 생각에 믿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부어 주실 때 ‘아! 이것은 과연 그렇구나!’ 하고 믿어지고 그 믿음에 확신이 생기고, 확신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
여러분, 소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에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을 통해 확신하게 되고, 확신이 있을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해서 중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믿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주셔서 믿게 하여 주시고 마음에 확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확증이 있을 때 소망이 있게 됩니다. 그 소망은 우리의 삶을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줍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중생한 사람 안에 오셔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진리에 대해 ‘아! 그렇구나’ 하고 확신할 때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아 가고, 그 깨달음은 확신을 주고, 확신은 우리에게 분명한 소망이 되고, 이 소망이 강렬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강해지고 결코 흔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멘.
(2024. 6. 30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