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논문중 색칠한 부분은 좀 잘못된 자료를 참고했다...1913년 일제가 한반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 전에 용궁군도 있었기 때문에 예천에서 용궁을 건너뛰어야 산양이 나오는데....당시 산양은 상주군 소속이었다.
대체 어떤 교수가 쓴 책(자료)을 참고했을까??회초리로...
(2015.7.1 수정) 모 교수와 통화를 해보니...안동의병진에서 쓴 '일기'를 참고했다고 한다.그러나 벽산 김도현 의병장은 예천읍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다.'벽산선생창의전말'에 보면 예안의병 중군장은 예천에 주둔하고 있는 호좌의진(호좌의진 영남소토사는 경암 서상렬 의병장이다) 중군장으로 초빙되어갔고,그 중군장이 예천회맹에 참여하였고,벽산은 청량산의병을 이끌고 현재의 풍산-예천군 호명면 오천리-경진나루(예천군 개포면)를 거쳐 산양으로 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안하고 석사학위를 주는 가 보다.
정말로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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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심상훈 작성일 : 2000-09
제 목 : [54호]인물-한말 의병장 벽산(碧山)김도현(金道鉉)(1)
1997년은 우리에게 있어서 좌절과 희망을 안겨준 한해였다. 기업의 연쇄적인 부도, 일본의 독도영유권문제 등은 우리의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였고, 연말에 불어닥친 경제한파, 즉 국가부도위기라는 암흑적인 사실을 접하였다. 그리고 사상 최악의 취업난, 조기퇴직, 명예퇴직 등의 사회·경제적 질서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공동유치, 1998년 프랑스월드컵 진출, 정권교체 등의 희망을 간직하기도 했다. 좌절과 희망 속에서 우리는 1998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1998년은 선택의 시대일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나타나야 할 시기이며, 좌절보다는 희망을 전할 시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1백년전의 이 나라의 모습이 현재와 비슷하지 않는가? 당시의 우리 선조들은 어떠하였는가? 빼앗긴 나라, 빼앗긴 국권,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해 모두가 일어섰지 않았는가. 우리도 이러한 정신을 이어 제2의 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벽산 김도현은 1895년 을미의병에서 출발하여 을사의병, 계몽운동 등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섰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도해순국(蹈海殉國)한 인물이다. 그의 구국활동과 도해순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가? 이 시대의 아픈 상처를 우리가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가. 우리는 그의 사상·구국활동 등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아닌 미래의 나, 우리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시대적인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원동력으로 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김도현의 생애와 의병활동, 계몽운동, 도해순국까지의 일대기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구상해 보자.
출생과 가계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반변천을 끼고 형성된 내앞을 지나 가랫재를 넘어 진보를 지나면, 영덕과 영양으로 갈라지는 월전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31번 국도, 즉 영양 방향으로 가다 입암 시가지를 지나 좌측으로 이동하면 일월산의 줄기가 남주하여 이룬 검각산 밑에 위치한 청기면 상청리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뒤로는 검각산을, 앞으로는 반변천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집성촌 마을이다. 여기는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었던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의 순절 후 벼슬과 인연을 끊은 김녕(金寧) 김씨의 한 갈래의 파중 촌락으로, 입향조는 김광필(金光弼)이다. 요란한 양반은 아니지만, 절의를 지킨 전통을 가문의 긍지로 이어오고 있는 이곳에서 김도현이 태어났다.
김도현의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이고, 의병장으로 활동할 때 도현(都鉉)이라는 이명(異名)을 사용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국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지던 때인 1852년 7월 14일 경상북도 영양군 청초면 소청리(현 영양군 청기면 상청동)에서 김성하(金性河)와 한양조씨 사이에 3남 2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괴암서당(槐岩書堂)에서 조부 괴암 김하술(槐岩 金夏述)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그리고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의 학통에 관해서는 관련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경북 북부지역은 퇴계 학통으로 맥을 잇고 있었고, 특히 안동지역의 의병장들은 정재 유치명(定齋 柳致明)의 학통을 근간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함창 태봉전투 이후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의 문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퇴계 학통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벽산은 춘추와 병서를 읽었으며, 1882년 30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한 과거시험을 직접 목격하고 그냥 귀향한 벽산은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포기한 채 학문에만 전진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운동, 청일전쟁 등 일련의 사건을 접하면서 구국의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갑오농민군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영양과 인접해 있던 영해에서는 농민군이 상당수 존재하였고 이 여파가 영양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에 벽산은 집 뒤의 검각산에 산성을 쌓아 이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곳은 북으로는 검각산을, 동으로는 수직절벽 아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남, 서만 막으면 천연요새가 되는 지형이다. 산성을 쌓기 위해 벽산은 그의 재산을 내놓았고, 소청을 중심으로 한 벽산의 일족과 소작인들이 참여하여 축성하였다. 검각산성은 석축으로서 크기는 8,886㎡ 정도이고, 성둑은 1.5㎞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산성은 후에 벽산이 일월산을 중심으로 펼치는 유격전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의병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검각산성은 현재 파손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거의 과정
한말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1894년부터 추진되었던 갑오개혁의 일부였던 '단발령', '의복개혁' 등 일련의 사건으로 전국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진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을미의병에서는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벽산이 창의를 결심하게 된 것은 1895년 11월 30일 일제가 단발령으로 고종과 백성들의 단발을 강요한다는 급보를 받으면서였다. 그리하여 영양의 여러 유지들과 창의를 논의하였다. 이때 안동과 선성(宣城, 현 禮安)에서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두 의진의 상황과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기의에 도움이 되겠다는 결정에 따라 벽산은 조용기(趙龍基)와 더불어 안동과 예안으로 파견되었다.
12월 12일 영양을 출발한 벽산 일행은 14일 개목나루를 건너 안동으로 들어와 의병장 권세연(權世淵)과 김흥락(金興洛), 유지호(柳止鎬) 등을 만나 안동의진의 진세를 둘러보았다. 안동의진은 단발을 실행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몰아내고 안동부를 점령하고 있었고, 김석중은 안동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관군을 모아 예천에 진을 치고 있던 상태였다.
15일에는 예안의진에 들러 이만도와 이중린(李中麟)을 만나 의진형성에 관해서 논의하였다. 벽산은 안동·예안의진의 진세가 너무 미약함에 실망을 금치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안동·예안의진의 지도부나 병사부의 구조가 너무나 허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과 구식대포, 활, 죽창, 칼, 창, 곤봉 등이었다. 따라서 관군과 일본군의 무기에는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언제 한번 무기를 잡아보았을까. 오직 지도부는 손자병법을 탐독하였을 정도의 수준이었을 것이고, 병사들은 낫, 곡괭이로 농사만 짓던 소작인들이었기에 의진의 구성이 오직 허술했겠는가.
예안의진을 둘러 본 후 청량산의 지형을 답사하였다. 영양으로 돌아온 후 벽산은 안동의진이 안동관찰사 김석중에게 패해 안동부가 점령당한 사실과 의병에 참여하였던 유생들이 강제로 단발을 당한 사실을 접하자, 1896년 1월 1일 친척 19명을 데리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청량산성을 거점으로 유시연(柳時淵), 신형일(申衡一), 이충언(李忠彦) 등과 함께 기의하였다.
예천회맹과 함창태봉전투(咸昌胎封戰鬪)
청량산에서 창의한 벽산의진은 조직을 정비한 후, 봉화, 영천(榮川,현 榮州) 등지에 의병을 모으기 위하여 순회하였다. 영주에서 벽산은 그동안 실시되었던 개혁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는 각지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이 지방으로 파견된 틈을 타서 러시아공사관과 이완용 등의 친러파 세력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을미의병 봉기의 한 원인이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도 친일파와 친러파의 세력싸움에서 친러파에 힘을 실어주던 명성황후를 일본이 시해한 것으로 열강제국의 주도권 싸움의 희생이었던 것이다. 이에 친러파를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면서 갑오개혁시 추진되었던 개혁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영주에서 의병을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량산으로 향하던 중 안동의진의 안동부 탈환작전 소식을 듣고 안동의진을 돕기 위해 출진하였다. 1월 13일 안동부에 도착한 벽산의진은 안동부 탈환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안동의진의 의병장은 김도화(金道和)였다. 그는 일직 고운사에서 이상룡(李相龍), 유난영(柳蘭榮)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안동에 도착한 벽산의진은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영호루 앞 모래밭에서 진법훈련과 활 쏘는 훈련을 하면서 이후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이때 김우창(金禹昌,영주), 조승기(趙承基,영양), 허훈(許勳,진보) 등 각지에서 의병이 기의한 상태였기에 벽산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연합의진구성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청량산으로 돌아와 의진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예안의진의 김석교(金奭敎)가 호좌의진으로 합류해 감에 따라 벽산은 후임으로 취임하였다. 마침 안동을 중심으로 한 연합의진형성이 계획되고 있었다.
연합의진의 구성은 안동부를 비롯하여 예안, 예천, 순흥, 풍기, 영주, 봉화 등의 7개군의 의진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함창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참소를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태봉의 일본군은 1894년 갑오농민군을 탄압하고 청일전쟁을 치루고 계속 주둔하던 부대로 이 무렵에는 의병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또한 안동관찰사로 임명된 이남규(李南珪)가 상주에서 관군을 훈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 목적지인 상주로 향하기 위해서는 함창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연합의진은 의암 유인석(毅岩 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의 유격장으로 별동부대를 거느리고 예천에 진을 친 서상열(徐相烈)이 맹주가 되어 지휘하도록 협의하였다. 서상열은 1894년 안동에서 갑오의병을 일으킨 서상철(徐相轍)의 육촌동생이었다.
연합의진은 중간집결지로 결정한 문경군 동로면 산양(당시 예천군)에 집결하였는데, 이를 '예천회맹(醴泉會盟)'이라 한다. 산양은 지리적으로 문경, 함창, 상주, 선산 등의 경상우도와 용궁, 예천, 영주, 안동 등 경상좌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또한 신라가 당나라군을 물리쳤고, 임진왜란때 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당교에 인접한 지역이었다. 연합의진은 규구(葵丘)에서 모임을 가진 옛날 재환공(齋桓公)의 일을 모방하여 백마를 죽이는 등의 의식을 갖추고 맹서하였다. 연합의진의 의병장과 의병들은 과거의 '당교전투(唐橋戰鬪)'를 상기하고, 승리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1896년 3월 28일 연합의진은 함창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나누어 출격하였다. 안동의진은 상주 덕통역으로, 호좌의진은 함창으로, 예안, 영주, 순흥의진은 상주 포내천으로, 풍기의진은 당교로, 봉화의진은 상주 동산촌으로 가서 유진하였다. 이날 밤 함창에 진을 친 호좌의진은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한편 문경에서 창의하였다가 호좌의진으로 간 이강년(李康秊)은 서상열의 요청으로 조령의 길을 막아 충주 수안보에 주둔한 일본군의 이동을 막았다.
3월 29일 아침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연합의진의 공격은 모두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오조차 갖출 수 없었고, 체계적인 공격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예안의진은 공격대열의 앞에 섰고, 그 뒤에 풍기, 영천, 순흥의 3개 의진이 따랐다. 그리고 안동의진은 뒷산에서 포를 쏘아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진군하는 군사들은 들판에 가득 찼으며, 혹은 산에 오르고 혹은 길을 따라 쫓았다.
함창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대구주둔 수비대의 증원을 얻어 의병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연합의진은 우세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에게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저녁 무렵에는 관·일 연합군이 대공세를 취함에 따라 차츰 전열이 무너져 끝내 퇴각하게 되었다.
연합의진은 예천, 안동, 풍기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벽산의 예안의진도 용궁, 안기로 후퇴하였다. 안기에서 추격해오던 관·일 연합군과 혈전을 벌였고, 생존자만 거느리고 예안으로 이동하여 의진을 정비하였다. 안동의진의 구원요청으로 벽산은 5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천(烏川)의 후조당(後彫堂)에 도착하였을 때, 안동부가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것을 보았다. 이때가 1896년 4월 2일이다. 예안읍으로 다시 돌아온 벽산은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그 후 벽산은 영양으로 돌아와 재기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함창태봉전투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경북 북부지역의 의병들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1896년 의병해산조칙을 통해 자진해산 하는 등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심 상 훈(안동대 대학원 사학전공)
관동창의군과의 연합작전
벽산이 고향에서 재기할 방도를 계획하고 있을 때, 진보의병장 허훈의 초청을 받아 진보로 갔다. 그리하여 허훈과 재기 항전을 상의하고 영양으로 귀향하여 40여명의 의병을 모아 재기하였다. 그러던 중 안동의진의 요청으로 1896년 4월 22일에 의병을 이끌고 안동부로 들어갔는데, 천여호의 민가가 방화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패잔병을 수습한 안동의진은 임하면 금소동으로 의진을 옮긴 상태였기에 시가지는 차가운 기운만 돌고, 민중들은 기아에 허덕였을 것이다. 꽃피는 4월이지만 몸으로 느끼는 추위는 여느해 겨울보다도 더했을 것이다. 이러한 안동의 참혹한 상황을 지켜본 벽산은 구국운동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혔을 것이고, 더 이상 안동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때 벽산은 평해 의병장 이호성(李虎成)을 통하여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 대장인 민용호(民龍鎬)의 요청을 받았다. 이무렵 민용호는 원산진격에 실패한 뒤 강릉에서 병력을 다시 모으고 부대의 전열을 정비하면서 영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던 것이다. 벽산의진은 1896년 5월초 동해안의 평해, 울진, 삼척을 거쳐 강릉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벽산은 관동창의군의 선봉장을 맡았다. 5월의 봄길, 동해안 산비탈에 진달래가 만발한 그 좋은 계절에 이 나라는 침략과 항쟁의 싸움터가 되고 있었다.
벽산이 관동창의군에 합류한 직후, 강원도에 새로 부임한 관찰사 서정규(徐廷圭)가 5월 24일 서울에서 내려온 김홍권 중대장이 이끄는 관군을 앞세워 반격해 왔다. 이에 관동창의군은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어 몇 번이고 싸우지 말 것을 당부했으나, 결국 일대혈전을 치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관령 밑 대공산성(臺空山城)에서 싸워 19명을 사로잡았으나, 관군이 계속 반격해오므로 대관령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보현산성(普賢山城)에서 다시 혈전을 벌였다. 관동창의군은 임계, 백복령, 북평을 거쳐 삼척으로 후퇴하여 갈야산성(葛夜山城)에 진을 치고, 의진을 재정비하였다.
산성에는 민용호와 최중보의 본부부대가, 읍성에는 김도현, 민동식의 별동대가, 남산에는 김헌경, 김달호, 주명승이 지휘하는 향병이 진을 쳤다. 이때 관군이 고사리재를 넘어 어정수에 머물렀다가 읍으로 진격해 옴에 따라 관동창의군과 관군과의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이를 '삼척대전' 또는 '갈야산성의 대혈전'라 한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누가 누구와 싸우는가. 오십천 굽이치는 강물 위에 깍아세운 듯한 절벽 끝에 서 있는 죽서루도 땀과 피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알 바 아니라 오로지 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라는 의병이지만 의병의 희생도 너무도 컸다.
삼척대전은 승패가 없었다. 모두의 패전으로 끝났다. 2백명의 관군도 50명만 살아 강릉으로 돌아갔고, 의병도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벽산은 10여명의 군사만을 거느린 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왔고, 민용호는 오십천을 거슬러 통리재를 돌아 임계로 갔다.
유격항전과 의병해산
전국의 의병들은 1896년 여름에는 거의 해산하였다. 을미의병 가운데 전투의병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유인석의 호좌의진도 북상하여 평북 금산을 거쳐 서간도로 들어갔고, 안동의병진도 자진해산하였다. 그해 여름이면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은 거의 종식단계에 이르고 되었다. 또한 고종도 의병해산에 관한 조칙을 내리고 선유사들도 각지를 순해하며 해산을 종용하는 때였다.
삼척전투에서 패배 아닌 패배를 한 벽산은 일월산을 넘어 영양으로 돌아와 검각산성에 본진을 두고 면내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모아 의진을 형성하였고, 각지역을 순회하면서 병사를 모았다. 소청에 관군이 진입했다는 급보를 전해 듣고 소청으로 왔으나, 이미 본진은 관군에 의해 패멸된 뒤였다. 벽산은 검각산성을 수리하고 의진을 재정비하여, 산성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통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영양지역의 지세에 밝았던 그는 지형이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주로 입암 등지에서 싸웠다. 입암의 부용봉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지리적인 잇점에도 불구하고 화기의 열세로 인하여 만족할 만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병활동을 펴다가 잠시 집에 들렀는데, 일본군과 관군이 벽산의진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벽산은 친척과 의병을 이끌고 검각산성에 진을 치게 되었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일본군과 관군은 벽산 생가와 괴암서당 등 산성주위의 민가를 방화하였다. 벽산은 방화로 불타는 자기집과 존화주의, 위정척사를 다짐하였던 괴암서당을 검각산성에서 그저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또한 사부고개전투에서 순흠, 용흠, 장흠 그리고 생질인 심의형이 전사하는 집안의 참사를 맞았다.
1894년 6월 25일 벽산은 영양읍 남씨 재사에 진을 치고 있던 영양의진에 가서 전투원을 보충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이인화(李仁和,예안), 유시연, 최세윤(崔世允,興海)이 합류하여 일월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10월 15일까지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침으로써 전기의병 중 가장 오랫동안 항전하였다.
10월 5일은 음력으로 9월 9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인 중양절이다. 지쳐 있는 의병을 이끌고 벽산은 아버지가 숨어 있는 청기면 여미라는 산골마을에서 의병을 해산하였다. 당초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동안 명성황후의 명예도 회복되고 개혁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러 있었고, 지방에는 일본군과 일본인 상인이 그대로 있었기에 계속적인 항쟁을 전개하였지만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의병을 해산한 것이다. 의병 해산 당시의 벽산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주권을 상실해 가는 민족과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오읍도집강과 을사의병
벽산은 의병을 해산한 후 1903년을 전후하여 경상북도 관찰사 이헌영(李憲永)으로부터 오읍도집강(五邑都執綱)을 위촉받아 영양, 청송, 진보, 영덕, 영해의 다섯 고을의 화적 토벌에 진력하였다. 을미의병 해산 후 민심이 어지러워 도처에 영학당(英學黨), 남학당(南學黨), 서학당(西學黨), 동학당(東學黨), 활빈당(活貧黨) 등이 일어나 탐관오리, 부자 등을 습격하였다. 이 시기에 농민군의 활동을 '광무농민운동(光武農民運動)'이라 한다. 농민군의 활동이 격렬하였던 지역은 경상북도의 북부와 소백산맥 일대였다. 즉, 강원도의 남부, 동해의 삼척, 울진, 평해 그리고 경북의 영덕, 진보, 영양, 예안, 봉화, 영천, 예천, 함창, 상주 등이었다. 벽산이 위촉받은 오읍도집강은 농민군을 효유, 진무하고 치안의 기강을 확립하는 임무를 담당하던 직책이었다.
1896년 10월 벽산의진의 해산을 끝으로 을미의병은 일단 종식되었다. 그러나 1905년에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다시 봉기하였다. 을사의병의 이념을 보면 구국이념과 척사사상이 혼재되어 있었고 반침략적 구국운동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벽산은 을사조약 직후에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는 한편 서양 각국에도 포고문을 발송하면서 역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즉, 만국공법에 따라 일제의 횡포를 누르고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전국민의 을사조약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에 벽산은 고향으로 내려온 뒤 사흘만인 1905년 12월 29일(음) 영양읍 장터에다 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거의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1906년 1월 3일(음) 오읍도집강 시절 양성한 5∼60명의 포수을 주측으로 의병을 모아 다시 거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을미의병 해산 뒤 10년만에 대의의 명분을 위해 뜻을 가다듬은 것이었다.
하지만 벽산의진은 항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영양군수 이범철(李範喆)과 안동주재 일본군의 출동으로 해체되었으며, 벽산도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벽산은 곧 대구 경무국으로 압송됨으로써 재기의 꿈은 무산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벽산의 일족은 일본군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재산을 강탈당하는 등의 큰 타격을 입었다.
대구 감옥에 갇혔던 벽산이 괴질에 걸려 방면되었으며, 이때 고종의 밀칙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벽산은 삼남지역에 격문을 발송하였으나, 그 자신은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괴질의 여독이 아니더라도 주변 여건이 그로 하여금 재기할 수 없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을미·을사의병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었기에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고, 그동안 정성을 다해 훈련시켰던 포수들도 흩어져 다른 의진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경제적인 타격까지 받은 상태라 다시 거의 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남에 격문을 발송하는 이상의 활동은 펴지 못하였다. 그가 삼남에 돌렸던 통문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척사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계몽운동으로의 혁신과 영흥학교
을사의병 때 벽산은 고종의 밀칙을 받고 기의를 꾀하였지만, 주변여건으로 인하여 그 활동은 을미의병에 비해 둔화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서울에 있으면서 국제 정세의 흐름을 얼마간 파악했을 것이고, 조병희(趙秉禧)와 교유를 통해 사상의 변화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병희는 영양 주실 출신으로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로,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등의 회원으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혁신유림이었다. 벽산은 1907년 다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방면되었다. 이후 벽산은 의병활동이 벽에 부딪힘에 따라 사상의 동요가 있었을 것이다. 을사조약 직후에 상경하였던 벽산은 세상이 급변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고, 또 신문물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정미조약(1907)이 체결되고 일제의 주권 침탈은 첨예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일반적인 추세는 해외 독립군 기지의 건설과 계몽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벽산은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영흥학교를 설립하면서 계몽주의자로 변신하였던 것이다. 당시 일제가 향교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음모를 꾸미게 되자, 전국적으로 혁신유림이 주동이 되어 향교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경북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안동의 '협동학교(協東學敎)'이다.
벽산은 조언찬(趙彦瓚), 조인석(趙寅錫)과 함께 1908년 6월에 '영흥학교(英興學敎)'를 창설하였다. 1908년 11월 1일에는 영양객사를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였고, 학부의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으며, 벽산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교장직을 사임한 것으로 보인다.
객사는 옛날 관찰사를 위시하여 대소관리들을 수령이 영접, 숙박하게 하고, 또 빈객을 맞이하던 곳이다. 영양객사는 1699년에 현감 한세기(韓世箕)가 현 영양초등학교 자리에 동향으로 2동을 가지런히 지었던 것이다. 객사가 들어서기 전에는 서원이 있던 자리였다. 1577년 청기면 대명동 돈간재에 일시 은거하던 청계 김진(靑溪 金璡)이 향인 노소 수십인과 더불어 주창,발기하여 창건한 것이 영산서당이다. 이후 영산 서원으로 승격되어 영양읍 현동으로 이건하여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을 모시게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철폐되어 현재는 건물터만이 남아 있다.
1911년 8월 23일 일제총독부의 학제개혁으로 인하여 영흥학교는 폐지되었고, 영양공립보통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영양공립보통학교의 학제는 4년제였으며, 1921년에 6학년제로 변경되었다. 영흥학교의 학제나 교재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운영형태를 알 수 없지만, 전국에서 실시되었던 초등교육기관의 형태와 비슷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벽산이 영양의 혁신유림과 더불어 영흥학교를 세웠다는 것은 종래의 의병활동과는 다른방식 즉, 교육을 통한 구국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벽산은 영흥학교를 통한 계몽운동을 계획대로 진행시키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11년 9월에 학교가 폐지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09년 5월 3일자 {황성신문(皇成新聞)}에 의하면 영흥학교 운영에 영양군수가 참여한 것으로 보아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운동의 차원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육의 규모는 개화교육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학을 중심으로 한 서당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도해순국과 절명시
구국의 의지를 의병·계몽운동 등으로 전개했던 벽산은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순절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충효의 전통적 윤리관으로 볼 때 부모를 두고 앞서 죽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순절은 부모의 사망 후 결행되었다. 이때 벽산의 심정은 그가 도해하기 전인 1914년 11월 2일에 손자인 여래(勵來)에게 남겨준 유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나라는 망하고 또 부친마저 별세하니 전국시대의 재나라의 노중운처럼 도해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순절을 결심한 그는 이튿날 오랜 친구이며 의병창의 때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김병식(金秉植)을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김병식은 청기면 대명동에 은거하고 있던 내앞의 종손이었다. 그리고 11월 6일에는 국내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남기고, 11월 7일에 집을 떠나 백여리나 되는 대진으로 가서 마치 신화의 한 장면과 같이 바다속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쳤다. 대진바닷가에는 '벽산선생김도현도해비(碧山先生金道鉉蹈海碑)'를 비롯하여 '천추대의도해단(千秋大義蹈海壇)'과 '조선의사벽산김선생도해비(朝鮮義士碧山金先生蹈海碑)'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벽산의 순절이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국가부도 사태로 IMF, 미국, 일본 등 강대국에서 외자를 유입해 왔다. 그리고 일본은 이것을 계기로 그동안 규제되었던 자동차, 영화 등 일본문화를 공식적으로 침투시키게 되었다. 백년전에는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의 선두주자로 한반도를 강점하였던 그들이 이제는 경제를 앞세운 제국주의로 변모하여 거세게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들이 아닌가? 우호적인 경제 지원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특히 일본은 어떠할까? 그들은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독도영유권문제 등 지금까지 풀지 못하였던 과제들에 대한 우리의 양보를 요구하지 않을까?
현재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남은 것은 무엇인가?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지키고 성장시킨 조국이라는 거대한 힘이 있지 않는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흘렸던 선조의 피를 그동안 외면만 하였던 우리지만, 이제는 그 정신으로 새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할 것이다.
일전에 방송매체에서 '아나바다'운동의 전개를 권유하였다. 이 운동은 서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을 비롯해 기득권을 가진 상류층의 인사들도 포함될 것이다.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들은 그들이 아니었던가. 현재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진정 국민들을 위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가. 말로만 대통합을 외치지 말고 이제는 몸으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제2의 창조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이에 벽산이 유유히 동해바다를 밟으며 순절하기 전 간절한 심정을 읊었던 절명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我生五百末 조선왕조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난 나
赤血滿腔腸 붉은 피 전신에 엉키었구나.
中間十九載 중년의 독립운동 19년에
鬚髮老秋霜 머리칼은 늙어 서리 끼었는데
國亡淚未已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親歿心更傷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萬里欲觀海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七日當復陽 이레가 마침내 동지이더라
獨立故山碧 홀로 외롭게 서니 예산만 푸르고
百計無一方 온갖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白白千丈水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足吾一身藏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심 상 훈(안동대 대학원 사학전공)
첫댓글 귀한 자료를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벽산 김도현 선생 후손과 영양군청 관계자에게 건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