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좋은 땅
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파종하는 자가 씨앗을 듬뿍 들고 나가 흩뿌리니, 혹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먹어버리느니라. 혹은 바위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해 낟알을 내지 못하고, 혹은 가시에 떨어져 찔리며 벌레의 먹이가 되니라. 혹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곡식을 맺으며 60배 120배의 결실을 맺느니라.
이 구절은 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로 알려져 있으며, 보다 나은 세상과 보다 나은 인간형의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1. **길에 떨어진 씨앗**: 이는 세상의 어려움과 유혹에 쉽게 굴복하여 그 가치를 잃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2. **바위에 떨어진 씨앗**: 이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려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는 우리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필요한 지원과 격려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3.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 이는 외부의 방해나 유혹에 의해 성장이 방해받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회적인 장애물이나 불공정한 조건들이 개인의 성장을 어렵게 하는 것을 상징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이는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잘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각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함을 의미하며, 이는 나은 세상을 위한 근본적인 목표가 됩니다.
종합적으로, 이 비유는 개인의 성장과 성공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도 크게 의존함을 보여줍니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적, 환경적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공정성, 평등, 상호 지원과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우리들은 적극적인 경청, 깊은 울림, 감동에 취약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자극에 노출되어 있으며, 사실 잘 듣지 않습니다. 마치 컴퓨터를 켜 놓고 듣고 있지만, 스마트폰을 하느라 딴 생각을 하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들은 시험을 겪습니다.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 했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제 무의식적으로 저장되는 기억 메모리에서 이것저것 복사해다가 붙여넣기를 합니다.
이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경청은 감정과 연결됩니다.그 내용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거나 슬픔을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이 긍정적이며 자신을 변화 시킵니다.그 감정이 기분 나쁘거나 혐오감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정통적으로 씨부리는 자의 비유는 나쁜 흙들의 나열과 좋은 흙의 비유로 우리 신앙 생활에서 좋은 신자의 조건과 나쁜 신자의 조건을 들어서 자신은 누구나 좋은 흙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나쁜 흙이라고 던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경구는 마치 네 사람의 경우를 듣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한 사람의 영적 변화의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영적 단계에서 우리는 누구나 길가의 씨앗 과정을 겪습니다.왜냐하면 영적으로 입문단계에 있는 사람은 마치 지하철역 앞에서 나이 지긋한 성도에게 전단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어떤 사람은 귀찮아서 안 받고, 어떤 사람들은 빨리 나눠주고 들어 가시게 받아서 안 볼 때 쓰레기 통에 버립니다.아직가진 하나님의 가르침은 길가에서 받는 전단지 취급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자기 소개서는 폐기되고 우리는 갈길을 갑니다.
혹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먹어버리느니라.
인간의 뇌는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모든 정보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예를 들어 불이 났다면 우리는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갈 것입니다.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우리는 별 생각없이 듣거나 ‘비판적인 사고’가 현실적으로 판단해서 ‘사이비’라고 매도합니다.우리의 비판적인 사고는 하나님의 초대를 무시하고 바쁜길을 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혹은 바위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해 낟알을 내지 못하고
설사 비판적 사고를 넘어서 마음을 내었다고 해도 또 다른 장벽에 가로막힙니다.우리의 과거는 뿌리가 깊으며 변화하기 어렵습니다.세례 요한이 불안한 이스라엘 정국에서 회개와 구원을 외쳤을 때,사람들은 로마의 침입에 언제 망할 지 모른 불안을 느꼈습니다.개다가 헤롯왕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며,자신의 정치를 비판하고 헐뜯는 사람들은 핑계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정당한 비판을 받아 들이지 않는 통치자들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심을 내었더라도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선 과거와 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마치 프로이드가 말하는 거대한 무의식과 해결을 봐야 합니다.우리는 공부하고 싶지만 잠도 오고,tv나 유튜브,틱톡도 봐야합니다.
종교적 가르침이 좋지만 그걸 따르기엔 너무나 어렵습니다.때대로 인간에게는 그런 기회가 옵니다.너무나 아프거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거나,배우자의 부정을 목겨갰거나하면 우리는 진심이 됩니다.그리고 구원을 받습니다.여전히 건강은 좋아지지 않고,주머니 사정도 나아지지 감정적인 정화나 고난의 시기에 힘이 되어줍니다.문제는 그 시기를 지나면 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천주교 상담소에 봉사를 한적이 있었는데 한 평생 독신을 하는 신부들이 성생활이 궁금했습니다.그래서 주임 신부님에게 물었는데 그것이 장난이냐?아니면 진지한것인가?라고 되물으셨습니다.성적인 유혹에 취약한 불쌍한 남성이 저는 그부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신부님은 다른 나이 지긋한 신부님이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자다가 몽정한 신부님이 속옷을 빨면서 찬양하시는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을 봤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약간 충격적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건 뭐든지 받아들이는 자세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우리늬 잘못된 습관은 바위처럼 뿌리를 내려 우리를 완고한 노인이 되게 합니다.
술 권하는 사회에 옛날에는 알콜중독이 큰 문제였다면 요즘은 인터넷 도박이나 특히 십대들의 범죄가 문제입니다.게다가 시대들의 범죄는 기존 성인 범죄의 모방을 넘어 점점 기성세대를 교체하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심대 이십대 범죄자들은 학교 폭력과 금품 갈취, 보이스 피싱의 알바생에서 점점 총책으로 다른 성인 범죄자들과 연대를 통해 네트워크화가 진행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범죄를 들키거나 처벌을 받으면 ‘자해’를 하여 양욱자가 자신을 혐오하게 만듭니다.사실 병원내에서도 말썽이 끊이지 않습니다.폐쇄병동은 현근 소지가 안되는데 그들은 내기나 게임을 통해 구실을 만들어 배달 음식을 시키는걸로 빛을 대신합니다.부모들은 사실 아이를 정신병동에 입원 시켰다는 죄책감과 아이가 이미 하교 폭력에 가해자이고 보이싱피싱의 총책이나 조직원이며,여자아이들의 성폭행범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을 꾸짖는 어른이 없습니다.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십대들을 가르치다가 폭행을 당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저는 오랜 기간동안 무술을 한지라 아이들은 저를 두려워합니다.그러나 이것도 도움이 안될 경우가 있습니다.그건 제가 근무하는 시간에는 사고를 안 치는 방법입니다.그들은 항상 마음씨 좋은 간호사나 보호사의 근무 시간을 노립니다.특히 교대시간에 그들은 마음에 안드는 환자를 때리고,물건을 훔치고 여성환자를 꼬여내어 성범죄를 저지릅니다.
오목을 두다가 이겼는데 ‘이기면 소원 들어 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 십대들 세명이서 여자 십대 환자와 성교를 할려다가 들킨것입니다.다행히 직원에게 발각되어 즉식 격리 조치를 하고, 부모에게 연락하고 경찰이 출동하여 조사하는등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지난 세월에 우리는 너무 십대를 억압하고 감정을 무시하고 체벌만을 해왔습니다.사회가 변화하고 점점 아이를 안 낳는 추세가 되니 우리는 과보호에 상전으로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은 어렵습니다.
이 책 도마복음은 비행청소년들이 ‘갱생’ 하는 것이 바위에 씨앗이 떨어진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저도 대안이 없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치료가 안되는 십대들은 결국 소녀분류심사원이나 소년원, 위탁가장에 가게 됩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소년범죄를 저지르고 부모의 필사적인 소년원행을 막기 위해 ‘나이롱’ 으로 입원한 것 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십대에 범죄를 저지르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합의금을 물어주고 가정법원에서 소년심판을 받고 소년원에 입소하여 보호관찰형을 받는 것이 성인범죄자와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기성 범죄자인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그들은 영적 회개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시험에 들게됩니다.때때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가 이제 d나 나간다는 분들을 봅니다.그 분들은 성당에 안 나가는 것이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생각하십니다.그러나 우리곁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시면 우리와 함께이십니다.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마치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계약을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계약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실망하고 포기하고 이제 손을 떼지만 하나님은 부모가 버린 자식이라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하나님은 인권을 넘어서 심리상담이나 약물치료를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그분의 시험과 여정에 우리가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놀라운 변화를 알게됩니다.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사주팔자도 부적도, 상담심리학도 약물치료도 우리의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 시킬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적 시험만이 우리를 변화 시키고 바꿀 수 있습니다.단단한 바위를 소나무의 뿌리가 뚫어 뿌리를 내리듯 우리의 영적 맹세와 기도가 우리의 아이들을 변화 시킵니다.
혹은 가시에 떨어져 찔리며 벌레의 먹이가 되니라.
어릴 적 울타리 대신에 가시를 넘어 이웃과 경계를 삼고, 탱자나무 가시가 열매를 맺으면 따다가 약술을 감던 기억이 납니다.그런데 왜 담을 안 쌓고 탱자나무 가시로 경계를 표시했을까요.당시에는 탱자나무가 흔해서 자전거를 미숙하게 타던 시절 탱자나무에 쳐 박혀 온 몸이 가시가 찔려서 힘들게 빼내던 기억이 납니다.무론 집에 선인장도 많았죠.
탱자나무 울타리를 사용하는 것에는 여러 긍정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와 함께 몇 가지 단점과 위험도 존재합니다. 탱자나무의 가시는 물리적인 장벽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만, 동시에 사람이나 동물이 다칠 위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면, 탱자나무 울타리 사용에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1. 소유권과 보호의 의미: 탱자나무 울타리는 '내 것'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소유권을 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소유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무단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2. 위험성과 안전 문제: 탱자나무 울타리의 가시는 사람이나 동물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요구합니다. 특히 어린이나 애완동물이 있는 경우, 또는 자전거나 오토바이 등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3. 사회적 신호: 탱자나무 울타리는 물리적인 장벽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 무단으로 들어오면 다칠 수 있다"는 강한 사회적 신호를 보냅니다. 이는 경계를 넘는 행위에 대한 경고이며, 일종의 억제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설치할 때는 이러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고려하여, 적절한 위치 선정, 안전 조치, 그리고 필요한 경우 경고 표지판 설치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는 울타리가 그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불필요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 중요합니다.
또한 대문은 끈으로 묶어 놓기는데, 담벼락에는 유리병을 깨서 날카로운 조각들을 시멘트로 고장 시켜 놓기도 했습니다.
문을 안 잠그거나 끈으로 묶는 관습, 이것은 과거에 이웃 간의 높은 신뢰와 긴밀한 공동체 의식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절의 특징입니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돌보고,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는 문화를 반영합니다.
그런데 담에는 유리병을 깨서 꽂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보다 방어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는 물리적인 보호 수단으로서, 무단 침입자에게 경고하고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관행은 불신과 방어적인 태도가 증가했음을 보여주며, 안전과 보안에 대한 우려가 커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 공동체 내 신뢰의 수준, 그리고 개인과 재산 보호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과거에는 이웃과의 신뢰와 공동체 의식이 더 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보다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더 넓은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변화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혹은 가시에 떨어져 찔리며 벌레의 먹이가 되니라.
지금은 예외 없이 다 자물쇠로 잠그고 다닙니다.어떤 집은 아예 비밀번호를 사용하기도 합니다.하도 세상이 흉흉하다보니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를 안 입기 위해 더욱더 조심합니다.민간 경비가 발달한걸 보면 당연한건지도 모릅니다.이제 과거에 이웃간의 높은 신뢰속에 공동체가 운영되는 시절은 지났습니다.저마다 가시를 세우고,도어락을 달고 민간경비업체에 이야기를 하여 cctv를 설치할 것입니다.내 소유를 주장하고 침범하는 사람을 처벌하는것은 가난한자 보다는 있는자들이 중요하게 신경 쓰는 부분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내 물건을 훔쳐 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물론 요즘은 묻지도 않고 살인과 폭력을 일삼는 이들 때문에 없어도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조심해야하는 세상입니다.그리고 내 소유를 침범했다는 이유로 가시로 찔러서 상대도 다치게 합니다.내가 살기 위해선 할 수 없는 일입니다.친한 환자가 프로그램으로 한자 받아 쓰기 시험을 보는데, 조금 정신이 온전치 않은 환자분이 가르쳐달라고 해서 안가르쳐 줬는데 어떻게 해야하나라고 물었습니다.
가시를 치고 소유권을 주장한것이죠.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너무나 인간적이 행동입니다.그래서 그 시앗, 하나님이 계획 하신 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는 소유욕과 안전욕구를 잘보여줍니다.
이건 다른 이야기이지만 공자의 제자에게 자로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공자는 논어에서 허구헌날 나무랍니다.사냥꾼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술과 고기 노는데 정신이 팔리고 에의가 없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그러나 자로가 취직하여 고나리가 되었는데 자신의 주군이 위험에 처하자 다 도망치는데 홀로 자로가 찾아가 싸우다가 잡혀서 처형 당합니다.그런데 그는 죽기전에 모자를 바로 쓰고 죽었다고 합니다.
‘군자는 죽을대도 의관을 바로 하고 죽는다.’
사회 지도층, 나라의 관리가 어떠해야 하난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영적 수행의 길은 나 자신의 소유는 뒤로하고 적당히 좋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물은 100도에서 끓습니다.98도가 되어서 물은 끓지 않습니다.우리의 영적 변화는 뒤에 남겨놓는 걸 싫어합니다.나의 인생,생명,소유물들을 다 날려도 좋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웃기는건 우리가 내 것을 지키려고 노력할수록 더 날린다는 것입니다.
도박이나 주식투자,코인투자,부동산 투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더 지킬려는 노력인데 실제로 잘못 선택하여 빚까지 지고 더 날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다른 사람을 돕다가 자신의 소유물과 생명을 날리는일만 어리석은 것은 아닙니다.인간은 참으로 약설적인 존재입니다.과거에는 이런 여러 종류의 땅에대한 비유가 신앙의 여러가지에 대한 비유라는걸 몰랐습니다.
게다가 무슨 비유처럼 좋은 땅처럼 좋은 신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좋은 땅이고 남은 잘못된 땅이라 여겼습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 땅들은 우리 안에 다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좋은 땅이 되었다가 흉년이 져 못 쓰는 땅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우리 마음이 인연에 따라 길가에 땅이나, 바위위에 땅이나 가시나무 아래 땅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곡식을 맺으며 60배 120배의 결실을 맺느니라.
여기서 좋은땅은 영적으로 고양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믿음과 진정한 회개 그리고 구원의 과정을 거쳐 영적 시험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마련하신 게획의 실현을 이야기 합니다.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과정이지만 마지막은 개인적인 과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과거 氣수련을 할 때, 스승을 못 찾아 33살이 되도록 인생을 낭비한 것 같아 하루 5시간씩 정좌수련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감탄하셨습니다.’하루 5시간식 앉아서 수련하는 회원은 처음이다.무슨 소원이든 이루것이다.’
수련은 마치 수십년을 고생하다가 마지막에 와선 폭발력을 발휘하는 희한한 특성이 있습니다.모세는 미디암에서 목자생활을 40년을 보냈습니다.길가에 흙이 좋은 흙으로 변해 신앙의 꽃을 피우는 것은 오랜 세월 단련과 번민 그리고 연구 시험속의 고단한 限의 응축인것입니다.이것은 개인의 공로이기도 하지만 개인것만은 아닙니다.에수님의 3년의 공생활은 단지 예수님만의 고난과 십자가 오르심과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다양한 시험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의 응원과 관심속에 이루어진것임니다.그리고 에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수많은 영적수행자들에게 영향을 미치 한 순간에 길가와 바위위와 가시밭길이 좋은 땅으로 변하는 기적중에 기적이 일어난것입니다.그것은 인루의 의식이 진화한 것입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의 율법을 넘어서서 사랑과 자비만이 유대와 로마, 그리고 전세계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길임을 증명 하신것입니다.
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파종하는 자가 씨앗을 듬뿍 들고 나가 흩뿌리니, 혹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먹어버리느니라. 혹은 바위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해 낟알을 내지 못하고, 혹은 가시에 떨어져 찔리며 벌레의 먹이가 되니라. 혹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곡식을 맺으며 60배 120배의 결실을 맺느니라.
인간의 마음은 훌륭한 땅과 같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진정한 가나안 땅입니다.우리가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고 선택할 때, 우리는 ‘예수천군’,’불신지옥’,사이비 광신자의 정신나간 흰소리가 아니라 진정한 길을 가르키시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알게 될 때 우리의 마음 땅은 변화하기 시작하고, 바위 같은 인가늬 탐욕과 분노와 이기심의 바위는 무서지고 모래알이 되고 마침내 가루가 되어 흙으로 변합니다.
영적 시험을 통해 우리는 가시밭길을 걸으며 면면히 인간의 허물이 벗겨지고 마침내 화려한 색깔의 나비가 나오게 됩니다.그 나비는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마침내 우리가 사는 이 공간은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됩니다.그럴 때 우리는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에수님의 인간성으로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수난받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무덤에 묻히고 부활하는 영광스런 순간을 지금도 알 수 겪을 수 있는것입니다.
성경속의 영적인 순간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신아생활 속에서 영적 순간들을 다시 겪습니다.우리는 모세의 기적을 보고,노아의 방주를 타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사화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우리는 갈리리 호수에서 베드로와 같이 고기를 잡을 수 도 있고,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도 볼 수 있습니다.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해야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사람들은 유튜브나 ott서어비스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영화속에서 드라마 속에서 가상 현실로 마음대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하고 나의 삶 속에 구현한다면 우리는 성경에 충실하며 우리가 사는 이세상을 보다 풍요롭게 가치있게 변화 시키고 우리가 사는 단 하나의 공간이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하나뿐인 나 자신을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시험과 고난과 계획이신 것입니다.
옛날 택시가 부족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갈 곳은 멀고 시간은 촉박할 때 우리는 소리칩니다.
‘따블!’,’따따블’. 우리가 좋은 땅이 되어 결실 맺을 때 우리의 노력은 ‘곱에 곱’을 받게 되어 개인 뿐만 아라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립니다. 그것은 항상 내가 투자하거나 바친 것보다 많습니다.이제껏 많은 선지자들이 보다 많은 것을 받았고,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보았습니다.우리는 요청하면 됩니다.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우리가 문을 열면 그분은 들어오십니다.’우리의 자유의지’는 그럴 때 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