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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다.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907년 헤이거 밀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용포를 입은 임금의 모습은 전통적인 의관 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
字는 시백, 號는 석파(石坡), 남영군 구의 아들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 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나라로 납치되어 3년간 유배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신미양요 아시아 함대 선상의 장병 1871.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 원정(5월16일 ~ 7월3일)을 단행했다.
명성황후 장례식 1897년.
상복 차림에 인산을 들고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침통한 표정들이다. 장례 행렬에 동원된 초롱은 5천 개나 되었다.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 의사(당32세).
여순(만주) 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한말 군인
항거하는 독립군
철도 방해죄로 처형 (1905년)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남, 이춘근, 안순서이다.
1904년 9월 오전에 용산 마포간 철도 부근 야산에서
처형되고 있는 현장의 사진이다.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 치하에 있는 한국인을 재판 없이 체포하여
일본 관헌은 이들을 즉석에서 처형하였다.
입은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은 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 국권이 없는 무능으로만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중앙에 있는 일본 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로일전쟁 당시의 의병 형(1904년)
이와 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후 3.1 일운동 때에도 재현되었고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손을 뒤로 묶고 철사줄로
목을 매어 치명적으로 처형시켰다.
민중 투쟁에 앞장 섰던 이상재와 이승만(왼쪽)
1902년에서 1904년 3년간 개혁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다 (당시 옥중 사진)
1904년
좌측이 이승만 씨(미국)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1910)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사형 그날까지 애국 충정으로 더욱 당당했다. 사형을 이틀 앞두고 여순 감옥에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은 프랑스 신부 홍석구 씨, 두 동생은 형님의 유언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1930년 항일 학생 교화 시간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 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낙들의 작업 현장
연자방아
도공
겨울 낚시
결혼식
결혼식 장면
맷돌질
곡물 고르기
다듬이질(나무 홍두깨)
다리미질하는 여인
절구질하는 민며느리
원산 부부 나들이
짐 배달꾼 1930년
주리틀기
동학혁명으로 체포되어 수모를 당하고 있다.
장옷 쓴 아녀자 1930년.
착색된 빛깔을 통해 당시 장옷의 색상을 알 수 있다.
항아리 물동이 1930년.
효수
동학 죄수들의 효수
마을 서당
서당
서당
남사당패
궁중 무관의 활 연습
부녀자들의 활 연습
장기 놀이
풍금
1915년 무희 교습소 개설
1930년 널뛰기
페허된 석굴암
구박물관으로 운반하는 에밀래종(봉황대 거리)
인천항
제주 물허박
제주 물구덕
제주 아기 구덕
제주 우장
제주 아기 구덕
손기정 선수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부산 영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1952-01-21)
공산권·중립국가 휴전선 감시위원단 탈퇴 요구 시위(1955,8,13)
미스코리아 결선대회 출전자들의 수영복 심사 광경(1957.5.14)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아기들(1957.5.15)
성형 수술 장면(1957.08.27)
약현 성당을 방문한 로마교황 사절 환영 플래카드(1959.3.9)
인기 영화배우 최은희 씨(1959.8.19)
4.19혁명 희생자 49제(1960.6.5)
펄벅 여사를 접견중인 윤보선 대통령 내외(1960.11.2)
김영복 씨 귀국 의상 발표회(1960.12.18)
제2공화국 출범 경축식(1960.10.1)
경복궁에서 군인 위문 공연(1961.5.29)
대학생 농촌 문맹 퇴치 계몽 활동(1962.1.11 )
KBS의 전신인 서울방송국 위문단 제주도 위문 공연(1962.3.24 )
화폐 교환 및 극빈자 쌀 배급(1962.6.10 )
화폐 교환하는 시민(1962.6.10)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낙선재 입궁(1962.6.14 )
한산모시 직포 광경(1962.7.23)
대한항공사 취항식(1962.12.1 )
이화여자대학교 77주년 기념 5월의 여왕 대관식(196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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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거리(1907)
칼을 찬 순경이 죄인을 감시하고 있고,
오른쪽 이발소 간판 밑에 가로등이 보인다.
명동성당(1905)
앞의 종탑은 명동성당이며, 뒤의 흰 3층 건물은 샬트 수녀원이다.
옛 조선호텔 앞 거리(1900)
일본에 의해 황궁우(皇穹宇)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소공동 중심가(1903)
당시 충무로와 소공동은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중앙의 누각은 현 조선호텔에 남아 있는 황궁우이다.
용산 나루터(1904)
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줄무늬 상의를 입은 소년과 목판에 엿을 담은 어린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다.
소년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마포 나루터(1900)
왼쪽에 밤섬이 보이고, 이곳 마포 나루터는 화물 선착장으로 유명했다.
옛 진고개 (1904)
진고개는 현재 충무로 2가의 고갯길로서
흙이 몹시 질어 '진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명동성당과 북악산이 보인다.
1906년 8척 가량 파내어 길을 닦고
높이 5척의 방주형 수멍을 묻었다.
이것이 서울시내 수멍 도랑의 시초이다.
광화문 전경(1907)
당시 이 거리는 도성에서 제일 넓은 거리였다.
왼쪽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있고,
오른쪽 건물엔 일본 관리인과 군 부대가 있었다.
소공동 거리(1907)
소공동 주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이 많았는데
일흥노약방 뒤로 원구단(園丘檀) 누각이 보인다.
서대문 밖 곡물 창고
당시 이 곳에는 곡물 창고가 있었고 왼편의 건물은 전차 수리소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중학천(1907)
뒤의 누각은 경복궁 동십자각이며 백악산 밑에서
경복궁을 거쳐 청계천과 합류하였다.
하천 주변의 주민들은 이곳을 빨래터나 목욕터로 이용하였다
청계천(1904)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는 하천이며
말 그대로 물이 맑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
독립문 앞 전경(1931)
각종 채소들이 집산되어 시내로 유입된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의주통이라 불렀다.
충무로 입구(1903)
충무로 입구에서 바라본 명동성당이다.
당시 충무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서부역 부근(1907)
이곳은 저지대라 비가 오면 진흙땅이 된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약현성당이다
♬ 베토벤 : 비창 소나타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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