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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수필문학의 진수 (9)
버트런드 러셀(Bertand Russel, 1872 - 1970)
1. 작가소개 및 감상
영국의 철학자, 수학자, 그리고 사상가로 캠브리지(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이 대학 강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반전운동을 하다 쫓겨나 1918년에 6개월간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 1910-13, 공저)>, <철학의 제문제(The Problems of Philosophy, 1912)> 등 명저를 낸 바 있지만, 후년에 와선 순수 학문에 관한 서적보다는 전쟁, 정치, 사회, 종교에 관한 수많은 서적을 펴냈고, 교육, 성(性), 이혼 등 영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걸쳐, 수많은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1950년엔 문학부문의 노벨상을 받았다.
‘그의 에세이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사상을 전달하고, 주의를 내세우는 좀 딱딱한 글이 대부분이지만, 논리의 명징성과 평이한 문체로 인해 많은 독자를 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시기심(Envy)>은 이러한 그의 에세이의 특징이 잘 나타내고 있다. 시기심이란 무엇이고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논리정연하면서 평이한 문체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시기심은 민주주의 기초가 된다.” 잘사는 사람을 시기하여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민주주의가 생기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도덕성에 어긋나는 죄를 저지를 기회를 가진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그러한 죄를 저지를 기회를 갖지 못해 시기하는 것이고, 그런 처벌을 받는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얻게 된다.”하여 최근 고위공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도 우리가 고위공직자가 되지 못한 시기심의 일부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할 것이다.
“시기심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가 가진 것으로부터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남이 가진 것으로부터 고통을 끌어내려 한다.” “보통 사람에겐 행복이 시기심의 유일한 치료법이다.” “남과 비교하는 버릇은 불행을 자초하는 짓이다.” 아무 이득이 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버릇을 갖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시기심을 버리고 행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난날에 정신의 폭을 넓혔듯이, 그의 감성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을 초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인의 경지에 다다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가까이 있는 듯하면서도 멀기만 행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는 연습을 위해 우리는 이러한 글들을 읽는 것이리라.
2. 전문 읽기
시기심(Envy)
버트런드 러셀
근심 걱정 다음으로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시기심일 것이다. 시기심은 가장 널리 그리고 깊이 뿌리박힌 인간의 감정의 하나이다. 시기심은 한 살도 채 못된 어린이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교육하는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특별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한 아이를 무시하고, 다른 아이를 두둔하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자리에서 눈치를 채고 원망한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철저하고 한결같이 그리고 항상 차별없이 대우하는 공평한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물론 어린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어른보다 시기심이나 질투(시기심의 특수한 형태)를 표현함에 있어 드러내놓고 표현할 뿐이다. 이런 감정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어른의 세계에서도 널리 똑같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우리집 가정부들의 경우,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떤 결혼한 가정부가 임신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기를 무거운 것을 들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다른 하녀들도 무거운 것을 들지 않으려고 했다. 할수없이 우리가 무거운 것들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시기심은 민주주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글리터스는 에베소(소아시아 서쪽의 옛도시: 역자 주)의 시민이 “우리들 사이에는 제1인자는 없다(그리스는 민주주의 국가여서 모두가 통치자라는 의미: 역자 주).”고 하자 “그러면 전 시민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민주주의 운동도 거의 전적으로 이러한 감정(시기심)에 고무되었음에 틀림없다. 현대 민주주의 경우도 같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하는 이상주의적 이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 자신도 이러한 이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어느 부문이고 이같은 이상적 정치 이론이 큰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강하게 작용하는 곳은 없다. 큰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변화를 정당화하는 이론이란, 언제나 이 감정(시기심)을 위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추진하는 힘이 있는 이 감정은, 의심할 나위 없이, 바로 시기심이라는 감정이다. 로랜드 여사(프랑스 정치가의 아내: 역자 주)의 회고록을 읽어 보자. 이 여인은 자주 대중봉사 정신이 투철한 고귀한 여성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그 부인이 열성적 민주주의자가 된 것은, 어떤 귀족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그 하인들이 거처하는 방에 안내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체 높은 부인들 사이에서 시기심은 유난히 큰 힘을 발휘한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다가 옷을 잘 입은 부인이 우연히 통로를 지나갈 때 다른 부인들의 눈초리를 지켜보라. 그 부인보다 옷을 더 잘 입은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심술궂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 여인의 흠을 잡을 구실을 찾느라 애를 쓸 것이다.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악의의 표현이다. 다른 부인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아주 미미한 증거만 있어도 곧 믿게 된다. 높은 도덕성도 똑같은 작용을 한다. 도덕성에 위배하는 죄를 범할 기회를 갖게 된 사람들도 남의 부러움을 사게 된다. 그래서 그 죄 때문에 처벌받는 것은 미덕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도덕성은 나름대로 확실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예를 들면, 고위공직자처럼 도덕성에 어긋나는 죄를 저지를 기회를 가진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우리가 그러한 죄를 저지를 기회를 갖지 못해 시기하는 것이고, 그런 처벌을 받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들은 위안을 얻게 된다: 역자 주)
똑같은 현상을 남자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여성들은 모든 여자를 그들의 경쟁자로 간주하지만, 남성들은 원칙적으로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시기심을 품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독자여, 당신께서는 한 미술가를 다른 미술가 앞에서 칭찬할 정도로 경솔한 일이 있습니까? 당신께서는 한 정치가를 같은 정당의 다른 정치가 앞에서 찬양한 일이 있습니까? 한 고대 이집트 연구 학자에게 다른 이집트 학자를 추켜 올린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열명 중 아홉 사람은 질투의 분노를 터뜨렸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후이겐즈(Leibniz, Huyghens: 두 사람 모두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사이에 오고 간 서신 가운데, 뉴턴이 미쳤다는 가상의 사실을 슬퍼하는 편지가 수 없이 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저 비길데 없는 천재 뉴턴이 이성을 상실하여 그의 천재성이 흐려졌다니 딱하지 않습니까?”고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명한 두 학자는 편지마다, 거짓 눈물을 흘렸는데, 속으로 분명 고소하다 했을 것이다(이 두학자는 뉴턴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역자 주). 사실은 그들이 위선의 눈물을 흘려 슬퍼하였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다만 몇 가지 이상한 행동이 그런 소문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든 속성 가운데, 시기심이 가장 불행한 것이다. 시기심이 심한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 하고, 문제가 발행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면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기심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가 가진 것으로부터 기쁨을 얻으려 하지 않고, 남이 가진 것으로부터 고통을 끌어내려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남의 이점을 빼앗으려고 한다. 자신도 이러한 이점을 갖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만일 남의 이점을 빼앗는데서 기쁨을 얻는 이러한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게 되면, 사람들이 가진 모든 장점에 치명적 피해를 입히게 되는데, 사람들이 가장 유용하고 독특한 기술을 구사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 장애가 된다. 예를 들면, 노동자는 일터로 걸어가야 하는데, 의사는 왕진을 갈 때 왜 차를 타야하는가, 왜 과학자는 따뜻한 방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조수들은 까다로운 화학원소를 연구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하고 특출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왜 힘든 집안일을 면제 받는가? 이 질문에 대해 시기심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시기심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감정, 즉 칭찬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칭찬을 증가시키고 시기심을 감소시킬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면 시기심을 고치는 약은 무엇이 있을까? 성인(聖人)의 경우엔 무욕(無慾)이라는 약이 있으나, 성인일지라도 다른 성인을 부러워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 시메온 스타일리쯔(6피트 높이의 돌 기둥 위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기독교 수도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끈에 달아 올렸다고 함: 역자 주)가 만일 다른 어떤 성인이 더 좁은 돌기둥위에서 더 오랫동안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인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보통 사람에겐 행복이 시기심의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시기심이라는 것이 또한 행복을 가로막는 무서운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린 시절의 불행이 시기심을 한없이 키우는 것 같다. 형제자매 중 누구 하나를, 한 아이가 보는 앞에서 두둔하면 다른 아이는 시기심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라서 세상에 나갔을 때 자신이 당했던 불공평을 맞딱뜨리게 되면 즉시 인식하게 되고, 또 그런 일이 없더라도 어디엔가 있으려니 상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별수 없이 불행하고, 이런 있지도 않은 가상의 불공평을 피하려고 경계하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된다.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자신의 이러한 신념이 옳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어린 시절의 또 하나의 불행은, 부모의 정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자라나는 경우이다. 불공평하게 위해준 형제자매는 없다 하더라도, 남의 집 아이들이 자기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남의 집 아이들과 제 부모를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자신을 이스마엘(구약성경에서 아부라함이 하녀에게서 낳은 아들: 역자 주)이라고 느끼게 된다. 어느 정도의 행복은 사람마다 타고난 권리이다. 그 행복을 박탈하면 별 수 없이 마음이 뒤틀리고 화를 내게 된다.
그러나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말할 것이다. “시기심을 치료하는 것이 행복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을 계속 시기하는 동안에는 행복을 느낄 수 없는데. 당신은 내가 행복을 찾을 때까지는 시기하기를 그칠 수 없다고 말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처럼 논리에 맞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내가 시기하는 원인만 알아도, 시기심을 고치는 쪽으로의 긴 과정에 한 발 내디뎠다 할 것이다. 남과 비교하는 버릇은 불행을 자초하는 짓이다. 무슨 기쁜 일이 있으면 한껏 즐겨야 한다. 다른 사람에겐 더 기쁜 일이 있을거야 - 그런 생각하느라 내가 즐겨야 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말한다. “그렇네요. 오늘은 햇빛이 따사롭고, 때는 봄이고, 거기다 새는 지저귀고, 꽃은 만발하였군요.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시실리섬의 봄철은 천 곱절이나 더 아름답고, 새들은 헬리컨(그리스 남부에 있는 산으로 아폴로와 뮤즈가 살던 곳이라 알려짐: 역자 주) 숲에서 더 기막히게 노래하고, 새런(고대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의 기름진 평야:역자 주)의 장미는 나의 정원의 장미보다 훨씬 더 탐스러울 것입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태양은 침침해지고, 새 소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지저귐이 되고, 꽃들은 잠시 바라볼 만 한 가치도 없어 보인다.
인생의 다른 즐거움도 모두 이런 식으로 다루게 된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마음 속 여인은 사랑스럽죠.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나를 사랑하죠. 그렇지만 시바의 여왕은 얼마나 절세의 미인이었을까. 아아, 내가 솔로몬 왕이 될 기회만 있었더라면”하고. 이처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시바의 여왕이건 이웃 사람이건, 불만의 씨가 되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계속 즐길 뿐이지, 남이 다른 것을 가졌다 해서 시기심을 품지 않는다. 사실 시기심은 일종의 악덕이라고 하겠는데, 비록 부분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지적일지라도, 사물 그 자체를 그대로 보지 않고, 다른 사물과 비교적인 관계에서 보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만큼 충분한 봉급을 받고 있다고 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 나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 내 봉급의 두 배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내가 만일 시기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가진 것으로부터 얻는 만족감이 줄어들고,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상하기 시작한다. 이런 모든 증상에 대한 적절한 치료방법으로 마음의 수련이 필요하다. 아무 이득이 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버릇을 갖는 것이다. 결국 행복보다 더 부러워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만일 내가 시기심을 고칠 수 만 있다면, 나는 행복을 얻을 수 있고, 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 두 배의 봉급을 받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자기 봉급의 두 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속이 쓰릴 것이고 - 그런 식으로 시기심은 계속 된다. 만일 당신이 명예를 탐내면 나폴레옹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시저를 부러워했고, 시저는 알렉산더대왕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 알렉산더대왕은 틀림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큘리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역자 주)를 부러워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했다는 것 하나 만으로 시기심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역사나 전설 가운데는 언제나 당신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아가는 길에 얻어지는 만족을 기쁘게 받아들임으로, 또 해야 할 일을 함으로, 그리고, 당신이 상상하는 사람들 - 아마 터무니없는 상상이겠지만 - 이 사람들이 당신보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 이렇게 타인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버릇을 피함으로, 시기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필요한 겸손은 시기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겸손은 미덕으로 생각되나, 내 생각으론 그것이 극단에 이르면, 미덕이 될지 매우 의심스럽다. 겸손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감을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다. 그들은 흔히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시도하기를 주저한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늘 접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의 빛이 흐릿해진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특히 남을 시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시기심에서 불행한 감정으로, 다음에는 악의로 기울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아이를 키울 때 아이들이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도록 교육시키라고 하고 싶다. 어떤 공작새든 딴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할 것 같지는 않다. 저마다 자기 꼬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듣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작새는 평화로운 새가 된다. 생각보라, 만일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생각이 틀린 것이라고 듣게 되면, 공작새의 삶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다른 공작새가 꼬리를 펴고 있는 꼴을 볼 때마다, 이렇게 자신에게 타이를 것이다. “내 꼬리가 저놈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돼. 그건 속임수야. 그런데 내 꼬리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보기싫은 놈은 화사한 제 날개에 저렇게 자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저놈의 털깃을 몇 개 뽑을까? 그러면 아마 저놈하고 비교해도 겁날게 없겠지.” 혹은 그 새에게 함정을 파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는 공작새답지 않은 행동을 취하여, 고약한 죄를 진 공작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또 공작새들의 대표들 모임에서 그를 고발도 할 것이다. 점차로 특별히 아름다운 꼬리를 가진 공작새들은 거의 언제나 고약한 공작새라는 원칙을 세우려 할 것이다. 그러면, 공작새 왕국의 현명한 통치자는 몇 개의 더러운 꼬리털을 끌고 다니는 볼품없는 새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이런 원칙이 세워지면, 아름다운 공작들은 모두 죽음에 처해지고, 나중엔 정말로 아름다운 꼬리는, 지난날의 기억으로나 남을 것이다. 이런 것이 도덕심의 가면을 쓴 시기심의 승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작새마다 다른 어떤 공작새보다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모든 억압은 필요가 없다. 공작새는 저마다 경쟁에서 일등상을 탈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자기의 암컷의 아름다움도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에, 저마다 그럴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시기심은 물론 경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우리의 손이 미칠 수 없는 행운은 탐내지 않는다. 사회계급이 굳게 정립된 시대, 빈부의 차이가 신의 섭리에 따라 정해졌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류계급이 상류계급을 시기하지 않았다. 걸인들은 백만장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보다 잘 사는 걸인들을 부러워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사회신분의 불안정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평등원칙은 시기심의 영역을 크게 확대시켰다. 이것이 죄악이라고 하겠지만 당분간은 보다 바른 사회제도를 찾아내기 이전에는 견뎌내야할 악인 것이다. 불평등이 합당한 것으로 생각되면, 보다 고차원적 가치에 근거를 두지 않는 한, 불평등은 공정한 것으로 보인다. 불평등을 부당하게 보는 순간, 부당한 것을 제거하는 길 이외엔, 그로 인해 초래되는 시기심을 교정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시기심이 유별나게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시샘하고, 빈국은 부자 나라를 부러워하고, 여자는 남자를 샘내고, 도덕적인 여자는 부도덕해도 벌을 받지 않는 여자들을 시기한다. 시기심이 서로 다른 계급이나 다른 국가사이 그리고 남녀 사이에서 평등을 가져다 주는 원동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시기심으로 얻어지는 그러한 정의는 가장 좋지 못한 정의라고 하는 설도 동시에 진실이라 하겠다. 즉, 그런 논리는 불행한 사람의 즐거움을 늘리는 것 보다는 행복한 사람의 즐거움을 줄이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 생활을 좋지 않게 만드는 감정 역시 공공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시기심같은 죄악에서 무슨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회제도의 근본적 변화와 사회정의가 확대되기를 바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시기심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이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희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좋지 않은 일들은 상호 연관성을 가져서, 한 가지 악이 다른 악의 원인이 되기 쉽다. 그중에서 특히 피로감은 흔히 시기의 원인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때 불만을 품게 된다. 일이 힘들지 않은 사람 쪽으로 시기심이 작동하기 쉽다. 시기심을 감소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피로감을 줄여 주는 일이다. 그런데 훨씬 더 중요한 일은 본능적으로 만족스러워 하는 삶을 확고히 하는 일이다. 순전히 직업적인 것으로 보이는 많은 시기심은 성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결혼과 자녀에서 행복을 누리는 남자는, 다른 남자들이 더 부유하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크게 부러워하지 않는다. 자녀들을 그가 옳다고 느끼는 길로 양육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인간 행복의 요건은 단순하다.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교양이 있는 사람은 정말 무엇이 부족한지 스스로 고백할 수 없다. 시기심 가득한 눈으로 잘 차려입은 여자들을 바라보는, 앞서 말한 여자들은 본능적인 삶에 있어서 불행함에 틀림없다. 본능적 행복(의식주같은 삶의 기본적 요건에서 오는 행복: 역자 주)은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문화에서는 드문 일이다. 특히 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문명은 방황하고 있는 듯 싶다. 행복이 덜하면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이런 조치가 강구되지 않으면 우리 문명은 증오의 진흙탕 속에 빠져 파괴로 치닫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 옛날에는 이웃 사람들을 부러워할 뿐이었다. 그밖에 사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교육과 간행물을 통해, 단 한 사람도 아는 자라고는 없는 인류라는 커다란 계층에 대해 막연히나마 알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 부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알고 있고, 신문을 통해 외국의 수많은 부정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선전을 통해 피부색이 다른 인종의 사악한 관습도 알게 되었다. 황색인종은 백인을 미워하고, 백인은 흑인을 미워하고 있다. 이런 모든 증오심은, 선전에 의해 선동되고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좀 피상적 설명이라 하겠다. 선전이 호의를 불러일으키려 할 때에 비해 증오심을 선동할 때 더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의 마음은 현대문명이 그렇게 만들었듯, 호의보다는 증오심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 또 사람의 마음이 증오심으로 기울기 쉬운 것은 무언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마침내 인생의 의의를 상실해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연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제공하는 온갖 좋은 것을 차지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생활에서 쾌락의 실제적 양은 원시적 사회에서 찾을 수 있었던 양보다 많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쾌락에 대한 의식의 범위는 훨씬 더 증가하였다. 아이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갈 때는 항상 관찰하게 되는 것처럼,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거나 밤을 까고 있지 않을 때는, 그 눈에 이상하게 슬픔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돼야 하는데, 그 비밀을 찾지 못한 것이다. 진화의 노정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그들 사촌들은 계속 진화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데 그들은 뒤쳐진 것이다. 무엇인가 유사한 긴장과 고뇌가 진화된 인간의 영혼 속에도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손에 잡히는 거리 안에 무엇인가 보다 나은 것이 있는 줄 알지만, 어디서 구해야 할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그의 친구에게 - 그도 똑같이 길을 잃고 똑같이 불행한 사람이지만 - 짜증을 내는 것이다. 우리는 진화의 과정에서 한 단계에 더 도달하였지만, 그 단계는 마지막 단계는 아니다. 우리는 그 단계를 시급히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대부분 도중에서 멸망하고 남은 사람은 의심과 공포의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시기심은 그 자체가 악이고, 그 영향이 무섭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악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시기심은 부분적으로는 영웅적인 고통의 표현이다. 밤중에 길을 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같은 것이다. 더 좋은 휴게소를 찾아 가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별수없이 죽음과 절망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문명인들은 지난날에 정신의 폭을 넓혔듯이, 그의 감성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을 초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워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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