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이에야스의 대망 제1부 갈대의 싹3
쌍학도
1
이나바야마를 물들인 푸른 녹음도, 나가라가와의 맑은 물결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초여름을 수놓고 있었다. 그러나 성에 사는 사람들은 지난해와 다른 성주를 모시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이토 타츠오키를 이세의 나가시마로 몰아내고 이곳으로 옮겨오자마자 곧 지명을 '기후'라고 바꾸었다.
부모와 형제를 이곳에서 잃은 노히메에게는 산과 강이 모두 노부나가 이상으로 깊은 감회를 떠올리게 했다. 소녀시절을 보낸 집은 전쟁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크고 작은 산과 새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리운 추억을 되살려주었다.
그날도 노부나가는 새로 쌓은 성밖 거리로 나가 성에 있지 않았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이미 뜻을 천하의 제패에 둔 노부나가는 이곳을 쿄토로 진입하는 거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 안팎을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새로 설치하는 시장의 지리와 인심을 살피며 돌아다녔다.
노히메는 성의 이곳저곳을 대강 나서 자기 거실로 오루이가 낳은 토쿠히메를 불렀다.
올해 아홉 살 된 노부나가의 장녀 토쿠히메가 드디어 이번 5월 27일에 오카자키 성으로 시집가게 되었다. 신랑인 타케치요도 같은 나이인 아홉 살인데, 노부나가가 수도진입을 결심하게 되면서 오다, 마츠다이라 두 가문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자, 이리 와 앉아라."
인형과 같은 모습의 토쿠히메가 툇마루에 나타나자 노히메는 가볍게 일어나 손을 잡고 맞아 들였다.
"자, 차를 끓여줄 테니 잘 보고 기억해두도록 해라."
"예."
토쿠히메는 자기를 낳은 오루이보다 노히메 앞에서 더 어리광도 부리고 또 순종하기도 했다. 차가 끓기를 기다리는 총명한 눈매는 노부나가를 많이 닮았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이치히메만은 못했지만, 오루이보다는 훨씬 더 미모가 뛰어났다.
노히메는, 비록 정략결혼이기는 하나 이 철없는 신랑 신부에게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결혼도 그랬지만,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아니라, 말하자면 상대의 집안에 들여보내는 첩자이고 인질이며 또한 신랑을 묶어놓는 사슬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방심하지 말고 신랑을 잘 감시해야 한다, 알겠느냐? 이상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알려야 한다."
아버지 사이토 도산은 자기가 노부나가에게 시집올 때 엄하게 다짐을 주었었다. 자기도 지금 토쿠히메에게 그와 똑같은 의미의 훈계를 해야한다.
찻잔을 건네고 약간 떨어져 앉은 노히메는, 토쿠히메와 나란히 앉아 있을 사위 타케치요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맛있게 끓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토쿠히메는 생모인 오루이가 가르쳐주었는지 차를 마시고 나서 예법대로 얌전히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 동작이 어른스러울수록 가슴이 더 아팠다.
"토쿠히메."
"예."
"혼례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니?"
토쿠히메는 순진하게 웃고 고개를 갸웃했다.
2
대답을 못하고 눈만 반짝거리는 토쿠히메를 안쓰럽게 보았다.
"그런 것을 물은 내가 잘못이다. 그럼, 시집가려는 집은?"
"예, 오카자키 성으로......"
"그래, 신랑의 이름은?"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님."
노히메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야스란 아홉 살인 타케치요가 신부를 맞기 위해 바꾼 이름이었다. 물론 위의 첫 자는 노부나가의 노부였다.
"노부야스 님의 아버님 성함도 알고 있느냐?"
"마츠다이라 이에야스......"
"어째서 아버님을 이에야스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
토쿠히메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던진 질문이었다.
"그 까닭을 말해주겠다."
"예."
"오다 집안은 너도 알다시피 어엿한 헤이시의 후예. 또 마츠다이라 집안은 겐지의 후예란다.
옛날 이 두 집안은 자주 싸웠어, 오랫동안 서로 적이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쿄토를 손에 넣고 있는 쇼군 아시카가는 겐지의 후손이다. 알아듣겠니, 토쿠히메?"
"예."
"이 말은 누구에게도 하면 안 된다. 그 겐지의 후손인 쇼군은 이미 세상을 다스릴 능력을 잃었어. 그렇다면 이것을 대신할 사람은 헤이시......라는 것이 아버님의 생각이시다."
"그러면......마츠다이라 집안과는 적이 되어야 하나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 아버님과 마츠다이라 집안의 아버님과는 각각 헤이시와 겐지이지만 사이좋게 천하를 다스리자고 굳게 약속하신 사이야. 그래서 노부야스 님은 아버님 성함에서 노부란 자와 마츠다이라의 아버님 성함에서 야스란 자를 사이좋게 하나씩 따서 이름을 짓게된 것이란다."
"노부야스 님의 아버님을 이에야스라고 하는 것은요?"
"아버님이 이전의 성에 계실 무렵 코묘 사란 절에 이소쿠거사라는 학승이 계셨단다. 그 학승은 병서를 좋아하여 겐지의 조상인 하치만타로 요시이에가 남긴 병서 마흔여덟 권을 암송하고 있었지."
"하치만타로의......."
"아버님은 이소쿠 거사에게 가르쳐달라고 했으나, 그것은 겐지 집안의 소중한 병서라는 이유로 헤이시에게는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그 내용은 겐지의 후손인 이에야스 님에게 전해지게 된 거야. 그렇기 때문에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이에라는 글자를 따서 이에야스 님이라 부르게 된 것이란다. 그 전에는 모토야스 님이라 했어."
토쿠히메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을 왜 자세히 말해주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알겠느냐? 자신이 전수받지 못한 그 비밀스러운 병서까지 일부러 이에야스 님께 전하게 하신 아버님의 그 넓은 마음을. 이렇게 겐지와 헤이시가 마음을 합쳐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두 집안의 약속. 만약 이 약속을 깨려는 자가 가신 중에 있기라도 하면 두 가문에는 큰일이지. 그럴 경우에는 시종을 시켜 즉시 이 성에 알려야만 한다."
어린아이를 설득시키는 것은 어른에게일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이런 말을 듣고 소꿉장난 같은 생활을 하러 시집가는 토쿠히메의 앞에는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예. 알았습니다."
토쿠히메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노히메의 손에 들려 있는 과자를 보았다.
3
노히메는 토쿠히메의 그 눈길을 보고 다시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과자와 과일 같은 것이나 좋아할 나이. 세상의 파란이나 음모 따위와는 거리가 먼 천진난만함을 간직하고 낯선 성에 가야만 한다. 토쿠히메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우연히 다이묘 집안에 태어난 딸들이 똑같이 짊어진 슬픈 운명이었다.
절세미인인 노부나가의 막내 여동생 이치히메는 오미의 아사이 집안으로 출가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타케다 신겐의 둘째아들 카츠요리에게는 노부나가의 조카 칸타로의 딸이 이미 출가해 있었다.
마츠다이라 일족은 물론 아사이, 타케다 일족도 모두 노무나가가 상경할 때는 틀림없이 그를 돕기 위해 가담할 것이고, 그밖에 또 딸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출가시켰다.
이세의 키타바타케, 오미의 롯카쿠, 에치젠의 아사쿠라 등은 모두 노부나가의 패업을 가로막는 험준한 산이었다.
노히메는 토쿠히메에게 과자를 주고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노부야스 님의 어머님 이름을 알고 있느냐?"
"예. 세키구치 마님이라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마님은 착한 분이......"
말하다 말고 토쿠히메가 불안해 할 생각에 얼른 정정했다.
"착한 분이었으면 좋겠는데."
"저는 정성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자식이므로......"
"아버님의 자식이어서......어떻게 하겠느냐?"
"외롭더라도 울지 않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만 해. 강한 사람이 될수 있도록 나도 너에게 널 지켜줄 칼을 하나 주겠다. 그러나 너무 강한 사람이 되어 노부야스님과 다퉈선 안 된다."
"노부야스님과는 화목하게 지내겠습니다. 노부야스 님은 저의 소중한 낭군이니까요."
오카자키에 가거든 공손하게 절을 해야 한다. 먼저 노부야스 님의 아버님을 뵈었을 때는......"
"잘 보살펴 주십시오."
"응, 그래. 어머님을 뵈었을 때도 똑같이 하면 돼. 그럼 가신들에게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토쿠히메는 순진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생모가 가르쳐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노히메는 부르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가신들에게는 여러 모로 폐를 끼치게 되었어요...... 의젓하게 앉은 채로 이렇게 말하도록 하여라."
"예, 이처럼 의젓하게 앉아서."
"응, 그래. 그렇게 말이다. 너무 상냥하게도 말고, 지나치게 엄하게도 말고......"
노히메는 이렇게 말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처럼 너무 많은 것을 일러주면 도리어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 뒤 토쿠히메는 잠시 노히메에게 안기듯이 하여 거문고 연습을 하고 돌아갔다.
조금도 어두운 기색은 없고 들놀이라도 가는 기분이었다. 복도까지 바래다주자 노히메에게 천진난만하게 절을 했다. 그리고 거문고를 뜯는 흉내라도 내는지 투명하고 작은 손을 가슴께로 올려 퉁기듯이 놀리면서 사라져갔다.
노히메는 잠시 후 발길을 돌려 생각난 듯이 불상을 모신 방으로 갔다. 그녀의 부모가 이 성 기슭에서 살해된 것도 지금과 같은 신록의 계절이었다.
4
살해당하는 자와 출가하는 자, 태어나는 자와 낳는 자. 이러한 복잡한 인간사는 각자의 자유의 사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조종하는 운명의 실에 따른 것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이것은 노히메가 서른이 넘어 인생유전을 갖가지 보아온 뒤의 원숙함에서 오는 생각이었다.
노히메는 불전에 향을 피워 진심으로 토쿠히메의 가호를 부처에게 빌고 나서, 오늘 한발 앞서 성을 떠나는 토쿠히메의 혼수품과 신랑에게 줄 선물을 일일이 살폈다.
이번 혼례의 정사로 짐을 총괄해서 오카자키로 가는 것은 사쿠마 우에몬노죠 노부모리. 토쿠히메를 돌보기 위해 오카자키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은 이코마 하치에몬과 나카시마 요고로 두 사람.
노히메가 혼수품들을 늘어놓은 바깥채의 큰 방으로 왔을 때, 사쿠마 노부모리는 직접 목록과 대조하면서 수많은 물건을 각각 궤에 집어넣고 있었다.
"수고가 많군요."
그말을 듣고 노부모리는 깜짝 놀란 듯 노히메를 돌아보았다.
"아니, 마님께서 일부러 나오셨군요."
붓을 든 손을 무릎으로 내리면서 반갑게 맞았다.
아홉 살 된 신랑에게 보낼 호랑이 모피가 있고 비단이 있었으며 안장과 등자가 쌓여 있었다.
"이 흰 비단과 홍매색 비단은?"
"예, 시어머니가 되실 마님에게 각각 오십 필씩."
노히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보다가 마루 옆에 놓인 큰 대야에 눈길이 갔다.
'무엇일까?'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길이 석 자가 넘을 큰 잉어 세 마리가 비어져나올 듯이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공중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었다.
"아니, 이 잉어는?"
"성주님께서 이에야스 님에게 보내실 선물입니다."
"아, 이렇게 귀중한 잉어를."
"예. 미노에서부터 오와리 일대를 모두 뒤져서 겨우 찾아낸 큰 잉어입니다."
"정말 크군요. 나는 처음 보았어요."
이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 커다란 잉어의 눈이 자기에게 향해졌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입의 두께도 사람의 것보다 훨씬 두꺼워 보였고, 미끈미끈하고 둥근 몸이 무섭게 느껴졌다.
"성주님 말씀으로는 이 한 마리는 나, 또 하나는 이에야스님, 나머지 한 마리는 신랑이라 생각하시고 소중히 기르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성주님의 큰 뜻을 이 거대한 잉어에 담아 보내는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노히메는 고개를 끄덕이고 잉어 옆을 떠나면서 문득 무언가에 발이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장난이 심한 노부나가가 입밖에 내어 말한 것 외에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때때로 잉어가 그 큰눈으로 이에야스를 흘끗 쳐다본다. 그때마다 선물을 보낸 노부나가를 상기하고 흠칫 놀라게 만들겠다는 그런 속셈. 어떤 것이든지 한도가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너무 커서 괴물처럼 보이는 것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대상은 되지 못한다. "오, 여기 와 있었군." 노히메가 잉어 옆을 떠나 투쿠히메의 혼수품 앞에 섰을 때였다.
"하하하."
노부나가가 여느때와 다름없이 그가 애지중지 하는 칼 미츠타다를 들고 밝은 소리로 웃으면서 나타나 마루에 서서 대야를 들여다보며 아내를 불렀다.
"여기와서 이걸 좀 봐요. 이에야스를 놀라게 할 괴물을 발견했소."
5
"정말 멋진 잉어네요. 이에야스 님도 놀라실 거예요."
다시 마루로 돌아와서 잉어를 보고 노히메는 저도 모르게 눈길을 돌렸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는 순간 잉어의 눈 가장자리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그속에서 탐욕스러운 검은 눈이 노히메를 흘끗 쳐다보았다.
"하하하하."
노부나가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이 잉어를 보고 이에야스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진귀한 선물을 보내셨다면서 가신들과 같이 요리를 만들어 잡수시지 않을까요?"
"뭣이, 이 잉어로 요리를 해서 먹을 거란 말이오?"
"예."
"그런 소리 말아요. 한 마리는 이 노부나가, 나머지 두 마리는 이에야스 부자요."
"성주님......"
노히메는 부드럽게 노부나가를 쳐다보았다.
"살아있는 생물을 사람에 비유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하......어느 한 마리가 죽어도 좋지 못하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노부나가는 또 소리내어 웃었다.
노부모리는 두 사람과 멀리 떨어져 열심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노히메와 나란히 앉자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그 정도의 것도 모르는 사람인 줄 아오? 이것은 이에야스가 성의를 보이는지 감시하는 잉어란 말이오."
"이 잉어가 감시를......?"
노부나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모리에게 잘 일러서 보낼 것이니 이에야스는 싫더라도 이것을 연못에서 기르지 않을 수 없을 거요."
"소중히 기르시겠지요."
"나는 때때로 편지를 보내 그 잉어가 잘 있는지 물어보겠소. 딸이 잘 있느냐고 물을 수 없지만 잉어에 대해 묻는다면 아주 자연스러울 거요. 알겠소?"
노히메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식따위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줄 알았던 노부나가가 그런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하하하하.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이 잉어를 볼 때마다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오. 잉어가 잘못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자연히 오다 쪽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게 마련이오. 다시 한번 잉어를 보시오. 이것이야말로 이에야스의 마음을 감시하는 충실한 역할을 하게 될 거요......하하하하. 아, 그 감시자가 큰 눈을 굴리면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군."
노히메는 저도 모르게 후유하고 안도의 숨을 쉬고 다시 한번 대야를 들여다보았다.
남편의 놀라운 성장.
여전히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지략. 그 지략을 가지고 카이와 타케다 집안을 비롯하여 미요시, 마츠나가 일족과 쇼군까지 조종하면서 쿄토에 진입하려 하는 남편.
"놀랍습니다."
노히메는 마루에 두 손을 짚었다.
"하하하......"
노부나가는 밝은 햇빛처럼 웃었다.
"좌우간 경사스러운 일이오. 이 혼례가 끝나면 이에야스는 마침네 토토우미를 평정하려 들것이오. 그렇게 되면 오다와리도 카이도 그쪽에 정신이 팔려...... 그렇지 않겠소?"
수도로 진입하려는 노부나가의 방해는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는 목을 움츠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6
토쿠히메가 출가하는 에이로쿠 10년 5월 27일. 이날 오카자키성의 표정은 지극히 복잡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으로 이에야스가 웅비할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노부나가에게 굴복하여 결국 사슬에 묶이는 결과가 된다고 비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가마의 행렬이 성문으로 들어올 때까지 본성의 거실에 틀어박혀 문서 책임자인 케이타쿠를 상대로 하여 새로운 인사배치를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근시도 가신도 근접시키지 않고 때때로 생각난 듯이 부채질을 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선진을 담당할 무사의 총대장은 사카이 타다츠구와 이시카와 크즈마사. 이 두사람 밑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말해보아라."
케이타쿠는 이마의 땀도 닦으려 하지 않고 탁자위에 있는 장부를 넘겼다.
"사카이 사에몬노죠 타다츠구를 따를 분들은 마츠다이라 요이치로 타다마사, 혼다 히로타카, 마츠다이라 야스타다, 마츠다이라 코레타다, 마츠다이라 키요무네,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마츠다이라 야스사다, 마츠다이라 노부카즈, 마츠다이라 카게타다외에 마키노 야스나리, 오쿠다이라 미마사카, 스가누마 신파치로, 스가누마 이즈노카미, 스가누마 교부, 토다 단죠, 사이고 키요카즈, 혼다 히코하치로, 시다라 엣츄님 등입니다."
"그럼, 나이토 야지에몬은?"
"예. 이시카와 카즈마사님의 막하에."
"그래? 그러면 카즈마사를 따를 사람은 나이토 야지에몬, 사카이 요시로,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스즈키 효고, 스즈키 키이......" 꼽아 나가다가 말했다.
"좋아. 그러면 본영의 무사들을 말해 보아라."
"예. 본영의 전위대장은 마츠다이라 진타로, 토리이 히코에몬, 시바타 시치쿠로, 혼다 헤이하
치로, 사카키바라 코헤이타, 오쿠보 시치로에몬, 마츠다이라 야에몬님 등 칠기입니다."
"케이타쿠."
"예."
"어떠냐. 이렇게 셋으로 나누었을 때 어느쪽이 가장 강할 것 같으냐? 네가 적이라면 우선 어디부터 공격하겠느냐?"
"황송합니다마는,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음......그래, 알겠다. 다음에는 성에 남아 수비를 맡아볼 사람을 말해보아라."
"예. 사카이 우타노스케 마사이에, 이시카와 휴가노카미 이에나리, 토리이 이가노카미 타다요시, 히사마츠 사도노카미 토시카츠......"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에야스가 문득 손을 쳐들었다.
"그 다음에 아오키 시로베에의 이름을 적어넣어라. 그밖에는 나카네 헤이자에몬, 히라이와 신자에몬, 혼다 사쿠자에몬, 혼다 모모스케, 미야케 토자에몬등 다섯 명이었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리고 세명의 부교는 오스, 코리키, 우에무라다."
"다음에는 아시가루와 감시병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우에무라 데와, 와타나베 한조, 핫토리 한조, 오쿠보 타다스케도 모두 명부에 올라 있겠지?"
"빠짐없이 적어놓았습니다."
"코소 중에 아마노 사부로베에도 들어있지?"
"예."
"깃발을 담당할 자, 뱃사공, 물자수송을 담당할 자, 문서관리자, 의사, 요리사, 돈을 맡아보는 자......"
갑자기 성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토쿠히메의 행렬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7
키에타쿠가 고개를 들었다.
"도착하신 것 같은 데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마를 찌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타쿠, 내가 노부나가 님의 사슬에 묶였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면서?"
"예. 아니, 그런 말은."
"못 들었다는 말이냐?"
이에야스는 씁쓸히 웃었다.
"노부나가 님은 지금 둑을 무너뜨리고 흐르는 분류와도 같아. 아무도 그 흐름을 막지 못해. 아마 가까운 장래에 높으신 어른으로부터 밀칙이 내릴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 쿄토로 진격하시는 건가요?"
이에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키에타쿠, 나도 역시 물이야."
"예?"
"거세게 흐르는 물은 아니다마는, 그러나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그쪽으로 흐르기를 사양치 않는 물이다. 요시다 성도 손에 넣었다. 타와라도 함락했다. 앞으로 어디로 흐르게 될지는 너도 알수 있을 것 아니냐?"
"예, 아니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히쿠마노에서 카케가와로 흐를 것이다."
말하다 말고 창밖의 창공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흐르는 물은 답답해 보이게 마련이지. 그러나 이 물도 서로 뜻이 맞는 것끼리 모이면 폭포도 될수 있고 분류가 되기도 한다. 케이타쿠, 서두르지 말자. 서서히 큰 강물이 되자는 말이다."
"예."
"나는 앞으로도 결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도 멈추지 않겠다."
이때 발소리가 나면서 코쇼의 우두머리인 아마노 사부로베에가 들어왔다.
"성주님, 일행이 도착하셨으니 준비하시지요."
"음, 도착했느냐?"
"예. 신부는 이미 둘째 성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면의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기분은 좋아 보이더냐?"
"예. 성에 막 들어왔을 때는 불편해하더니 잠시 후 기분이 좋아지셨습니다."
"허어. 어째서 불편해 했을까?"
"예. 다름이 아니라......소변을 참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소변을 참느라고 그랬다는 말이지. 나도 그런 기억이 있어. 슨푸 성에서 신년 축하연이 행해질 때였지. 그래서 나는 마루에서 정원에 대고 용변을 보았지만, 토쿠히메는 그럴 수도 없었을 거야. 알겠다. 곧 나가겠다."
이에야스는 즐겁다는 듯이 웃고 케이타쿠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그만하자. 아직 인사문제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된다."작은 소리로 말했다.
케이타쿠는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의 서류를 정리하여 문갑에 보관하러 갔다.
이에야스는 일어났다.
노부나가의 장녀가 어떤 얼굴로 무어라 말할지를 생각하며 서원 뒤의 방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가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마음이 어두워졌다. 이 혼례를 병적으로 혐오하고 있는 아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자기와 나란히 앉을 것인지.
'가엾은 여자......'
어째서 세나는 이에야스라는 사나이의 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8
오다 쪽에서 보낸 예물이 산더미처럼 쌓인 넓은 방에 이에야스가 착석하자 곧 사쿠마 노부모리가 목록을 읽어내려갔다.
염려했던 것보다는 세나도 밝은 표정으로 마주앉은 토쿠히메를 보고 있었다.
토쿠히메는 좌우에 로죠와 시중드는 사람을 거느리고 티 없는 얼굴로 신랑이 된 노부야스와 노부야스의 누나 카메히메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오와리와 미노 두 곳의 태수과 된 노부나가의 맏딸다왔다. 이에야스 일가 뒤에 도열해 앉은 오카자키의 노신들에게 전혀 주눅이 드는 기색이 없었다.
목록을 읽고 나서 사쿠마 노부모리는 자리에 앉아 양가의 만만세를 축원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노부모리의 인사가 끝난 뒤 로죠가 가만히 토쿠히메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토쿠히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에야스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공손히 두 손을 짚었다.
"토쿠이옵니다. 오래도록 보살피고 인도해 주십시오."
"오, 착하도다! 내가 노부야스의 아비 이에야스다. 화목하게 지내기 바란다."
토쿠히메는 생긋 웃고 이번에는 세나 쪽으로 향했다. 세나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어머님, 토쿠이옵니다.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래. 내가 노부야스의 어미다. 잘 지내보자."
"예."
토쿠히메는 손위 시누이인 카메히메를 무시하고 죽 늘어앉은 일족의 조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인사말을 잊은 모양이었다.
"저어......"
약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여봐라."
"예."
"수고가 많구나."
예."
세나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 성에서는 세나조차 이처럼 노신들을 내려다보지 못했다.
이에야스도 놀라는 듯했으나, 험악해진 공기는 다음에 이어진 신랑과의 천진한 대화로 곧 누그러졌다.
"노부야스 님."
토쿠히메가 부르자 무릎에 단정하게 손을 얹고 있던 노부야스는 등을 꼿꼿이 세웠다.
"응, 왜 그래?"
"우리 사이좋게 소꼽놀이를 해요."
로죠가 깜짝 놀라 소매를 잡아당겼으나 이때 신랑인 노부야스가 일어났다.
"그래, 좋아."
노부야스의 시중을 들던 히라이와 신자에몬이 당황하여 노부야스의 하카마를 붙잡았다.
"내버려 둬."
노부야스는 이를 무시했다.
"이리 와서 봐, 큰 잉어가 있다."
"예."
토쿠히메도 일어났다.
그 자리에는 무의식 중에 소리없는 웃음이 퍼지고 있었다. 노부야스에게 손을 잡힌 토쿠히메가 아주 자연스럽게 남편을 따르는 어린 아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만이 소리내어 웃었다.
노부야스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많은 예물 중에서도 그 큰 잉어였던지 곧바로 대야가 있는 데로 걸어갔다.
"이 잉어 정말 크지?"
토쿠히메는 그것을 처음 보기 때문에 눈이 휘둥그래져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잉어에 대해서는 주군 노부나가 님께서 전해달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사쿠마 노부모리가 웃고 있는 이에야스 쪽으로 향했다.
9
"허허, 살아있는 잉어를 보내주셨군. 고마운 일이야."
"예, 미노와 오와리를 관통하는 키소가와에서 운 좋게 살아있던 큰 잉어입니다. 하나는 이에야스님, 또 하나는 노부야스님, 나머지는 저의 주군이라 생각하시고 연못에 기르시면서 오래도록 감상하시기 바란다는 뜻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시군. 그럼, 어디 나도 좀 구경해볼까."
이에야스는 일어나서 대야 곁으로 걸어갔다.
"오오, 대단해! 놀라워!"
잉어를 내려다보던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와 토쿠히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큐자부로, 어서 이 잉어를 연못에 놓아주어라.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잘 돌보도록 네 윗사람인 킨아미에게 일러라. 알겠느냐, 경사스러운 잉어이니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는 잡무를 담당하고 있는 스즈키 큐자부로를 불러 명했다.
"예."
스즈키 큐자부로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대야 앞으로 가서 잉어를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얼굴을 돌렸다. 아마도 기후 성에서 노히메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전율을 그 역시 이 거대한 괴물을 보고 느꼈던 모양이었다.
잉어가 연못에 풀려나자 노부야스는 토쿠히메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나가 잠시 그 세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안도한 표정으로 방에 돌아왔다.
혼례는 그날 밤 무사히 치러졌다.
운명의 전각에 나란히 앉아있는 한쌍의 학은 양쪽 모두 좋은 상대를 얻은 만족감으로 자못 즐거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거처는 당분간 츠키야마 전각과 가까운 동쪽 별채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 무렵 이에야스는 이미 자기 생애를 이 작은 성에서 끝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미노를 제압한 뒤 밀칙이 내리도록 은밀히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 역시 노부나가와 같은 거리에서 웅비할 뜻을 세우지 않는다면 뒤떨어질 뿐이었다. 아니, 그 준비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문서를 다루는 행정관 뇨셋사이에게 명해서 임임관에 대한 것을 조사하고, 교토의 고관 코노에 사키히사와 요시다 카네미기 등에게 남모르게 선물을 주어 알선을 부탁해 놓았다.
서임임관이 됨으로써 일개 토호의 지위에서 벗어나 토토우미를 손에 넣고 서서히 스루가로 세력권을 넓힌다......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성은 노부나가의 사위인 노부야스에게 맡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노부야스가 본성으로 들어가는 날은 내가 토토우미의 제압을 끝내는 날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만큼 토쿠히메를 바라보는 이에야스의 눈은 남달랐다.
이에야스는 생모 오다이와 계모 토다에게는 일부러 자기도 동석하여 토쿠히메를 인사시켰다.
사쿠마 우에몬노죠 노부모리는 무사히 일을 끝내고 기후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안 가신들이 혼례의 축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6월 중순의 일이었다.
그날 이에야스는 오랜만에 스고가와로 나가 수영을 했다.
몸을 단련하는데는 수영이 최고라 하여 여름에는 종종 수영을 즐기는 이에야스였다. 그가 수영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본성의 부엌에서 때아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실컷 마신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이에야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10
이에야스는 손뼉을 쳐서 사람을 불렀다.
"부르셨습니다?"
문앞에 와서 공손히 두 손을 짚은 코쇼는 나이토 요시치로였는데, 그 역시 얼굴에 취기가 올라있었다.
"요시치로,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
"예, 혼례의 남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여흥을 즐기고 있습니다."
"뭣이, 여흥을......?"
이에야스는 꾸짖는 대신 탐색하는 눈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가 지시했느냐? 누가 나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말이냐?"
"예, 스즈키 큐자부로 님입니다."
"큐자부로가 그러라고 하더냐?"
이에야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자기도 취해서 했던 말을 잊어버린 건 아닌가 했다.
원래 이에야스는 가신이나 측근들로부터 지나치게 검소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따. 바로 혼례식 4,5일 전에도 점심상을 받고 밥그릇의 뚜껑을 열어보니 위에 엷게 보리가 덮여 있었으나 그 밑은 흰 쌀밥이었다.
이에야스는 쓴웃음을 짓고 주방 일을 담당한 아마노 마타베에를 불렀다.
"마타베에, 너희들은 내가 인색해서 보리밥을 먹는 줄 알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다 보리쌀을 적게 섞은 밥이 성주님 상에 오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잘 생각해보아라. 지금은 천하가 소란하여 침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도 많다. 그런 시절인데 이 이에야스 혼자 배불리 먹을수 있겠느냐? 모든 비용을 절감해서 한시라도 빨리 태평한 세월이 오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쓸데없는 낭비는 허락할 수 없다."
이렇게 주의를 주고 그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래, 큐자부로가 그랬다는 말이지? 알겠다, 킨아미를 불러라."
요시치로는 절을 하고 큐자부로의 윗사람인 킨아미를 부르러 갔다.
주방은 점점 더 소란해져 모두들 불을 켜는 일까지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벌써 돌아오셨군요. 오늘은 생각지도 않았던 술을 내려주셔서 정말 잘 마셨습니다."
킨아미는 요시치로 이상으로 취해 그 벗겨진 머리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킨아미."
"예."
"많이 취했구나."
"예, 약간...... 오다 성주님이 일부러 보내주신 모로하쿠, 그 풍미와 맛이 너무 좋아서......"
"오다 님이 보내신 모로하쿠를 마셨다는 말이냐?"
"예. 모두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안주도 좀처럼 맛볼 수 없는 키소가와의 큰 잉어라서......"
"잠깐, 킨아미!"
"예."
"큰 잉어라니, 설마...... 오다 님이 보내신 그 세 마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세 마리 중 한 마리를 먹어치웠습죠. 기름이 잘잘 흐르는 게 여간 맛이 좋지 않았습니다."
킨아미는 이렇게 대답하고 새삼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엎드렸다.
11
이에야스는 자기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깨달았다.
노부나가가 일부러 자신과 사위와 이에야스에 비유하여 보내온 잉어였다. 그런 잉어를 멋대로 잡아 술안주로 삼았다니...... 물론 누군가가 지시했고, 그 이면에는 통렬한 풍자와 간언이 숨겨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저러나 이 사실이 노부나가에게 알려지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었다.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고 판단할 게 틀림없었다.
"킨아미."
"예."
"주방 책임자인 아마노 마타베에를 불러오너라."
"예......?"
그제야 비로소 킨아미도 이에야스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일어나다가 옷자락을 밟아 비틀거리면서 물러갔다.
"성주님, 부르셨습니까? 오늘은 어쩐 일로......"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라. 그 큰 잉어를 누가 요리했느냐?"
"예.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큰 잉어라 평생의 추억이 될 것 같아 제가 직접 칼을 들었습니다."
"그래, 평생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에게 요리를 명한 것은?"
"성주님이 아니십니까?"
"내가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될 게다. 그렇다면 연못에서 잉어를 건진 자는 누구더냐?"
"예. 스즈키 큐자부로 님입니다. 쿠자부로 님은 성주님의 허락이 내렸다면서 훈도시 차림으로 연못에 뛰어들어, 아주 용감하게 격투를 벌였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이놈의 오다 녀석을 사로잡아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그만 닥쳐라!"
이에야스는 부채로 무릎을 탁 쳤다.
"큐자부로 불러라!"
소리지르는 것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큐자부로 님은 성주님의 허락도 없이......"
"됐다. 너희들이 먹은 것을 토할 수도 없을 것이니 도리가 없다마는, 이 말을 절대로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당장 큐자부로를 불러오라."
"예."
그가 나간 뒤 곧 주방에서는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이에야스는 이를 부드득 갈고 긴 언월도를 집어 칼집에서 뽑아 한 바퀴 휙 돌렸다. 소중하게 돌보라고 일부러 주의까지 주었는데 주제 넘게 내 말을 거역하다니. 큐자부로보다 수십 배나 더 깊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었다.
나이토 요시치로가 등불을 가지고 와서 깜짝 놀라 이에야스를 쳐다 보았다. 이에야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저물어가는 정원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땀방울과 칼에 등불이 싸늘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요시치로!"
"예."
"큐자부로가 왜 안 오느냐? 어서 불러오너라."
"그를 처형하시렵니까?"
"그렇다. 이번 일만은 참을 수 없다. 말리려 든다면 너도 역시 그냥 두지 않겠다."
"예. 불러오겠습니다."
요시치로는 겨우 사태를 파악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12
이에야스는 언월도를 들고 선 채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큐자부로 녀석, 어디론가 도주했으면 좋으련만.'
오다 일족에 대한 혈기의 반발. 이것은 결코 큐자부로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혈기왕성한 가신들은 이에야스의 인내를 노부나가에 대한 굴종이라 여겨 찬성하지 않았다. 인간이 하는 일에도 계절과 마찬가지로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 기세 앞에는 이길 수 없다고 설명해도 좀처럼 납득하지 않았다.
큐자부로의 일은 이러한 가신들의 속내를 밖으로 드러낸 돌발적인 본보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큐자부로가 나타나면 크게 꾸짖어 보내고 가능하다면 죽이고 싶지 않았다.
어디선지 부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등불 가장자리를 돌면서 떠나지 않았다. 그 부나비가 큐자부로인 것만 같아 그만 혀를 찼다.
"성주님!"
뒤쪽 문 언저리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에야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홱 돌아섰다.
"스즈키 큐자부로, 거실을 피로 물들이면 황송하기 이를 데 없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정원에 대령했습니다."
"이 천치 같은 놈!"
이에야스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고함쳤다. 그 일갈로 화를 풀려고 했으나, 큐자부로는 와키자시까지 땅에 내던지고 천천히 마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야스의 분노가 가슴에 치밀었다.
"어쩌자고 내 말을 거역했느냐?"
큐자부로는 허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이미 별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왜 말이 없느냐? 후회는 없느냐?"
"없습니다."
큐자부로는 딱 잘라 대답했다.
"저는 성주님을 위해 그런 짓을 했습니다. 상대의 희롱이 하도 건방져서 이쪽에서도 똑같이 보복했을 뿐입니다."
"그 보복이 양가의 우의에 금이 가게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느냐? 이 멍청이 같은 놈아!"
"그렇지 않슺니다. 성주님과 오다 님은 형제와 같은 사이. 상대가 희롱해와 그 희롱을 되돌린 것뿐인데 어찌 우의에 금이 가겠습니까?"
"그 큰 잉어가 그렇게까지 참을 수 없는 희롱으로 보였다는 말이냐? 호의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량도 너에겐 없다는 말이냐?"
"성주님은 오다 일족을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주님의 생각에는 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뭣이, 이 이에야스의 생각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잉어는 목숨을 가진 것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큰 잉어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살아 있다면 모르되 좁은 연못에 갇혀 있으면 언젠가는 지루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주님께서는 잘 돌보지 못해서 그랬다고 가신들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성주님! 죽은 잉어는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선물로 보내는 오다 님의 속셈이 가증스러워 살아 있을 때 잡아먹어 잉어의 본분을 다하게 했습니다. 이 큐자부로도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잉어도 보람되게 죽었다고 제 뱃속에서 기뻐하고 있을 줄 압니다."
큐자부로는 댓돌 앞에 엎드려 목을 길게 내밀었다.
"이놈! 혼자서 멋대로 판단을 내리다니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
이에야스는 나막신을 신고 큐자부로 뒤로 돌아가 외쳤다.
"요시치로! 물을 가져오너라."
나이토 요시치로가 말리기를 바랐다.
"예."
그러나 그는 대답하고 국자로 대야의 물을 퍼서 이에야스의 언월도에 끼얹었다.
13
이에야스는 요시치로를 일단 노려보고 나서 큐자부로에게 눈길을 옮겼다.
큐자부로는 정말 죽을 결심이었고, 요시치로도 이에야스의 분노가 이유 있다는 것을 알고 말리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일부러 마루까지 등불을 들고 나와 발 밑을 밝히고 엄숙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이에샤스는 땀을 닦았다.
이렇게 되면 이에야스 자신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한 마리 잉어에게 반항한 스즈키 큐자부로.
큐자부로가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것이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큐자부로."
"예."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면 몰라도 잉어 한 마리 때문에 죽는 것은 분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큐자부로는 다시 눈을 뜨고 이에야스를 쳐다보았다. 맑고 깨끗한 심경임을 알 수 있는 조용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성주님! 전쟁터에서 죽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평소의 충성에 목숨을 걸기란 어려운 것이라고 아버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니다. 잉어 한 마리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것이 충성이냐고 묻고 있는 거야."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진작 도망쳤을 것입니다. 충성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 끝에 죽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냐?"
"이 큐자부로가 죽지 않으면 언젠가 다른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은 차라리 사소한 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건방지구나. 말해보아라, 네 생각을."
"선물을 보낸 상대가 두렵다고 해서 잉어 한 마리와 가신 한사람의 가치도 계산하지 못하시는 성주님. 그런 성주님이라면 결코 큰 뜻은 이루지 못합니다. 잉어 한 마리 때문에 전쟁이야 벌어지겠습니까. 저의 죽음은 성주님께 그 점을 깨우쳐 드리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충성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보낸 것이라 해도 기물은 기물, 잉어는 잉어가 아닐까요. 성주님, 인간 이상의 것이 없음을 깨달아 주십시오."
이에야스는 언월도를 든 채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일과 이 일은 다릅니다. 저는 성주님께서 하면 안된다고 하신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죽이시고, 앞으로는 현명하지 못한 명령은 내리시지 않기를 부탁 드립니다......자, 어서 베어 주십시오."
"요시치로!"
이에야스는 요시치로를 불렀다.
"나는 벨수 없다. 이 언월도를 보관해두어라."
"예."
"큐자부로."
"예."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미숙했어. 앞으로는 취소해야 할 명령은 내리지 않겠다. 오늘의 일은 웃고 지나가도록 하자."
큐자부로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비록 어떤 사람이 보낸 것이라도 잉어는 잉어라고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말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 님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못지 않는 중요한 마음 가짐. 내가 미숙했다. 앞으로는 잉어를 잉어로 다루어라."
이렇게 말하고 이에야스는 마루로 올라갔으나, 큐자부로는 그대로 땅에 엎드려 있었다.
별빛으로는 그의 어깨가 들먹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울고 있는 탓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암독수리의 성
1
에이로쿠 10년 가을부터 겐키 원년 봄에 이르는 만 3년간은 오와리의 매와 미카와의 독수리가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0년 11월에 오기마치 천황의 칙사 타테이리 요리타카가 매사냥을 하고 돌아올 때 은밀히 가신인 미치이에 오와리 노카미의 집에 초대해 상경할 기회를 마련하고, 같은 달 20일에 맏아들 키묘마루 노부타다의 아내로 타케다 신겐의 딸을 맞아들이기로 하여 후방을 공고하게 다져 놓았다.
이때 신랑신부는 모두 열한 살이었다.
이듬해 7월 28일, 드디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대망의 쿄토 진입을 성취시켰다.
덴가쿠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죽인지 8년째 되는 해였다.
그동안 미카와의 이에야스와 화친을 맺고 미노의 사이토 씨를 멸망시켰으며, 다시 카이의타케다 신겐을 농락했다. 한편 이세의 키타바타케씨에게도 대비하였고 막내여동생 오이치를 북오미의 오다니의 성에 있는 아사이 나가마사 에게 시집보내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성취한 상경이었다. 전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는 쇼군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공격을 받고 자결한 뒤 에치젠과 오미 등지를 전전하고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그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쿄토에 입성하여 실권을 쥐고 있던 미요시 일족을 셋츠와 카와치로 몰아내고, 10월 18일에 요시아키를 세이이타이쇼군에 앉혔다.
요시아키는 물론 노부나가의 꼭두각시였고, 사실상 노부나가가 실권을 쥐고 천하를 손에 넣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타와의 독수리는 서서히 자신의 발판을 다져가고 있었다.
에이로쿠 10년 12월, 이에야스는 마츠다이라 성을 일족에게 넘기고 스스로 도쿠가와로 성을 바꾸어 칙허를 받았다.
당시에는 이에야스를 가리켜 후지와라씨의 후예라고도 하고 겐지라고도 했다. 확실하게 겐지라고 한 것은 헤이시인 노부나가뿐이었다. 도쿠가와로 성을 바꿈으로써 이에야스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밝혔다.
도쿠가와라는 성은 닛타 겐지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처음에는 도쿠라는 글자를 쓰지 않고 도쿠가와라 칭했다. 다시 이에야스는 미츠다이라 가문의 시조 타로자에몬 치카우지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스스로의 성을 도쿠가와라 했다.
도쿠가와 치카우지였던 선조가 향리인 쇼주에서 일어난 난리를 피해 도쿠아미라 이름을 바꾸고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다가 카모고리의 마츠다이라 마을에서 향주의 사위가 되어 정착되었다는 전래를 살렸다.
치카우지가 도쿠아미라고 이름을 바꾼 그 도쿠는 도쿠가와의 도쿠를 숨긴 것이었다. 이번에 그 도쿠를 다시 드러내는 동시에, 아직은 밝힐 수 없는 구상이 이에야스의 가슴에는 가득 차 있었다. 덕으로써 천하를 제압하겠다는 야망과, 만일에 노부나가에게 무슨 변고라도 일어나면 겐지라 칭하며, 그를 대신하여 천하를 호령할 준비를 하겠다는 속셈이 있기도 했다.
에이로쿠 11년이 저물어 갈 무렵, 드디어 타케다 신겐과 스루가, 토토우미의 분할을 약속했을 때의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사코노다이부 미나모토노 이에야스였다. 나이는 스물일곱살. 서른 다섯 살이 되어 교토 경영에 나선 노부나가를 생각하면 그의 피 역시 뜨겁게 끓어올랐다.
정월을 앞두고 이에야스는 오늘도 전장에 있었다.
히쿠마노 북방 25리. 엔슈 이나사고리의 이이노야 성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오 부젠의 미망인이 지키는 히쿠마노 성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쿠자에몬. 정월까지는 미망인의 항복을 받고 싶군."
이때 이에야스 본진의 부교는 혼다 사쿠자에몬 시게츠구였다.
2
기름먹인 종이두건을 쓴 혼다 사쿠자에몬은 갑옷 위에 솜을 넣고 누빈 소매없는 등거리를 입고 모닥불을 쬐며 앉아 있었다. 이에야스의 모습에 그는 가만히 일어나 걸상을 이에야스쪽으로 갖다놓았다.
"성주님은 이오부젠의 미망인을 알고 계시다면서요?"
"음. 어려서 슨푸에 있을 때 가까이 지냈는데 상당히 강한 기질을 가진 여자였지."
사쿠자에몬은 발돋움을 하듯 목책 너머에서 반짝거리는 하마나 호수를 보면서 말했다.
"차라리 해가 지기 전에 공격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일세. 틀림없이 항복할 테니까. 미망인도 역시 우지자네에게는 원한을 가지고 있거든."
사쿠자에몬은 이렇게 말하는 이에야스를 흘끔 쳐다보고 아무 말없이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놓았다. 북풍을 받아 탁탁 튀며 타오르는 모닥불의 연기가 이에야스의 진바오리에 걸렸다가 성의 산쪽으로 흘러갔다.
"사쿠자에몬, 그대는 미망인의 남편 부젠이 우지자네의 미움을 산 이유를 알고 있나?"
"전혀 모릅니다."
"부젠은 요시모토가 전사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무사한 것을 보고 의심하기 시작했어. 오다 쪽과 몰래 내통하고 있는 게 아닌가......나와 무슨 밀약이 있지 않은가 하고......"
사쿠자에몬은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태도로 연기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이오부젠이 우지자네에게 속아 나카노 강가에서 죽은 경위를 이에야스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에야스와 미망인이 이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부젠은 그녀를 몹시 의심했다. 우지자네 때문에 나카노 강가에서 목숨을 잃을 때는, 이제 미카와의 고아에게 그녀와 함께 성을 빼앗기게 되었구나......하면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문이었다.
이에야스가 이곳에 진을 치고 미망인이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의 이면에는 그 이야기와 무언가 관계가 있는 듯했다. 사실 측근의 젊은 무사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큰 불만이었다.
"성주님은 슨푸에 계셨을 때 아직 출가하기 전인 이오의 미망인과 친하셨다는 거야."
"그래, 나도 이야기를 들었어. 성주님은 츠키야마 마님보다 키라의 딸인 이노의 미망인에게 더 마음이 끌리셨다는군."
"아무리 옛날에는 그랬다 해도 그런 일로 전쟁을 늦출 수야 없지. 누가 몰래 쳐들어가 전쟁의 불길을 당기지 않고는 이 이이노야에서 설을 맞게 되었어."
그중에서도 나이가 어리고 성질이 급한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의 불만이 가장 컸다. 사실 그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 꼼짝도 않는 적의 태도에 안달이 나 있었다.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오겠소."
오늘 아침 이에야스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리고 달려갔다. 이에야스는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사쿠자에몬, 고작 여자가 지키고 있는 성이야. 언젠가는 항복할 것이 분명한 성을 굳이 공격해서 불태울 필요가 있겠나?"
"하지만......성주님, 그건 성주님의 오산이 아닐까요?"
"나의 오산......어째서 오산인지 그 이유를 말해봐."
사쿠자에몬은 흘끗 이에야스를 쳐다보고는 연기가 맵다는 듯 얼굴을 돌렸다.
3
"이오의 미망인은 상당한 열녀라고 하더군요."
"음. 그리고 기질이 강한 여자였는데......"
"그렇다면 더더구나 이대로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격을 하지 않으면."
"그럼, 그대도 공격에 찬성하는 쪽인가?"
이에야스는 씁쓸히 웃었다.
"좀더 기다려보세. 틀림없이 사람을 보내올 거야."
사쿠자에몬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아."
여자에 관한 일에는 이상하게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이에야스가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사쿠자에몬의 생각으로는, 열녀라 불릴 정도의 여자인 만큼 생전의 남편으로부터 받은 의심의 원인이 된 이에야스에게 공격도 받기 전에 항복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쿠자에몬만이 아니었다. 혼다 헤이하치로도, 토리이 모토타다도, 또 사카키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지체하고 있는 동안에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대군이 오가사를 지나 밀어닥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때로는 성주의 지혜도 흐려지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었다. 속히 공격하도록 진언하라고 모두들 사쿠자에몬에게 조르고 있었따.
"사쿠자에몬, 연기가 맵군. 장작을 좀더 던져넣게."
사쿠자에몬은 허리를 구부리고 입으로 불을 불면서, 이에야스가 농부의 집을 개조한 막사 안으로 어서 들어갔으면 했다. 그대로 이곳에 있다가 만일 헤이하치로에 대한 것을 묻기라고 하면 큰일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바로 눈밑에 있는 본영의 집합소에서 갑자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사쿠자에몬, 무슨 일일까? 설마 다투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사쿠자에몬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절을 하고 달려갔다.
"왜들이러나? 성주님이 다 들으셨네."
안을 들여다보고 작은 소리로 꾸짖었다.
"마침 잘 왔소.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오."
한손을 오쿠보 타다스케에게 잡힌 사카키바라 코헤이타가 울상을 짓고 말했다.
"방금 헤이하치로 부하 하나가 돌아와 보고하는데, 헤이하치로 타다카츠가 성에서 몰려나온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다는 거요. 이일을 그냥 내버려둘 수 있다는 말이오? 헤이하치로를 그대로 죽게 할 수 있겠소?"
"잠깐, 너무 떠들지 말게."
손을 들어 제지하고 돌아보니 과연 한쪽 구석에 병졸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움츠리고 있었다.
"헤이하치로는 어디로 쳐들어갔나?"
"예, 곧바로 정문을 향해 달려가 소리쳤습니다. 이 성은 살아있느냐, 죽었느냐? 여기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가 단독으로 왔다. 뒤따르는 군사는 없다. 살아있거든 어느 놈이건 나와 상대하자......"
"그랬더니 몰려나왔다는 말이구나. 인원 수는?"
"지금 삼백여 명에 둘러싸여 아수라처럼 창을 휘두르고 있습니다마는......"
그말에 손을 잡힌 코헤이타가 다시 몸부림쳤다.
"아무리 성주님이 명령이 없다해도 헤이하치로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소. 꾸중은 각오하고
있소. 이 코헤이타를 보내주시오."
"안돼!"
그때 사쿠자에몬의 뒤에서 이에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차!'
이렇게 생각했으나 이미 어쩔 수가 없었다. 사쿠자에몬이 천천히 돌아보았을 때 찢어질듯한 눈으로 일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드득 소리를 내며 진눈깨비가 내렸다.
4
이에야스를 본 코헤이타는 그 자리에 엎드리더니 부르짖 듯 소리를 높여 애원했다.
"성주님! 부탁입니다! 헤이하치로를 구출하게 해 주십시오!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하다고 합니다."
"안돼!"
이에야스는 다시 부르르 몸을 떨며 소리질렀다.
"사쿠자에몬!"
"예."
"헤이하치로는 누구의 명령으로 성을 공격하러 갔느냐? 모르고 있었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있으면서 어째서 달려가도록 내버려두었느냐?"
"황송하오나 이 사쿠자에몬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소리가 통할 줄 아느냐? 코헤이타도 잘 들어라. 이 이에야스가 기다리라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성주님!"
다시 코헤이타가 외쳤다.
"위급한 상황입니다. 꾸중하시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이오나 헤이하치로 타다카츠가......"
"죽게 되었다는 말이겠지."
"전사하도록 내버려두시면 성주님, 본진이 약해집니다. 헤이하치로의 그 사슴뿔로 장식한 투구는 인근에까지 소문난 미카와의 명물, 미카와의 용장......성주님......꾸중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제발......"
"안된다면 안돼! 정신 차리지 않으면 코헤이타 너 또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헤이하치로를 이대로 방치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평소의 성주님답지 않습니다."
코헤이타가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이에야스는 칼자루를 잡고 코헤이타 앞으로 다가서서 느닷없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
코헤이타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동안 이에야스의 팔과 입술이 부르르 떨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진눈깨비는 점점 심해졌다.
"너희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군율을 우습게 생각하게 되었느냐? 내말을 어째서 가슴으로, 마음으로 새겨듣지 못하느냐?"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하고 비로소 분노의 어조에서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몰래 습격하거나 일대일 싸움은 이미 옛날의 낡은 전법이라고 그토록 설명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이냐? 활과 칼의 시대는 지나고 총포의 시대가 왔다. 일사불란한 대비만이 승패를 가름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돼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 명령을 어긴다면 헤이하치로만이 아니라 코헤이타도 히코에몬도 용서치 않겠다. 내 부하는 그대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어라."
"......"
"비록 헤이하치로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군법을 어긴 죄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나에게 처형을 당해도 죽고 적과 싸우다 전사해도 죽는다. 헤이하치로는 건방지게도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알겠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땅에 엎드린 코헤이타는 입술을 깨물고 거세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사쿠자에몬."
"예."
"젊은이들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다시 내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체없이 목을 베어라."
이렇게 내뱉고 이에야스는 그대로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불이 꺼지겠어. 어서 장작을 지펴라."
이윽고 사쿠자에몬이 말했다. 그리고 부하가 던져넣은 장작이 기세 좋게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 봐, 틀림없이 노하실 거라고 했잖아?"
사쿠자에몬은 마디가 굵은 손을 불에 쬐면서 말했다.
5
"그러나 저러나 이오의 미망인은 대단해. 헤이하치로인 줄 알면서도 공격해 나오다니. 어쩌면 내 생각이 잘못이었는지도 몰라."
사쿠자에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대는 성주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몸. 왜 헤이하치로를 위해 변명해주지 않았소?"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오쿠보 타다스케가 으쓱 오른쪽 어깨를 쳐들고 사쿠자에몬 쪽으로 돌아앉았다. 타다스케는 현재 은퇴하여 죠겐이라 불리고 있는 강직한 신파치로 타다토시의 조카였다.
"음, 타오르는 불길에는 맞서지 않는 게 좋지. 곧 사그라질 테니까."
"사르라지다니......헤이하치로가 죽은 뒤에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사쿠자에몬은 타다스케를 잔뜩 노려보았다.
"헤이하치로는 죽지않아."
"어떻게 그것을 아시오?"
"알지. 알고 있어서 말리지 않았네. 헤이하치로는 싸움에는 능숙해. 자기 몸에 닥치는 위험을, 비가 내릴 것을 저절로 느끼는 개구리처럼 잘 아는 사람이지."
"그럼, 조금 전에 생각이 모자란다고 한 의미는? 헤이하치로를 죽이겠다고 한 뜻이 아니란
말이오?"
사쿠자에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성주님이 이오의 미망인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공격을 미루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미망인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고......?"
"음, 그런 줄로 생각했었지. 츠키야마 마님과의 불화, 그 연령과 그 몸으로 성주님은 정말 쓸쓸하셨을 테지. 미망인에게 정을 두고 있었다. 어떠냐, 예전의 미카와의 고아는 역시 이처럼 그대를 손에 넣었다......하하하, 젊었을 때는 그런 고집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했었지만 성주님은 그 이상의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아."
이말을 했을 때였다. 지금까지 땅에 엎드려 울고 있던 코헤이타가 느닷없이 벌떡 몸을 일으켜 창을 들고 일어섰다.
"나는 가야겠소."
"잠깐!"
사쿠자에몬은 앉은 채로 말했다.
"이 이상 더 성주님을 노하게 할 생각인가?"
"아니, 가야겠소. 가기로 결심했소."
"그런 결심을 하다니 생각이 크게 모자라는군. 헤이하치로는 죽지 않는다고 한 말을 못들었나?"
"죽지 않도록 나도 가겠다는 거요. 헤이하치로와 이 코헤이타 두 사람이라면 성주님도 처형하지 않으실 거요. 헤이하치로가 처형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정도로 이 코헤이타는 정이 메마르지 않았소."
"기다려, 코헤이타. 그래서 생각이 모자란다고 하는 거야. 성주님은 절대로 헤이하치로를 처형하시지 않아."
"결단코 용서하시지 않겠다고 했지 않소."
"그게 바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이라는 것일세. 곧 사그라지게 마련이야. 정말 성주님이 헤이하치로를 처형하실 거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주님에 대한 모독일세."
코헤이타는 일어선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져 모닥불이 더욱 선명해졌다.
"나는 가야만해. 역시 가야겠소."
막사 밖으로 거칠게 뛰쳐나갔다. 거기에는 무언가 수상한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누구냐! 어디로 숨어 들어왔느냐?"
창을 꼬나들고 외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6
혼다 사쿠자에몬이 일어나 나가보니 코헤이타가 꼬나든 창앞에 열서너 살은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코헤이타가 들이댄 창을 보고 당연히 겁을 먹고 벌벌 떨어야 하는데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잔뜩 노려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남루한 솜옷 밑으로 드러난 종아리가 추위에 얼어 빨갛고, 신발도 다 떨어져 거의 맨발이나 다름 없었다.
"왜 그러나, 코헤이타?"
"이 녀석이 몰래 막사 안을 엿보고 있었어요. 못된 녀석!"
사쿠자에몬은 소년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아이들이 올 데가 아니다. 어서 돌아가거라. 모두 흥분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칠지도 모른다."
소년은 진눈깨비로 범벅이 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싫다. 나는 미카와의 이에야스님을 만나러 왔다."
"뭣이, 성주님을 만나겠다고? 무슨 일로 왔느냐?"
"부하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에야스님께 안내해라."
"성주님은 지금 바쁘시다. 너 같은 아이를 만나실 틈이 없어. 어서 돌아가거라."
소년은 다시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에야스 님을 만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원래 여기는 내성이 있던 곳이다."
"뭐, 너의 성이......"
사쿠자에몬은 문득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좋아. 내가 알아보겠다. 따라오너라."
"너는 누구냐?"
"본진의 부교 혼다 사쿠자에몬이다."
"아아, 귀신이라 불리는 사람이군. 그 이름은 나도 듣고 있었어. 그렇다면 이야기가 통하겠군."
사쿠자에몬은 코헤이타를 홱 돌아보았다.
"안돼. 코헤이타. 자네는 너무 흥분해서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거야. 곧 헤이하치로가 돌아올 것이니 꼼짝말고 여기있게. 코헤이타, 알겠나?"
엄한 소리로 말하고 소년의 앞장을 서서 이에야스의 막사 앞에 피워 놓은 모닥불 옆으로 갔다.
"자, 앉아라. 그럼 너는 이 이이노야의 주인이었던 나오치카님의 아들이냐?"
소년은 사쿠자에몬을 똑바로 노려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만치요라는 이름이었지?"
"그래요."
"우리 성주님을 만나 무슨 말을 하려느냐? 그리고 만치요가 확실하다는 증거라도 있느냐?"
"이에야스 님을 만나기 전에는 말할 수 없소."
"먼저 말을 해야 만나게 해 주겠다."
사쿠자에몬은 단호하게 말하고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었다.
"날씨가 춥구나. 자, 불을 쬐어라."
"이것 보세요."
"말할 생각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상대하지 않겠다."
"당신을 의심해서 미안해요. 나는 이에야스 님의 부하가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허어, 부하가 되려면 증거를 가져왔을 텐데. 납득이 되거든 만나게 해주겠다. 그 증거를 나에게 보여라."
"그것은 안 돼요."
"그렇다면 거절하겠다."
"이것 보세요."
"왜 그래?"
"증거는 보여줄 수 없지만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말할 수 있어요."
"음, 그렇다면 어디 들어보도록 하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히쿠마노 성의 여주인 키라 마님의 편지를 가지고 있어요."
7
"뭐, 히쿠마노의 미망인이......"
말하다 말고 사쿠자에몬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 마님은 만치요의 이모였어. 그래, 그랬었어."
사쿠자에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럽게 만치요를 바라보았다.
히메가도에 있는 이이노야까지 군사를 진입시키고도 정면으로 히쿠마노 성을 공격하지않는
이에야스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경솔했어......'
사쿠자에몬은 생각했다. 젊은 날의 연정에 구애되어......단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치요의 아버지 이이 나오치카 역시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질투로 목숨을 잃었다. 아니, 아버지만이 아니라 아들인 만치요의 목에까지 상금이 걸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그 만치요가 어디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를 찾아내어 자기편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나사, 호소에, 키가, 이이노야, 카나사시 일대의 민심을 얻는 것이 된다.
'성주님의 마음은 이미 토토우미에서 멀리 스루가로 향하고 있었던 거야......'
그것을 알면서도 사쿠자에몬은 우지자네에게 쫓겨 이 고장에서 유랑하던 명문의 아들을 잊고 있었다.
"그렇구나, 너는 마님의 조카였구나. 알겠어. 만나게 해주지. 이리오너라."
사쿠자에몬은 만치요를 데리고 뒤에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장막 안은 어두컴컴했다. 이에야스는 촛불 두 자루를 켜놓고 뇨셋사이에게 그리게 한 지도에 열심히 붉은 줄은 긋고 있었다.
"성주님, 드디어 성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뭐, 사자가 왔어?"
"예. 만치요님. 이리로."
소년은 아무 두려움도 없이 성큼성큼 이에야스 앞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이이노야의 주인이었던 나오치카님의 아들이냐?"
"예. 만치요라고 합니다. 미카와 성주님! 부디 이 만치요를 부하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지금까지 히쿠마노 성에 은신해 있었겠지?"
"예, 숨어 있다가는 쫓기고, 쫓기다가 다시 숨기도 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쏘는 듯한 시선으로 만치요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심해지는 우지자네의 질시에 못이겨 당연히 숨기도 하고 다른 데로 옮기기도 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만치요 뒤에 깔린 어둠속에서 슨푸 시대에 보았던 키라의 딸을 떠올렸다.
이에야스도 좋아했으나 그녀 역시 그 무렵의 이에야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세나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가 아니고, 세나의 아버지인 세키구치 치카나가에게 두 사람을 맺어주려는 의사가 없었다면, 이에야스의 아내는 키라의 딸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오부젠을 남편으로 삼고 이에야스는 세나를 아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그 여자와는 적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가 최근에 채용한 닌쟈 중에서도 특히 유능한 자를 뽑아 몰래 미망인에게 보내 항복을 권유한 마음은 착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배려에 비해 만치요는 너무나 초라하고 이해되지 않는 사자의 풍채였다.
8
이에야스가 성에 밀사를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마나 호수 부근에 위치한 상대의 성이 스루가와 토토우미로 날개를 펴려는 이에야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그 성이 불타면 다시 쌓는 데 필요한 시간과 인원이 아까웠다.
이미 우지자네의 몰락을 예견하고 타케다는 스루가, 도쿠가와는 토토우미를 분할한다는 밀약이 노부나가의 개입으로 성사되어 있었다. 하루라도 더 늦어졌다면 그만큼 타케다의 침식이 가속화되었을 터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미망인의 목숨을 구하겠다는 생각도 간절했고, 새로 지배하게 될 백성들의 민심도 계산에 넣고는 있었다.
"만치요를 무참히 죽인다면 애석한 일이오."
이런 전갈을 보내면 미망인도 정식으로 만치요를 사자로 보내와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에야스 앞에 나타난 만치요는 사자로서의 체면을 전혀 무시한 모습이었다.
"이모님은 너에게 사자로 가라는 말을 하지 않더냐?"
만치요 역시 쏘아보듯 이에야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모님에게 항복을 권했습니다."
"네가......?"
"이모님은, 미카와의 성주님이라면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네가 참견 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으음, 그래서......?"
"네가 그토록 미카와의 성주님을 동경한다면 이 서신을 가지고 가라. 틀림없이 그분은 너를 하타모토로 삼으실 것이라고......"
만치요는 이렇게 말하면서 젖은 옷속으로 손을 넣어 소중하게 두겹으로 싼 한통의 서신을 꺼냈다.
"성주님! 저는 다음에 천하를 손에 넣을 사람은 은밀히 궁중에 손을 대고 있는 오다의 성주님이거나 미카와의 성주님일 것이라고......이모님에게도 잘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모님도 그럴 것이라고 동의했습니다. 성주님! 저는 다이묘가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하타모토가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에야스는 만치요의 손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들고 그것을 촛불 밑에서 죠용히 폈다.
혼다 사쿠자에몬은 이에야스의 발 밑에 피워놓은 숯불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삼가 몇자 올립니다.
생각지 않게 뜬 세상의 여러 모습을 보게되어, 멸망하는 자와 흥하는 자의 불가사의를 직접 몸으로 느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만치요는 서리 맞은 가랑잎처럼 썩어서는 안될 자인 줄 아오니, 미카와님의 번영으로 이 이이노야에도 봄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그를 보내드립니다. 부디 오래도록 곁에 두고 보살펴 주시기를 바라면서, 언제가 황천에서 즐겁게 뵙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에야스는 다 읽고 팔짱을 끼었다. 어디에도 항복한다는 말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슬픈 감회 속에 혹독한 겨울을 느끼게 하는 것뿐이었다.
"만치요."
"예."
"이모님은 네가 항복을 권했을 때 무어라 하시더냐? 사실 그대로 말해보아라."
다시 진눈깨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9
이에야스의 질문을 받고 빛나는 만치요의 눈에 촛불이 반사되어 흔들렸다.
"우지자네는 이제 이모부님의 원수가 아닙니까. 미카와의 성주님께 항복하여 가문의 안태를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제가 이렇게 말했더니 처음에는 웃었습니다."
"무어라며 웃으시더냐?"
"너는 아직 어려서 어른의 심정을 모를 거라고...... 그래도 계속 따졌더니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며, 이 이모가 항복하면 미카와 성주님이 웃으실 것이라고......"
만치요의 두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카와의 성주님! 이모님은 성주님을 좋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더냐?"
"예. 처음에는 요시모토 공의 주선으로 출가하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흥하는 자와 망하는 자가 걷게 될 운명의 갈림길. 같은 비라도 봄비와 진눈깨비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으음."
"진눈깨비는 궃을수록 좋다. 만일 여기서 미카와의 성주님께 항복하여 미지근한 비였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차디찬 비로 일관하겠다. 그래야 미카와 성주의 마음에 더 오래 남게 될것이라고."
"이제 그만!"
이에야스는 당황하며 만치요의 말을 중단시켰다. 차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미망인은 키라의 딸이었을 때부터 그런 강한 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항복을 권한 자신의 잔인함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아마 남편이 생존했을 때도 옛 사랑의 상처가 그녀를 괴롭혔을 것이 틀림없다. 그 남편이 죽은 지금도 만일 이에야스에게 항복한다면 그 고통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이모님은......"
생각났다는 듯이 만치요가 다시 말했다.
"이모부님이 살아 있었다면 진작에 미카와 성주님을 성에 맞아들였을 테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것이 괴롭다고......"
"알고 있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성주님! 이 만치요에게 아시가루 백 명 정도만 빌려 주십시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이모
님, 이 만치요가 공격하고 싶습니다.
이에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인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성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가신들을 차례차례 성을 떠나게 한 뒤 마지막으로 자결할 생각임에 분명했다.
'무서운 여자야.'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항복하여 이에야스의 그늘에서 사는 것보다는 짙은 향기를 남기고 죽는 편이 더 이에야스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에야스는 평생 미망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돌아온 모양이로군."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사쿠자에몬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성주님. 혼다 헤이하치로가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를 처형하시겠습니까?"
이에야스는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가만히 눈을 감고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사쿠자에몬은 싱긋 웃고 두 사람만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봄의 천둥소리
1
이에야스의 맏아들 타케치요는 열두 살의 나이로 오카자키 성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신들로부터 신년하례를 받았다.
오카자키에 있는 마츠다이라 지로사부 노부야스, 그 상좌 가까에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노부야스를 보좌하게 된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가 대령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에야스가 히쿠마노에서 성을 쌓고 있는 중이어서 가신들도 대부분 그곳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부터의 노신인 사카이 우타노스케 마사차카와 토리이 이가노카미 타다요시, 오쿠보죠겐 등은 이른 아침부터 큰 방에 모여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고 담소하고 있었다. 토리이 타다요시는 이미 검은 머리가 한 가닥도 없는 백발이었고, 오쿠보 죠겐은 이가 빠져 말을 할 때마다 침이 튀었다.
이야기는 50년 전의 옛날로 거슬러올라갔다가는 곧 오늘로 옮겨지고 오늘의 번영에서 다시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시대로 되돌아갔다.
"성주님은 히쿠마노 성을 하마마츠 성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실 모양이더군."
"정말 꿈만 같아. 스루가, 토토우미, 미카와 세 곳의 태수였던 이마가와 일족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성주님이 토토우미에서 스루가를 바라보게 될 줄이야. 성주님은 언젠가 슨푸에서 우지자네에게 두고 보자, 너에게 공차기를 시키고 바라보겠다고 하셨다더군."
"아니, 그 공차기인지 풍류인지 하는 게 요물이라니까. 멸망하는 집안에서는 반드시 그런 짓을 하거든."
이런 잡담을 하고 있을 때 히사마츠 사도노카미가 나타났다. 순간 모두들 오다이가 이혼당하던 때의 괴로웠던 심정을 수군거렸다.
정월치고는 보기 드물게 따뜻한 날씨였다. 이미 매화가 만발해 있었다. 쿄토식으로 개축된 서원의 창에 환하게 햇빛이 비치고, 때때로 거기에 새가 그림자를 떨구었다.
열두 살의 어린 도령 지부사부로 노부야스와, 동갑인 아내 토쿠히메가 의복을 갈아입고 나타난 것은 다섯 점 반 무렵이었다.
모두 잡담을 멈추고 일제히 엎드렸다. 엎드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노부야스도 그 아내는 이제는 사춘기를 맞아 한창 자랄 나이였다. 그러나 나란히 않아 있는 모습은 아직 어린아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한사람씩 축하의 말을 올리고 관례에 따라서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지난날 할아버님이신 히로타다 님에게 소실을 권했을 때의 연세가 어떻게 되었지?"
이렇게 말한 것은 토리이 타라요시.
"음, 아마 열두 살이실 때의 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손가락을 꼽으며 고개를 갸웃한 것은 오쿠보 죠겐이었다.
"그렇다면 도련님에게도 이제는 부부관계에 대해 가르쳐드려야 할 텐데, 히라이와 사치노스케는 그 적임자가 아닌 것 같아."
"그런 것쯤은 아실 테지. 자연의 일이니까."
"아니, 자연의 일이니 그 방법이 더욱 중요하지. 잘못해서 거칠게 대하면 자칫 내전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니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로죠들에게 부탁해볼까?"
이때 토쿠히메의 시중을 들고 있는, 코지쥬라는 하녀가 술병을 가지고 왔다.
"너는 토쿠히메의 시중을 드는 여자지? 어떠냐, 도련님은 요즘 젊은 마님의 침실에 자주 드시더녀?"
죠겐이 주책없이 물었다.
2
코지쥬는 그 말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예......?
그러다가 그만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어떠냐, 자주 드시더냐?"
"예...... 아닙니다."
"예, 아니라고 대답하면 알 수가 없지 않아. 아직이란 말이냐?"
"예. 아직 그런 일은."
"없다는 말이지. 별로 사이가 나쁘시지는 않을 텐데."
"그렇기는 하지만......"
대답을 얼버무리며 코지쥬는 난처한 듯 술병을 앞에 놓고 고개를 떨구었다. 코지쥬가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봄을 알게 될 무렵이었다. 그런데 짓궂게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로사부로의 생모 츠키야마 마님.
츠키야마도 처음에는 순진한 토쿠히메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지로사부로 노부야스가 본성으로 들어가고 토쿠히메가 본성의 안채로 옮긴 뒤부터 태도가 돌변했다. 츠키야마는 자신이 지로사부로와 함께 본성으로 옳기고, 내전의 주인 역시 당연히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에야스의 정실, 그러한 나를 두고 토쿠히메가 내전의 주인이 되다니."
이런 불평을 이에야스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 불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거운 짐은 젊은 사람에게 지게하고, 그대는 홀가분히 지내도록 하시오."
사실은 이런 생각을 해서가 아니라, 지로사부로 노부야스에게 언제까지나 그녀의 잔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본성으로 옮긴 뒤에도 츠키야마는 종종 지로사부로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아직 토쿠히메를 가까이하기에는 이르다고 주의를 주었다.
열대여섯 살까지는 남자보다 여자의 성장이 빠르다. 요즘 토쿠히메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은근한 색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오다 집안에서 따라온 코지쥬는 은근히 마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음, 아직 그런 일이 없다면 이 노인이 한번 귀띰을 해드려야 할 모양이군. 저렇게 나란히 계시는 것을 보면 이미 훌륭한 젊은이로 보이는데."
코지쥬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죠겐 앞으로 갔다.
술자리가 벌어진 곳에 오래 앉아 있기가 지루했던지 지로사부로는 히라이와 치카요시에게 물었다.
"그만 일어나도 될까?"
치카요시가 머리를 끄덕였다.
"히메, 들어가자구, 배고파."
토쿠히메를 재촉하여 일어났다. 토쿠히메도 잠자코 일어섰다. 나란히 서자 토쿠히메의 키가 좀더 커서 누나같이 보였다.
"사부로 도련님."
함께 복도로 걸어나왔을 때 코난도 앞에서 오쿠보 죠겐이 불렀다.
"왜요, 오쿠보 영감?"
"다시 한번 이 늙은이 앞에 나란히 서 보십시오. 오오,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쌍이십니다. 아직 아기는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늙은이는 두 분의 아기를 보고 세상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토리이 노인도 나와 같은 생각입니다."
"응, 아직은 없지만 앞으로 생기겠지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지로사부로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대로 토쿠히메와 같이 내전으로 향했다.
3
지로사부로는 내전의 거실로 들어와 자기 앞에 앉은 토쿠히메를 빤히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히메, 오쿠보 영감이 우리 아이를 보고 싶다고 했지?"
"예, 그랬어요."
"어떻게 하면 아기가 생기는지 알고 있어?"
토쿠히메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노부야스를 흘겨보고 나서 김이 오르는 탁자위의 주전자로 눈길을 옮겼다.
"모르는 모양이군."
"몰라요."
"나는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 이를까? 어디 히메의 생각을 말해 봐."
토쿠히메는 다시 노부야스에게 눈을 흘겼다. 그 눈에는 이미 자기도 알고 있다는 원망 비슷한 수줍은 마음의 움직임이 나타나 있었다.
"왜 잠자코 있어. 부끄러운가?"
"말하기 거북한 것을 묻는군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츠키야마 마님께 꾸중을 들어요."
"어머니 꾸중이 무서워? 나는 지금 이 성의 주인이야."
지로사부로는 이렇게 말하고 벌떡 일어나 창을 열고 젊은 활기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창밖에 피어있는 매화가지 하나를 꺾었다.
"어머, 그것은 왜 꺾나요. 그냥 두고 보는 것이 좋은데."
"나는 말이지, 때때로 칼을 빼어들고 이 근처에 있는 나무들 모두 잘라버리고 싶어."
"아이, 무서워라.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까요?"
"내 첫 출전을 어버님께서 막고 계시기 때문이야. 치카요시, 치카요시!"
지로사부로는 두 사람을 멀찌감치 따라오고 있는 히라이와 시치노스케를 불렀다.
"올해에는 내가 첫 출전을 할 수 있도록 그대가 어버님께 간곡하게 말씀 드려줘."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아직 말타기가 익숙지 못하다. 좀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음, 그래요? 그럼, 점심을 먹고 한 번 말을 달려봐야지."
"안됩니다. 오늘은 설날, 무예 연마는 이일인 내일부터라고 아버님이 결정하신 것을 마음대로 어기시면 안됩니다."
히라이와 시치노스케는 엄하게 말했다.
"그래요?"
지로사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만 물러가세요. 나는 히메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예. 곧 축하상이 이리로 나올 것입니다. 그럼 그때까지 두 분이 계십시오."
시치노스케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코지쥬에게 말했다.
"너도 자리를 비켜 줘. 단 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예. 필요하실 때 불러주십시오."
"히메!"
지로사부로는 토쿠히메와 둘만 남자 열어젖힌 창턱에 난폭하게 걸터앉았다.
"이리와. 이 매화 한송이를 머리에 꽂아주겠어. 부끄러워할 것 없어. 우리 둘뿐이니까."
토쿠히메는 그가 하라는 대로 가까이 왔다. 그러자 지로사부로는 허리를 구부려 그녀의 머리 냄새를 맡았다.
"히메, 히메는 어떻게 하면 아기가 생기는지 알고 있겠지? 자, 내 귀에 입을 대고 대답해 줘." 다시 말했다. 토쿠히메는 어깨에 놓인 지로사부로의 손에 살짝 자기 손을 겹쳐 놓으면서 원망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 몰라요."
4
지로사부로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자 토쿠히메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다.'
여덟 살부터 햇수로 4년간이나 같이 살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탓이리라. 이미 지로사부로를 떠난 인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아버지인 노부나가에 비해서도 생모인 오루이, 정실인 노히메에 비해서도 지로사부로에게 더 친근감이 깊었다.
전에는 곧잘 토라지기도 하고 짜증도 내곤 했으나, 지난 늦가을부터 부쩍 어른스러워지고 우울해지는 일이 많아졌다. 지로사부로와 토쿠히메의 결혼을 츠키야마 마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정도 알았고, 부부란 어떻게 지내야 하는 것인지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지로사부로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뒤에서 눈을 가리거나 뺨과 목덜미에 닿거나 하면 토쿠히메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미 무엇인가를 몸이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로사부로는 토쿠히메의 기대와는 달리 언제나 장난꾸러기 어린아이로 되돌아갔다.
오늘도 토쿠히메는 그 후에 올 실망을 생각하고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자 웬일인지 자기도 모르게 뚝뚝 눈물이 무릎에 떨어졌다.
"아니?"
지로사부로는 토쿠히메의 눈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뭐가 슬픈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뒤에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울면 싫어, 히메. 몰라도 좋아. 다시는 묻지 않겠어. 울면 싫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로사부로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듯한 어조여서 토쿠히메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 때문에 운 것은 아니에요."
"그럼, 뭐가 슬퍼서 우는 거야? 히메, 오늘은 즐거운 설날이야. 이유를 말해줘. 누가 히메에게 못된 짓이라도 했어?"
"아니네요! 눈물은 기쁠 때도 흘리는 거예요."
"아, 그럼 이것이 기쁜 눈물이야?"
"예. 다정하게 매화꽃을 머리에 꽂아주셔서."
"난 또 뭐라고.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지로사부로는 이렇게 말하고 토쿠히메를 홱 자기 쪽으로 돌려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부부야. 그렇지?"
"예."
"부부는 화목해야 해. 그쪽 손도 이리 줘. 내가 꼭 안아줄 테니까."
토쿠히메는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졌다. 어째서 뜨거워지는지는 몰랐으나,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정말 부부가 된다......는 수줍음과 기대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히메!"
지로사부로는 토쿠히메를 꼭 끌어안고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히메를 사랑해......"
"나도 사부로님을."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사부로, 무얼하고 있는 거야."
복도에서 거실 쪽을 향해, 목소리를 떨면서 말한 이는 역시 축하의 말을 하러 왔던 츠키야마였다.
"아아, 어머님."
지로사부로는 토쿠히메를 껴안은 채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5
"무얼하고 있는 거야. 사부로?"
츠키야마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이에야스에게 그토록 외면당하고 있는 츠키야마의 피는 이 순진한 아이들의 포옹에도 비틀거릴 정도로 강한 자극을 받았다.
"사부로는 이 성의 대장이야. 대장이면 대장답게 의젓한 위엄을 지니지 않으면 안돼. 토쿠히메를 놓아주어라."
"아니, 놓지 않겠어요."
지로사부로는 순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토쿠히메는 내 아내예요. 안아준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어요. 그렇지 히메?"
"히메!"
이번에는 츠키야마가 토쿠히메를 불렀다.
"이 무슨 난잡스러운 짓이냐, 어머니 앞에서? 냉큼 떨어져라."
"싫다고 했지 않아요? 히메, 떨어질 것 없어."
토쿠히메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지로사부로의 손을 뿌리쳤다.
츠키야마는 아직 방에 들어오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때 로죠들이 축하상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츠키야마는 광태에 가까운 목소리로 무섭게 매도했을 것이 분명하다.
츠키야마도 차마 더 이상 꾸짖지 못하고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새해에는 더 많은 복을 받기 바란다."
"예, 어머님도 건강하세요."
"사부로."
"예, 어머니."
"나도 여기서 상을 받고 싶구나."
"예. 그렇게 하세요. 괜찮겠지, 히메?"
"사부로!"
"예."
"어째서 그런 일까지 토쿠히메에게 묻느냐? 너는 이 성의 대장이 아니냐?"
지로사부로는 완전히 어린아이로 돌아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무리 대장이라도 안의 일은 안에서 하는 거예요. 안의 대장은 히메이기 때문에 히메의 허락을 받아야 해요. 괜찮지, 히메? 어머니의 상을......"
"예. 아무 부담도 가지지 마시고 드십시오. 제가 직접 상을 가져오겠습니다."
토쿠히메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츠키야마가 토쿠히메 쪽으로 돌아앉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이었다.
"히메, 잠시 그대로 앉거라."
"예."
"아무리 노부나가 님의 딸이라 해도 지나치구나. 나는 사부로의 어머님인 동시에 이에야스님의 정실이다."
"예."
"그런 나에게 음식상을 내놓는 일까지 일일이 네가 지시하다니. 이렇게 나가다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삼가도록 해라."
토쿠히메는 어째서 꾸중을 들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로사부로가 일부러 물어서
대답한 것 뿐인데도 꾸짖다니 웬일인가 싶어 잠시 입을 다물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너는 내가 멸망해가는 이마가와 가문의 출신이라 하여 내게 맞서려는 것이냐?"
이때 히라이와 치카요시가 크게 기침을 하면서 들어왔다.
"자, 오늘은 두 분이 함께 받으시는 축하상이니 제가 시중을 들지요. 코지죠, 술병을 이리다오."
6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가 시중을 들겠다고 하자 츠키야마도 그 이상은 토쿠히메를 꾸짖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흘끗흘끗 시치노스케를 노려보고 토쿠히메를 노려보며, 또 지로사부로를 노려보면서 식사했다.
토코노마에 해돋이 그림이 있는 족자를 걸고 학과 거북을 수놓은 깔개로 장식한 설날의 좌석에 화려하게 차리고 앉은 츠키야마의 표정만이 창백했다.
시차노스케 치카요시는 이것이 무언가 불길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아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그는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올해는 도련님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아버님은 하마마츠 성에 계시면서, 결국 스루가로 진출한 타케다 일족과 대치하실 것이고, 쿄토에도 입성하실 것입이다. 도련님도 그렇게 아시고 한층 더 문무를 연마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츠키야마가 거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아래서는 임관도 되지 않았던 이에야스가 드디어 노부나가와 손을 잡고 쿄토로 간다. 그러한 노부나가의 딸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분하고 안타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치카요시!"
"예, 마님."
"그대가 사부로에게 연초의 훈시를 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될 테니 나는 이만 가겠습니다."
"조심해 가십시오."
"성주님도 너무 하셔. 어느 틈에 노부나가 님의 가신처럼 행동하시다니. 아마 그대들은 만족하겠지. 오다님을 따라 성주님을 쿄토로 보내게 됐으니까."
시치노스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으나, 츠키야마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생각났다는 듯이 미소를 띠고 지로사부로 쪽으로 향했다.
식사가 끝났다.
시치노스케는 상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코지쥬를 재촉하여 자기들도 방에서 물러났다. 츠키야마의 방문으로 토쿠히메의 기가 죽어 있었다. 시치노스케의 경험에 따르면 이럴 때는 단둘이 있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지로사부로가 무슨 말로 달래건 상관없다. 그러나 토쿠히메의 불만을 코지쥬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코지쥬의 입을 통해 토쿠히메를 따라온 시종의 귀에 들어가면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전해진다. 이러한 일로 양가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시치노스케 치카요시가 생각하기에도, 이미 두 사람은 부부관계를 가져도 될 시기로 보였다.
'자연스럽게 어느 쪽에서든지 먼저......'
두 사람이 물러가자 지로사부로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다시 창턱에 걸터앉았다.
"히메, 내가 사과하겠어. 참도록 해."
지로사부로는 아버지 이에야스보다도 눈치가 빨랐다. 이에야스라면 잠자코 생각에 잠길 텐데도 그는 곧 입밖에 내어 말했다. 이에야스보다 인내심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고생을 모르고 자라난 탓인 듯했다.
"어머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 히메, 화내지 말고 참아줘."
토무히메는 더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또 우는군. 그것도 기쁨의 눈물인가? 그런 거야 응......"
7
기쁜 눈물이냐는 물음에 토쿠히메는 대답했다.
"예."
지로사부로의 마음속에 있는 정감을 다른 때보다 몇 배나 더 뜨겁게 느끼는 토쿠히메였다.
"어머님 심정은 잘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응. 히메는 영리하니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예. 나도 오다 집안이 망하거나 사부로 님에게 배척을 당하거나 하면 틀림없이 슬프고 마음이 흐트러져서......"
"그런 말은 하지 말도록 해. 아, 해가 졌어. 저걸 봐. 하늘이 어두워졌지 않아? 주사위 놀이를 할까, 사람들을 불러 화투치기를 할까?"
"싫어요. 전 이렇게 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 머리에 꽂힌 매화나무 가지를 다시 꽂아주었다.
"비뚤어졌어."
토쿠히메는 생긋 웃고 다시 옷소매를 눈으로 가져갔다.
"저번에 이와츠로 매사냥을 갔을 때 말인데......"
"아, 그 몹시 춥던 날."
"응, 산기슭 풀밭에서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 멧돼지 한 마리가 뛰어나왔어."
"그래서 활로 쏘았다는 이야기는 벌써 두 번이나 들었어."
"예.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내가 키타하라 키노스케가 주는 활로 한 발 쏘았더니 옆에서 시치노스케가 뛰어나와 창으로 찔러 잡았어. 나는 화를 냈지. 왜 다시 한 발을 쏘지 못하게 했느냐면서. 그랬더니 대장은 위험한 일을 해선 안된다는 것이었어. 정말 그럴까, 히메?"
"예. 위험한 일에는 조심해야 할 거예요."
"여름이 되면 다시 스고가와에 가서 헤엄을 치겠어. 매사냥과 수영, 아버지는 이 두 가지로 몸을 단련하셨다고 했어. 나도 아버지에게 지지 않겠어."
말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데 불쑥 말했다.
"히메의 아버지 노부나가 님 말인데."
"예, 미노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수영을 가르쳐주셨다고 하는 거야. 그걸 알고 있어?"
"아니, 몰랐어요."
"그럼, 말해줄게. 아버지가 아츠타에 계실 때 히메의 아버지가 찾아 오셔서, 한겨울에 헤엄치게 하신 것이 처음이래."
"어머나, 한겨울에......"
겨우 토쿠히메의 기분이 풀렸다. 한겨울에 헤엄을 쳤다는 말을 듣고 토쿠히메가 가만히 이맛살을 찌푸렸을 때.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보니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소나무 가지에서 바람이 울고 있었다.
"아니? 천둥소리 같군."
"천둥......? 바람일 거예요. 천둥은 여름에나 치는 것이라는 노래도 있어요."
"아니, 확실히 천둥 같았어."
지로사부로가 일어나 마루에 나가려 했을 때, 이번에는 분명히 북쪽 하늘에선 보랏빛 번개가 번쩍였고, 이어서 대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무서워......"
토쿠히메는 정신없이 지로사부로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다.
8
봄의 천둥은 두서너 번 울리고 멀어져갔다.
하늘은 캄캄하고, 지로사부로를 껴안은 토쿠히메는 언제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어째서 이럴 때 천둥이......'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 겁을 먹었으나, 지로사부로의 손이 다정히 어깨를 감싸자 공포는 사라지고 울고 싶은 듯한 감상과 기쁨이 가슴 가득히 퍼졌다. 지로사부로는 다음 천둥소리를 기다리듯 토쿠히메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꽂꽂이 서서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남쪽으로 간 모양이야. 천둥이......"
얼마 후 지로사부로가 불쑥 말했다.
"싫어요......"
토쿠히메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다시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히메는 천둥소리가 무서워?"
"예."
"나는 무섭지 않아. 그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용기가 생긴다니까."
"그것은...... 사부로 님의 용감한 기질 때문이에요."
"히메는 용감하지 않은가?"
"전 여자인 걸요."
"하하하...... 여자는 상냥해야 하는 것, 그렇지?"
"사부로 님, 둘이서 이렇게 하고 가만히 있고 싶어요."
"괜한 소리를......"
웃으려 하다가 지로사부로는 깜짝 놀랐다. 바싹 목이 말라 자기 목소리가 마치 남의 것이 양 잔뜩 잠겨 있었다.
'어째서일까?'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뭉게구름처럼 몰려오는 감정에 가슴이 막혀 내쉬는 숨결이 거칠어졌다.
"좋아!"
지로사부로는 소리지르듯이 말했다.
"히메의 몸이 부서지도록 꼭 껴안아 주겠어."
거칠게 무릎을 짚고 어깨 위에서 힘껏 두 손으로 죄어 들어갔다.
"아아."
토쿠히메는 비명을 지르면서 상반신을 맡겨왔다.
지로사부로는 머리가 불처럼 달아올랐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여전히 나긋나긋한 토쿠히메의 몸이었다. 그 부드러움을 대하자 더욱 맹렬하게 불이 타올랐다.
"아프지 않지?"
"예."
"이래도? 이래도 아프지 않아?"
토쿠히메는 지로사부로의 가슴에 묻은 머리를 희미하게 흔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턱 밑에서 나부끼고, 그 옆으로 드러난 귓볼이 홍매화의 꽃잎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지로사부로는 그 귓볼을 보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니, 아찔해진 의식 너머에서 자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신비한 호기심의 도발을 느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주겠어."
이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였다. 그는 옆방에서 문턱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코지쥬를 보자 예사롭지 않은 공기를 느꼈다.
"기분이 풀리셨나?"
작은 소리로 물었다. 코지쥬가 목욕을 하고 나온 것 같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시치노스케는 근엄하게 말하고 자세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떳다.
매화의 새로운 성
1
이에야스는 아직 나무토막과 대패밥과 같은 것을 치우지 않은 정원과 망루를 둘러보았다.
"정리가 되거든 매화구경이라도 하세."
이렇게 말하며 혼다 사쿠자에몬을 돌아보았다.
"이월 중순이나 삼월 초에는 오다 님과 함께 상경해야 할걸세. 그러면 잠시 이 성을 비우게 되네."
사쿠자에몬은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중후한 면이 있는 반면, 때때로 이에야스에게 농담을 걸기도 했다. 그만큼 이에야스와 친밀해져 있었다.
"성주님, 매화구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입니다마는, 이 성에서 두 분을 모시고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둘이라면...... 오카자키의 사부로 말인가?"
"아니, 성주님과 이오의 마님 두분을 함께 모시고 말씁입니다."
"농담은 그만둬!"
이에야스는 버럭 화를 냈다.
"그대는 종종 농담을 하는데, 그런 촌스러운 소리는 하지 말게."
"하하하, 촌스러운 말씀은 도리어 성주님이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연한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듣고 싶지 않아, 그런 말은."
사실 현재 망루가 세워진 곳 부근에서 이오의 미망인이 자결을 하였는데, 자신을 한 조각의 뼈도 남기지 않고 불태우게 했다.
'정말 열녀였어."
그렇게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만일 슨푸에서 두 사람이 맺어졌다면 미망인의 인생도 크게 달라졌을 텐데.
그녀가 한 줌의 재로 변한 곳엔 매화나무 한 그루가 반쯤 탄 채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남아있는 매화나무 한쪽 가지에는 하얀 꽃이 만발해 있었다.
"사쿠자에몬, 저 매화를 잘라버리게."
"잘라서는 안됩니다. 남을 아랑곳 않고 피어있는 꽃...... 그 부근에는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말하다 말고 사쿠자에몬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성주님, 오카자키의 도련님과 토쿠히메님이 진정한 부부가 되셨다고 히라이와 시치노스케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아니, 시부로가...... 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군. 그런데, 사쿠자에몬."
"예."
"그대의 눈으로 볼 때 사부로는 어떨 것 같은가? 옆에 아무도 없으니 걱정말고 이야기하게."
"그러시다면......"
사쿠자에몬은 외면을 한 채 말했다.
"성주님은 너무 바쁘셔서 곁에 계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해도 혼자 계시게 하면 좀......"
"음. 나도 언제나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지. 그럼, 이번에 상경할 때는 그대도 오카자키에 남아주겠나?"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거기 남아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합니다. 저에게는 제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사쿠자에몬, 강한 것만이 남자는 아니냐. 집안 살림도 해야 하는 것일세. 그대와 코리키, 아마노, 이렇게 세 사람에게 오카자키를 부탁하려 하네."
사쿠자에몬은 못 들은 척하고 일어섰다.
"성주님,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이 늙은 매화옆에서 잠시 쉬도록 하십시오. 따끈한 보리차라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음, 정말 아름답군. 히쿠마노성...... 아니, 하마마츠 성의 명물이 될 이 매화나무, 백년은 되었겠지?"
이에야스가 그 나무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여봐라, 따끈한 보리차를 가져오너라."
사쿠자에몬이 새로 지은 주방을 향해 명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박한 쟁반에 찻잔을 얹어 부지런히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흘끗 바라본 이에야스의 얼굴빛이 변했다.
2
여자는 보면 볼수록 이곳에서 이오 부젠의 미망인과 너무나 흡사했다. 갸름한 눈매, 꼭 다문 입매, 머리카락과 피부 색깔, 그리고 키마저......
이에야스가 찻잔도 들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태도까지 똑같았다.
이에야스는 등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령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주위는 아직 밝았고, 이에야스의 기이한 태도에 점점 더 얼굴을 붉히는 여자의 가슴은 숨을 쉴 때마다 움직였다.
'미망인은 죽지 않은 것일까?'
이에야스는 그제야 찻잔을 들었다.
"그대 이름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예."
여자는 질문이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오아이라고 합니다."
"오아이라고...... 누구의 딸이냐?"
거듭해서 묻자 옆에 대령하고 있던 혼다 사쿠자에몬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이고 야자에몬 마사카츠의 손녀입니다."
"음 야자에몬의 손녀라...... 너무 닯았어."
"닯았다니, 누구를......"
사쿠자에몬은 다시 조롱하듯 어미를 길게 끌면서 말했다.
"여기서 성주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라."
"예."
여자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야자에몬의 손녀이고, 요시카츠의 아내입니다."
"허어, 이미 처녀가 아니란 말이구나."
"예. 남매의 어미이기도 합니다."
"그랬었군, 요시카츠의 아내였군."
이에야스는 가만히 한숨을 쉬다가 옆에서 다시 웃고 있는 사쿠자에몬을 깨달았다.
"아, 맛이 좋군, 한잔 더 가져오너라."
"예."
여자가 얌전히 물러갔다.
"사쿠자에몬, 왜 웃어!"
"문득 성주님의 할아버님이신 키요야스 님이 떠올라서."
"할아버지가 어떻다는 거야?"
"미즈노 타다마사와 싸우고 화의했을 때, 타다마사의 내실에 계시는 케요인 님을 보시고 나에게 달라 하시고는 오카자키로 데려오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더 이상 농담은 용서 못할 일이다."
"하하하. 단지 저는 성주님과 키요야스 님의 활달성을 비교한 것뿐입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군. 나도 상대가 적장이라면 망설이지 않아. 그러나 가신의 아내라면 안되는 소리지."
이때 오아이가 다시 보리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오아이라고 했지, 나이는?"
"예, 열아홉입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꿀꺽 마시고 잔을 넘겨준 이에야스는 자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웃는군. 용서하지 않겠어, 사쿠자에몬."
이 말을 듣고 사쿠자에몬은 오히려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3
"성주님, 너무 노하지 마십시오. 성주님은 중요한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사쿠자에몬은 여전히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뒤쪽의 새로 지은 건물을 가리켰다.
"이렇게 새로운 성이 생기면 당연히 여자도 필요하게 됩니다. 야자에몬님의 연로한 부인이 일부러 손녀에게 차를 가져가게 한 것은 무엇때문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래,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성주님은 잊으셨군요. 오아이는 미망인입니다."
"뭐......미망인이라고?"
"야자에몬님의 딸이 토즈카 고로다이부 타다하루에게 출가하여 그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오아이, 사촌에게 시집가는 바람에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가 얼마 전에 남편이 전사했습니다.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아아, 그 요시카츠인가......"
"야자에몬님의 부인은 이 성에서 일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 데려다 놓았으나 성주님이
깨닫기 못하셔서 제가 일부러 보리차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혈통, 기질, 예의범절이 모두 나무랄 데 없습니다. 성안의 여자들을 단속하게 하면 어떨까요?"
"음, 그대는 또 나를 속였군."
"원,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성안에서 일하도록 하는 것은 좋아. 그러나 여자들을 잘 단속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예, 그 점은 우선 곁에 두시고 천천히 성품을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사쿠자에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같이 가시죠."
"음, 그래."
어느틈에 하늘은 그림으로 그린 듯이 맑게 개고 거기에 빛이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빛을 받은 하마나 호수가 겨울 바람에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서도 노송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군."
"제발 이 성의 내전에는 바람이 불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니, 무어라고 했나?"
"아닙니다. 저에게도 아내가 없었더라면 하고 말했던 것뿐입니다."
"묘한 말을 하는군. 아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할 뻔했나?"
"미망인을 아내로 맞겠습니다."
이에야스는 씁쓸히 웃고 발부리의 돌을 걷어찼다. 아직 뇌리에는 오아이의 모습이 또렷하게 살아있었다. 아니, 그것은 오아이를 통해 먼 소년 시절의 꿈으로 생각을 되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원래 여자란 같이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요물이라서."
"또 그런 소리를 하는군.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그렇다고 수없이 많은 천하의 숫처녀, 일일이 다 겪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까 성격이 좋은 여자와 어울려보고 이만하면 여장부라고 낙인찍을 수 있는 사람을 맞이해야 계산이 맞을 것입니다."
"그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남녀 사이의 일을 계산으로 따질 수는 없어."
두 사람은 어느새 이에야스의 거실 밖 정원에 와 있었다. 이곳만은 이미 연못의 배치도 끝나고 마당도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다.
"성주님, 여기서 만나셔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우선 앉아 계시지요."
댓돌 위에서 마루를 가리키고는 안을 향해 큰소리로 불렀다.
"한에몬, 한에몬 거기 와 있나?"
4
"예."
대답하고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온 것은 혼다 한에몬이었다.
한에몬은 이에야스의 모습에 주춤했다.
"앗."
그러나 곧 마루 끝에 앉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 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이에야스는 한에몬에 대한 대답 대신 사쿠자에몬을 흘끗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또 잔재주를 부리면 용서치 않겠다."
사쿠자에몬이 말했다.
"한에몬, 어서 말씀 드리게."
"예. 혼다 분고노카미 히로타카가, 새로 완공하신 성에서 성주님의 신변에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하기 위해 전에 맡아 놓았던 것을 돌려드리겠다고 합니다."
"맡아놓았던 것? 나는 분고노카미에게 맡긴 게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합니다......"
"한에몬!"
사쿠자에몬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서 보여드리면 되잖아? 답답한 사내 같으니라구."
"그렇군요."
이에야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자코 있었다. 대강 짐작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치미를 떼는 사쿠자에몬에게 눈을 흘기듯 했다.
"오만 님, 어서 나오시오."
일단 마루에서 안으로 들어갔던 한에몬이 눈부신 표정으로 한 여자를 데리고 다시 마루로 나왔다.
"성주님, 그 사이 무고하신지......"
애절하게 떨리는, 겨울 연못의 수면과도 같이 맑은 목소리였다.
이에야스는 양미간을 모으고 돌아보았다.
'그대였군.'
중얼거리고는 사쿠자에몬을 흘끗 노려보았다.
"잘 있었나?"
"예...... 성주님도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물러가 있거라. 나중에 만날 테니."
츠키야마의 무서운 질투에 못이겨 혼다 분고토카미의 집에 숨어 있던 오만은 그동안 몰라볼 정도로 성숙한 여인네로 변해 있었다.
"한에몬도 물러가거라."
"예. 그러면 저는 맡기셨던 것을 분명히 전해드렸습니다."
"말이 많구나. 물러가 쉬어라."
"예."
오만은 반가워서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한에몬과 같이 나갔다.
"사쿠자에몬."
"예."
"그대들의 주제넘은 행동을 내가 기뻐할 줄 알고 있나?"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성주님답지 않습니다."
"뭣이, 또 말을 돌리면 용서하지 않을 터이다."
"무릇 충성이란 명령받은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는 끝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지나친 일을 하게 될지 모르나......그럴 경우에는 지체없이 꾸짖어 주십시오."
"그렇다고 일일이 여자의 일에까지......"
"성주님!"
"왜 그러느냐, 그런 불만스런 표정으로?"
"성주님은 더 이상 성을 늘리지 않을 것입니까? 아드님께 물려드릴 성은 오카자키만으로도 충분하십니까?"
이렇게 말하고 자기도 마루에 앉아 이에야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5
이에야스는 사쿠자에몬에게 일별을 던졌을 뿐이었다. 가신의 말 중에는 들어야 할 것과 듣지 않아야 할 것이 있었다.
지금 사쿠자에몬이 한 말에는 그 나름대로 지극한 충성심이 깃들여 있었다. 응당 받아들일줄 알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나 이에야스가 입을 다물자 그 역시 침묵하고 말았다.
지난 연말부터 시동이 된 이이 만치요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만치요도 아무 말없이 마루 가장자리에 앉았다.
"만치요, 너는 물러가 있거라."
잠시후 이에야스는 턱짓으로 만치요에게 명했다.
"아이를 낳게 하라는 말인가, 사쿠자에몬?"
나직한,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선군에게는 성주님이란 아드님이 계셨기에 지금 이렇게 하마나 호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셨습니다. 슨푸의 우지자네에게 훌륭한 형제가 있었다면 아직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주님을 지금까지 여자를 대하시는 방법이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씁쓸히 웃고 나서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여자 문제에서도 먼저 계산부터 해야한다는 사쿠자에몬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표면적인 혼례는 모두 타산적인 정략결혼이지만, 어느 다이묘나 소실에 관해서는 성격과 현명함 같은 건 계산에 넣지 않았다.
"원래 여자는......"
다시 사쿠자에몬은 혼잣말처럼 불쑥 말했다.
"남자의 노리개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나는 여자를 희롱하기만 했다는 말인가?"
"성주님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주님이 거쳐간 여자 중에서 누가 행복해졌습니까?"
"으음."
"모두 마음에 상처를 입고 떠났습니다. 이 점은 누구보다도 성주님 자신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이에야스는 사쿠자에몬으로부터 눈길을 돌렸다.
이 성에서 자결한 키라의 딸을 비롯해 츠키야마, 카네, 오만등의 모습이 눈에 떠올랐다. 상대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 자신의 마음에도 무거운 응어리를 남겼다.
"사쿠자에몬, 나는 여자를 다룰 줄 몰라."
"이제부터라도 익히십시오."
"어려운 일이야, 위로하려고 한 일이 도리어 상대를 슬프게 했어. 그대의 말이 옳았어."
"성주님! 위로하려고 하신 일...... 그것이 사실은 한낱 희롱에 불과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셨습니까. 좀더 비정해지셔야 합니다."
"정을 주지 말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여자에게는 자기 자식을 낳아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당사자가 깨닫건 못하건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천지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정으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에야스는 다시 사쿠자에몬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 눈에는 망설임의 빛이 역력했다.
사쿠자에몬은 다시 그 앞으로 다가앉았다.
"성주님. 정말 답답하십니다. 저기 있는 소나무를 보십시오. 이 성을 보십시오. 뿌리가 있고
토대가 있어 가지가 뻗어나고 잎도 바람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만으로 소나무가 자라겠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하는 말에 이에야스는 얼굴을 돌리고 가만히 무릎을 움켜잡았다.
6
이에야스는 사쿠자에몬이 한 말의 뜻을 반쯤은 이해했으나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했다. 천지 자연의 이치에 비해 인간의 정이 얼마나 무력한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인간의 정도 역시 천지 자연이 지닌 하나의 이치...... 이런 생각을 하니 망설여진다.
"나더러 비정해져서 저 소나무 뿌리를 붙들라는 말인가?"
"예. 여자 성격을 파악하시고 하찮은 정 따위는 잊어버리십시오."
"으음."
"자식을 낳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건강하게 키우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이것이 천지의 이치입니다. 입으로 위로하는 것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으음."
"성주님은 자식이 필요하시고, 오카자키의 사부로 도련님은 형제가 필요하십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식을 낳아 기르고 싶은 것이 본래의 소원......"
사쿠자에몬은 적의 창끝에라도 선 듯한 눈으로 차례차례 손가락을 꼽았다.
"만일 그 여자가 이미 여장부라는 소문이 자자한 미망인이라면 그야말로 사방팔방으로 훌륭
하게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하시면서 헛된 색정에는 빠져들
지 마십시오."
이에야스는 비로소 큰 소리로 웃었다.
"알겠어. 알겠으니 그렇게 물어 뜯을 듯한 표정은 짓지 말게."
"물어 뜯을 듯한...... 하하하. 이것 참 묘한 말씀을 듣게 되는군요. 그럼 저는 이제부터 망루를 돌아보겠습니다."
할 말을 다 하고는 귀신이란 별명처럼 다시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쿠자에몬이었다.
사쿠자에몬이 사라지자 만치요가 다시 마루에 나타났다.
"성주님, 상경하시는 날짜는 언제쯤입니까?"
"글쎄."
"사카키바라 코헤이타님, 혼다 헤이하치로 님의 이야기로는 이번은 단순한 상경이 아니다.
오다 님과 함께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전투를 벌일 것이라던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에야스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성주님! 부탁입니다. 이 만치요에게도 관례를 올리도록 허락해 주시고, 출전하게 해주십시오."
"만치요."
"예."
"오늘은 내 음식상을 내전으로 가져오라고 일러라. 오만이라는 여자가 혼다 분고노카미의 집에서 이리로 왔을 것이다. 그 여자의 방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전하라."
"예......"
만치요는 자기 말에 대한 대답이 없자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만이라......'
이에야스는 짚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오만을 방에 들인다는 것은 츠키야마에 대한 도전처럼 보여 거북스러웠으나 일부러 보내온 여자를 쫓아보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사쿠자에몬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에야스는 아직도 생나무의 향기가 짙게 깔려 있는 거실로 들어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지 목소리를 낮추어 우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7
이에야스는 그 소리가 귀에 익었다. 강한 기질을 가지고 있는 한편 어딘지 응석받이 같은 영리한 면이 있는 오만. 그녀는 지금 만치요에게 지시하는 이에야스의 말을 듣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이에야스는 성큼성큼 걸어가고 옆방으로 통하는 장지문이 열렸다. 마루에서 떨어진 그 방은 이미 황혼이 깔린 것처럼 어두컴컴했으나,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오만의 얼굴이 박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에야스는 문득 이 오만과 부엌일을 도우려고 온 오아이와는 누가 더 아름다울까 하고 머릿속으로 비교해보았다. 오만도 벌써 스무 살이 되었다. 오아이는 키라의 딸을 많이 닮아 복스러운 얼굴인데 비해 오만은 재치가 넘치는 갸름한 얼굴이었다. 한쪽은 두 아이의 어머니, 다른 쪽은 자기한테 꽃봉오리를 맡긴 처녀.
"오, 듣고 있었군."
"예. 꾸중을 듣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어째서 꾸중할 거라 생각하나?"
"성주님은 주제넘은 일을 싫어하시는 분이어서 다시 돌아가라고 하실 것만 같아......"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분고노카미인가?"
"예."
이에야스는 웃는 대신 짐짓 언짢아 하는 얼굴이었다. 입으로만 하는 위로는 그만하십시오.
이렇게 말한 사쿠자에몬의 말이 퍼뜩 뇌리에 스쳤다.
"오만, 분명히 말하겠다. 나는 여자의 주제넘은 행동은 질색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성주님."
"남자에게는 여자와는 다른 고민이 있어. 자칫 마음을 잘못 쓰면 비단 나만이 아니라 그대들 일족의 생명과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러니 남자가 생각하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돼."
이에야스는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 말에 모순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공연한 말을 했구나 싶어서였다. 결국 츠키야마에 대한 심한 불만을 그대로 오만에게 털어놓은 셈이었다.
"예......예."
오만은 갸륵할 정도로 순수했다.
"그 말씀은 이모부와 친정으로부터도 많이 들었습니다."
내리까는 속눈썹에 반짝 이슬이 빛났다. 어른으로 성숙한 목덜미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억제하고 남의 일인 양 거리를 두고 대할 수 있는것도 나이에서 오는 성숙함 때문이었다.
'그동안 여자를 좀 멀리하고 있었어......'
이럴 때는 자칫 여자의 가치를 잘못 생각하기 쉬운데...... 이에야스느 이렇게 생각하면서 도리어 싸늘하게 문을 가리켰다.
"물러가라. 알겠느냐. 여기는 바깥채, 여자들이 올 곳이 못된다."
벌써 누가 오만의 방을 정해주었는지 그녀는 다시 공손히 절을 하고 나갔다. 오만이 나간 뒤 이에야스는 문득 주위에 감도는 오만의 채취를 느꼈다.
'그녀는 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일까?'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8
탁자 위에 있는 것은 다음 전투를 대비한 군사배치 구상이었다. 아직 서기의 손에 넘길 수 없는 원안으로 이에야스 자신이 머리를 짜내어 구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성만도 열 개가 넘었다. 오카자키에는 누구를 남기고, 이 하마마츠에는 누구를 머무르게 할 것인가.
지금 타케다 신겐은 에치고의 우에스기 군대에 대비하면서, 사가미의 호죠와 스루가의 유산을 다투고 있었다. 그 틈에 노부나가와 함께 상경하여 아사쿠라와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상황변화는 읽을 수 없었다.
순간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좌절한 원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리야마에게 패하여 할아버지가 전사한 나이에 비해 자신은 이미 3년이나 더 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인간의 삶은 덧없다. 과연 사쿠자에몬의 말대로 하나라도 더 많은 자손이 필요하다. 노부나가가 대번에 세 사람이나 소실을 둔 사실은 결코 엉뚱한 짓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무상한 공격에 대비한 튼튼한 포석이었다.
'그렇다. 나도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넘치는 젊음의 돌파구를 색정에서만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오만 하나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이에야스는 만치요가 식사준비가 되었다고 알리러 올 때까지 과거에는 없던 이상한 방향에서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상이 차려져 있고 거기에 술병이 곁들여 있었다 .
더구나 그 술병을 들고 시중을 드는 것은 낮에 보리차를 가져왔던 오아이였다. 오아이 곁에는 얼굴이 상기된 오만이 눈부시게 앉아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아이를 흘끗 바라보고 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누구의 명으로 이 술병을 가지고 들어왔느냐?"
"예. 주방의 책임자 아마노 마타베에 님의 지시입니다."
"마타베에게 분명하게 전하라. 성은 완성되었으나 아직 부족한 게 태산이다. 술 같은 것은 당치도 않은 사치야."
"예,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밥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흰쌀이 너무 많아. 팔 할만 섞으라고 해라."
"예."
"국 한 그릇에 야채 세 가지. 이것도 전쟁터에서는 잊어서는 안될 규칙이다. 지금 백성들은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이에야스는 말 끝에 오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오아이라고 했지?"
"예."
"그대도 나를 곁에서 섬기지 않겠나? 지금 당장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아직 전사한 남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상경했다가 돌아온 뒤에 답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밥을 푸지 않고, 어서 밥을......"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어서 오아이는 당황하며 소반을 올렸고, 오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이에야스를 쳐다보았다.
이에야스는 그 눈길을 받으며 천천히 입 안의 밥을 씹었다.
천하포무
1
화창한 봄빛이 마루와 정원에 넘치고 있었다. 때때로 꾀꼬리 소리가 가까워졌다가는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는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전에 없이 의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이세에 있는 여러 사찰과 신사에 보낼 안도죠에 직접 천하포무라는 큼직한 도장을 찍고 있었다.
능청스런 표정으로 그 손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은 지난날의 원숭이, 지금의 키노시타 히데요시였다. 노부나가도 예전의 노부나가가 아니라, 킨키에서부터 이세 일대를 평정하고 천하에 무위를 떨친다는 도장의 글귀가 가리키듯 천하포무를 선언할 정도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역시 옛날의 토키치로가 아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선봉대장을 맡았고, 지금은 이마하마에 3만석 영지를 갖기까지 그 지위가 올라 있었다.
"어때, 이에야스는 잘 있더냐?"
노부나가의 물음에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웃기부터 했다.
"헤헤헤헤."
"묘한 녀석이군, 뭐가 우스우냐?"
"대장님이 스물두세 살 때 생각하신 것을 미카와 님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내가 스물두세 살 때 생각한 것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자손 번창의 시책 말입니다."
"하하하하, 소실을 두는 일 말이로군. 그래, 이에야스는 몇 살이지?"
"스물 아홉일 것입니다. 대장님보다 여덟 살 아래니까요."
"음, 스물아홉이라면 좀 늦은 편이군."
노부나가는 잠시 묵묵히 도장을 찍고 있다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대는 어떤가, 아직 생기지 않았나?"
"예, 그것만은, 전투를 하면 풍운이 일고, 공격하면 강둑이 무너지는 것처럼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알겠나, 이 노부나가를 속인 죄야."
"아니, 대장님을 속이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안사람도 여기저기 축원을 드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경계했던 것처럼 어느틈에 아시가루의 우두머리 후지이 마타에몬의
딸 야에를 구슬려서 아내로 삼았다.
노부나가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과연 원숭이다운 재치였다 싶으면서 새삼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직접 마타에몬에게 청혼하면 승낙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와 사이가 좋은 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를 내세워 청혼하게 했다.
"야에를 내 소실로 주게."
후지이 마타에몬은 놀라운 한편 기뻤다. 상대는 명문 출신일뿐만 아니라, 새로 노부나가로부터 아카호로를 입을 수 있는 특전을 받은 장수였다.
"마에다 님,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요?"
"내가 어디 농담이나 할 사람인가."
"잘 알았습니다. 야에는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장담까지 했다. 그러나 토키치로와 밀약이 되어 있는 야에가 승낙할 리 없었다.
"마에다 님에게는 이미 현숙하기로 이름난 오마츠님이 계십니다. 이 일만은 분명하게 거절해 주십시오."
딸의 완강한 거절에 마타에몬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러한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토시이에는 시침 뚝 떼고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 마타에몬이 딱한 처지를 의논할 상대는 예전의 부하로 지금은 주방 일을 맡고 있는 원숭이, 곧 키노시타 토키치로 밖에 없었다.
2
후지이 마타에몬의 딱한 처지를 원숭이는 부엌 화덕 옆에서 자못 심각한 표정을 팔짱을 낀채 생각에 잠겨 듣고 있었다.
"자네는 마에다 니모가 특별한 사이이니 어떻게든 좀 사죄를 해주게. 야에는 죽어도 싫다고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자리인데. 아마 부끄러워서 그러겠죠. 좀더 설득해 보시지요."
마타에몬은 그말에 더욱 풀이 죽어 다시 야에한테로 갔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토키치로는 또 토시이에를 찾아가 부탁을 했다.
"한 번 더 쐐기를 박아 주시오."
이번에는 마타에몬이 야에를 설득하고 있는 자리에 심부름하는 사람이 와 마타자에몬의 말을 전했다.
"마타자에몬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강제로라도 맞아들이겠다."
이러한 내용의 전갈이었다.
마타에몬은 사람을 돌려보내고 순진하게도 할복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때 원숭이가 어슬렁어슬렁 찾아와 물었다.
"어떤가요, 설득되었나요?"
미리 짜고 한일, 순진한 마타에몬으로서는 당할 수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네. 마에다 님이 그토록 화를 내고 계시니 이 쪼글쪼글한 배라도 갈라 사죄하려고 하네."
"아니, 할복을...... 이거 큰일이군. 이렇게 하십시오. 사실은 야에한테는 이미 정해진 상대가
있다. 그러니 이해해주시기 바란다고."
"안돼. 마에다 님은 대쪽 같은 성격이라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달리 거절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지요 뭐. 상대가 누구냐고 묻거든 제 이름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다음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니, 자네가 상대라고? 그 말을 곧이 들을 것 같나?"
"곧이 듣건 안 듣건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토키치로의 말에 마타에몬은 힘없이 토시이에를 찾아갔다. 물론 토시이에는 믿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 정해진 사람이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참고로 묻겠는데 그 상대자의
이름은?"
"예. 키노시타 토키치로입니다."
"뭐, 원숭이라고, 거짓말은 아닐 테지?"
"예......예. 저도 너무 뜻밖이라서......"
"알았네! 이 마타자에몬도 무사이니 그대로 물러날 수야 없지. 내가 야에와 원숭이의 중매인이 되겠네. 이의 없겠지?"
모든 일은 원숭이가 꾸민 대로 진행되었다. 마타에몬은 자기 의견 따위는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아무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
마타에몬으로서는 산 너머 산이었다. 마에다 마타자에몬조차 싫다고 한 야에가 어찌 원숭이
따위에게 시집가려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야에는
대뜸 원숭이가 상대라면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
"싸움에도 재능이 있지만, 여자에 대해서도 보통이 아니군. 방심해서는 안될 녀석이야."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이렇게 말하면서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원숭이!"
"예."
"그대와 이에야스의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듣지는 않았겠지?"
노부나가는 도장을 다 찍고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3
"물론 사람들을 내보내기는 했습니다마는......"
히데요시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노신들 중에는 이번 상경이 아사쿠라 토벌이라고......"
"눈치 챈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
"예, 대부분이."
"그렇다면 소문을 더욱 퍼뜨려야겠어. 무슨 수단을 쓰고 왔느냐?"
"예. 하마마츠에서 오카자키에 이르는 길에 행상인 스물세 명을 시켜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소문을?"
"올해 봄의 쿄토는 볼 만할 것이다. 불탄 니죠 궁궐터에 쇼군 저택이 생긴다. 지금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미카와의 성주도 쿄토로 꽃구경을 오실 것이다. 이런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꽃구경이라니 너무 한가한 소리 같구나."
"예. 백성들이 그 말을 믿을 정도로 미카와를 비롯하여 이세, 오와리, 미노, 오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평의 은덕을 우러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천하포무의 경사스러운 조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부하는 말은 하지 마라. 그대답지 못해."
꾸짖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쿄토로 꽃구경 갈 날도 그리 멀지 않았어. 아니, 어서 그날이 오도록 해야만 돼."
노부나가가 천하포무의 도장을 만들게 한 것은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세이이타이 쇼군으로 임명된 뒤 직접 이세로 옮기고, 이세의 지방관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대신 자기 둘째 아들 챠센마루, 칸베가의 후임으로는 셋째 아들 산시치마루를 승계시킨다는 약속으로 평정하고, 야마다의 대신궁에 참배했을 때부터였다.
쿄토 궁전의 쇠락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대신궁 또한 몹시 황폐해 있었다.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황폐한 채 내버려두고는 아무리 무력의 힘을 떨친다고 해도 결코 난세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천하포무 도장과 함께 궁정 재건에 착수했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여 서두르지는 않았다. 2, 3년 정도의 기간을 잡고 시마다 야에몬과 아사야마 니치죠를 책임자로 삼아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사실 그 무렵의 조정은 상상 이상으로 초라했다. 궁정의 담은 무너져 없어지고 군데군데 대나무울타리와 가시나무 등이 담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오기마치 천황과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이 황녀 두 사람, 궁녀 다섯 사람이라고 하는 열 명이 안되는 인원만으로 살고 있었다.
천황에게는 이밖에도 두명의 황녀가 있었으나 사정이 있어 각각 절에 들어가 있었다. 때때로 무너진 담을 통해 아이들이 안에 들어가 보면, 어디에나 낡은 발이 드리워 있을 뿐 적막하기 짝이 없고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황실에 대한 노부나가의 충성심은 아버지 노부히데 이래의 전통이기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쇠퇴한 현실과 결부되어 더 강해졌다.
'이래서는 절대로 안된다.'
민족적 종가의 쇠퇴는 역사의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곧바로 백성의 쇠퇴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선 뿌리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이런 노부나가의 뜻을 잘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내뱉는 노부나가의 한숨소리에 마음이 저려왔다.
4
"지금 당장 꽃구경의 장애는 에치젠인데, 대책은 마련해 놓았겠지?"
"예. 이번 상경은 유명한 다기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명품을 가진 자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음, 다기수집이란 말이지?"
노부나가는 씁쓸히 웃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힘으로 세이이타이 쇼군이 되자 곧 그를 후쿠 쇼군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이를 사양했다. 노부나가가 후쿠 쇼군이 되면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시카게 역시 방랑 중이던 요시아키를 도와주며 후일을 기약했던 사람이며, 시바씨로부터 임명된 지방관으로서의 가문은 노부나가보다 위였다.
"정세를 파악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요시카게 말인가?"
히데요시는 엷은 웃음을 띠고 말했다.
"예. 대장님이 후쿠 쇼군을 거절하신 심경을 이해한다면 순순히 상경해야 할 텐데."
노부나가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자네는 요시카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군. 그 사람은 이 노부나가와 쇼군이 머지 않아 반드시 충돌할 것이라 믿고 일부러 상경하지 않는 것일세."
"바로 그 점입니다. 충돌하게 되면 쇼군은 요시카게에게 의지하려고 에치젠을 찾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쇼군을 업고 일전을 벌이겠다는 생각이 바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노부나가는 흘끗 히데요시를 바라보면서 일어났다.
"원숭이, 정원에 나가 산책이나 하세."
노부나가가 꿰뚫어보고 있는 이상으로 히데요시도 요시카게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으로 내려간 노부나가는 곧바로 동산 위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성안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그곳까지 다른 사람이 접근해 올리도 없었다. 마침 벚꽃 봉오리에 봄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상경하는 것은 틀림없겠지?"
"그렇습니다."
"타케다는 걱정할 것 없고, 이세도 평정되었으나......"
노부나가는 혼잣말을 하듯 손가락을 꼽아나갔다.
"원숭이, 아사쿠라를 정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예. 북쪽을 공격하는 동안에 만에 하나라도 아사이 님이......"
말하다 말고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보니 그는 잔뜩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혼간 사, 히에이잔과도 손을 잡을지 모르는 아사이 님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부나가는 잠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아사이 나가마사는 절세의 미인으로 소문난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는 화목하여 이미 두 딸을 낳았고, 노부나가도 늘 마음에 두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한 아사이가 과연 아사쿠라와 손을 잡고 노부나가의 배후를 칠 것인가......?
"원숭이, 깊이 명심하겠네. 그밖에는?"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꾸벅 절을 했다.
"기후에서는 그다지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말고, 도중에 쓸만한 군사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뭐, 도중에......?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노부나가의 어조는 어느 틈에 재촉으로 변해 있었다.
5
노부나가가 이번 아사쿠라 공격에서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병력이동이었다. 궁전의 재건을 살펴보고 다기도 수집한다는 구실로 상경하면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갈 수는 없었다.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이에야스와 쿄토에서 합류하여, 봄이 늦게 오는 쿄토에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허점을 찌를 필요가 있었다. 계획이 뜻대로 성공을 거두면, 히데요시가 우려하는 아사이와 아사쿠라가 동맹을 맺을 틈이 없었다.
어떻게 군사를 이동하느냐 하는 문제가 계속 노부나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노부나가의 고민을 알고, 도중에 쓸만한 군사를 모아들일 방법이 있다고 한다.
"말해보게, 자네 생각을."
노부나가의 재촉을 받고 히데요시는 빙긋이 웃었다.
"대장님은 어릴적부터 씨름을 좋아하셨다면서요?"
"그것이 이일과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말이냐?"
"예, 관계가 있습니다. 대장님, 킨키에서 이세 일대는 이제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축하한다는 구실로 도중에 씨름대회를 여십시오."
"으음."
"힘깨나 쓰는 인근의 떠돌이 무사들이 속속 모여들 것입니다. 그중에서 기량과 능력이 있는자를......"
노부나가는 무릎을 탁 쳤다.
"약아빠진 녀석!"
저절로 감탄의 말이 튀어나왔다.
"장소는 오미의 죠라쿠사 부근이 좋겠습니다. 곧바로 영을 내려 모일 수 있는 시간여유를 갖게 합니다. 상품이라 하고 보급대에게 군량을 실어오게 하고, 구경시킨다는 명목으로 하타모토를 데려옵니다."
"알겠다. 알겠어, 이 원숭이 놈아."
"대장님이 선발하시고 남은 찌꺼기는 저희들도 줍겠습니다. 새로 채용된 자들은 서로 잘 보이기 위해 공을 다툴 것이고, 하타모토들은 신참자에게지지 않으려고 더욱 분발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번 전투는 일단 승리할 것으로 보입니다마는."
갑자기 누부나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웃기 시작했다. 꾸짖는 목소리도 컸지만 웃음소리도 그에 못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소나무에서 새들이 깜짝 놀라 후드득 날아갔다.
"하하하, 씨름을 보면서 코토 구경이라. 좋아, 좋아. 하하하하."
당장 그날 오와리, 미노, 오미 일대에 씨름대회를 연다는 방문이 나붙었다.
심판은 역시 누구보다도 씨름을 좋아하는 후세구라 슌안.
노부나가 일행이 아사쿠라 공격의 목적을 숨기고 한가롭게 기후 성을 출발한 것은 겐키 원년 2월 25일이었다. 그 이튿날에는 오미의 죠라쿠 사에 이르렀고, 27, 28일 이틀 동안은 사방에서 모여든 내로라 하는 씨름꾼들로 죠라쿠사 경내는 떠나갈 듯 떠들썩했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사람은 채용한다는 소문이더군. 난 상품보다 그 편이 좋아."
"어떻게든 대장의 눈에 띄었으면 좋겠는데."
역사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남녀노소의 속삭임도 섞여있었다.
"좋은 세상이 왔어. 앞으로 전쟁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이야. 오다 성주님은 복받을 분이야."
당사자인 노부나가가 역시 군중속에 섞여 느긋한 표정으로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걷고 있었다. 언제나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이 노부나가의 일관된 정치신념이었다.
6
씨름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전에 사사키 집안의 수호신사였던 사사키신사의 불교식 승방에 세워지고, 그 경내 한가운데에 씨름판이 마련되었다. 네 기둥의 윗부분과 관람석에는 돗자리로 막이 쳐지고, 이것이 사사키의 몰락과 오다 가문의 흥륭을 말해주듯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군중 사이를 한바퀴 돈 뒤 옷을 갈아입고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그가 조금
전까지 자기들과 함께 있던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존경과 두려움의 눈길로 노부나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받으면서 노부나가의 공상은 잠시 씨름대회에서 떠나 있었다.
서쪽에 비와 호를 끼고 뒤로는 산을 등진 이 천연의 요새 아즈치에 성을 쌓으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산허리에서부터 호수 일대에 걸쳐 거리를 조성하고, 모든 관문을 없애 전국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 이 땅의 무한한 번영은 불을 보듯 확실했다.
'기후도 좋다. 더구나 쿄토에 가깝다는 유리한 면이 있다. 이곳에 수군을 배치하고 히에이잔을 감시하며 자리잡는다면 아마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그 첫 출발은 아사쿠라 공격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씨름판으로 시선을 돌릴 때 그곳에서는 쵸코가와라 사의 다이신과 쿠다라 사의 시카가 서로 부둥켜 안고 얼굴이 빨개진채 씩씩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노부나가도 씨름을 좋아하던 터라 곧 열중했다. 얼마 안 있어 허리가 유연한 다이신이 이겼다. 그러자 시카의 동생 오시카가 달려나와 다이신의 가랑이를 잡아챘다.
얼굴에 수염을 잔뜩 기른 나마즈에 마타이치로가 씨름판에 올랐을 때부터 씨름은 문자 그대로 선발을 위한 백병전이 되었다. 미야이 메자에몬이라는 거구의 떠돌이 무사가 마타이치로에게 높이 쳐들려 씨름판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번에는 그 이름처럼 푸른 피부의 아오지 요에몬이 마타이치로에게 도전했다.
오늘 승부 중에서는 이들의 경기가 실력이 호각을 이루는 가장 흥미 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양쪽 모두 노부시로, 단련된 강철과는 같은 몸으로 쌍방이 지칠 때까지 겨루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아 이튿날 다시 맞붙기로 했다.
또 다른 조는 다이토 쇼곤과 후카오 마타지로의 대결로, 그들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아 시합은 이튿날로 미루어졌다.
활짝 갠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이틀간의 대행사. 더구나 사사키의 일족인 롯카쿠 죠테이의 수호신사 앞에서 벌이는 행사였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남달랐다.
"천하의 후쿠 쇼군에서 사퇴하신 오다 성주님의 기세가 여간 아니야."
"저 많은 상품을 모두 나누어 주신다고 하니 정말 부자셔."
아오지 요에몬과 나마즈에 마타이치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선발되고, 후카오 마타지로와 다이신, 메자에몬 등은 그들의 부하가 되었다. 또한 역량이 뛰어난 180여명은 하타모토나 아시가루, 또는 임시로 채용한 일꾼이라는 명목으로 아즈치를 출발하는 노부나가 일행에 가담했다.
씨름대회를 마친 노부나가는 키노시타 히데요시를 늘 옆에 두고 쿄토의 봄을 만끽하면서 2월 30일에 덴야쿠노카미, 나카라이 로안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7
쿄토의 나카라이 저택에 도착한 뒤 노부나가에게는 크고 작은 다이묘들이 꼬리를 물고 문안을 드리러 왔다. 그들 가운데서도 마츠나가 단죠 히사히데와 호소카와 효부노다이부 후지타카 두 사람은 노부나가가 상경한 목적을 알기 위해 계속 탐색해 왔다.
"대장님, 성안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말에 노부나가는 되물었다.
"에치젠을 정복하러 왔을 것이라는 소문말이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다도에 밝은 유칸 법사와 니와 고로자에몬을 함
께 다기를 구하러 센슈의 사카이에 보내면 말입니다."
"으음......"
니와 고로자에몬은 오다 가에서는 시바타 곤로쿠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중신이었다. 그런 그가 일부러 다기를 구하러 사카이까지 갔다고 하면 사람들은 오다 가에 싸울 의사가 없다고 판단할 터였다.
"좋아. 두 사람을 보내지. 하지만 아직은 일러. 쿄토에 벚꽃이 만발 할 무렵이면 좋겠어."
3월 7일,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이에야스가 쿄토에 도착했다. 노부나가는 곧 쇼군을 만나 새로 지은 쇼군의 니죠 저택으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노 공연 행사를 갖도록 하자고 진언했다.
니죠의 쇼군 저택 역시 노부나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건물이었다.
불탄 니죠의 궁전터를 동북으로 1정씩 넓혀 해자를 두르고 저택을 짓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2월 27일이었다. 기내를 평정하고 바쿠후의 위엄을 갖추는 것이 민심을 안정시키는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후 1년 남짓 걸려 드디어 완성되었다.
노부나가는 정원 연못을 꾸미는데 특히 정성을 기울였다. 옛날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원에 있던 구산팔해의 진귀한 돌, 호소카와 저택에 있던 미토의 돌 등 명석을 운반해 올때는 노부나가 자신이 직접 가서 돌들을 비단으로 싸고 밧줄로 묶어, 피리와 북 장단에 맞추어 옮겨왔다. 물론 쇼군 요시아키의 만족보다 쿄토의 민심안정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
노부나가의 그러한 시책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입성과 동시에 실시한 지세면제, 군기 확립과 함께 이들 시책으로 과연 오다 노부나가로구나 하는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니죠 저택의 노 공연은 14일에 개최하기로 했다.
벚꽃이 저택 앞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초대받은 귀족들과 고관들의 얼굴도 비로소 봄을 느낀 듯 환했다.
무인으로는 이세의 지방관인 키타바타케, 히다의 자방관인 아네노코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하타케야마 타카아키, 호소카와 후지타카, 잇시키 시키부노다이부, 마츠나가 히사히데등이 초대되었다. 에치젠의 아사쿠라는 이때도 상경을 제의 받았으나 회답조차 없었다.
나무향기 그윽한 새 저택에서는 칸제다유와 콘파루다유가 교대로 일곱 번 춤을 추었다.
"아아, 쿄토에서 노를 보게 되다니."
귀족들 중에는 서로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쇼군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앞에 와서 손수 술을 따르기도 했다.
"천황께서는 이번에 꼭 사효에노카미를 맡으시라는 분부인데 수락하심이 어떻습니까?"
쇼군의 말에 노부나가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대답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이 노부나가는 단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는 노부나가를 이에야스가 흘끗 바라보았으나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8
새 저택에서의 노 공연 행사는 성안에 널리 퍼져 있던 아사쿠라 정벌 소문을 상당히 약화시켰다.
4월 1일, 니와 고로자에몬은 유칸 법사와 같이 몇 필의 말에 금과 은을 싣고 명품 다기를 구하러 센슈 사카이를 향해 출발했다. 미리 손을 써두었기 때문에 명품들이 속속 수집되었다.
텐노 사 야소큐의 과자 그림을 비롯하여 야쿠시인의 작은 소나무 섬, 기름집 조유의 감귤 등이 그려진 명품이 수집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이와같은 위장행위를 시키는 한편 노부나가 자신은 궁전 공사를 서둘렀다.
"궁전의 조성이 너무 늦어진다."
매일같이 공사장에 나가는 노부나가, 예전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때의 차림새에 눈이 휘둥그래질 게 틀림없다. 감청색 비단 갑옷에 호피 무카바키를 두르고 검은 말에 올라 거리를 질주했다.
공사에 필요한 수만개의 재목은 오사카에서 토바로 옮기고, 그곳에서 다시 궁전으로 운반했다. 그 총책임자는 오사와 오이노스케.
모든 것을 옛날 방식으로 했다. 목수들도 모두 에보시와 스오차림이었다. 그 사이를 토바에서 궁전, 궁전에서 토바로 호피카바키 차림의 노부나가가 왕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황실을 숭상하는 오다 님의 마음은 진정인 것 같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고, 또한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황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궁전을 완성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방에 영지를 정한다고 해도 기기서 전투가 벌어지면 쌀은 한 톨도 올라오지 못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노부나가는 공사를 서두르면서도 황실의 살림이 유지되도록 힘썼다. 곧 쿄토 성 사람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헌납하게 하는 별도의 대책을 강구했다. 최소한 매달 15섬 정도의 수입이 생기면, 거느리는 사람이라고는 고작 10여명 남짓한 오기마치 천황의 생활은 안정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쿄토에는 이미 꽃이 졌다. 파란 새잎이 포근하게 이 고도를 감싸기 시작했다. 고도에 평안한 나날이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천하포쿠의 수레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군사를 거느리고 머물러 있는 쇼코쿠사에 밀사가 파견되었다.
이미 호쿠리쿠 산간의 눈섞임물도 골짜기에 흐르기 사작하고 봄빛이 감돌고 있을터.
4월 18일.
이에야스는 쿄토의 봄을 만끼했으니 그만 하마마츠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기세를 올렸다.
이어서 4월 20일.
"오늘은 오다님의 모습이 안보이는군."
"웬일이실까?"
공사장의 목수들이 이야기하고 있는동안, 노부나가도 이에야스보다 한발 늦게 오미의 사카모토에서 와카사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맨 앞에 열 개의 적갈색 깃발을 앞세우고 다음에 활과 총포로 무장한 군사가 뒤따랐다. 이어서 그가 자랑하는 세간짜리 창을 든 300명의 군사, 다음에는 하타모토인 팔각장, 구조장, 십이아장, 삼십육비장등이 검은 색과 붉은 색 호로를 걸쳐 입은 500여기를 거느리고 에치젠의 츠루간쇼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싸울 때면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고, 공격할 때면 흡사 둑이 터져 쏟아져내리는 물과 같다는 평을 받는 노부나가 군의 말발굽소리가 순식간에 초록빛 산을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