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바람처럼 떠나라 -동유럽여행기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헤르만 헤세는 말하였다. 누구나 여행을 꿈꾼다. 아들의 권유에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기에 용기를 내었다. 우리가 즐거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까지 기다린다면 아마도 평생 동안 기다려야 할 것이기에. 하여, 바람처럼 떠나기로 하였다. 아내의 짐 꾸리기가 분주해졌다. 아들과 여행 일정을 조율하느라 한창이다. 이미 여행은 시작되었다. 자유와 설렘이 잔잔한 떨림으로 전해온다. 여행은 출발하기 전부터 낮은 목소리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짐을 꾸리며, 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 삶의 무게를 극복하는 방법임을 가르쳐 준다. 여행은 내게 넘치는 것을 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버린 후에 되돌아오는 것임을. 그리고 내가 남겨 두고 떠날 그들이 정말 소중한 사람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 무릇 여행이라는 단어는 항상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기 위해 떠나는 또 다른 길이기에.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앞만을 보며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다가 잠시 우측 깜박이를 넣고 한적한 시골길의 가로수가 우거진 시원한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유로움이 여행 아니겠는가.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 틀림없다.
세계는 한 권의 책과 같아서,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과 마찬가지라 하였다. 설렘으로 마음의 날개를 달았다.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여 비행 10시간 만에 도착한 핀란드. 북극권의 빛나는 오로라가 펼쳐지는 나라. 국토 80%가 산과 호수 그리고 늪이다. 하여, 느린 삶을 즐기는 이들이다. 내가 오로라를 꿈꾸었던 곳이기도 하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헬싱키 중앙역으로 향했다. 디자인 왕국이라고도 일컫는 핀란드를 여행 첫 경유지로 선택해 하루를 머물렀다. 감각적인 도시다. 오후 네 시를 조금 넘겼는데 밝지를 못하다. 겨울 유럽은 낮이 짧다더니 진짜다. 거리 간판과 장식물이 가히 예술적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색채와 형태가 특이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헬싱키는 도보여행이 매력적인 곳이라고 느꼈다. 반나절이면 곳곳의 명소를 돌아볼 수 있다. 천천히 음미하며 걷다 보니 웅장한 교회 건물이 보인다. 헬싱키 대성당이다. 건물이 화려하다. 북유럽의 발달한 조명도 일조하는 듯하다. 중세 교회의 위엄이 느껴왔다. 여행 내내 느낀 것이지만 유럽 도시 곳곳이 옛 역사를 담고 있어 신, 구의 조화가 품격을 높여준다. 헬싱키는 삼면이 바다인 항구도시다. 역 인근 항구의 마켓광장으로 이동했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손으로 직접 만들고 판매하는 곳이라 하였는데 막 파하고 상점을 정리하는 중이라 아쉬웠다. 헬싱키 교외를 느리게 산책했다. 우스펜스키대성당을 거쳐 공원을 거닐었다. 자작나무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나무 위로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진다. 자연의 조화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노면전차인 트램을 타고 다시 중앙역으로 와 아카데미 서점에 들렀다. 에스플라나디 거리 서쪽 끝에 위치한 서점은 북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근대 건축의 거장인 알바 알토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며 영화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매대와 연결 되어 있는 카페에서 퍼져 나오는 커피향이 향기로웠다. 하늘을 향해 점점 넓어지는 독특한 구조의 3층짜리 건물은 그래서인지 큰 규모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다양한 서적이 전시 판매되고 있었으며 책과 더불어 하는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독서율을 자랑하는 이들 아닌가. 알고 있는 핀란드 작가인 ‘아르토 파실린나’의 책을 찾기도 하고 우리 책 번역판이 있나 두리번거려도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오로라를 담은 사진첩을 보며 장엄한 광경을 떠올렸지만 하루 일정으로는 무모한 계획임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숙소로 향했다. 8시간의 시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잠을 자지 못한 채 이튿날 새벽을 맞았다. 여행은 정신을 젊어지게 하는 샘이기에 피로감은 잊은 채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을 가르며 공항으로 이동해 오스트리아 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프스 선율이 흐르는 나라. 대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700년 전 유럽대륙을 호령한 이들. 바이올린 선율처럼 잔잔히 흐르는 풍부한 예술혼은 여행객을 유혹하기 충분하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그리고 하이든이 만들어낸 음악적 유산은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빈 중심부 서역에 있는 한인민박 집의 교포 부부가 우리 부부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함께 길 떠남을 시작하기로 한 아들 녀석이 갑자기 일이 생겨 사흘간은 예기치 않게 아내와 둘만의 여행이 되었다. 담소를 나누며 동포의 정을 한참을 나누었다. 친절이 몸에 밴 분들이었다. 간단히 짐만 푼 채 빈 시내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생경한 도시를 거니는 재미가 좋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다른 생김새를 한 이들이 그다지 생소하지 않음은 그들의 무관심일 수도 있겠지 싶다. 현대자동차의 견고한 광고판을 시작으로 케른트너 거리, 카린시안 거리를 거니는 우리는 그리하여 자유를 만끽하였다. 시내에는 역사의 숨결과 문화와 예술의 향취가 가득하다. 성 슈테판 대성당의 장엄함과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의 예술성 그리고 멜크 수도원과 호프부르크 왕궁, 빈 시청사가 조화롭게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다음날 찾아간 빈 외곽의 함스부르크 왕가의 별궁인 쇤브룬 궁전은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 탄성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클림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벨베데레 궁전은 세계사 책에서 보던 바로크 양식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인간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여행은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여행은 우리의 지친 마음이 공간과 시간을 넘어 물처럼 바람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다. 꽉 매어졌던 정신을 풀어놓고, 힘껏 졸여진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다. 익숙한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고 거듭되는 일상으로부터 한 걸음 옆으로 떨어져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속에 자기를 비워놓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 다시 우리가 가꾸어갈 그 세상으로 돌아가 하루하루를 살 준비를 하는 것이 여행의 미학임을 느끼게 한다.
드디어 아들의 합류로 애초에 계획하였던 여행단이 꾸려졌다.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빈틈없는 계획보다 그 빈틈으로 들어가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모든 안내를 자처했던 아들의 늦은 합류로 우리 부부만의 사흘간 여정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서툰 언어로 긴장된 시간을 보내며 낯선 거리를 여행하는 설렘도 나쁘지 않았다. 여행은 사는 법을 배우게 한다. 뜻밖에 의도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될 때 계획하지 않은 길에도 즐거움이 있음을 터득하게 해준다. 낯선 곳에 가면 일상생활에서 닫히고 무뎌진 마음이 열리고, 빈손의 자유로움도 느끼게 된다. 한 걸음 물러나 내 삶을 밖에서 담담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이제 든든한 안내자도 함께하였으니 본격적인 길 떠남에 나선다.
31일이 되었다. 이곳도 연말연시의 술렁임이 차분하게 일고 있었다. 빈에서 차량을 빌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와 비경의 할슈타트를 여행하는 날이다. 기대가 컸다. 잘츠부르크로 향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도시이자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평화롭게 일행을 반겼다. 먼저 미라벨 정원을 거닐었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수도원 수습 수녀인 마리아가 명문 트랩 가의 가정교사로 들어가 7명의 자녀와 ‘도레미 송 Do-Re-Mi’을 부르던 영화 속 그 장면이 떠오른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모차르트의 도시’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로 거듭나게 했다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아름다운 겨울 정원은 한국인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객지에서 만난 한국 사람은 그저 반갑다. 눈인사로 반기니 그들도 미소로 화답한다. 모차르트를 떠올렸다. 그의 박물관을 거쳐 생가를 찾았다. 불꽃처럼 살다 간 서양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추억하는 이들로 붐볐다. 모차르트가 25세까지 산 이곳에는 그가 사용한 피아노, 바이올린과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이며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합창곡, 성악곡 등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이리도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기에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가를 나서니 세계에서 아름다운 거리로 일컫는 ‘게트라이데’ 거리가 정갈하게 펼쳐져 있다. 연철 간판으로 유명한 명품골목이다. 우리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즐기는데 포성이 연이어 요란하게 이어진다. 오늘이 31일이라 잘츠부르크 요새에서 연말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포성이 울리는 곳으로 향했다. 레지던츠 광장과 유럽 최대 규모인 6.000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오르간이 있는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지나니 호엔 잘츠부르크 요새를 오를 수 있는 열차인 후니쿨라가 보였다. 연이어 총성과 포성이 울리는 그 높은 곳을 향해 아찔한 속도로 올랐다. 난공불락의 요새에 오르니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시내는 멋진 야경을 선물해 주었다. 한참을 즐기다 숙소로 향했다. 늦게 도착한 게스트하우스에는 재야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들떠 있었다. 아들은 그들과 즐기러 내려가고 우리 부부는 새해 새날 일출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2016년 1월1일이다. 새해 새날을 여행지의 낯선 곳에서 맞이하니 느낌도 남다르다. 새해 일출을 함께하려 새벽에 눈을 떠니 창밖에서 진눈개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날씨가 좋아지길 기대하며 길을 나섰다. 살아있는 유럽의 맥박을 온몸으로 느끼며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따라가는 여정은 실로 경이롭다. 순백의 알프스가 선물하는 하양, 이 겨울날이 건네는 알프스의 선율은 만년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호반으로 일행을 이끈다. 높은 산과 호수가 절경을 이룬 알프스의 진주 할슈타트가 우리를 잡는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녕 동화 속 풍경이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이 풍광 앞에서 내 마음은 크게 요동친다. 시리게 펼쳐진 잘츠카머구트 가장자리에서 백조와 오리가 노닐고 송어가 뛰어 오른다. 슈베르트가 되어 송어를 떠올린다. 말문이 막히는 절경을 살면서 얼마나 직접 만날까…. 기쁘고 행복하다. 동유럽 절경이 눈을 호사시킨다. 장트길겐 마을과 필그림들이 만든 아름다운 장트볼프강 마을을 천천히 음미하며 두루 돌면서 알프스 자연이 빗어낸 풍광에 그만 내 영혼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날씨가 흐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새해 일출은 이곳에서 다시 맞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참 아름다운 곳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정말로 그곳이 내가 사는 곳보다 좋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그곳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낯선 정경이어서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람의 욕구는 한이 없다. 뭔가를 이루고 나면 또 다른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한다. 똑 같은 것을 보아도 달리 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은 새로운 것이 되고 내가 사는 곳도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마르센 프루트라는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라고 했다.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뭔가에 대한 욕구불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나를 향한 새로운 시각과 세상을 전과 달리 볼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안에 숨은 욕망과 절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자유롭게 마음을 표출하고 배우고 느끼며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게 된다. 한 번에 포용할 수 없는 산과 바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은 그동안 바쁘게 살아 왔던 나에게 뭔가를 전해준다.
또 새날이 밝았다. 근래 날씨가 맑지 않아 산뜻한 여행이 되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유럽 겨울 날씨가 하도 변화무쌍하니 그래도 좋아지리라 기대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을 먹고 나니 햇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할슈타트로 향했다. 어제 보다 쾌청한 그문덴 호수가 우리를 반겨 준다. 또 감탄사가 연발한다. 세계 자연유산 잘츠카머구트는 소금창고라는 뜻이라 한다. 이곳은 잘츠부르크의 동쪽 일대에 펼쳐져 있는 산악지대인데 이 지방에 소금을 채취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광산이 거의 없지만 아름다운 마을은 2.000m의 산으로 둘러싸인 채 남아 있어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잔설을 이고 있는 높은 산이 호수에 내려앉아 이색적인 풍광을 연출해준다. 세인트 볼프강 호수를 끼고 있는 모차르트 외가가 있는 세인트길겐 마을과 이어져 있는 볼프강 마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옥빛 호수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영혼마저 빼앗아간다. 이 아름다운 풍광은 꽤 오래 가슴 속에 머물 것이다. 아름다운 여운을 간직한 채 다시 빈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판도로프 디자이너 아울렛에 들렀다. 눈 내리는 궂은 날임에도 많은 이가 찾아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이 구미가 당겨 아들의 졸업선물을 마련했다. 기뻐하는 모습에 덩달아 행복해졌다. 늦게야 빈에 도착했지만 뒤늦게 합류한 아들은 엄마를 졸라 시내 관광을 나가고 나는 그 동안의 여정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빈의 마지막을 즐겼다. 내일은 헝가리로 간다. 안데르센은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정신을 젊어지게 하는 샘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떠올리며 청춘이 되었다는 마음으로 헝가리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국경을 새처럼 아무 제약 없이 넘어 헝가리로 접어들었다. 국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국경이란 국가라는 조직이 생긴 후에 일이다. 모든 벽이란 것은 먹는 일이 어려워지거나 사람들에게 욕심이란 것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그것의 높이나 견고함이 달라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분단국에서 왔기에, 국경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을 느낀다. 우리의 국경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철옹성인 북한과 남한 사이의 휴전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럽 국가들 사이에 놓인 국경보다 철저하게 폐쇄적이다. 국경은 결국 불평등에서 출발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도 결국은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곳의 국경은 헤세가 말한 그런 이상적인 경계의 모습이다. 헤르만 헤세는 말하였다.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려면 국경의 의미가 더는 무의미하게 될 때다”
라고 말이다. 군대 시절 군사분계선에서 총을 겨눈 채 북쪽을 바라보던 모습이 국경을 새처럼 넘고 있는 이때 왜 떠오를까….
어느새 열차는 역사로 들어선다. 왠지 서산하다. 다른 도시의 역들과는 다르게 처음 도착하는 사람이 '내가 이곳의 이방인' 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게 하였다. 숙소에 짐을 내리고 나니 얼른 이곳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인터넷 검색으로 헝가리 역사를 찾아보았다. 교향시를 창시한 피아노의 달인 리스트의 조국인 헝가리는 다뉴브 강변의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뚜렷한 사계절 속에 아름다운 문화·관광지가 빛나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세체니 다리 -부다 왕궁 -마차시 교회 -대통령궁 -어부의 요새 -오페라극장 -중앙시장 -영웅광장 -세체니 온천 등으로 집시의 나라를 느낄 곳을 정하고 나니 몸이 뜨거워졌다. 숙소에서 나와 다뉴브 강을 따라 걷는데 어느새 석양이 내려앉는다. 짧은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이곳은 더욱 특별해진다. 고갱의 그림에서 본 듯한 노을이 강을 물들인다. 다뉴브 강은 독일의 바덴에서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헝가리, 발칸의 여러 나라를 거쳐 흑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세체니 다리가 붉게 빛나고 있다. 소통의 연결선인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귀족과 부자들이 살았던 부다 지역과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했던 페스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천천히 걸으며 보헤미안이 되어 부다페스트를 느꼈다. 다리를 건너 트램을 타고 부다 왕궁에 이르렀다.
빛, 불은 인류의 산물이다. 도시가 빛나기 시작한다. 세계 3대 야경에 꼽힌다는 부다페스트는 그리하여 황홀하다. 더 높은 곳으로 갔다. 다뉴브를 가로질러 한껏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세체니 다리를 중심으로 시가지가 향기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황금 덩어리로 빚은 듯한 국회의사당이 야경의 정점을 찍는다. 그 아름다움으로 내 눈은 호사를 누리고 가슴은 전율한다.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아름답게 빛나는 야경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이어서 마차시 교회와 대통령궁 그리고 어부의 요새를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즐기는 것으로 헝가리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영하 10도의 부다페스트 겨울날은 춥다.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다. 오페라극장과 중앙시장 그리고 영웅광장을 들러 예술과 시장 그리고 역사를 만난 후, 마지막으로 온천에 도착했다. 부다페스트에 가면 온천은 즐겨야 한다고 들었다. 이곳에는 여러 온천이 있지만 가장 역사가 깊다는 세체니 온천을 택하였다. 노천과 실내 온천장이 여럿 되는 큰 규모의 온천이었다.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노천온천장으로 갔다. 입술이 얼어붙는 추위다. 맨발은 땅에 달라붙는다. 수증기가 가득하게 피어오르는 탕 속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이들이 보였다. 탕으로 들어가니 온몸이 녹아내린다. 추운 날씨 영향인지 물이 뜨겁지는 않고 적당한 수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 밖에 나와 있는 머리는 얼음 언 머리카락을 이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뽀얀 수증기 위로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얀 눈은 넓은 온천에 내려앉아 수증기로 화하고 하늘을 지붕 삼은 노천온천장은 오랜 시간 우리를 머물도록 유혹하였다. 경이로운 경험이다. 왠지 마음이 고요해졌다. 부다페스트의 황홀한 야경과 아찔한 온천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온천을 마치고 들른 뷔페의 음식은 시장기를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였고 곁들인 맥주와 와인도 알싸하고 향긋했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그 지역의 독특한 음식을 맛보는 것이다. 가지각색의 색과 맛으로 치장한 음식 맛에 우리 혀는 감동한다. 오감을 통하여 온 신경이 짜릿한 쾌감을 맛보는 순간일 것이다. 음식을 향한 사랑보다 더 진실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음식들이 인터넷에 소개되고 여행객은 현지에서 이를 찾는다. 우리의 오감에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주기 위해서 방문지의 맛 집을 찾곤 한다. 여행 첫날은 호텔, 넷째 날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나머지 기간은 모두 한인 민박을 이용했기에 아침은 한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유럽 음식을 먹고 조금은 느끼한 속을 풀어 주는 김치찌개는 역시 최고였다. 빈의 맛 집에서 만난 폭립도 좋았고 긴 줄을 서서 기다림 후에 맛본 전통음식 슈니첼도 미각을 동하게 해 주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점심으로 먹은 수제 햄버그도 감칠맛이 있었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할슈타트에서의 소고기 스테이크와 슈니첼은 맛이 으뜸이었다. 아름다운 그문덴 호수를 바라보며 주문한 커피는 강한 향과 특이한 맛에 그만 실소를 머금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조식으로 맛본 오스트리아 전통음식은 입맛엔 그다지 맞지 않았지만 체험이라 생각하니 이 또한 좋은 기분이었다. 동화의 나라 체스키 프롬로프에서 맛본 꼴레뇨와 굴라쉬는 우리의 족발 바베큐 맛으로 구미를 댕겼다. 카를 교를 걷고 들어간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여행 마지막 오찬을 달팽이 요리와 스테이크를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맥주의 고장답게 다양한 맥주 맛은 음식 맛을 돋워 주었다. 맥주를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식사 때마다 겸하고 보니 어느새 맥주 애호가가 된 기분이다. 자몽맥주와 코젤 흑맥주 그리고 호프 브루이가 좋았고 특히 쓰디쓴 라거 맥주인 필스너 맥주는 기억에 남는다. 이번에 만난 음식들은 여행의 맛을 느끼는데 크게 한몫을 하였다. 물론 그에 해당하는 큰 지출을 감수해야 했지만….
집을 나선 지 열흘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여행지인 프라하로 가기 위해 야간열차에 올랐다. 아늑하다 못해 비좁은 침대칸에서 곧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동이 트고 있었고 열차는 프라하의 새벽에 우릴 떨구어 주었다. 동화의 도시인 프라하는 로맨틱하며 매력적이다. 동유럽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 프라하. 프라하는 안개의 도시다. 이곳에 들어서면 차가운 안개가 우리를 반긴다. 유럽의 가장 유서 깊은 도시임을 안개가 설명한다. 안개는 가까운 사물을 아련하고 멀리 보이게 한다. 몽환적이다. 다가서면 또 멀어진다. 나무 사이가 멀어 보여 다가가면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 아스라이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프라하. 숨 가쁜 세상 속에서 안개는 그렇게 신비한 도시 프라하를 가까이에서 안내한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프라하 체험은 구시가지 광장부터 시작하였다. 명소답게 관광객들로 붐볐다. 1시 정각이 되어가니 천문 시계탑이 있는 곳으로 광장에 있던 모든 이가 모여든다. 모두가 한 곳을 향할 때 시계가 울리며 인형이 나타났다 사라져 간다. 이것을 보기 위해 모두 모인 것이라 생각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우리는 프라하를 한눈에 보기 위해 시계탑에 올랐다. 한 눈에 펼쳐진 프라하는 지금 설국이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신비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어서 하벨 시장을 지나 신시가지 바츨라프 광장으로 갔다. 중세시대 곡물시장이 있던 곳으로 광장이라기보다는 드넓은 대로이지만 프라하 시내에서 최고 번화가이다. 지금 광장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지만 1968년 소련군 침공에 항의하던 대규모 시위대가 희생된 '프라하의 봄'과 1989년 민주화 운동과 벨벳혁명 등 무수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체코 민주화의 상징적인 곳이다. 광장 전면에는 세계 10대 박물관 중에 하나인 국립박물관이 있었는데 공사 중이라 관람할 수는 없었다. 대로변을 중심으로 근대에 건축된 상점, 카페, 은행, 호텔 등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광장의 도로는 인도와 차도로 구분되고 가운데에는 정원과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광장 한쪽에 ‘프라하의 봄’과 스탈린 기의 영령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프라하의 역사를 보면 어느 부분 우리나라와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유를 갈망하던 그곳은 이제 번화가로 변하여 프라하의 랜드 마크가 되어 있다. 트램을 타고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블타바 강의 서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프라하의 상징이자 체코의 상징이다. 체코의 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통치했으며 현재는 체코 공화국의 대통령 관저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옛 성답게 웅장함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성안에는 대표적으로 성 비투스 성당, 로레타 성당, 황금소로, 대통령 궁이 있다. 체코의 대표 건축물인 성 비투스 대성당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니 황금빛 내부는 온통 스테인드글라스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높은 천장은 아찔하다. 580년 걸려 완성했다는 이 건축물은 그리하여 실로 웅장하다. 대성당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화약탑이 나온다. 박물관의 모습이다. 광장으로 나왔다. 프라하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신이 내린 야경을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트램에 몸을 실었다. 차가운 안개의 나라 프라하는 지금 눈 세상이다. 몸을 녹이러 들어간 아담한 카페에서 프란츠 카프카를 만났고 중세 도시와 근, 현대의 조화로운 골목을 거닐며 낭만을 즐기며 추억을 만들었다. 내일은 동화의 나라 체스키 프롬로프에 가는 날이다.
안델역에서 버스로 3시간 거리의 외곽에 있는 체스키는 온통 주황색을 하고 반긴다. 르네상스에서 멈춘 도시, 체스키 크롬로프는 ‘보헤미아의 굽은 목초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진에서만 보던 그곳을 왔다. 말발굽처럼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블타바 강이 만든 아름다운 풍광을 느끼며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구시가지로 연결된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니 아기자기한 상점이 많다. 구경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중세의 모습으로 그 시대 보물을 팔 것만 같다. 체스키 성에 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오른 전망대에서 동화 같은 풍경을 만나 한참을 넋을 놓고 있었다. 또 내 영혼을 빼앗겼다. 프라하와 달리 이곳은 맑은 날이다. 해가 지려는 하늘의 양털구름이 아주 아름답다. 맛나게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체스키 성에 올랐다. 중세 풍경을 간직한 이곳의 야경도 실로 아름답다.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새해가 지난 지 며칠이 되었지만 궂은 날씨로 아직 일출을 보지 못해 내일은 붉은 해를 기대하며 정갈하게 마련된 잠자리에 들었다.
새날이 밝아오는 듯해 일어나 창을 여니 차가운 안개가 수북하게 마을에 내려앉아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일출을 기원하며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 또다시 체스키 성에 올랐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뿌옇게 날은 밝아오는데 안개는 더욱 짙어져 가고 있었다. 안개에 쌓인 마을을 내려다보며 짧은 한숨으로 답한 후에 내려 와야만 했다. 정성스레 차려낸 푸짐한 서양식 상차림으로 아침을 마치고 짐을 꾸리고 나서 프라하 행 버스가 떠나는 오후 2시까지 우리는 블타바 강을 끼고 돌며 안개의 흐름 따라 유유자적 체스키를 다시 음미하였다. 프라하에 도착하니 어둑해진다.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공감되는 밤이다.
이제 이틀 후면 집으로 간다. 남은 여정은 프라하의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프라하를 느껴볼 요량이다. 아내가 ‘프라하의 연인’ 촬영지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의한다. 물론 야경을 보기 위한 것임을 알기에 가기로 하였다.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트램을 타고 촬영지 파빌리온으로 향했다. 눈길을 걸어 언덕에 올라 당도하니 프라하의 야경이 눈 속에 묻혀 예상보다 화려하진 않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앉아 식사하던 야외 테라스는 눈 때문에 앉기가 힘들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지배인이 나오더니 오늘은 단체 예약 손님이 있어 개인 저녁 식사가 곤란하다며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눈앞에 펼쳐진 흐린 프라하가 우릴 애써 위로하여 주었다. 궂은 날씨로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조금은 느끼해진 속을 얼큰한 라면과 김치로 속을 달랜 후 내일의 멋진 마지막 날을 꿈꾸며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마지막 날이 밝아왔다. 천천히 걸으며 프라하를 다시 음미하기로 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두 청년 무덤을 보며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고 구시가지 광장의 천문 시계탑에서 정시를 기다려 시계 쇼를 다시 보았다. 종이 울리면 해골은 종을 흔들고 닭이 울고 창문으로는 열두 제자 인형 중 몇이 고개만 살짝 내민다. 다시 실소하였다. 호텔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을 즐기고 카프카의 집터였다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카를 교를 많은 이들과 함께 걸었다. 눈물처럼 흐르는 블타바 강 위의 아름다운 다리에서 보헤미안이 되어 본다. 겨울의 블타바 강은 광활하게 차디차다. 아내는 새벽녘의 카를 교 산책을 꿈꾼다. 언젠가 또다시 이 집시의 도시를 찾을 때면 나는 아마 늙어 있으리라. 내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곳은 변함없이 그대로 내 나이테를 측정할 것이다. 나는 사느라 잊겠지만 여긴 그대로 유유하고 당당히 사람들을 대할 것이다.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자유와 평화의 상징인 존 레넌 벽을 찾았다. 체코 젊은이들이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던 시기에 비틀즈가 프라하에서 공연을 했다. 어느 날 존 레넌이 어이없게 죽었고 반공산주의자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자유에 대한 갈망이 크기에 존 레넌의 노래와 글을 이 벽에 표현하기 시작하며 프라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것에 감동한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곳을 찾아 체코의 젊은이들이 자유를 찾은 용기에 대해 동감하는 글들을 남겼다고 하는데 근래에는 그 내용이 많이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 글도 여럿 있었다. 젊은이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민주화운동이 우리의 소명이었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발길을 돌려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성 비투스 대성당이 있는 프라하 성에 다시 올랐다. 성 앞의 거인상과 코르분수가 보인다. 대통령궁 광장에 붙어있는 찻집으로 가 프라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군중 속의 고독을 즐겨 보았다.
프라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중세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고혹적이었고 세기를 넘나드는 작가와 화가의 흔적이 좋았으며 도시를 걷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좋았다. 천 년의 시간을 묵묵히 이어가는 이 작고 놀라운 도시에는 정교하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유럽여행에서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 중의 또 하나는 거리의 음악이다. 음악의 도시인 빈과 프라하에 와서 음악공연을 놓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아들의 압박으로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밤은 국립극장을 찾기로 하였다. 클래식에 문외한이지만 빈과 더불어 세계적인 음악 축제가 열리는 이곳에서 음악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찾아간 프라하 국립극장은 다소 한산하였다. 웅장한 건물 내부는 우리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테마가 있는 연주회는 피아노 5중주의 연주와 발레 그리고 성악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1시간여의 공연이었지만 뛰어난 연주 실력과 더불어 음악과 함께 하는 유럽인의 편안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공연을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으로 이번 여행을 갈무리하게 되어 더한 행복을 느꼈다.
오로라를 꿈꾸었던 핀란드 헬싱키를 거쳐 알프스를 담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머물다 알프스가 빗어낸 비경을 지닌 할슈타트와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재야와 새해를 맞고 야경이 아름다운 헝가리 부다페스트 거리를 걸으며 영혼마저 빼앗겼으며 동화의 마을 체스키 프롬로프에서 온통 주황빛으로 르네상스를 즐기다 동유럽 중심지인 체코 프라하에서 여러 날 즐거움으로 머물렀다. 여러 곳에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경이로움은 벅찬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여행이 좋은 것은 구경이 전부가 아니다. 집을 떠나 다른 장소에 가면 누구나 마음 문이 열려 모든 것을 거침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평소 완고했던 마음도 무방비 상태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다른 자연, 언어와 문화 풍습 그리고 얼굴을 대하면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에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의 삶을 살더라도 문득 그때 생각을 하면서 혼자 미소 짖고 있다면, 그동안의 고정된 생각과 편견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는 증거이다.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섰을 때는 여행은 돌아갈 곳이 있기에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이야기와 많은 추억이 가슴에 담겼다. 깨우침도 여럿 있었다. 떠날 때 몸 그대로 가슴에 많은 것 담고 돌아왔으니 오래 기억될 행복한 여행이었다. 여행은 목적지보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그곳을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의 여정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출발할 때 자연 일부가 되어 숨 쉬겠다는 그 첫 마음이 소중하고 산과 강, 나무와 풀들이 자신과 튼튼한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귀갓길이 더 값진 것이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삶의 동반자가 있다면 모든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느껴질 것이다. 바로 지금 아무리 긴 여행일지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삶은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의 바위 하나 물줄기 한 곳 그 어느 것도 빼놓지 않고 각각 이름과 그에 따른 사연을 만들어 간직하고 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번 여행을 통해 훨씬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었음에 참으로 행복하다. 이황 선생의 ‘매화에 물어 주어라’라는 유언이 떠오른다.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리라는 다짐을 여행을 마치면서 하여 본다.
진실한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나봄도 좋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