⓵ 만추는 햇살이 만든다. 햇볕이 나면 퓰과 나무가 활짝 꽃 피며 웃다가 해만 구 름에 가리면 금방 시무룩하니 몸을 움츠린다.
코를 찌르던 여름의 풀 냄새는 없고, 산에는 마른 풀 향기가 희미하게 떠돈다. 잎 이 성긴 나무들이 서 있는, 아무도 없는 과수원에 들어선다, 한쪽 양지바른 풀밭,버 려진 묘 위에 털썩 드러누우니, 참 억새며 다 자란 풀들이 눈 앞을 가리고 해를 비 춰 반짝인다. 눈을 감고 사지를 뻗으면 한가한 즐거움이 나른하게 몸에 와서 잠 긴다. 나는 마른 풀에 볼을 비비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진동기 「가을 풀」에서
⓶ 사십이 가까운 처녀인 그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 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훌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맘대로 쪽지거나 들어 올리지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겨 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 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 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악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놀랠 때에는 기숙사생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 격하고 매서웠다.
-현진건 「B 사감과 러브레터」에서
표현과 현현
그런데 시를 쓰는 데도 묘사적 언술이 적절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많은 사람이 시를 쓰면서 시적 표현이란 바로 문장론에서 말하는 묘사와 일치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특히 앞서 설명 과정에서, 암시적 묘사나 주관적 묘사는 더욱 시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묘사는 어떤 사물이나 인물의 실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언술 방법이지, 시에서처럼 사물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는 전복적 언술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⓵의 첫 문장은 꽤 암시적이다. 그러나 그 의도는 햇볕과 나무의 불가분 관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언술하고자 한 것이며, ⓶의 언술도 주인공 노처녀의 인상을 보다 실감 나게 설명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그러나 시의 경우는, 좀 더 효과적인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질적으로 다른 사물로 개조하는 데 있다. 이 말은 기존의 의미에서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존재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명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나 예술에서는 묘사란 말보다 표현(表現)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표현(expression)이라는 말은 내면적, 정신적, 심적인 상태를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세계를 가시의 세계로, 무형의 세계를 유형의 세계로 형성하는 것이다. 인상주의가 외부적인 사물의 형상을 내면에 각인시킨 다음 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표현주의는 처음부터 내면의 세계를 외형화 한다는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처럼 표현은 철저히 무형의 유형화다. 시의 대표적인 양식을 서정시(敍情詩)라 하는데 감정을 풀어내는 시라는 이 말은 표현이라는 뜻과 일치한다. 한편, 시는 자신의 내면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내면, 즉 숨겨진,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를 들어낼 경우도 있다. 이를 현현(顯現)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시는 묘사적 언술이 아니라 표현적 언술이고 현현적 언술이다.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 몸 되어 흐르는
눈물 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참 맑은 물살」
요즘 같은 세상에 정말 참 맑은 물살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참 맑은 물살의 신선하고 아름답고 생명력 있는 세계를 느낀다.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그 물살의 간지러움, 투명함, 고사리순처럼 순한 존재를 재확인하며 사랑해야할 날들을 깨닫는다. 머리카락 풀어 헤친 물살의 이미지, 물 속에 비친 산들의 부신 허벅지, 이들은 모두 묘사가 아니라 표현이며 현현이다. 그리고 마침내 물살과 산이 한 몸 되는 자연의 공존, 그 연분홍 사랑에 눈물겨운 인간의 연민이 시의 존재성을 들어낸다. 그리하여 표현은 단순한 형상화가 아니라 미적 기능, 정서적 기능, 의미의 창조를 실현한다.
첫댓글 귀한 내용의 글 읽게 해 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네ᆢ우교수님
정독하고 유념합니다
시는 묘사 보다는 표현
무형의 현현ᆢ
고급 시론 감사힙니다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