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고창터미널 600m, 도보 15분]
신재효선생 영정
신재효선생 생가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성관 평산신씨(平山申氏) 자호 백원(百原), 함자 재효(在孝), 어호 동리(桐里)이다.
민족문화의 진정한 터전을 모색한다면 우리는 결코 판소리를 도외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광대의 피나는 눈물과 자조(自嘲)어린 너털웃음에서 시작하여 양반 왕공(王公)에 이르기까지 공감과
반응을 일으킨 참다운 뜻의 국민문학이기 때문이다.
이 광대소리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과 소담한 자료와 이론적 유산을 남겨놓은 이가 바로 고창태생의 신재효이다.
그는 이제 그의 생전의 업적으로 인하여 판소리의 성자(聖者)가 되었고 국문학사는 그를 위하여 한 페이지를
양보하고 판소리를 하나의 문학 형식으로 정립해 놓았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조선조 양반소설의 잠꼬대가 왕부(王府)의 낙조와 더불어 기울어져 갈 즈음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서민 판소리문학의 이론가이며 연출가요, 광대의 지휘자가 바로 신재효였다.
물론 신재효 이전에도 18세기 초두 판소리의 비조(鼻祖)였다는 최선달의 뒤를 이어 권삼득, 송홀록, 염계달, 모흥
갑 등 많은 가객(歌客)들이 판소리의 전통을 확립시켜 놓았었다.
국문학의 전통은 양반들의 문집보다 광대들의 신방청(神房廳)과 기생들의 교방(敎坊)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서민문학을 키워준 위대한 존재는 광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노래는 부르고 남겼지만 그 사설(辭說)을 남기지 못하여 국문학의 정수(精髓)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광대들의 뒤에서 그 사설을 전승시키고 정리하여 준 숨은 공로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기법으로 판소리 사설(타령)의 창작과 집대성으로 필생의 대업을 이룩한 동리 신재효이다.
그가 이룩한 위업은 당시 판소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광대들에 대한 따뜻한 애호를 아끼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의
높은 심지에도 연유하였지만 신재효 같은 이가 가사(歌辭)와 문학의 음률(音律), 창(唱)에 대한 깊은 조예를 바탕
으로 와전왜곡(訛傳歪曲)된 가사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집념어린 소산의 결정이라 하겠다.
당시 사회배경을 볼 때 양반들의 서슬이 파랗던 시절이요 양반과 상민의 차별이 우심하여 서민은 양반 관료의
천대와 멸시를 한 몸에 받던 터에 이들 서민의 반항적 작심을 대변하듯 그가 분연히 붓을 들어 판소리 사설을
다듬어 낸 것은 이러한 서민들의 울분이며 양반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적 정신의 표방이었다는 점에서 그 위업의
가치성은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신재효는 1812년(純祖 12년) 11월 6일 고창현 천남면 서문리(현 고창읍 읍내리)에서 신광흡(申光洽)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서가(自叙歌)인 동리가(桐里歌 )를 보면
[고창읍내 홍문(虹門)거리
투춘(偸春)나무 무지개 안
시내우에 정자(亭子)짓고
정자 끝에 포도 시렁
포도 끝에 연못이라
성관(姓貫)은 평산(平山)신씨
이실재(在) 효도효(孝)는
창적(彰籍)의 함자(啣字)이요
일백백(百) 근원원(源)은
친구간의 자호(字號)로다.
뜰 앞에 벽오동은
임신(壬申)생과 동갑이요.
이호(里號)는 동리(桐里)오니
너도 공부 하랴기면
가끔 가끔 찾아오소
에용 어허 우겨 방아로구나]
하여 그가 거쳐하던 연당(蓮堂)의 묘사(描寫)와 자신을 명료하게 서술해 놓았다.
신재효의 선대는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 광흡이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을 맡아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경주인은 경저리(京邸吏)라고 하여 이서(吏胥)나 서울에 사는 서민으로 서울에 머물면서 본군의 연락사무를 대행
하던 사람인데 여기서 생기는 이익이 적지 않았다.
광흡은 이를 계기로 하여 여러 가지 전재(錢財)의 화주(化主)나 시주(施主)를 통한 인연으로 1810년(純祖 10년경)
께 고창 고을의 관약방(官藥房)을 맡게 되어 법성포와 무장을 경유 고창으로 왔었다.
관약방은 아전이라고 하지만 작은 고을에서는 존경받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신광흡은 경주인과 관약방을
하는 동안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중인(中人)이라는 신분과 물질적 부를 아들 신재효에게 물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신재효는 그의 행장록(行狀錄 )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초산(楚山-井邑)의 월조봉에 치성을 하여 11삭(朔)만인
1812년(純祖 12년:壬申) 11월 6일에 낳았다고 했다.
신광흡의 1남3년의 외아들로 태어난 동리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통했고 어버이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거슬리지
않는 후덕한 인품이었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서사(書史)를 배웠고 관년(冠年)에 이르러서는 고창현의 교관(敎官)인 엄사안(嚴思安)
문하에서 크게 진취(進就)하여 제자백가어(諸子百家語)를 무불통섭(無不通涉)하였다.
특히 음률, 가곡, 창악, 속요(俗謠)에도 정통하여 그 조예(造詣)의 현묘(玄妙)함이 새로운 영역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리도 신분의 제약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리(胥吏)에 머물러야만 했다.
서리는 사관(仕官)계급과 평인 계급과의 중간에 위치했던 하급 요속(僚屬)이었다.
행정의 요속을 아전이라 하고 서리라 했다.
대개는 세습(世襲)으로도 행정잡무는 거의 이들이 처리하였다.
이들은 관로(管路) 진출은 불가능했으며 중인계급으로 통칭한다. 결국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가졌어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중인계급의 운명이었으며 이 비극은 동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가 뒷날에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將相)댁에 못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 할까
글 잘한다고 과거 할까.....]
라고 읊은 것을 보면 그가 반상(班常)의 신분차별에 얼마나 맺힌 시름이 컸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인생을 달관하여 풍류의 생애로 일생을 보낸 멋있는 분이었다.
그가 40대가 되던 철종(哲宗) 초에 이방이 된 이면으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수신세가하고 입신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살필 수 있다.
부대(父代)부터 쌓아 온 시주의 공과 동리 자신이 1845년(憲宗 11년)에 형방청(刑房廳)을 화주하여 중창(重創)
하는 등 대소의 많은 공적들을 꾸준히 쌓음으로써 발탁될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어 나갔었다.
그리하여 그는 50~55세를 전후하여 삼공형(三公兄:고을의 戶長, 吏長, 首形吏 3官屬)의 우두머리로서 군아(郡衙)
의 실질적 재정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호장(戶長)을 지내게 되었다. 외지에서 온 그가 다른 토착 아전을
물리치고 호장이 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르 가능케 한 것은 경주인 관약방을 통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치가(治家)의 재능을 가진 그의 아버지
광흡의 폭넓은 이해와 후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사(處士)의 호칭을 받던 1873년(高宗 10년)은 동리의 나이가 62세되던 해이므로 그는 62세 이전에 이미 퇴관
(退官)하여 야인생활로 돌아갔다고 하겠는데 우리 선인들이 회갑(回甲)을 인생의 퇴진 연대로 생각하던 관습을
감안한다면 동리도 60세 쯤 해서 퇴관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동리가 65세 되던 해에 당시 고창현감이던 청풍 유돈수가 1876년(高宗 13년) 노연(老掾)으로 퇴관하여 동리정사
에서 칩거하고 있는 신재효를 위로하고 그의 만상서권(滿床書卷)과 풍류를 벗삼고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선망
하며 보낸 시문으로 미루어 야인으로 돌아 온 동리는 학문의 정도가 깊어지고 풍족한 부가 축적되어 있어 멋과
풍류로 여생을 보냈는데 특히 그가 여리(宴里) 생활을 통해 소리하는 기녀나 창부들이 미천하고 노래의 말이
속되고 그 말이 이치에 거슬리는 점을 가슴 속에 새겨둔 일과 당시 팽배하게 일어난 판소리 전성시대에 부응하여
이러한 바탕에서 판소리 개혁에 뜻을 품은 그의 웅지(雄志)를 실현하게 됨으로써 그의 노년은 더욱 값지고 국문
학사상 길이 빛날 기념비적인 금자탑을 쌓았던 것이다.
영국이 섹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는다는 비유법을 써서 그를 더욱 소중하게 아끼고 있거니와 동리 신재효가
국문학사에 끼친 업적의 비중도 또한 영국문학사에서 사옹(沙翁)의 그것과 버금되고 있으며 사옹의 생사일(生死
日)이 같은 날인 것처럼 동리도 그의 생일과 사일이 같은 11월 6일이어서 두 사람이 우연의 일치처럼 귀한 사례를
낳고 있다.
섹스피어가 전래의 작품과 설화를 작품화했듯이 신재효도 우리나라 전래의 구전문학을 정리하여 개작했다는 점
에서 두 사람이 비교될 수 있으며 오히려 예술성은 동리의 작품이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작품이 운문 시가체인 점에서도 그 유사성은 충분히 비유될 수 있어 우리는 신재효를 [한국의
섹스피어]라고 일컬어 그를 보옥(寶玉)처럼 아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각 고을에 있는 광대들을 불러 모아 침식을 제공하면서 연당집 대청마루에 모아 놓고 각기 특장(特長)한
판소리의 대목을 불러보게 하여 여기에서 신재효는 가사를 바로 잡고 광대 우두머리 홍두평으로 하여금 잘못
불리어진 음률을 다듬게 하고 문하생 진채선(陳彩仙)에게 바른 창을 부르도록 하여 가요를 더욱 발전시켰다.
열네 칸 줄행랑에는 모여든 기녀와 창부들로 붐볐고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연당 난간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척도(尺度)하고 있는 동리 앞에 나아가 지도를 받고 내일에의 꿈을 키워나갔던 것이었다.
뒷날 국창으로 일세를 떨쳤던 이날치, 박만순, 정창업, 김창록, 전해종, 그리고 여류명창의 비조인 진채선, 허금파
등은 다 그 문색을 거쳐서 친자(親炙)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판소리를 정착시키고 다시 이를 다듬어 그 사설 정리에 착수하여 판소리 열두마당 중 장끼타령, 무숙이
타령, 옹고집 타령, 배비장 타령, 강릉매화전, 숙영낭자전을 제외한 춘향가의 남창, 여창, 동창, 심청가, 토별가,
홍보가, 적벽가, 횡부가등 여섯마당을 개찬 윤색하였고 특히 허두가, 성조가, 어부가, 도리화가, 오섬가, 광대가,
호남가, 치산가, 갈처사 십보가, 권유가, 명당축원가, 추풍감별곡, 방아타령 단자가, 구구가, 한시 등 많은 작품을
내어 근세말의 판소리 발전에 일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민족문학사의 찬연한 업적의 가치성은 당시 숭상하던 충효열(忠孝烈)이나 한시문 밖의 몹시 천대 멸시하던
광대와 극가(劇歌)와 우리말과 글을 홀로 사랑하고 키우고자 일생 정력을 오로지 여기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기 같은 학자는 신재효가 이룩한 판소리의 업적을 국문학사상의 [기적적인 사업]으로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가람은 [우리 선현의 많은 문집이나 잡기들이 대개 공맹의 교훈이 아니면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싯귀 나부
랭이요 우리말 우리글로 된 시문들도 대부분 중국인의 사상이나 시문을 모방하고 답습한 것인데 그러나 신재효
만은 오로지 우리 민족성을 발휘하여 극가문학(劇歌文學)을 크게 이루어준 우리의 큰 은인이었다]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신재효는 판소리를 통하여 서민의 진실을 대변하려 하였고 억압된 민중의 불평이 판소리로 피어나게 하여 새로운
여명에의 발돋움을 함으로써 우리 민족문학 수립을 창시한 공로자인 것이다.
그는 진보적인 사상과 저항의식을 철학으로 하여 판소리의 이론가요 작가요 연출가로서 서민의 절규를 담은 판소리
문학에 정진하여 마침내 서민예술의 영웅이 되었다.
신재효의 위대한 업적 중의 또 하나는 그가 아니었더라면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졌을[가루지기 타령]을 완전한 형태로 남겨 놓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조선조 도학(道學)의 영향을 받아 양반들이 즐겨 읽던 문장체(文章體)소설 가운데 성(性)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없었다.
그러나 가루지기타령에 이르러서 동리의 폭넓은 창작정신으로 말미암아 갇혀왔던 서은 비로소 해방이 된 것이다.
그의 말년의 생애는 한량으로 불릴 만큼 타고난 멋과 풍류기절이 있어 그는 끝내 판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에헤 에헤 나하에야
한량 멋 알기에는
고창의 신호장이 날개라]
당시 유행하던 날개타령인 이 소리는 당대 제일의 인기자(人氣者)들을 노래한 가사인데 신호장(申戶長)을 멋쟁
이의 날개라 하였으니 이는 곧 그의 풍류스런 생애의 일면을 여실하게 웅변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전기적(傳記的) 사실 가운데 멋과 풍류가 조화된 인간애의 기념비적인 기민구휼(飢民救恤)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세상에는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도 불행한 이웃을 외면하기가 다반사인데 신재효는 그의 작품
속에서도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을 잊지 않았다.
박타령에서도 흥부가 처해있는 가난에 그의 동정심은 풍성하게 발휘되었다.
1876년(高宗 13년)의 막심한 한해(旱害)가 든 흉년에도 예외없이 그의 휼민의식(恤民意識)은 발동되었다.
그는 빈민들에게 그냥 쌀을 주면 큰 자선이나 베푸는 것 같아서 [쌀이 필요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가지고와서
바꿔가라]고 광고를 냈다. 그러나 가난한 그들에게 기껏해야 넝마나 걸레조각이 있을 뿐이었다. 동리는 그것을
받고 쌀을 퍼주니 물물교환 형식을 갖추어 빈민을 구제했다. 이것은 분명히 신재효의 인도주의를 설명해주는
사연이기도 하다. 1865년(高宗 2년)에 시작된 경복궁 중수에도 그는 원납전(願納錢)으로 수 천량을 헌납하였다.
그 후 경복궁 낙성연(落成宴) 때에는 경축의 뜻으로 손수 명당축원가 성조가 방아타령 등을 지어서 수제자 진채
선으로 하여금 흥선대원군 앞에서 부르게 했다.
이때 대원군의 인정을 받은 채선이의 주선으로 동리의 덕행이 조정에 입문되어 1877년(高宗 14년) 그의 나이
66세에 이르러 비로소 양반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충장군(折衝將軍)을 제수 받았으며 이어서 11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
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또한 일설에는 원납전에 의한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으로 직첩(職牒)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1884년(高宗 21년) 동리 신재효는 73세를 일기로 작품생활의 요람이었던 동리정사에서 조용히 그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고창 천북면 옥동(현 고창읍 성두리 옥동) 동남편 내동(內洞)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우리의 판소리 중흥을 위해 위대한 은인이었던 그의 유덕(遺德)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유애비(遺愛碑:당초
중거리 당산거리에 세웠다가 하거리 당산거리로 옮겨진 것을 다시 모양성 광장으로 옮겨세움)와 1963년에 세운
추념비(追念碑)가 모양성 안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한 가사문학의 산실이었던 그의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979년에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하여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최초의 여류국창(女流國唱) 진채선(陳彩仙)
판소리의 대부 신재효로부터 판소리를 사사받은 수제자로서 우리 판소리의 여광대 효시인 진채선은 경복궁
낙성연 때 대원군에게 인정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국창이 된 여성예술가의 큰 별이었다.
그는 1847(헌종 13)년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에서 태어났다. 갸름한 얼굴이 퍽 고운데다 나긋나긋한 몸매로
춤 솜씨 또한 일품이며 목소리의 성량이 풍부하여 가창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났었다.
검당포에서 예순 아홉 때까지 살다 간 진채선의 이질녀인 김막례(1949년 당시 63세)의 실담과 고로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진채선의 집안은 무장고을에서 대대로 이름을 이어온 아전집안이었는데 그의 조부가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그 당시 천일염의 고장으로 이름난 검당포에 머물면서 날품을 팔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검당포에
살고 있던 과수댁 김당골과 살림을 차리게 되면서 이곳에 눌러 앉게 되었다 한다.
관계되는 기록들을 보면 진채선을 기녀출신으로 또는 무장고을 관기로 또는 타지방 출신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가당치 않은 전언인 것이다.
이와 같이 검당포의 세습무당인 김당골의 손녀로 태어나게 된 진채선은 그의 어머니까지도 성격적으로 노래에
취미가 더 있어 당골생활은 어설프게 이어오는 데 그쳤다고 한다.
채선은 유년시절에 당골학습을 배우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등너머로 익힌 가창솜씨가 학습 선생에게 알려
지게 되어 별도로 소리지도를 받게 된 것이 판소리 공부의 첫 인연이 된 셈이었는데 그의 노래솜씨는 근동에까지
자자하게 소문이 나서 처녀꼴이 날 때까지 어머니를 따라 큰 잔칫집의 소리판에 으레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고창읍내 신재효 부잣집에서 광대들을 길러내기 위해 널리 소리꾼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알려와 채선은
학습 선생을 다리 놓아 그 문하생으로 입적하게 되었다.
동리 신재효의 문하에는 원근으로부터 광대들을 비롯하여 남사당패거리와 기생 당골녀들 까지 수 십 명이나 모여
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 부잣집에는 그 당시 내 노라 하는 방짜광대들이 운집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당시 기생이나
당골들은 판소리와 가무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능통해야만 대중을 이끄는 매력이 될 수 있었기에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러나 여자로서 판소리를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동안 채선이 고향에서 학습 받은 것은 쉬운 민요나 창법이 다른 가곡의 겨우 어설픈 대목들을 부르는 정도였
는데 이곳에 와보니 창법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부터 새로이 본격적인 판소리 학습을 공부해야 했다. 소리의 폭과 깊이가 짧고 단조로우며
서정적인 가곡을 부르는 데는 비단결 같이 곱고 맑은 창법이 필요하지만 극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는 판소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폭과 깊이가 긴 서슬있는 거센 창법으로 폭포수나 뇌성벽력들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쇠를 불과 물에 여러 차례 들어내고 무수히 두드려야 제대로 다져지듯이 판소리 창법의 목소리도 웨장목을
몇고비 넘기고서야 다듬어 지는 법.
진채선은 처녀와 뛰어난 미모의 잇점이 있어 다른 광대들 보다는 좋은 조건속에서 학습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날마다 동리선생의 연당집에서 당대의 판소리 대가인 김세종에게 바탕소리를 익혔으며 오랫동안 소리 방에
쳐 박혀 죽비를 두드리며 목에 피가 넘치도록 복습을 해냈다.
어느 때엔 목이 쉬고 부어 숨쉬기도 거북하여 지쳐버리기도 했으나 신재효선생의 최초의 여광대를 길러 내고자
하는 따뜻하고 넓은 인품과 첫 여광대가 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그녀의 끈질긴 집념 속에서 그 어려운
고비들은 용케도 넘길 수 있었다.
바탕소리를 끝낸 진채선은 신재효에게 사설과 아니리, 너름새와 득음으로 짜여진 판소리의 이론적이고 음악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광대 차례로서 첫째는 인물이요, 둘째는 사설이요, 셋째는 득음이요, 넷째는 너름새라 하는 판소리 이론을
[광대가]라는 단가로 익혀냈다.
그의 소리하는 법례는 시냇물이 얼음 밑에 흐르는 듯한 은은한 목소리, 순풍에 돛단배 놀 듯 이리저리 굴러가는
목소리, 만길 산봉으로 오르듯이 치솟는 목소리, 목포수가 천길 낭떠러지에 내리듯이 떨어지는 목소리들을 고루
갖추어 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녀는 본래 재질이 뛰어난지라 일취월장 큰 광대로 성장하였다. 이에 신재효는 채선을 첫 여자광대로 대성을
시키기로 작심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고 그 낙성연에 전국의 이름난 광대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베푼다는 소문이 있자 신재효는 빈틈없이 이에 대비하는 계획을 짜냈다.
잔칫날에 맞춰 김세종과 함께 곱게 남장을 한 (당시엔 여자광대가 없었으므로)진채선을 한양에 당도하게 하였다.
먼저 운현궁에서 있은 시연회에서부터 채선은 단연 두각을 내어 인기를 독차지 하게 되었다. 통 갓을 단정히 눌러
쓰고 어깨에 걸친 창의의 부드러운 선, 곱다란 선, 곱다란 미모에 티 없이 맑은 고운 소리,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경복궁 중수낙성에 걸맞는 [성조가]와 [방아타령]은 단연 안성맞춤의 절묘한 품위 그것이었다.
경회루 잔치마당에서도 다른 남창들의 판에 박은 판소리에 비해 낙성축원의 깊은 뜻과 그 소리의 흐름 속에서
절찬을 받은 추임새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하객들의 혼을 빼기에 충분하였다.
팔만 장안 억만 가구
복덕방을 골라내어
이 터를 잡았으니
북악은 억만봉이요
남산은 천년산이라
청룡은 왕십리요
백호는 동구재라
한강수는 만년수니
천세 만세 억만세지
우리 성군 만만세라
진채선이 부른 [성조가]에 탄성이 만발하게 되어 대원군은 마침내 채선의 팔을 끌어 안고 누가 지은 노래냐고
그 스승을 묻기에 이르렀다.
이에 채선은
고창읍내 흥문거리
두춘나무 묵지개 안
.....성씨는 평산신씨
이실재 효도효는
장적의 함자이오
일백백 근원원은
친구간의 자호로다
리오는 동리오니
너도 공부 하랴가면
가끔 가끔 찾아오소
......
[동리자서가]를 불러 신재효 스승을 소개하였고 그녀의 바른 팔에는 금토시를 얻어차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 신재효가 경복궁 중수에 원납전 5백냥 헌금한 것을 비롯해 흉년에 주린 백성을 긍휼하였으며 광대들을
학습시켜 명창을 길러 낸 논공 등 그의 사람 됨됨을 간청한 보람이 있어 나라에서는 1877(고종 14)년 통정대부
정충장군(정3품)의 직첩을 내린데 이어 같은 해 동짓달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중추부사 (종2품)로 승품
시켰다.
중인 신분에서 파격적으로 직급 높은 벼슬을 받게 되었으니 신재효로서는 더없는 영광이 되어 평소 그의 소망과
맺힌 한이 풀린 셈이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 진채선을 기다리는 간절한 그의 연정은 끝내 그를 몸저 눕게하고야 말았다.
자별나게 판소리를 좋아 했던 흥선대원군이 급변하는 정치정세에 속을 썩힐 때마다 생기 있고 맑은 채선의 노래와
젊고 싱싱한 그녀의 체취로 심신를 달래곤 하는 판에 진채선을 놓아 줄리 만무하였다.
스물네번 바람불어
만화방창 봄이드니
구경가세 구경가세
도리화가 구경가세
도리화는 진채선을 뜻하며 스물네번 바람불어는 채선의 나이 방년 스물네살을 나타내니 채선을 그리워하는
신재효의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읊어 갔다.
꽃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웃음웃고 말을 하니
수렴궁의 해어 환가
해어화 거동보소
아리땁고 고을시고
채선의 고운 모습을 꽃에 비유해 읊은 노래이다.
나와드니 빈 방 안에
햇빛 가고 밤이 온다
일점 잔등 밝았는데
고암으로 벗을 삼아
잠 못들어 근심이요
꿈못이뤄 전전하다.
.....
언제나 다시 만나 소동파를 울어 볼까
채선에 대한 연정의 표현이 이렇듯 극진하였으니 신재효의 상사병도 짐작이 간다.
이 노래는 [도리화가]로서 몸져누운 신재효가 진채선에게 띄어 보내 이른바 연가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진채선이 [추풍감별곡]을 계속 불러 스승에 대한 그의 간곡한 마음을 노래로서 읊어내니
대원군이 또한 그 뜻을 헤아려 마침내 채선의 하향을 허락해 주었다.
이렇게 되니 고창의 동리정사에는 또 다시 봄이 오게 되고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신재효는 채선을 옆에 두고 질박하고 생기 넘치는 판소리의 깊은 경지 속에서 열락의 만년을 장식하였다고 한다.
노년의 스승을 보살피며 명창으로 활약하던 진채선은 스승이 타계하자 조용히 자취를 감추어 무상한 인생을 되
뇌이며 이름 모를 암자에 묻혀 세상을 마쳤다고 하는 그의 이질녀 김막례의 증언으로 진채선의 행적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진채선을 효시로 허금파, 강소춘 그리고 박녹주, 김초향, 이화중선,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연맥을
통해 오늘날 판소리 명창은 남자보다 오히려 여자 명창으로 진을 치게 되었는데 신재효-진채선을 잇는 빛나는
후계양성을 이어내지 못한 진채선의 일대기가 너무 아쉽게만 느껴진다.
판소리(세계무형유산 2003년)
판소리란 무엇인가?
=판소리라는 용어의 유래=
판소리는 ‘판+소리’로 된 말이다.
‘판’이란 여러 사람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하며 어울리는 자리 또는 행위를 뜻한다. ‘소리’라는
말은 목소리로 정서를 표현하는 민요.잡가.판소리 등의 성악을 가르킨다.
=소리판의 구성=
창자+고수+청관중, 창자는 노래로 하는 ‘창’과 말로 하는 ‘아니리’를 번갈아가며 소리를 하고 고수는 창자의
왼편에 앉자 북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추임새’를 넣고 청관중도 적극적으로 추임새를 넣으면서 함께 즐긴다.
=판소리의 특징=
판소리는 북의 반주와 맞추어 소리꾼이 노래하듯 이야기를 하는 형태로 한국의 풍부한 전통 행위예술의 대표적
양식으로 양반과 평민 문화를 모두 아울렀던 전통예술이다.
=판소리의 기원=
설화기원설-근원설화로부터 나타났다고 주장.
광대소학지희 기원설-궁중 연례행사 ‘나레’굿.
판놀음 기원설-육자배기토리 무악권 창우(유랑연예인)집단.
무가기원설-충청도.전라도.경상도 서부지역의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을 ‘시나위’라 하므로 시나위
권이라 하고, 그동안 배출된 판소리명창들이 거의 대부분 이지역 출신의 무부들이였다는 점에 착안된 주장.
육자배기토리 기원설-육자배기는 남도 민요중의 하나인데 남도 민요의 음악어법인 육자배기토리와 판소리의
계면조가 음계, 선율의 움직음 등 음악적 구정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에 기초한 주장.
[종합]어느하나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고 여러 요인들이 창조적으로 결합하고 융합되어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최동현 교수--
판소리의 역사
=판소리 형성기=
초기의 판소리는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주로 민중이였으며, 판소리 12마당 형성초기에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판소리는 아직 음악이나 사설의 내용에 있어서 현재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전기 8명창시대=
19C후반에 이르러 판소리는 완전히 12바탕으로 완성되고 여러명의 훌륭한 명창들이 나타나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후기 8명창시대=
19C후반에 활동했던 후기8명창들은 전기8명창들이 개발해 놓은 선율형을 갈고 닦아 판소리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더늠들을 만들어 냈다.
이시기 판소리의 특징은
첫째, 궁중을 비롯한 양반 귀족들 사이에서 판소리감상이 일상화되었다.
둘째, 서민감성의 서편제 소리가 만들어졌다.
=근대 5명창시대=
이시기는 19C 말부터 20C 전반기에 해당된다.
일제에 의한 국권의 침탈과 서구문화의 유입은 판소리 존립의 바탕이 되는 전통사회를 위협하고 이런 변화
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체적 변화의 몸부림은 판소리의 창극화로 나타났다.
1912년 이후 협률사 순회공연활동 재개
1920년 이후 유성기 보급에 따른 레코드취입 성행
=해방이후의 판소리=
해방 후 국악원 설립
1948년 여성국악동회
1961년 한국국악협회(국립극장.국립창극단창설)
1964년 무형문화제 실시
1973년 국립창극단 전원 유급제
판소리의 여러형태
=단가=
본격적인 판소리창을 하기에 앞서 부르는 짧은 노래. 현재 불리워지고 있는
단가는 40여 가지로 [진국명산, 사철가, 이선저산, 호남가] 등이있다.
=판소리=
애초에 12바탕이던 것을 동리 신재효 선생에 의해 정리 개작되어 다섯 바탕이
현재까지 전승된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승도창=
줄을 타면서 부르던 판소리로 전승이 끊김
[이날치, 장판개, 이정업고수] 등이 줄타기의 명수였다.
=병창(석화제)=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판소리의 특정대목을 부르는 것.
=창극=
여러 명이 각기 배역에 따라 소리를 하는 연극적판소리로 최초의 창극은 1902년
원각사에서 김창환의 [창극춘향전]이 공연되었다.
=창작판소리=
기존의 전통판소리 외에 새로이 만들어진 판소리
1904년 김창환[최병두타령], 박동실[열사가]
1971년 박동진[변강쇠가]
1980년 임진택[소리내력, 똥바다, 오월광주]
판소리의 중요 용어해설
=귀명창=
판소리를 할 줄 모르지만 그것을 많이 들어서 깊이 감상하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을 이르는 말. 이 말은 판소리
감상자를 명창과 대등한 정도로 인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1청중 2고 고수 3명창]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청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는 매 한가지이다.
=일고수 이명창=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 이라는 말은 잘 숙련된 고수의 위치를 명창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고수의 역할을
강조한 말이다. 고수의 장단과 추임새에 따라 소리의 효과가 달라지기에 그 역할이 중요하다. 고수는 장난을
밀고 달고 맺고 풀면서 반주자로서의 구실을 한다.
그리고 처지거나 빨라지는 것을 조절하고 추임새를 통해 좋은 소리는 이끌어내는 지휘자로서의 구실도 한다.
이외에도 창자의 상대역으로 극적상황을 돋보이게 하는 구실, 청중의 참여를 유도하고 대변하는 구실도 한다.
=발림=
창이나 아니리가 언어에 의한 표현이라면 발림은 ‘몸짓’에 의한 표현을 뜻하는 제스처. 연극에 있어서의 액션도
리듬을 요구하지만 판소리의 발림은 무용적이면서도 고도의 축약성이 요구된다.
=대마디 대장단=
판소리에 쓰이는 리듬기교의 하나로서, 기교 없이 리듬과 선율이 원리 원칙대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선율의 시작과 끝이 장단의 기본 틀에 꼭 맞게 진행되면 본디 리듬형태로 벗어나지 않는다. 리듬감을 강조하는
음악에서는 대마디 대장단으로만 구성되면 단조로우므로 엇붙임.잉애걸이.완자걸이 등 붙임새의 기교를 쓴다.
=붙임새=
음악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음악적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하여 쓰는 기교, 붙임새에는 완자걸이.잉애걸이 등이
있다. 완자걸이는 가락을 늦추었다 당기었다 하여 얼핏 들으면 박자를 불규칙하게 부르는 것 같이 함으로써 그
톤에 묘미를 가미하는 창법이다. 잉애걸이는 가락이 박자 사이사이를 비켜 나가는 창법으로 ‘잉아’에서 따온
말인 듯 싶다.
=시김새=
음을 장식하거나 흔들거나 흘러내리거나 밀어 올리는 등의 기술을 말한다. 판소리 창자가 수련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 그 가락이 제대로 잘 익혀 시김새를 구사하면 예술적인 멋이 풍부하게 살아난다.
=추임새=
판소리를 할 때 고수 또는 청주의 흥을 돋우어 주기 위한 감탄다. 소리를 맺고 끊는 대목에서 고수가 적절하게
‘조오치’ ‘얼씨구’ ‘잘한다’ ‘으흠’ 등을 쓰며 신명을 불어 넣는 것으로 소리의 강약과 휴지부를 보강하는
기능을 한다.
=또랑광대=
판소리 한마당을 다 해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토막 소리 밖에 못하는 사람을 조롱하여 이르는 말.
판소리박물관
신재효(申在孝)의 유품과 고창 지역의 명창, 판소리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판소리 박물관.
판소리를 중흥시킨 신재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개관하였다. 대지 5525.5㎡, 건물 1433㎡의 2층
규모로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 지역의 명창, 판소리 자료 등 총 1,48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소리
마당과 아니리마당 등 5개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중 소리마당에는 판소리의 기원과 판소리 시연 모형, 판소리
계보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아니리마당은 고창군 소개와 신재효·진채선·김소희 등 이 지역 출신 명창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사 집과 국악 관련의 음반·서적 등 희귀한 전시물도 많다. 발림마당에서는 북과 북채로
영상에 맞춰 직접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며, 혼 마당 에서는 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자료실이 있다. 박물관터는 신재효 고택이 있던 자리로, 현재 고창 신재효고택
사랑채는 박물관 오른쪽으로 옮겨져 있다. 체험방에서는 〈춘향가〉와 〈수궁가〉 〈적벽가〉 등 각종
판소리를 들으면서 북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으며, 미술관에서는 청자·백자 등 고미술품과 서예작품 13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은 국악 공연장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공로학술과 판소리·고수 등 3개 분야에서
수상자를 뽑아 시상식도 갖는다. 판소리 박물관은 이와 같은 판소리의 유형, 무형의 자료를 수집, 보존, 조사,
연구, 전시, 해석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수준 높은 판소리 예술의 재교육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마침내
판소리 성지화를 꾀하기 위하여 설립 되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 관람료는 어른 800원, 청소년 500원이다. 박물관 옆에는 신재효가
노래청을 두고 제자를 길러낸 옛집이 복원되어 있다. 고창시외버스터미널에서 500m 거리에 위치하며, 인근에
고창읍성과 무장읍성·서정주문학관·인촌선생생가·도깨비도로·조산저수지·고인돌공원 등이 있다.
설립취지와 목적
고창판소리박물관은 판소리의 이론가이자 개작자, 후원가 였던 동리 신재효 및 진채선, 김소희 등 다수의
명창을 기념하고 판소리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 자리에 설립되었다.
고택은 현재 사랑채만 복원되어 남아 있으며 바로 옆에는 동리 국악당이 있다. 판소리 박물관은 이와 같은
판소리의 유형무형의 자료를 수집, 보존, 조사, 연구, 전시, 해석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수준 높은 판소리
예술의 재교육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마침내 판소리 성지화를 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연혁
2001. 6. 25. 박물관 건립 및 개관
2003. 1. 조직개편에 따라 문화체육시설관리사업소로 박물관이 통합되어 운영
2005. 4. 28. 박물관 등록(제 전북-1호)
2006. 3. 15. 제2전시관(미술관) 개관
기본 정보
개관연도 2001년
규모 대지5525.5㎡, 건물 1433㎡
개관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주요 소장품
판소리 관련 유물 1,48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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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늦게야(`07.10.11) 머리글만 읽었습니다.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보충과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복습의 의미로 틈 나는 대로 읽어보렵니다.
깊이 숨어 있는 귀중한 보물을 찾은 듯한 자료를
오늘에야 접하게 되니 반갑네요~
지식으로 담아 지혜로 잘 풀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