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철도문학상 산문부문 당선작]
대상
고향역 플랫폼에 서서 / 김*진
지난밤 아버지와의 통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평소 강단 있는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기운 없는 말투가 유난히 짠하게 다가왔다. 혼자계신 아버지가 걱정돼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고향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용산역으로 향했다.
용산역 플랫폼 앞에 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작별을 하고 다시 만나는 격정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결혼 후 고향집에 갈 땐 항상 남편이 운전해주는 자동차만 타고 다녀 기차역 플랫폼이 어색할 법도 한데, 나에겐 어쩐지 편안하고 익숙하게 다가왔다.
고향집으로 가는 장항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두 시간여를 달려 고향집 기차역에 닿았다. 지난날 아버지가 서 있던 그곳에는 다른 역무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 나가고 텅 빈 플랫폼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차가 오고 갈 때마다 깃발을 흔들던 아버지의 옛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아버지는 기차역 플랫폼을 삶터로 삼아온 철도역무원이었다. 평소 엄하고 깐깐했던 아버지는 늘 당신 안에서 충분히 정제된 언어들만 골라 사용했다. 가족들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였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어기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하는 아버지로 인해 나는 집에서도 늘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을 향해 살가운 행동도, 다정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더욱이 아버지는 오빠나 동생보다 유독 딸인 나를 더 엄하게 대했다.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거나 상장을 받았을 때도 아버지는 그 흔한 칭찬 한번 하지 않았다.
나는 늘 아버지가 어렵고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집에서 읍내를 가려면 기차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혹여 아버지와 마주치기라도 할까봐 나는 항상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차역을 지나쳤다. 어쩌다 아버지와 마주칠 때면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반대방향으로 뛰어갔다. 가끔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기차역에 갈 때도 나는 최대한 아버지를 피했다. 아버지는 북적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반듯하게 제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빨간 깃발을 흔드는 모습이, 유년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내가 대학교에 합격해 서울로 떠나는 날에도 아버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차역 플랫폼에서 덤덤히 일을 하고 있었다. 배웅하러 나오기 전부터 눈물범벅이 된 엄마와 달리, 역에서 만난 아버지는 그저 남의 일인 양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전문대에 진학해 빨리 취업하길 바랐던 당신의 바람을 꺾고 딸인 내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게 못마땅했던 건지, 아버지는 앞으로 낯선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야 할 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다만 기차에 오르기 직전 다가와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만 건네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깃발을 흔들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라는 기차역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품에서 멀어져 가는 자식을, 아니 기차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마음이 무거워서 였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무심한 행동이 섭섭해서였을까, 나는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눈물을 훌쩍거렸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타지 생활에 적응해가며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등록금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에만 집중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다녀올 때도 기차역에서 아버지와 마주쳤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무덤덤했다. 이제는 성인이 된 내가 아버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봄직도 했지만, 나 역시 이미 벌어진 마음의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했다.
훗날 결혼을 해 기차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더 이상은 기차역에서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게 됐다. 몇 년 후 아버지는 퇴직을 했고, 아버지의 삶터였던 기차역도 나의 일상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말도 없이 찾아온 탓인지, 내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버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겁게 껌뻑이는 두 눈에서 노년의 쓸쓸함과 힘겨움이 진하게 전해졌다.
흐트러짐 없이 기차역을 지키던 반듯한 모습의 역무원은 온데간데없고, 홀로 텅 빈 집을 지키는 초로의 노인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늘 꼿 꼿하게 보였던 등은 힘없이 굽어 있고, 플랫폼에서 기차의 출발을 알 리며 힘차게 깃발을 흔들던 단단한 팔은 야윌 대로 야위어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힘없이 푸석거리고, 기름칠을 하지 않은 몸은 여기저기 삐거덕거려 빈 쭉정이처럼 헛헛해보였다.
십여 년 만에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그제야 몸을 곧추세우면서 눈빛을 빛냈다. 미리 귀띔이라도 했으면 역으로 마중을 나갔을 거라는 아버지의 말이 낯설면서도 어쩐지 귓가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괜찮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병원으로 모시고가 영양제를 맞춰드렸다. 아버지가 영양제를 맞는 동안 시장을 봐 빈 냉장고를 채우고, 먼지가 내려앉은 집안을 청소했다. 안방 장롱 문을 열자, 할 일을 잃고 잠들어 있는 제복과 모자가 눈에 들어와 코끝이 시큰했다.
장롱 서랍엔 아버지가 오랜 시간 적어온 메모장 몇 권이 함께 놓여있었다. 그 속에는 역무원으로 일하며 경험했던 일들과 감정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에게 기차역이 어떤 의미인지, 매일매일 플랫폼에서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내가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떠나던 날 아버지가 느꼈던 뿌듯함과 걱정스러움이 노트를 한 장 가득 채우고 있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퇴직을 하던 날 아버지가 느꼈던 쓸쓸한 감정 역시 노트 위에 적힌 글귀들을 통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당시 오랜 세월 고생 많이 하셨다고 아버지에게 말 한 마디 전해드리지 못한 사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기차역 플랫폼에 섰다. 배웅하러 온 아버지와 함께 플랫폼에 선 순간, 문득 아버지가 평생 보아왔던 광경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잠시 후 기차가 요란한 숨결을 내뿜으며 저 멀리에서 달려와 우리 앞에 섰다. 기차가 불빛을 밝히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많은 사연들로 견고하게 다져진 선로, 기차가 내뿜는 기적소리, 물결치듯 어디론가 떠나고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기차역 플랫폼과 무척 닮아있었다. 자식들의 삶이 빛날 수 있도록 늘 한걸음 물러서서 지지해주는 모습도, 무뚝뚝하고 무심한 듯 보이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모습까지도 고향역 플랫폼과 똑 닮았다.
말없이 기차를 품었다가 가야할 곳으로 떠나보내는 기차역처럼, 아버지도 그렇게 나를 키우고 사랑해주었을 것이다. 내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때마다 아버지는 온 마음을 다해 조용히 뒤에서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먼저 다가와 보듬어주지는 않았어도, 뒤돌아보면 항상 같은 자리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기차역 덕분에 나는 거침없이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실제 아버지의 철두철미한 성격은 내가 실수 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능력을 인정받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밥 잘 챙겨 드시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 차창 밖으로 어서 집에 들어가시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아버지는 멋쩍은 표정만 지을 뿐 꼼짝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태운 기차가 완전히 고향역을 빠져 나갈 때까지 플랫폼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언젠가의 모습처럼.
최우수상
그해 겨울,밀양역 / 강*희
희붐하게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서울역은 간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로 부산스럽다. 크고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모두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무작정 집을 나선 나에게 이른 아침 공기는 여전히 낯설다. 12월의 차디찬 바람은 플랫폼에 서 있는 나를 휘감으며 목덜미를 파고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일 아래 육중한 무게와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는 침목과 선로를 가만히 바라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같이 있지만, 웬일인지 남편과는 나는 요즈음 평행선을 유지하며 지낸다. 퇴직 후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소소한 감정 다툼이 자주 일어난다. 일상은 특별할 것 없이 기차 바퀴처럼 변함없이 도는데, 나의 시간은 뚝 잘려 나간 것처럼 멈춰진 느낌이다. 겨울나무처럼 가벼워질 만도 한데, 뒤엉킨 마음이 옹이처럼 촘촘히 박혀 무겁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워지고 싶어 길을 떠나보기로 했다. 코레일 톡 앱을 실행시켰다. 출발역은 서울, 도착역을 넣으라는 메시지에 잠시 머뭇거린다. 나에게 아주 비밀스럽지만 조금은 색이 바랜 이야기 하나가 있는 곳이 있다. 시간의 퇴적층을 비집고 떠오른 밀양은 추억 속으로 스러져간다. 따스하고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는 밀양역을 도착역으로 지정하며 표를 예약했다.
밀양으로 가는 KTX 기차를 탔다. 역방향 좌석이었다. 생각과 다르게기차는 뒤로 달렸다. 건물이 밀려가고 하늘도 거꾸로 흘렀다. 눈을 감았다. 몸의 저항만큼이나 시간의 태엽이 풀리듯 머릿속은 흐물거렸다. 기억 속의 남편 모습이 흔들리며 다가왔다. 젊고 당당했던 그의 모습이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뛰었다.
“덜컹.”
기차가 대전역에 멈췄다. 창으로 흘러들어 온 아침 햇살 탓에 지난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창 밖은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었고 겨울 산허리가 시리게 다가왔다.
35년 전, 그해 겨울이 어제인 듯 차창으로 펼쳐진다. 젊은 남편이 잠시 살던 곳은 기차역 맞은편에 엎드리듯 나지막하게 있던 빨간 벽돌
양옥집이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었고 아래채에 방 하나를 세 얻어 남편이 기거했다. 밀양은 이름만큼이나 고즈넉한 빛으로
가득했다.
“나 오늘 밀양지사로 발령이 났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남편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차분하고 조용했다. 어딘지 모르게 긴 한숨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낯선 도시로의 발령 소식에 순간 나의 머릿속은 멍해졌다. 도무지 떨어져 지내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남편을 따라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밀양이라는 도시는 그렇게 당혹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밀양으로 떠나기 직전에 첫아이를 잃었다. 늦가을의 스산함과 설명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이 나를 흔들어댔다. 혼자 지낼 때면 자주 울었다. 12월의 찬바람은 몇 안 남은 나뭇가지조차 세차게 훑고 갔다.
주말이면 남편은 고단한 몸을 서울행 기차에 싣고 집으로 왔다. 월요일 새벽이면 다시 밀양으로 내려가는 기차 타는 일을 남편은 불평 하나 없이 해냈다. 나는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기차는 떨어져 지내는 우리 부부를 다시 이어 놓았다. 드넓은 광야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막막한 마음을 기차에 싣고 밀양과 서울을 오르내렸다.
남편은 밀양역 바로 앞에 회사가 있고, 생각보다 교통이 편하다며 나를 위로했다. 열차 편이 없었다면 주말부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로 남편이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왔고, 나는 방학이 되어야 밀양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로 수천수만 번의 불안하고 쓸쓸한 마음을 담아 기차는 둘 사이를 무시로 드나들었다. 오고 가는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희망하기도 했다가, 절망하면서 우리는 점차 현실의 상황에 적응해갔다.
시시로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나의 상처에도 단단한 딱지가 앉았을 무렵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처음으로 나는 밀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새로운 도시의 낯섦과 기대가 성에처럼 차창에 끼어서 온통 불투명했다. 남편을 만날 생각에 숨어버렸던 애틋한 설렘이 어느새 차창에 한 줄기 빛으로 어른거렸다.
혹여 밀양역을 지나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밀양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내 심장은 기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밀양역은 아담했다. 예상했던 대로 작은 시골 역이었다. 기차는 나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불러 세울까 봐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겨울 오후의 햇살이 예각으로 떨어져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수많은 선로가 뒤엉켜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차는 제 갈 길을 아무 탈 없이 가고 있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우리 부부의 길도 어딘가에 보이는듯했다. 겨울인데도 햇살은 포근했다. 역사는 기와지붕을 얹어서 한옥 느낌이 났다. 낮은 구릉이 건물을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마중 나온 남편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영화에 나올법한 연인들처럼 부둥켜안았다.
남편이 사는 집은 밀양역 앞에 있었다. 부엌을 주인집과 같이 쓰기에살림을 단출했다. 방은 작았지만, 햇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작은 책상 하나와 알람 시계가 전부였다. 벽에는 산과 호수 사진을 담은 달력이 걸려있었고 날짜마다 붉은색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서울행 기차를 타는 날이었다. 우리 마음속에 쉼 없이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작은 창 너머로 남편의 회사가 보였다. 역 앞이라 기차가 지나는 소리를 종일 들렸다. 소꿉장난하는 기분이 들 만큼 밀양의 단칸방은 작고 아담했다. 종일 방안에만 있었던 나는 비켜 들어온 햇살 속에서 춤을 추는 먼지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겨울 나뭇가지의 일렁임을 오래 응시했다. 기다림에 지칠 즈음이면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왔다.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기차역 주변을 걷기도 했고 서울과 밀양을 이어주는 기차를 볼 때마다 손을 흔들기도 했다. 오일장 서는 날에는 함께 재래시장으로 장을 보러 가고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지는 날에는 강변을 산책했다. 겨울비가 눈물만큼 내리던 날은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그해 겨울 우리 부부는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을 밀양에서 보냈다. 기다림의 시간이 계절을 돌고 돌며 지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간절하고 소중한 아이였다. 꿈이 깨질까봐 한동안 비밀스럽게 숨겼다.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차는 우리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기차에 오를 때마다 두 사람 모두 속삭이듯 말을 했으니까. 밀양역 도착 안내방송이 변함없이 나온다. 35년이 흐른 세월만큼이나 밀양역은 달라져 있다. 남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플랫폼은 오랜만에 만난 세련된 친구처럼 낯설다.
밀양역의 모습도 중년의 내 모습처럼 변했지만, 선로에 반짝이던 은빛 햇살만은 여전하다. 아담한 옛집은 찾아봐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흔적 없이 사라진 빨간 벽돌집은 내 기억 속에만 있다. 밀양강의 절벽 위에 서 있는 영남루에 올랐다. 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예전처럼 시간을 인내하고 기다리다 보면 다 알게 된다는 듯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깊은 침묵을 끌어안은 듯한 묵직함이 흐르는 여유로운 곳이다. 항상 서둘렀던 나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남편과 나 사이에 켜켜이 쌓은 시간을 떠올렸다. 시련의 시간도, 기쁨의 시간도 우리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잎을 모두 떠나보내고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오래된 두 그루의 나무가 눈에 띄었다. 오랫동안 누구를 기다렸을까. 구부러질지언정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나무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출발할 때 납빛처럼 무거웠던 마음은 어느새 붉게 물든 하늘처럼 주홍빛이었다. 겨울 해거름이 어둑해지는 시간, 나는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밀양역 플랫폼에 서 있다. 붉은색 목도리로 감싸 안은 목덜미에서 뜨겁고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기다림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질 즈음이다. 플랫폼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켜진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기다림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한 줄기 빛 아래 서서 기차를 기다린다. 복잡하게 얽힌 선로를 가만히 바라다. 그중 하나의 선로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남편이다. 나는 얼른 남편이 탄 기차에 오른다. 그 길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며 남편을 꼭 안는다. 그도 한참을 달려온 것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맥없이 날린다. 스무 살 청춘의 시간을 지나고 우리 부부는 반환점을 돌고 돌아 출발역으로 되돌아간다. 때로 티격태격하기도 하며 마음 안에 겨울바람이 몰아친 게 어디 한두 번이랴.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누그러진다. 나는 밀양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탄다. 겨울밤을 달리는 기차는 서울로 서울로 달려간다.
최우수상
누구의 잘못도 아닌 / 곽*인
“잠시 후 Z행, Z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고객 여러분들께서는…”
플랫폼의 가장 끝은 사람들과 한 발짝 멀어져 있었다. 스크린도어 너머로 붉은 해가 두 뺨을 따스하게 데웠고 전철이 들어서자 차갑게 식어버렸다. 냉랭해진 얼굴을 매만지다 옅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깊게 잠들지 못해 부어버린 잇몸 속에서 욱신거림이 연신 올라왔다. 이제는 그 통증이 턱으로 번진 듯했다. 입안에 공기를 머금은 채 공간을 만들어 두어야 그나마 고통이 덜했다. 턱 근육을 툭툭 비틀며 미끄러지듯 멈춰 서는 전철에 한 걸음 다가섰다. 문이 열리고 후배가 걸어 나왔다.
“수고했다.”
단출하게 건넨 한마디에 시간이 정지한 듯 교대 텀이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고장난 가로등처럼 리듬 없이 깜빡이는 눈동자와 하얗게 새어 나오는 한숨. 맥없이 흔들리는 후배를 붙잡아 그의 날갯죽지를 두어 번 토닥인 뒤 기관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의 손길에서 선배의 손길이 스쳤다. 둔탁하게 문을 닫고 기관실에 홀로 남겨졌다.
“3번선 출발 진행, 출입문 닫힘, 안전문 닫힘, 정시 발차.”
필름이 벗겨진 녹색 자동운전 버튼에 불이 들어왔고 나는 서둘러 역을 빠져나왔다. 사고 이후 3일째 아침이었다.
수많은 인파로부터 분리된 채 덩그러니 운전석에 주저앉았다. 매끄럽게 들이치는 햇볕이 한 평도 안 되는 적막한 조종실을 서서히 채워 갔다. 오른팔부터 찬찬히 타고 오르는 일출의 은근한 온기가 온몸을 데웠다. 마치 얽힌 밧줄처럼 꼬여있던 팔다리의 근육도 서서히 풀리는 듯 했다. 불투명한 빛이 새어드는 플라스틱 터널을 뚫고 그사이를 나서자마자 J대교가 팔을 펼치듯 시야를 열고 탁 트인 한강이 두 눈을 가득 채웠다. 꽉 막힌 O대로 위 차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나가는 53초의 시간동안 나는 잠시나마 자유로웠다.
“이번 역은 A역, A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J대교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전철은 다시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A역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방송이 머릿속을 울리자, 온몸의 근육이 다시 밧줄처럼 꼬이기 시작했다. 진액처럼 새어 나온 식은땀은 구레나룻을 타고 천천히 흘렀고 관자놀이가 툭툭 뛰며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욱신거리던 턱관절의 근육이 뒤틀리며 잇새로 가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떨리는 손을 들어 어렵사리 자동정지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 속 전철의 속력이 점차 줄어들었다.
9…8…7…
…3…2…1
느려지는 전철의 속도에 따라 스크린도어 넘어 사람들의 줄지은 모습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듯 천천히 선명해졌다. 제일 끝 스크린도어에 깊숙이 베인 듯한 실금이 그어져 있었고 그 옆 유리에는 노란 포스트잇과 국화꽃이 한 면을 그득히 메웠다. 나는 3일 전 이 시간,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선배를 떠올렸다. 사고였다. 죽은 김 씨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선배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까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안전을 위해 안전문을 고치다가 안전을 지키지 못한 이를 향해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를 향한 진혼곡을 불러주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짓이겨졌어. 내 앞에서. 내 눈앞에서.”
선배는 병든 짐승처럼 침과 눈물을 쏟아내며 울부짖었다. 선배는 즐겨하던 퇴근길 안내방송도, 지적 확인 환호 응답도 더 이상 뱉을 수 없었다. 10초가량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전철의 출입문 사이로 수많은 사람의 이탈과 회귀가 반복되었다.
“출입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간결하고도 단호한 음성과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역을 빠져나왔다.
A역부터는 어둠 속의 질주가 계속됐다. 끝없이 적요했다. 내가 어둠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인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인지 그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질 즈음 별안간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숨이 막혔다. 풍경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곳에 나만 정지해 있었다. 갑갑했다. 흉곽을 부수고 가슴 밖으로 무언가 뛰쳐나올 듯했다. 쉬지 않고 갈아버린 어금니는 몽돌처럼 밋밋해졌다. 가늘게 갈린 뼛가루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했다. 탁 트인 기관실 앞 유리의 정면을 바라보기 버거워 거듭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다. 피할 수 없었던 김 씨와 선배의 충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반대편에서 교행하는 열차가 접근해 왔다. 서로의 안부를 묻기 위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반대편 기관사를 향해 나는 손을 흔들 수 없었다.
“2025열차, 앞 차 지연. 수동운전 전환 바람.”
뜨겁게 달아오른 눈 틈으로 차갑게 식은 눈물이 새어 나온 그때, 스피커 사이로 녹슨 음성의 무전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하더라’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자문에 예리한 바늘로 귀속을 찌르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변속레버를 잡으려던 손에 연거푸 힘이 빠지고 미끄러졌다. 어깨는 마치 줄이 꼬인 마리오네트처럼 마음대로 펼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유니폼의 주머니 속 구겨진 종이의 모서리가 허벅지를 찔렀다.
‘퇴근길 안내방송 멘트’.
끝이 희미하게 휘갈겨진 리을의 선. 뭉개진 듯한 티읕의 모양. 선배의 글씨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뒤로 줄지어 앉아 있을 탑승객들의 무게가 어깨 위로 올라가 묵직한 중심을 잡았다. 귓속의 이명도 점차 흐려졌고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려 변속레버를 천천히 잡아내렸다. 선배가 했던 대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버튼 하나하나를 곱씹어 눌렀다. 제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전철이 스크린도어와 플랫폼 사이에 퍼즐을 끼워 맞추듯 천천히 멈춰 섰다. 출입문이 열리고 또다시 수많은 이탈과 회귀가 반복되었다.
“출입문 닫습니다.”
아깝게 몸을 싣지 못한 승객들을 향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금 출발한 전철은 지하를 빠져나와 윤기 나는 햇빛이 쏟아지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종착역으로 다가서며 나는 쪽지와 마이크를 두 손에 든 채 선배가 써 내린 글자들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번 역은 종착역인 Z역, Z역 입니다. 승객 여러분, 누군가에겐 힘들고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를 오늘 하루. 다시 돌아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